2021년 7월호

‘악귀’ 선녀를 만난 홍윤성의 선택 [환상극장]

그날 왜 그는 김종서를 살려뒀을까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입력2021-07-1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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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달빛은 파리했다. 수양대군이 거느린 병력은 반역을 도모하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책사들의 충고에 따라 그는 우선 경복궁 모든 출입문을 장악한 뒤 봉쇄했다. 왕이 궐 밖으로 나간 상태여서 금군의 경계는 한없이 태만했고, 그 틈이 수양에겐 엄청난 기회로 다가왔다. 이미 목숨을 건 그는 한 마리 야수였고 아무도 폭주를 막을 수 없었다.

    경복궁 출입문을 차지한 수양

    경복궁 출입문이 제 손아귀에 들어오자 수양은 자신이 오랜 세월 기른 사병을 경복궁 서쪽 영추문과 내수사 사이 골목에 집결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병력이 늘지 않았다. 사직단 방향에서 내려오기로 한 부대는 아예 통째로 사라져버렸다. 불안해진 수양은 한성부 말단 무관으로 거사의 행동책이던 홍윤성을 쏘아보며 물었다.

    “어찌 된 거냐? 이보다 세 배는 돼야 하지 않겠느냐?”

    체구가 유난히 크고 힘이 센 윤성이 수양 앞에 서자 아기와 어른만큼이나 체격 차이가 났다. 뽀얀 피부에 동그란 얼굴을 한 철부지 왕족을 내려다보며 윤성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겁이 나 도망갔습니다.”



    실올 같은 코밑 잔털 외엔 매끈한 수양 얼굴이 달빛을 반사해 번들거렸다. 겨울인데도 땀 한 줄기가 그의 목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침만 꼴깍대던 수양이 간신히 헛기침을 뱉은 뒤 목청을 돋워 외쳤다.

    “이 인원으로도 충분해! 궐로 진입해 저항하는 금군부터 차례로 도륙하겠다!”

    윤성이 가만히 수양의 팔을 움켜쥐었다. 엄청난 악력으로 인한 고통이 전해지자 수양이 본능적으로 상대를 밀쳐내려 했다. 윤성의 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수양을 노려보고만 있던 윤성이 속삭였다.

    “지금 중요한 건 궐 안의 금군이나 인척 집에서 무사태평 잠들어 있을 주상이 아닙니다.”

    간신히 풀려난 팔을 어루만지던 수양이 목울대를 가릉거리며 쉰 목소리로 물었다.

    “금군을 제거한 뒤 서둘러 주상을 궐로 모실 것이다. 김종서는 그다음에 관군으로 친다!”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은 윤성이 말했다.

    “김종서를 먼저 없애셔야 합니다. 그를 살려뒀다간 근왕병이 소집될 거고, 그러면 우린 다 죽은 목숨이거든요.”

    “한명회가 그랬다. 경복궁을 본진으로 삼고 주상을 볼모로 삼으면 천하를 움켜쥔다고! 김종서 따위는 반역죄로 몰면 그 순간 끝장나지 않을까?”

    “천만에요. 궁문을 걸어 잠근들 저 늙은 호랑이가 심복 장수들을 몰고 진짜 역성혁명이라도 일으키면 어쩌시렵니까?”

    “먼저 죽여야겠구나?”

    싱긋 웃은 윤성이 출전할 용사들에게 한 사발씩 먹일 탁주 항아리를 실은 수레를 가리켰다.

    “저거 한 동이만 내려주십시오.”

    홍윤성과 김종서

    술동이를 지게에 진 윤성은 가늘게 휘파람을 불며 돈의문을 향해 걸었다. 중간에 마음이 바뀐 그는 간문인 서소문으로 방향을 틀었다. 시신이 드나들 수 있는 시구문인 서소문이야말로 이럴 때 쓰기 안성맞춤이었다. 김종서 장군 이름을 팔아 문을 무사통과한 그는 고마청 앞으로 이동해 잠시 멈춰 섰다. 한양 도성에서 모인 말을 관리하는 고마청 주변은 여느 때보다 괴괴할 따름이었다.

