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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극장

詩에 홀린 자, 그의 이름은 이달

  • 윤채근 단국대 교수

詩에 홀린 자, 그의 이름은 이달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Gettyimage]

[Gettyimage]

평양성 대동문 인근 객사에 도착한 승려 등명 앞으로 객사 주인이 허겁지겁 다가왔다.

“등명 스님! 깊은 밤에 죄송합니다.”

상대를 그윽이 바라보던 등명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느 방인가? 아직 목숨은 붙어 있나?”



크게 고개를 끄덕인 주인이 속삭이듯 대답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걸 보면 아직 살아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나저나 다른 투숙객들 불평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요. 이런 말 듣기 거북하시겠지만, 저런 손님은 차라리 빨리, 뭐지, 그 뭐냐, 아무튼 극락으로 어서 떠나버렸으면 싶지 뭡니까요.”

상대를 잠시 흘겨본 등명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객사를 홀로 떠도는 자라면 이승의 고해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는가? 내 편히 떠나도록 인도해 줄 테니 걱정 말게. 어느 방인지 안내하게.”

입구 돌계단을 오른 두 사람은 객사 오른쪽 가장 후미진 방을 향해 이동했다. 울부짖음인지 신음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괴성이 점점 크게 들려왔다. 자물쇠로 잠긴 방문 앞에 선 등명이 주인 옷소매를 잡고 낮게 속삭였다.

“내가 들어가면 밖에서 다시 문을 잠그게. 소리를 들어보니 원한과 고통이 꽤 깊은 자인 듯하네. 숨을 거두면 내 즉시 부를 터이니.”

죽음의 인도자

방바닥을 뒹굴며 광분하는 상대를 말없이 노려보던 등명이 잽싼 동작으로 방 안으로 들어서서는 문을 도로 닫았다. 그 순간 등명을 향해 몸을 튼 상대가 잠시 동작을 멈췄다. 빈틈을 발견한 등명은 날쌔게 상대 몸 위로 올라타 상체와 두 팔을 제압했다. 둘의 승강이는 마침내 상대가 기진맥진해질 무렵까지 계속됐다. 탈진한 상대를 내려다보며 등명이 부드럽게 말했다.

“난 댁에게 아무 원한이 없소. 그저 마지막 가는 길을 인도해 주려는 거요. 지금 갈 수 있으면 그저 편안히 눈을 감고, 혹시 풀리지 않는 여한이 있거들랑 속 시원히 터놓고 떠나면 어떻겠소?”

거친 호흡이 조금씩 잦아들며 상대의 눈빛에 가득했던 광기도 차츰 누그러졌다. 등명이 물었다.

“성명이 어찌 되시나? 우리 통성명이나 합시다.”

깊은 한숨을 몰아쉰 상대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대는 날 모르나? 날 정녕 모르는가? 나 손곡 이달일세! 시인 이달이야. 조선 천하 제일 명인 이달!”

고개를 끄덕이며 등명이 속삭였다.

“알겠소. 한때 시인이셨구려. 난 유점사에서 수행하는 등명이라 하오. 평양성에 머물며 댁처럼 업장에 겨워 떠나기 힘들어하는 자들을 돕고 있소, 말하자면 뱃사공이오.”

“뱃사공이라. 참 시적인 말이로세!”

“행색은 초라하나 문자는 꽤나 익힌 듯하고, 나이도 지긋해 삶의 이치쯤은 알고도 남을 터, 몸의 고통이야 의원을 부르면 되지만 마음의 고통일랑 내게 털어놓으시오. 알겠소? 내 이제 당신 몸에서 내려올 테니, 얌전히 있겠소?”

이달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등명은 조심스럽게 상대 몸 위에서 벗어났다. 의외로 침착해진 이달은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더니 조용히 웃기 시작했다.
염주를 돌리던 손을 멈춘 등명이 긴 침묵을 깨고 은근한 음성으로 혼잣말처럼 말했다.

“낯빛을 보아하니 댁의 남은 수명은 길어봐야 고작 하루나 이틀일 거요. 내 이런 경우를 수도 없이 봐왔소. 몸이 버티는 게 아니라 마음이 버티고 있는 거겠지.”

