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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의 ‘소년 가장’ 세계적 석학이 되다 [卒記]

세계 정치학계에 한국 알린 故 이정식 펜실베이니아대 교수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식민지 조선의 ‘소년 가장’ 세계적 석학이 되다 [卒記]

  • ● ‘신동아’를 통해 본 故 이정식 교수의 삶
    ● 한국 공산주의 연구로 미국정치학회 최우수저작상 수상
    ● “해방 후 정치학의 새로운 방향 제시한 독보적 학자”
    ● “스탈린은 신탁통치에 반대했다” 등 연구 결과 ‘신동아’에 발표
    ● 유년기 네 차례 전쟁 겪으며 한·중·일어와 영어 습득
    ● 초등 졸업 학력으로 도미, UCLA·UC버클리에서 공부
    ● “누구에게나 기회는 온다. 이용하려면 최선의 노력해야”
한국이 낳은 세계적 정치학자 故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 [동아DB]

한국이 낳은 세계적 정치학자 故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 [동아DB]

약력
● 1931년 평남 안주 출생, 세 살 때 만주로 이주
● 1948년 북한으로 귀국
● 1950년 서울로 피란, 국민방위군 사관학교 입학
● 1951~53 미군 번역통역사업부대(ADVATIS)
● 1954년 미국 UCLA 정치학과 입학
● 1957년 미국 UC버클리 박사과정 입학
● 1963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정치학과 교수 임용
● 1973년 스칼라피노 교수와 공저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출간
● 미국정치학회 ‘최우수 저작상’(1974), 위암 장지연 학술상(1990), 경암학술상(2012), 인촌상(2018) 등 수상


8월 17일(현지 시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별세한 고(故)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1931~2021)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 정치학자였다. 이 교수가 고(故) 로버트 스칼라피노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교수(1919~2011)와 공동 저술한 ‘한국공산주의운동사(Communism in Korea)’는 한국 공산주의의 기원 및 변화상을 탐구한 기념비적 저서로 손꼽힌다. 이 교수는 이 책으로 1974년 미국정치학회 ‘최우수 저작상’을 받았다. 1년에 단 한 권만 시상해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상이다.

이후에도 이 교수는 한국 및 동아시아 현대 정치 분야를 꾸준히 연구하며 서구의 한국학 연구를 이끌었다. 그 성과로 1990년 위암(韋菴) 장지연 학술상, 2012년 경암학술상, 2018년 인촌상 등을 받기도 했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는 “이정식 교수는 해방 후 한국 사회과학, 특히 정치학의 새로운 방향과 기준을 제시한 독보적 학자”라고 평했다.

“스탈린 신탁통치 반대” 신동아 기고문 사회적 반향

이 교수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사회와 소통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이승만, 서재필, 여운형 등 한국 현대사 주요 인물에 대한 저작을 다수 펴냈다. 월간 ‘신동아’에도 꾸준히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정치학과 교수로 임용된 지 3년 만인 1966년 ‘신동아’ 11월호에 “미국에서의 북한연구”에 대한 글을 기고한 이후 수십 년간 ‘신동아’와 인연을 이어갔다. 그중에서도 ‘신동아’ 1993년 12월호에 게재한 “스탈린은 한반도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2007년 9월호의 “여운형은 좌익(박헌영파)이 사주한 테러에 당했다” 등의 연구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교수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평남)에서 태어나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소년 가장’으로서 중국 만주와 남·북한을 오가는 고난의 유년기를 보낸 경험을 털어놓은 곳도 ‘신동아’였다. ‘신동아’는 1997년 8월호부터 10월호까지 3회에 걸쳐 ‘재미 정치학자 이정식 회고록’(회고록)을 실었다. 이 글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참으로 이상야릇한 팔자를 타고난 사람인 것 같다.”

이어 이 교수가 돌아본 삶의 여정은 이렇다.