    지게를 땅에 괴고 술동이를 집어 든 윤성이 술을 벌컥벌컥 마셔댔다. 술동이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크게 트림을 한 그가 마주 보이는 김종서의 화려한 저택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군인으로서 김종서는 존경하는 대선배였다. 하지만 이젠 빨리 제거해야 할 성가신 장애물에 불과했다. 살해하기 전 상대와 나눠 마시려 한 술은 이미 다 떨어졌고, 그의 가슴속도 이상하게 서늘히 비워진 기분이었다.

    윤성이 중문 안으로 들어서자 종서의 장남인 승규가 무사 둘을 데리고 앞을 가로막았다. 아버지와 달리 유독 의심이 많은 승규는 윤성 몸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검신한 뒤에야 길을 터줬다. 승규의 어깨를 지긋이 다독인 윤성이 성큼성큼 대청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섰다. 종서는 친한 무관들과 술을 마시며 기녀들 정가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서 오게나. 한데 이 늦은 시각에 어인 일인가?”

    한때 천하를 호령하던 대장군은 몸집이 작고 눈매도 온화한 노인의 모습이 돼 있었다. 말없이 상대 앞에 마주 앉은 윤성이 호탕하게 소리쳤다.

    “호랑이를 잡으러 왔습니다그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늙은 무장 한 명이 옆에 놓여 있던 부젓가락을 화롯불에 넣어 가열하기 시작했다. 그냥 뒀다간 언제 자신의 눈이나 심장을 향해 찔러댈지 알 수 없는 위태로운 순간이었지만 윤성은 누군가가 쓰던 사발을 비운 뒤 술을 가득 채워 단숨에 마셨다. 그는 그렇게 다섯 잔을 연이어 위장 안에 쏟아부었다. 길게 트림하는 그를 노려보던 종서가 기녀들을 물러가게 한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좌정했다. 그는 무슨 생각엔가 골똘히 침잠해 좀체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침내 종서가 입을 뗐다.

    “늙은 호랑이 사냥하기에 제법 멋들어진 밤이지?”

    늙은 호랑이 사냥

    종서를 비롯해 주기가 오를 대로 오른 원로 무관들은 겉으론 강건한 척 위장했지만 속은 부대낄 대로 부대껴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추스른 종서는 자신 앞에 멀쩡히 버티고 있던 윤성을 발견하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네 녀석, 사내는 사내구나. 이제 어디 날 죽여보아라. 할 수 있겠느냐?”

    파전 한 조각을 손으로 집어 입안에 욱여넣은 윤성이 피식 웃으며 상대의 빈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잔을 쥔 종서가 반쯤 마시다 도로 내려놓고 신음처럼 속삭였다.

    “내 너를 그리 아꼈건만, 근자엔 수양대군 처소를 뻔질나게 드나든다지?”

    음식을 다 삼키고 크게 트림을 한 윤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늘 말씀드렸잖습니까? 소인은 날이 잘 선 검입니다. 먼저 쥐는 사람이 임자지요.”

    볼을 실룩이며 멋쩍게 웃은 종서가 매섭게 빛나는 눈으로 상대를 보며 속삭였다.

    “너와 난 고향이 같은 충청도인 데다, 기상도 서로 잘 통한다. 비록 아들을 뒀지만 그릇이 작아. 저리 내 옆만 하염없이 지키며 아비 그늘을 벗어날 줄 모르는구나. 조선의 국운이 지금 내 손 안에 들어 있다. 그건 잘 알겠지?”

    팔짱을 낀 윤성이 대청마루에서 자기 쪽을 감시하고 있던 승규 쪽을 힐끔 돌아봤다. 승규의 양옆엔 언제든 칼을 뽑을 태세를 갖춘 무사가 무릎을 꿇고 대기하고 있었다. 당장 종서의 모가지를 비틀고 그들과 맨몸으로 겨룬다면 자신도 무사하진 못할 듯했다. 자세를 고쳐 앉은 윤성이 다시 술 한 사발을 게걸스레 마시고 말했다.