시인의 광기

한참 동안 등명을 쏘아보던 이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보게, 뱃사공 양반! 내 뱃삯을 내려는데 돈이 없네. 숙박비와 술값으로 모두 탕진해 버렸지 뭔가. 한데 술이 전혀 필요 없는 그대가 날 찾아왔으니 이 또한 참으로 기막힌 인연이 아닌가?”

“뱃삯은 받지 않겠소. 어디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들랑 다 하고 편히 떠나시오.”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 우린 이제 막 만났는데?”

“괴로워하는 것 같아 하는 말이오. 몸이 아프다면 의원을 불러 통증을 누그러뜨려 주겠소. 그게 아니라면 내게 사연을 전하고 부디 순하게 가시오.”

이달이 다시 키득대며 웃었다.

“이보게, 등명! 내 나이 일흔을 넘긴 지 이미 오래. 몸뚱이가 죽기 직전이니 아예 아프지 않을 수야 없겠지? 그동안 써먹은 게 있는데 안 아프길 바라면 도둑놈 아닌가?”

침을 꼴깍 삼킨 등명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상대를 바라보다 낮은 소리로 물었다.

“그럼 마음속 깊이 곪은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거요? 그리 광란을 벌인 이유가 필시 있지 않겠소?”

가슴을 잔뜩 움켜쥐고 얼굴을 찌푸렸던 이달이 긴 숨을 몰아쉬고 힘겹게 대답했다.

“이를테면 시인의 광기지! 이태백이 하던 신선놀음이랄까. 내가 몸이나 마음이 아파서 이러고 있다 보는가?”

“그럼 왜 그리 난리를 치셨소? 그 울부짖음은 또 어떻고?”

두 다리를 쭉 편 이달이 등명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대답했다.

“내 어제부터 이 짓을 벌인 건 일종의 작별 인사지. 세상에 나왔을 때 등명 자네도 울부짖지 않았던가? 막 탯줄을 잘린 아기들이 바닥을 뒹굴며 맘껏 울지 않던가?”

“그럼 아기 흉내를 낸 거였소?”

“그럼! 나왔던 모습 그대로 돌아가려는 거지. 생명을 만들어준 우주에 날 돌려주려는 중일세! 그래야 또 돌려받을 것 아닌가?”

유희삼매

객사 주인이 차려낸 조촐한 주안상을 마주한 이달이 등명에게 은근한 어조로 속삭였다.

“다 죽어가는 무일푼의 시인에게 이런 대접을 해주다니. 등명 자넨 곧 성불하고 말 거야. 한데 난 더는 마실 수 없으니 이를 어쩐다?”

이달이 애써 잡은 술잔을 들어 올렸지만 심하게 떨리는 팔 탓에 술을 모두 흘리고 말았다. 등명이 다시 술을 따라 이달의 입에 대보았지만 상대는 이미 물 한 모금 삼킬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달이 씩씩대는 숨소리를 내며 간신히 말했다.

“겨우 말할 기운만 남아 있어. 자네가 대신 마셔주면 안 될까?”

등명은 오래도록 이달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달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초가을 새벽의 소슬한 바람이 둘 사이에 있는 여백을 채우며 밀려들었다. 그저 진공에 불과하던 방 속으로 무언가 사연이 채워진 듯했고, 둘은 조금씩 친밀해졌다. 가볍게 잔을 움켜쥔 등명이 한 번에 술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이달이 다시 손짓하자 등명은 연이어 두 번째 잔을 비웠다.

“등명! 자네의 열반은 어디에 있나?”

등명은 잠시 망설였다. 대답이 없자 이달이 이어서 말했다.

“내겐 여기 이승이 열반 장소일세. 여기에서 못 하면 그 어디서도 못 해! 속세에서 유희삼매(遊戱三昧·부처의 경지에서 노닐며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아니함)에 빠져 그 이상이 없을 열반에 드는 거지. 수단이야 뭐가 됐든 무슨 상관인가? 내겐 그게 시와 술이었어.”

상대의 한결 평온해진 얼굴 표정을 바라보며 안심한 등명이 조용히 물었다.

“지금 당신, 열반에 들고 있는 거요?”