“평남 시골의 보통학교 선생의 장남으로 태어난 나는 남들같이 평온한 인생길을 걷지 못하고 어린 시절을 파란만장 속에서 지냈다. 중국 양쯔강(揚子江) 상류에 있는 한구(漢口)에서 일본 대륙 침략의 참상을 목격하기도 했고, 해방 후 3년을 중국 내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내기도 했다. 평양에 돌아와 공산 정권하에서 장돌뱅이 노릇을 하다가 한국전쟁의 쓰라린 맛을 보았고, 남으로 내려와서는 중공(中共) 포로를 신문하는 일도 했다. 그리고 어쩌다 미국 유학길에 올라서는 할리우드 영화배우 노릇도 해보았고 식당보이 노릇도 3년 했는데, 결국 대학교수로 낙착돼 지내고 있다. 나처럼 많은 종류의 군대를 겪어보고, 여러 정권 밑에서 살아봤으며, 많은 종류의 직업을 가져본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만주의 엄동설한에 눈을 치우던 청소부, 중국 공장의 사동(使童), 병원 조수, 평양의 미곡상(米穀商)이 미국의 대학교수가 됐으니 이상한 팔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교수는 자기 삶을 “격동적인 국제정치와 중국 정치, 그리고 한반도 현대사의 격랑에 밀려다녔다”고 정리했다. 그러면서 “내가 후에 학자가 돼 동양의 국제정치를 연구하고, 일본과 중국 정치를 가르치며, 한국 현대사를 연구하는 교수가 된 건 우연한 일이 아닌지 모른다”고 했다.

격동의 국제 정세에 휘말린 ‘소년 가장’의 삶

이정식 교수(왼쪽)는 평생 동아시아 역사 및 정치 연구에 헌신한 공로로 2018년 인촌상을 받았다. [동아DB]

이정식 교수(왼쪽)는 평생 동아시아 역사 및 정치 연구에 헌신한 공로로 2018년 인촌상을 받았다. [동아DB]

실제로 이 교수는 어린 시절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 중국 국공내전, 6·25전쟁 등 인류사의 참화를 온몸으로 겪었다. 이 교수는 2011년 경희대 특강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그 파괴력은 너무나 참혹합니다. 저는 여러 번의 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전쟁의 참상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1937년에 터진 중일전쟁을 중국 대륙에서 경험했고, 1941년에 발발한 태평양전쟁(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으며, 만주에서 벌어진 중국 내전 때는 우리 집 바로 앞 토치카에서 울려오는 기관총 소리에 몸을 떨어야 했습니다. 1950년에 일어난 6·25전쟁 때는 매일같이 미국 폭격기가 폭탄을 떨어뜨리는 광경을 구경하면서 살았습니다. 숨어 있느라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제가 전쟁을 따라다녔는지, 전쟁이 저를 따라다녔는지 모르지만 이상야릇한 팔자를 타고난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시절 이 교수 삶을 더욱 깊은 나락으로 몰아넣은 것은 아버지의 부재였다. 이 교수 아버지는 그가 만 열네 살이던 1946년 3월, 일제의 항복과 중국 내전 등으로 혼란이 심화하던 만주에서 실종되고 말았다. 당시 이 교수 어머니는 임신 상태였고, 장남인 이 교수 아래로 여덟 살, 네 살, 한 살짜리 동생이 줄줄이 있었다.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이 교수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일본어, 중국어, 영어를 익혔다. 모국어인 한국어를 포함해 4개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의 능력은 이후 동아시아 정치사 연구에 소중한 자산이 됐다. 이 교수는 ‘신동아’ 1995년 3월호에 기고한 ‘외국어 배우기와 동심’이라는 글에서 자신만의 외국어 공부법을 공개한 일이 있다.

“말을 배우는 것은 나이와 상관이 없다. 나는 20세가 지나서 처음으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시작 후 약 1년 뒤에는 쉬운 말을 곧잘 하게 되었다. 매일 영어 배우기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2년 후에는 수준급에 도달했다.”