    “국운이란 게 뭐 따로 있겠습니까? 이 나라도 장수가 칼로 세운 것 아니냐 그거지요. 누가 먼저 시작하느냐에 달린 거 아닐까 합니다만.”

    능글능글 웃는 윤성을 오래 바라보던 종서가 술잔에 살짝 입만 대고 물었다.

    “오늘 무슨 소동이 일겠구나? 그치? 수양이 널 보낸 게냐? 감히 내 목숨을 넘보라 하더냐?”

    몸을 가볍게 움찔한 윤성이 껄껄대며 웃다 태연스레 대답했다.

    “맞습니다! 장군 목을 따오라 시키더이다.”

    “그래서? 이제 어쩔 테냐?”

    “어쩌긴 뭘 어쩝니까? 술이나 들이켜며 잘 놀다 가야지요.”

    쓴웃음을 길게 삼킨 종서가 손짓으로 승규를 불렀다. 승규가 가까이 다가오자 종서는 그동안의 취기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갑자기 또렷한 발음으로 명을 내렸다.

    “단단한 활 다섯 개만 가져오너라.”

    홍윤성과 다섯 개의 활

    대청에 의자를 설치하게 한 종서는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머뭇대는 늙은 무관들을 향해 그가 말했다.

    “술도 잠시 깰 겸 좋은 구경이나 합시다. 어서 다들 앉으시오.”

    무관들이 비틀대며 품계에 따라 제자리를 찾아 앉자 마당에 선 윤성을 향해 종서가 속삭였다.

    “약속대로 그 활 다섯 개를 연달아 부러뜨리면 오늘밤 너는 산다. 하지만 하나라도 멀쩡히 남겨둔다면 이 밤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종서의 얼굴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던 윤성이 활 하나를 슬쩍 들어 올려 시위를 당겼다. 당기는 힘을 버티던 활이 굽을 만큼 굽어지자 윤성은 두 팔목의 힘쓰는 방향을 어긋나게 해 마침내 활을 비틀어 꺾었다. 구경하던 무관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술 한 사발을 걸친 윤성은 도합 네 개의 화살을 연이어 부러뜨렸다. 그가 마지막 활을 움켜쥐자 종서가 말했다.

    “됐다! 마지막 하나는 내가 죽거든 부러뜨려라. 들어가서 남은 술이나 마시자.”

    종서가 무관들을 이끌고 안방으로 사라지자 윤성 옆에서 칼을 빼 들고 서 있던 승규와 무사들이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들을 슬쩍 노려본 윤성은 잠시 망설였다. 안방으로 들어가 술을 더 마실지, 승규와 무사들을 때려죽이고 집안을 피바다로 만들지 결정해야 할 순간이었다. 손에 움켜줬던 활을 땅에 툭 던진 윤성이 승규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이보게. 달빛도 힘이 없고 내 힘도 어지간히 빠졌네그려.”

    다가오려는 윤성을 향해 칼을 겨눈 승규가 쇳소리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어디 하급 무관 따위가 반말이냐? 오늘 아버님이 적잖이 취하셔서 사는 줄이나 알거라!”

    겁 없이 더 전진해 칼을 쥔 승규의 오른팔을 붙잡은 윤성이 속삭였다.

    “내 마음만 먹으면 너희 열 명은 단숨에 요절내는 거야. 너희들이야말로 장군이 취하셔서 사는 줄이나 알아.”

    몸을 홱 돌린 윤성이 안방으로 걸음을 옮기려다 땅에 떨어진 활을 다시 주워 들었다. 그가 활 양 끝을 잡아 자신의 무릎 위로 내리치자 견고했던 활이 힘없이 동강 나버렸다. 승규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웃으며 윤성이 덧붙였다.