이달이 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지. 유희삼매에 빠져 세상을 실컷 만끽이야 했지만 열반은 어림도 없지. 이번 생엔 글렀어!”

“왜 그렇소?”

“삼매의 기쁨이 조금 부족했어. 유희가 부족했어. 난 속세로 더 태어나야 돼. 내겐 결핍이 너무 많았어.”

건천동 꼬마

동인의 영수였던 초당 허엽의 집은 한양 건천동에 있었다. 초당 집안과 교유가 깊었던 이달은 자주 건천동 집에 들러 허엽의 장성한 아들들과 시를 짓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당이 늦은 나이에 얻었다는 막내아들 얘기가 나왔다. 이달은 농담 삼아 그 아이를 가르쳐보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어린 허균과 조우했다.

열 살도 채 안 된 허균은 홀로 툇마루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다. 이달이 기척을 내며 다가갔으나 허균은 제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꽤나 건방진 꼬마였지만 이달은 싱긋 웃으며 옆자리에 앉았다.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난 이달이라 한다. 네 형님들의 벗이지.”

꼬마는 대답 대신 뒷짐을 지고 일어섰다. 한참 말없이 이달을 바라보던 꼬마가 냉랭한 말투로 말했다.

“난 초당 허엽 선생의 아들 균이라 하네.”

이달은 처음엔 어린아이의 노숙한 말투에 코웃음을 쳤다. 익살맞다고 느낀 첫 감정이 제대로 정리되기도 전에 꼬마의 말이 이어졌다.

“자네가 비록 시로 명성이 자자하고 우리 형님들과 교분이 있다고는 하나, 서자는 서자가 아니던가?”

이달은 마치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잠시 말을 잊은 채 제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비록 서자로서 벼슬길은 막혔지만 타고난 시적 재능에 더한 각고의 연마를 통해 문단의 기린아로 우뚝 선 그였기에 꼬마의 말이 준 충격은 자못 컸다.

“그래. 난 서자다. 하지만 저명한 양반들과 두루 교제하며 하대받은 적은 없지.”

꼬마가 맹랑한 표정으로 곧바로 쏘아붙였다.

“시가 사람을 바꾸지는 못하는 법. 내 자네를 스승으로 대접할 테니, 자네도 날 반가의 자제로 존중해 주길 바라네.”

생각지도 못한 모욕을 받은 이달은 당장 강원도 원주에 있던 집으로 돌아갈까 망설였다. 그런 그의 기분을 짐작이라도 했다는 듯 꼬마가 말했다.

“강원도 손곡 땅에 집이 있다고 들었네. 내가 그리로 갈 수도 있겠으나 부디 우리 집에 머물며 시를 가르쳐주게. 요즘 당풍시로는 자네가 으뜸이라 들었네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부아가 솟던 이달의 마음이 이상하게 가라앉았다. 송나라풍의 한시가 주류를 이루던 조선 문단에 당나라풍 한시를 대유행시킨 당사자가 바로 그였다. 꼬마는 이달이 스스로 자부해 온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건드릴 줄 알았다.

질투

허균 이야기를 다 들은 등명이 낮게 한숨 쉬며 물었다.

“그래서 그 꼬마와는 잘 지냈소?”

희미한 웃음기를 머금은 이달이 가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등명, 자넨 허균에 대해 잘 모르는군? 그렇지?”

“평양에 사는 가난한 승려가 한양 소식을 어찌 일일이 알겠소?”

“임진년 왜란 때도 쭉 여기 머물렀나?”

“평양성 벗어난 건 선조 임금께서 한양 도성 버리고 저 북쪽 변방으로 몽진하실 때 따라나섰던 게 전부였소.”

길게 한숨을 내쉰 이달이 두 손을 포개 가슴에 얹으며 속삭였다.

“난 꼬마를 훈육하며 제압해 버리고 싶었어. 그 아이 아버지나 형들 모두가 대단한 문사들이었지만, 적어도 시만큼은 내가 앞선다고 믿었지. 난 시에 미쳐 살았던 사람이거든. 그 누구에게도 주눅 들거나 굽혀본 적이 없었지. 한시 운율 정도야 공부하면 누구나 배울 수 있어. 하지만 말로 설명할 길 없는 다른 영역이 있거든. 그건 가르칠 수 없는 언어도단의 경지지.”

