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호

사진·만평으로 본 1931년 조선의 가을 풍경

‘신동아’ 창간호가 기록한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삶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21-12-06 10: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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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년 11월, 월간 ‘신동아’가 세상에 태어났다. 동아일보는 그해 10월 신문 광고를 통해 “‘신동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잡지가 될 것”이라며 “기사뿐 아니라 ‘귀중한 사진 동판 화보’와 ‘내외국 만화’도 싣겠다”고 선언했다. 90년 전 언론 환경을 감안할 때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 터. 당대 기자들의 피와 땀이 담긴 ‘신동아’ 지면을 공개한다.

    충무공 현충사 상동식(上棟式)

    1931년 9월 16일, 충남 아산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현충사에서 상동식(상량식(上樑式)의 옛말)이 열렸다. 충무공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둔 인물. 일제강점기 조선인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우는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신동아’는 창간호 화보에 충무공을 기리는 사진을 실음으로써 ‘민족의 표현기관’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냈다.

    충무공 현충사 상동식이 열린 데는 ‘동아일보’의 기여도 컸다. 동아일보는 1931년 5월 13일자를 통해 충무공 묘가 있는 충남 아산 땅이 후손의 부채 탓에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는 내용을 처음 알렸다. 이튿날인 5월 14일 동아일보 1면에는 ‘민족적 수치, 채무에 시달린 충무공 묘소’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백성과 국토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출한 민족적 은인 충무공의 위토(位土·제사 관련 비용을 충당하고자 마련한 토지)와 묘소가 채권자 손에 넘어가는 것”을 ‘민족적 범죄’로 규정한 이 사설은 조선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이후 동아일보가 주도한 충무공 유적보존 운동에 전국적으로 2만 명 넘는 사람이 참여했다. 충무공 묘를 지키는 데 필요한 금액보다 훨씬 많은 1만6021원30전이 모일 만큼 열기가 뜨거웠다. 1931년 5월 23일 한용운, 정인보 등 민족지도자들이 참여해 조직한 충무공유적보존회는 이 성금으로 후손의 채무를 갚고, 위토를 2배로 넓혔다. 또 현충사 사당 중건과 묘소 및 비각 정비에도 나섰다. 1932년 6월 3일 동아일보 사설에는 당시 모금 운동에 참여한 조선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다.

    “(전략) 민족적 지정(至情)의 발견에 있어서는 상하를 묻지 아니하며 해내외(海內外)와 경향(京鄕)의 구별이 없었으며, 빈부의 이(異)가 없었다. 혹은 끼니를 굶어 (성금을) 보내기도 하며, 혹은 의복을 팔고, 혹은 품을 팔아 보내는 이도 있으며(후략).”

    동아일보 주최 제9회 전조선 여자정구대회

    “노픈 하늘, 맑게 부는 바람, 가을의 공중을 자유자재로 종횡하며 조선 여자 정구계의 금년도 운명을 좌우할 열구(熱球). 일구 일타마다 관중의 가슴을 열광시키고야 말 본사 주최 전조선여자정구대회가 이윽고 24일 오전 9시부터 경성운동장에서 열리게 되엇다.”

    1931년 9월 24일자 동아일보 기사의 한 대목이다. 신동아 창간호는 이 뜨거운 경기 현장도 화보에 담았다.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 다양한 체육 활동을 통해 조선인이 자신들의 힘과 기상을 깨닫게 하고자 노력했다. 1923년 창설한 전조선여자정구대회는 이에 더해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이라는 계몽적 목적도 갖고 있었다. 동아일보 주최 정구대회는 이후 남성 참여를 허용하고 ‘소프트테니스 대회’로 이름을 바꿨을 뿐 현재까지 이어져, 올해 9월 제99회 대회가 경북 문경에서 치러졌다.



    천주교 청광제

    신동아 창간호 화보에는 서울에서 열린 천주교 행사 사진도 실렸다. 1931년은 조선에 천주교 교구가 설립된 지 꼭 100년 되는 해였다. 로마교황청은 이를 축하하고자 무니(Mooney) 대주교를 조선에 보냈다. 동아일보는 9월 14일 “시내 명치정(明治町·명동의 옛 이름) 천주교회에서 무니 승정(僧正) 주재로 천주께 청광(淸光)을 구하는 제사가 거행되엇다. 참예한 교도가 근 1000명에 달하얏다”고 보도했다. 성당 안을 가득 채운 신도 사진으로도 당시 열기를 짐작할 만하다.

    평양사건 공판

    신동아 창간호가 주목한 조선의 또 다른 풍경은 ‘강력사건’이었다. 1931년 7월 7일 평양에서 조선인 여럿이 중국인 한 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동아일보는 당시 톱과 돌, 곤봉 등이 동원된 사건의 참상을 생생히 보도했다. 8월 26일 열린 공판 결과도 실었다. 그에 따르면 살인범으로 체포된 조선인 3명 전원에게 검사가 사형을 구형했으나, 법원은 각각 무기징역, 징역 15년, 징역 13년형을 내렸다.