    “오늘밤 고비만 넘기면 너흰 다 살아. 대신 누가 찾아와도 문을 열어주지는 마라. 그 정도 머리는 있겠지?”

    어리둥절한 표정의 승규를 지나쳐 중문으로 향한 윤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종서의 저택을 벗어났다.

    무부(武夫)와 싸움개

    다시 혼자가 된 윤성은 돈의문을 통과해 경복궁으로 향하려다 멈칫했다. 멀리 무리를 이끌고 다가오는 수양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비둔한 몸을 좌우로 휘저으며 다가온 수양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해치웠느냐?”

    욕심이 한번 동하면 제 성을 주체하지 못하는 상대의 성미를 잘 아는지라 윤성은 짐짓 취한 척 헛소리를 시작했다.

    “술로 겨뤄보니 죽일 가치도 없는 노인네입디다. 지금쯤 반죽음 상태일 테니 어서 가서 처리하려면 하십시오.”

    눈가 근육을 꿈틀대며 화를 참던 수양이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먼저 없애자던 놈은 바로 너잖아? 그걸 왜 그냥 두고 와? 승규 녀석이 몇 명을 거느리고 있더냐?”

    느긋하게 손가락으로 셈을 하던 윤성이 대답했다.

    “족히 열은 넘었습니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살아선 못 나오실 거고, 아마 문밖에서 처리하셔야 될 걸요?”

    수양이 무리 가운데 한 명에게 눈짓을 보냈다. 저잣거리에서 지저분한 싸움으로 단련된 노비 출신 임운이었다. 앞으로 나선 임운이 소매 속에서 철퇴를 꺼내 붕붕 소리를 내며 돌려댔다. 금방이라도 윤성의 머리를 가격할 태세였다. 수양이 변성이 덜 된 듯한 가는 목소리로 윤성에게 말했다.

    “죽고 사는 게 한순간이지. 넌 누구 편이냐?”

    수양의 가늘게 찢어진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윤성이 번개처럼 임운의 팔을 낚아채 철퇴를 빼앗았다. 빼앗은 철퇴를 그가 돌리자 아까와는 질이 다른 거센 파공성이 주변에 울려 퍼졌다. 윤성이 철퇴를 멀리 집어던지자 임운이 허겁지겁 철퇴가 떨어진 곳으로 달려갔다. 윤성이 수양에게 속삭였다.

    “저걸 보십시오. 주군을 버리고 무기를 찾으러 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건 싸움개지요. 소인은 무부(武夫)고.”

    “무슨 말을 하고픈 거냐?”

    “개는 주인을 바꾸지만, 무부는 그렇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교활한 미소를 머금은 수양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리를 이끌고 황급히 돈의문 쪽으로 멀어져갔다. 뒷짐을 진 윤성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의금부를 향해 걸었다. 이 밤의 승자가 누가 됐든 내일이면 하옥되는 죄인들로 넘쳐날 곳이었다. 아는 포졸에게 막걸리 한 동이를 가져오게 한 윤성은 밤이 새도록 통음을 이어갔다. 말동무 해주던 포졸조차 머리를 꾸벅거리며 졸다 깨다를 반복했다. 윤성이 포졸 멱살을 잡고 번쩍 들어 올리며 부르짖었다.

    “한 동이 더 가져오너라!”

    몸을 바동거리던 포졸이 흐느끼듯 대답했다.

    “고거이 고문에 다 죽어가는 놈덜 살리라고 준비해 둔 거인디, 발각나믄 쇤네 바로 뒈집니다요.”

    평소의 윤성이라면 술김에 포졸 하나 죽이는 것쯤 개의치 않을 것이었지만 이상하게 온몸의 기력도, 살의도 사라져갔다.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그가 만취 상태가 된 채 혼자 중얼거렸다.