“혹시 그 꼬마가 그런 경지에 올랐단 거요?”

“처음엔 상상도 못 했지. 그 집안 내력이 기억력은 비상하지만 성정이 건조했거든. 제법 시를 잘 외운다고만 생각했지. 그런데 가만 보니 암기한 시들 사이에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이상한 시들이 끼어 있는 거였어. 아무리 책들을 뒤져봐도 전례가 없었어.”

“그 꼬마가 지은 거였소?”

“그렇지! 처음엔 알면서도 모른 척했지. 잘못 외워온 시라며 면박을 주기도 했고. 그런데 내가 흥분할수록 녀석은 싱글싱글 웃으며 오히려 더 만족하는 거였어. 내 심중을 다 꿰뚫어보고 있었던 거지. 그 어린 녀석이 말이야!”

이달은 한참 동안 말을 멈추고 호흡을 골라야 했다. 흥분 탓에 벌게졌던 안색도 차츰 되돌아왔다. 등명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질투를 하신 게로군?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상대를 말이오.”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이달이 나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맞아. 난 질투에 눈이 멀었어. 그 아이가 내 나이를 통과할 때면 더는 겨룰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할 게 눈에 빤히 보였지. 그 후로 난 향유가 사라졌어. 즐거움을 잃었지. 이리저리 떠돌며 벗들과 풍류를 누렸지만 내 안에선 이미 무언가가 사라져버린 뒤였어. 평생 시에 모든 걸 걸었건만 그게 더는 내 것이 아닌 기분이랄까, 소중한 걸 도둑맞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애초부터 남의 것이었다는 깨달음이랄까. 난 태어난 의미를 잃어버리고야 말았지”

등명은 죽어가는 노인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괴벽스러워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에 유난히 튀어나온 광대뼈가 결합돼 상대는 이미 시신이 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등명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소?”

명례방 무신

허균 집안이 건천동에서 명례방으로 이사한 뒤에도 이달은 띄엄띄엄 제자를 방문해 한시를 지도하곤 했다. 하지만 그건 지도라기보다 토론에 가까웠다. 조숙한 천재였던 허균은 이달이 30대에 읽은 책들을 이미 독파하고 난 뒤였다.

파락호들과 아울려 전국을 떠돌던 이달은 술과 여자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고, 제자는 그런 스승을 연민했다. 어느덧 이달은 자신이 제자를 가르치기보다 그로부터 위로받기 위해 명례방을 찾는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길 수 없는 경쟁자를 제자로 둔 것도 복이라면 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명례방을 방문한 이달 앞에 낯선 무신 한 명이 나타났다. 허씨 형제들이 마침 모두 자리를 비운 터라 그는 홀로 마당을 거닐며 시를 읊조리고 있었다.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져 반가운 표정으로 몸을 돌린 그의 눈앞에 체구가 크진 않지만 단단하고 날렵해 보이는 무신 한 명이 서 있었다.

“뉘신지?”

질문을 하면서도 이달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허씨 집안이 무신들과 교유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던 터였다. 상대는 조심스레 손을 모아 예의를 갖추고는 정중한 태도로 입을 뗐다.

“한때 건천동에 살며 초당 선생 댁을 왕래하던 사람이올시다. 근자에 변방에서 돌아와 한양에서 근무하게 되었기에 인사차 들렀습니다. 훈련원 봉사 이순신입니다. 선생께선 뉘신지요?”

헛기침을 한 이달은 조금 당황해 하늘만 멀뚱히 쳐다보았다. 내세울 관직이 없던 그로선 번거롭게 자기 처지를 설명하기가 마뜩잖았다. 그런 그를 예리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순신이 유쾌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건천동에 함께 살던 유성룡 공이 소신의 어릴 적 벗이올시다. 유 공이 같은 동인의 선배이신 초당 허엽 선생과 매우 친했지요. 그렇게 서로 알게 된 사이입니다.”

어떤 죽음

말을 마친 순신은 이달이 경계를 풀고 자기소개 하길 조용히 기다렸다.

“난 이달이오. 변변한 벼슬 한 적이 없소. 한리학관이라고 들어는 봤는지? 그걸 제안받고 거절한 적은 있지 뭐요.”