    추계경마대회

    경마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인기 있는 오락거리였다. 1922년 ‘조선경마구락부’가 설립된 뒤 서울 부산 대구 평양 신의주 등 전국 각지에서 경마가 진행됐다. 신동아 창간호는 1931년 서울 동대문 밖에서 열린 ‘추계경마대회’ 현장 사진을 실었다. 당시 조선 지식인들은 일제가 세금 징수 목적으로 경마를 육성하는 데 대해 우려한 듯하다. 동아일보 1931년 4월 8일자에는 “재원(財源)을 엇기에 급급한 총독부가 경마(競馬)를 장려하야 세금을 부과하고저 연구하고 있다. (중략) 유력한 총독부의 재원은 되나 그 반면 도박열(賭博熱)도 향상될 모양”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전조선 수상경기대회

    동아일보는 조선인들이 유흥보다는 체육 활동을 통해 신체를 단련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기를 바랐다. 1923년 여자정구대회를 시작으로 1926년 야구연맹전, 1929년 조선수영경기대회, 1931년 마라톤경주대회 등을 잇달아 주최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1931년 9월 서울에서는 동아일보가 후원하는 제2회 전조선 수상경기대회도 열렸다. 신동아는 150여 명의 선수가 참여해 성황리에 진행된 이 대회 현장 사진을 창간호 화보에 담았다.

    황을수 군 환영 권투

    일제강점기 ‘핵주먹’으로 조선을 들뜨게 했던 권투 선수 황을수 군 사진도 신동아 화보에서 만날 수 있다. 동아일보 1931년 8월 22일자 기사에 따르면 ‘조선의 자랑’ 황 선수는 1929년 일본에서 명치신궁선수권, 관동학생선수권, 전일본학생선수권, 전일본아마추어선수권 등 네 개 대회를 석권했다. 조선인이 판정승으로 일본인을 꺾기 힘들던 당시 환경에서, 황 선수는 매번 화끈한 KO승을 거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1932년 LA올림픽을 앞두고 치러진 일본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라이트급 1위를 차지해 조선인 최초로 올림픽 무대에 서기도 했다. 신동아에 실린 사진은 황 선수가 1931년 9월 잠시 귀국했을 때 환영의 의미로 열린 권투경기 현장을 촬영한 것이다.

    고 황상규 씨 영결식

    신동아 창간호 화보에서 또 하나 주목할 사진은 황상규(1890~1931) 선생 영결식 광경이다. 황 선생은 의열단, 신간회 등에서 활동한 대표적 독립운동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동아일보는 1931년 9월 9일자 기사를 통해 “조선 사회를 위하야 만흔 활동을 한 백민 황상규 씨가 지난 2일 별세했다”며 그의 부고를 전했다. 또 “모인 사람은 관람자를 합하야 만여명에 달하얏다. 수천 명이 통곡하야 곡성이 천지를 진동하고 누구나 눈물 아니 흘린 사람이 업섯다”고 보도했다. 경찰이 “철옹성가튼 경계”에 나섰다는 내용도 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장례 현장을 화보에 담아낸 것은 값진 사료로 평가할 만하다.

    조선군 만주 출동

    마지막으로 ‘조선군 만주 출동’ 사진을 보자. 때는 1931년 9월 19일. 일제가 대륙 침략의 야욕을 품고 중국 만주를 공격한 ‘만주사변’ 개시일 이튿날이다. 일제가 당시 조선에 있던 군인까지 만주 침략에 동원했음을 보여준다. 일제는 이 총력전을 바탕 삼아 1932년 1월 만주 전역을 점령했고, 3월 괴뢰정권인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 사변은 1945년까지 계속된 일본·중국 사이 15년 전쟁의 서막이자, 조선의 병참기지화를 본격화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안경 쓴 선비가 자전거를 타고 논두렁을 달리고 있다. 쌀가마를 진 사내는 ‘요리점’ 안으로 막 들어가려는 참이다. 신동아 창간호에 실린 ‘조선의 표정’ 만평 두 점 옆에는 ‘설명은 생략’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독자에게 자유로운 해석의 여지를 남긴 셈이다.

    이 작품 창작자는 청전(靑田) 이상범(1897∼1972) 화백. 청전은 1922년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이래 10회 연속 수상 기록을 세운 미술계 ‘대스타’였다. 1927년 동아일보 미술기자로 입사해 춘원 이광수가 집필한 연재소설 ‘이순신’의 삽화를 맡는 등 다방면에서 실력을 뽐냈다. 청전은 이 인연으로 충무공 영정을 직접 그렸고, 해당 작품은 1932년 6월 충남 아산 현충원에 봉안됐다.

    제 무덤 제가 파

    신동아 창간호에는 해외 유력 매체에 실린 만평을 전재(全載)하는 코너도 있었다. ‘제 무덤 제가 파’는 1931년 세계를 뒤덮고 있던 대공황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그림 옆에는 ‘노임(勞賃) 減下(감하)로 구매력 감퇴, 이야말로 제 무덤 제가 파는 격’이라는 글이 쓰여 있다.

    실업홍수시대

    ‘실업홍수시대’ 역시 세계적 경제위기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독일(獨)이라고 쓰인 집은 이미 절반 이상 물에 잠겼다. 영국(英)과 미국(米)이라고 적힌 집 거주자도 몰려드는 물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다.

    제왕의 공포 시대

    이어지는 만평 ‘제왕의 공포 시대’는 팔뚝에 ‘무쏠리니’라고 적혀 있는 덩치 큰 사내가 제왕 차림의 작은 남자 멱살을 잡고 있는 그림이다. 왕관에 쓰인 글씨는 ‘이태리(伊太利)’다. 1931년 당시 이탈리아는 왕정 국가였지만, 무솔리니가 최고통치자를 뜻하는 두체(Duce) 칭호를 사용하며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세태를 풍자했다.

    국제적 대도박

    마지막 그림은 정면에 ‘부리앙’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보인다. 당시 프랑스 장관으로, 국제협력 체계를 만들고자 동분서주한 아리스티드 브리앙(1862~1932)으로 보인다. 그 주위로 독일, 미국, 이탈리아 등의 이름이 적힌 옷을 입은 사람들이 둥글게 앉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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