이 교수가 역시 ‘신동아’에 기고한 회고록에는 그 과정이 좀 더 자세히 나와 있다. 그가 처음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건 6·25 때라고 한다. 당시 그는 군인으로서 미 극동군 총사령부 번역통역사업부대(ADVATIS)에 배치돼 중국 및 북한군 포로 신문 임무를 맡았다. 문제는 중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한 반면 영어를 전혀 못 했다는 점이다. 그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미군이 필요한 것은 영어 정보였다. 미군은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일본인 2세를 ADVATIS로 보내 영어로 된 질문지를 일본말로 바꿔 우리에게 전달했다. 우리는 다시 포로에게 중국어로 질문했다. 우리는 한자리에서 매일 3개 국어를 하고 들었다. 당시 2년 동안 중국어 실력이 늘고 군사 지식도 쌓였다. 가장 큰 수확은 영어를 배운 것이다. 처음에는 미군들이 하루에도 몇백 번씩 쓰는 ‘갓뎀’의 뜻을 몰랐지만 3개월이 지나니 무슨 얘기를 하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반년이 지나니 거의 해득하게 됐다. 그리고 1년이 될 무렵부터는 영어를 꽤 지껄이기 시작했다.

나는 영어를 맹렬히 공부했다. 거기에는 지기 싫어하는 내 성격도 크게 작용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사전을 찾았고 출퇴근 시간에는 단어를 외웠다. 그리고 휴가차 일본에 가는 미군 장교들과 사병들에게 일본말로 된 영어자습서들을 사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영어로 일기를 써서 미군 사병들에게 고쳐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이 교수 모습을 눈여겨본 군대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이 교수는 종전 직후인 1954년 1월 초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 이 교수는 공식적으로 ‘초등학교 졸업’ 상태였다. 만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채 아버지 실종으로 생업에 뛰어든 탓이다. 늘 공부에 목말랐던 이 교수는 1951년 부산 피란 중 현지에 옮겨온 경희대 전신 신흥대에서 잠시 수업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전쟁의 혼란 속에 학위 과정을 마치지 못했다. 이 교수는 2014년 10월 경희대에서 명예학사 학위를 받으며 당시의 한을 풀었다. 당초 경희대는 이 교수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제안했지만, 그가 “지금 내게 박사학위가 무슨 소용인가”라며 “한국에서 받지 못한 학사학위를 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이정식 교수가 은사 고(故) 로버트 스칼라피노 UC버클리 교수와 함께 쓴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974년 미국정치학회 최우수 저작상을 받은 기념비적 저서다.

이정식 교수가 은사 고(故) 로버트 스칼라피노 UC버클리 교수와 함께 쓴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974년 미국정치학회 최우수 저작상을 받은 기념비적 저서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온다”

이 교수는 미국에서 접시닦이 등으로 생활비를 벌어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학·석사 과정을 마치고, 1957년 스칼라피노 교수가 있는 UC버클리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당시 스칼라피노 교수는 동아시아 공산주의에 대한 연구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 교수가 한·중·일 3개국어에 능통한 데다 일제강점기 조선과 만주 및 남·북한 모두에서 생활한 이력을 갖고 있는 것을 알고 대학원생으로 뽑았다고 한다. 이 교수는 이후 스칼라피노 교수가 입수한 일본과 중국, 북한 자료를 통해 한국 독립운동과 민족주의, 공산주의 등에 대한 본격 연구를 시작했다. 그 성과로 30대 초반, 미국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세계적 명문 펜실베이니아대 교수가 됐다. 이 교수는 ‘신동아’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중국 만주에서) 광복을 맞은 뒤 도미(渡美)하기까지 8년의 세월은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다. 만주에서 2년 8개월, 평양에서 2년 8개월, 그리고 부산 대구 서울을 합해 3년이라는 기간에 매일같이 새로운 일이 벌어졌고 새로운 도전과 싸워야 했다. 나와 우리 가족은 곤경 속에서도 참으로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 절망의 시기에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은인이 나타나 도움을 주었다.”

이 교수는 이후 평생 동안 연구를 통해 자신이 받은 ‘축복’을 사회에 되돌리고자 노력했다. 이 교수의 ‘신동아’ 회고록은 다음의 말로 마무리된다.

“나는 누구에게도 언젠가 좋은 기회가 온다고 믿는다. 운은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고도 믿는다. 운이 찾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또 찾아온 기회를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지금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격동기 한민족의 신산한 삶을 온몸으로 겪으며 끝없는 노력을 통해 세계 한국학 연구의 전기를 마련한 거인. 한국을 넘어 세계 정치학계가 기억할 이 교수의 삶을 돌아보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정식 #펜실베이니아대 #한국공산주의운동사 #한국학 #신동아



신동아 2021년 10월호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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