시선이 흐트러지는 이달을 꼼꼼하게 관찰하던 순신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리학관이라면 화어에 능통하시겠군요?”

“조금 할 줄 아오. 시인이니까.”

순신의 표정이 밝아졌다. 환하게 웃던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말했다.

“소신도 본디 문과를 준비하며 시를 배운 사람이올시다.”

묵묵히 얘기를 듣고만 있던 등명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 돼 속삭였다.

“그분이 충무공이셨소?”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이달이 술잔을 잡으려던 손길을 거두며 신음하듯 대답했다.

“그랬지. 지나고 보면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었어. 임진년에 벌어질 왜란은 꿈도 꿀 수 없었던 평화로운 시절이었거든. 그는 그저 그런 초라한 무부로 보였었지.”

이달 옆으로 다가앉은 등명이 처음으로 상대 손을 잡으며 물었다.

“그런데 전란 중에 돌아가신 충무공 얘기가 왜 마지막 유언인 거요?”

거칠게 숨을 몰아쉰 이달이 공허한 눈빛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까 말했는데, 벌써 잊었는가? 난 향유가 멈춘 사람이라고. 쾌락을 좇긴 했으되 결코 삶을 제대로 누리진 못했노라고.”

“그게 이순신 장군과 무슨 관계요?”

“그가 남쪽 바다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난 또다시 거대한 질투에 휩싸이고 말았어. 붓을 쥔 이후로 칼을 쥔 자를 부러워한 적이 없었지. 결단코 난 칼을 경멸했었어. 단 한 번도 칼을 쥔 삶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지. 그런데 왜란을 겪으며 들개처럼 도망이나 다니다 보니 깨달았지. 붓은 칼의 힘으로 지켜지는 거야.”

“충무공이 부러우셨던 게요?”

“그의 죽음이 부러웠어.”

“시인인데 무장의 죽음이 어찌 부러울 수 있소?”

“그의 죽음은 시야. 시인은 말이지, 결국엔 자기 삶으로 시를 쓰는 거거든. 이순신의 죽음은 말하자면 가장 완벽한 압운이야. 그가 나보다 열 배는 위대한 시인인 거지.”

고개를 갸웃한 등명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를 바라보던 이달이 흐느끼듯 말했다.

“난 글자로 된 시에서 제자에게 패배했고, 삶으로 쓰는 시에서도 완벽하게 패배했어. 이순신은 내게 가장 철저하게 승리한 자야. 다시 태어난다면, 난 그로 살고 싶어. 아주 간절히.”

작별 인사

허씨 형제들은 그날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둘이서 마당을 함께 거닐며 담소하던 이달과 이순신은 오후 늦게 명례방 골목에서 헤어졌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봅시다.”

말을 꺼내며 이달은 속으로 다시 볼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와 달리 진지한 표정의 순신은 꼭 다시 만나자며 악수를 청했다. 붓이 더 어울릴 부드러운 손이었다.

“훌륭한 시인을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북쪽 변방이 평온하니 당분간 한양에 머물 것 같습니다. 부디 소신에게도 시를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이달은 어색하게 웃었다. 순신이 성큼성큼 걸어 골목길 저편으로 먼저 멀어져갔다. 이달이 소리를 질러 그를 멈춰 세웠다. 약간 놀란 표정의 상대를 향해 이달이 소리쳤다.

“아깐 말하지 못했소만, 나 서자요.”

순신은 아주 잠시 땅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들어 이달을 향해 크게 손짓하더니 우렁차게 외쳤다.

“시인이시지 않소이까? 곧 뵙겠습니다.”

그 순간 이달 내부에서 불길한 열등감과 굴욕감이 뒤섞여 피어올랐다. 시는 비루한 무부 따위가 범접하지 못할 영험한 세계여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그곳을 지키는 성주였고 수문장이었다. 시의 나라, 그곳은 제자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은 땅이었다. 그는 다시는 이순신 같은 자와 말을 섞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술친구들이 모여 있을 주막을 향해 터덜터덜 걸었다.

* 이 작품은 허균의 ‘손곡산인전’을 모티프로 창작됐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신동아 2022년 8월호

윤채근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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