    “이보게, 장 포졸! 자넨 선녀를 봤나? 난 봤네. 그걸 보고나서 말이지. 세상이 뒤집어진 거야. 선녀가 하늘에 사는 착한 여자인 줄만 알고 있지? 천만에! 우리를 농락하는 악귀란 말이지. 우린 그럼 뭐냐고? 개다 이거야! 우리는 다 개라고. 듣고 있나? 물어뜯으며 싸우다 서로 잡아먹는 개 말일세!”

    평양 부벽루의 선녀

    20대 전후의 윤성은 강한 육신 하나만 믿고 설치며 하급 무관이나 전전하던 불우한 충청도 사내였다. 주량 하나만큼은 항우를 능가하던 그가 유독 엄청나게 퍼마신 어느 날 무슨 사연으로 평양, 그것도 대동강 한복판에서 깨어나게 됐는지는 그 자신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취중에 누군가로부터 빼앗은 듯한 배 위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달밤이었다.

    힘껏 노를 저은 그는 배를 가까운 산기슭에 접안했다. 마땅히 발 디딜 땅조차 보이지 않자 굵은 나무줄기를 잡고 몸을 지탱한 윤성은 괴력을 발휘해 절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술 취한 소동파가 나무와 풀을 잡고 적벽을 기어올랐듯, 그는 맨손으로 암벽을 기어올라 마침내 부벽루에 닿았다.

    눈앞에 펼쳐진 능라도와 왼쪽에 솟구친 모란봉을 보고서야 그는 비로소 자신이 평양성에 와 있음을 깨달았다. 멀리 영명사 쪽에서 새벽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졌다. 고요히 흐르는 참한 달빛에 흥이 오른 그는 북쪽 현무문을 향해 무턱대고 걸었다. 그걸 본 건 그 순간이었다.

    그건 처음에 희미하게 빛나는 하얀 점이었다. 하얀 점에 불과하던 그건 점점 가까워지자 흰 옷을 팔랑대며 걷는 여인의 모습으로 화했다. 이 세상에 속할 것 같지 않은 아리따운 자태의 여인이었다. 숨이 멎은 그는 저 아래 장경문 쪽을 바라보았다. 혹시 어느 부귀한 집안 딸이 밤 뱃놀이를 즐기다 길을 잃은 거라면 틀림없이 그녀를 찾는 무리가 장경문 방향에서 횃불을 밝히고 올라오고 있을 터였다. 장경문 쪽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여인이 다가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되돌린 순간, 윤성은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쳤다. 어느새 그의 코앞에 당도한 여인이 한 자도 안 될 거리에서 자신에게 얼굴을 들이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평생 맡아본 적 없는 미묘한 분내가 훅 끼쳐오자 윤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는 뉘시오? 뉘시기에 이 한밤중 홀로 나다니고 계시오?”

    귀여운 생김새의 여인을 자세히 살피자 생각보다 나이가 어려 보였다. 그는 내심 10대 초반으로 어림짐작했다. 동그란 눈을 깜박이던 소녀가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 소리가 들릴까 모르겠네. 들려요?”

    질문의 뜻을 이해 못 한 그가 멀뚱히 바라만 보자 소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들리나 보네! 잘됐다! 서로 대화가 되겠는걸.”

    아무래도 상대가 귀신이거나 도적 떼의 선봉이라 판단한 윤성이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소녀가 피식 웃으며 속삭였다.
    “다칠 텐데 그런 짓 말아요. 제가 누구냐면, 글쎄, 누구라고 해야 알아들을까?”

    “귀신인가?”

    “에이! 그럴 리가. 전 말하자면 하늘에서 내려온 거죠. 저 위쪽에서!”

    “그렇다면 선녀?”

    얼굴을 찌푸린 소녀가 골똘히 상념에 젖은 듯 말이 없다가 대답했다.

    “선녀로 해두죠 뭐. 이 지역 선녀!”

    옥황상제 시녀와의 이별

    부벽루에 나란히 앉은 두 남녀는 오래도록 대화를 이어갔다. 말을 이어갈수록 신이 난 소녀는 스스로를 옛 조선국의 건국자인 은나라 기자의 손녀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달콤한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였다.

    “당신들이 옥황상제라 부르는 분이, 실은 진짜 저 천상계에 존재한다니까요. 저는 말하자면 그분의 시녀라고 할 수 있죠.”

    “어쩌다 상계의 선녀가 될 수 있었소?”

    “글쎄요. 어느 날 평양성을, 그러니까 이 주변을 산책하고 있었죠. 하늘에서 번쩍 번개가 치는 거예요! 깜짝 놀라 올려다보니 거대한 원통 하나가 불기둥을 내뿜으며 모란봉 위로 내려오지 뭐예요. 그래서 달려갔죠. 누군가 내리기에 다가갔더니 함께 가자지 뭐예요. 그렇게 된 거죠 뭐!”

    옆에 앉은 소녀를 뚫어져라 노려보던 윤성이 침을 삼키고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게 거짓말임은 너 스스로만 모르는 것이냐? 도대체 네년 정체가 무엇인 게냐? 서방의 곤륜산에 산다는 포악한 여신 서왕모쯤 되느냐?”

    놀란 눈빛이 된 소녀가 윤성을 빠끔히 주시했다. 뭔가 결심한 듯 그녀가 갑자기 드센 목소리로 준열히 꾸짖듯 외쳤다.

    “함께 놀아줬더니 안 되겠네. 까부는 거야 지금? 나한테?”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윤성이 소녀의 멱살을 잡아 허공에다 흔들며 소리쳤다.

    “기자조선 시대 왕녀가 뭐 어쩌고 어째? 요망한 무당년 같으니!”

    그가 흔드는 대로 몸을 내맡겼던 소녀가 까르르 웃어대기 시작했다. 이상한 조짐을 느낀 윤성이 그녀를 바닥에 내던지고 칼을 빼 들었다. 사뿐히 바닥에 착지한 소녀는 뒷짐을 진 채 윤성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그는 자신이 상대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도대체 넌 뭐 하는 계집이냐?”

    고개를 조금 숙였다 든 소녀의 표정은 뾰로통해져 있었다. 입술을 내밀고 울먹이는 듯하던 그녀가 대답했다.

    “널 예뻐했단 말이야. 데려갈 생각도 진짜 있었단 말이야. 이제 보니 아니네? 조금 혼만 내줄 테야. 대신 죽이진 않을게.”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윤성은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낮추고 장경문을 향해 뛰어 내려갔다. 일개 어린 계집이 두려워 도주하는 건 무패의 싸움꾼인 그로선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살고 봐야 했다. 하지만 달리던 그의 두 발이 살짝 공중으로 들린 건 불과 몇 초 뒤였다.

    서너 배는 몸집이 커진 소녀는 윤성의 몸뚱이를 공깃돌 다루듯 잡아 두 손을 옮겨가며 던졌다 받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숫자를 세며 윤성을 가지고 놀았다. 그가 현기증으로 토할 무렵에야 소녀의 놀이는 그쳤다. 그녀가 땅에 드러누운 윤성에게 속삭였다.

    “아파? 앞으론 말 잘 들을 거야?”

    굴욕감에 분루를 삼킨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어쩌면 기절했던 것도 같았다. 한참이 지나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가 가만히 눈을 떠보았다. 사방은 여전히 어두웠고 소녀가 사라진 주변은 그저 괴괴했다. 관절마다 욱신거렸지만 빨리 그 지역을 벗어나야 했다. 그가 비틀대며 장경문 근처에 도착할 즈음, 처음 듣는 기괴한 폭발음이 짧게 귓가에 전해졌다. 모란봉 쪽을 올려다보자 원통형 비행체가 불을 뿜으며 솟아오르더니 순식간에 허공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계유정난 #수양대군 #김종서 #윤채근 #신동아

    * 이 작품은 김시습의 ‘취유부벽정기’를 레이 브래드버리의 ‘멜랑콜리의 묘약’의 세계관을 활용해 각색한 것이다.



    환상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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