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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취재|병무비리 수사 극비 내막

“K씨를 제거하라”

  •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K씨를 제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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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K씨는 어떤 경위로 병무비리수사의 전문가가 됐을까. 병무비리는 대개 청탁자(본인 또는 부모)─알선자(브로커)─해결사(군의관)라는 3단계를 거쳐 이뤄진다. 병무비리를 제대로 밝히려면 무엇보다 군의관의 자백을 받아내야 한다. 군의관이 부정면제의 최종 관문이기 때문이다. 이전까지의 병무비리수사가 초보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군의관을 다그칠 만한 의학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의학전문용어를 모르니 신검관련서류를 판독하기도 어려웠고 뭘 어떻게 물어야 할지도 몰랐던 것. 그런데 K씨가 참여하면서 군의관들의 ‘철벽수비’가 흔들렸다.

한 군의관의 증언.

“수사관이 돈 받은 의혹을 제기하며 허위판정 아니냐고 아무리 다그쳐도 군의관이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죠. 그런데 K씨는 의학지식이 풍부했어요. 또 병무에 밝아 면제 판정이 나기까지의 과정과 절차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 앞에선 거짓말을 하기 힘들어 당황했죠.”

K씨가 이처럼 의학지식에 해박한 것은 군복무 시절의 경험 덕분이다. 의정하사관으로 입대한 그는 약 4년반 동안 의무행정 업무를 봤고 군의관들 덕분(?)에 의학까지 공부했다고 한다. “내가 많이 아는 이유가 있어요. 군에 있을 때 군의관들이 하사관들을 굉장히 무시하더라구요. 자존심이 상했죠. 그래서 업무로 그들을 이겨야겠다는 생각에 나름대로 의학을 공부했어요.” 게다가 국군대구병원 근무 당시 병무비리에 연루돼 구속된 적이 있어 병무비리 커넥션에 훤하다. 그 사건으로 그는 이등병으로 강등, 강제전역 조치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K씨는 제대 후 한때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S병원 운영에 관여했다. 당시 의사 면허는 없었지만 간단한 수술 정도는 했다고 한다. S병원에 확인한 결과 K씨가 90년대 초 이 병원과 인연을 맺은 것은 사실로 드러났다.



군·검합수부팀은 서울 후암동에 있는 옛 병무청 건물에 수사본부를 차렸다. 1차 수사대상은 서울 지역의 군면제자들이었다. 서울병무청과 국군수도병원에서 트럭으로 나른 약 5만 건의 병적카드 진료기록 등이 강당을 가득 메웠다. 그중에서 ‘냄새가 나는’ 자료들을 뽑아내는 작업은 K씨 몫이었다.

99년 1월12일 새벽. 그동안 부인으로 일관하던 군의관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수사팀이 면책을 약속한데다 K씨를 앞세운 수사팀의 날카로운 추궁에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날 하루에 자백한 병무비리만 150여건에 이르렀다. 합수부에 파견된 서울지검팀의 수사도 이때부터 활기를 띠었다. 군검찰이 군의관들의 진술서와 병적카드 진단서 등을 서울지검 수사팀에 넘기면 서울지검 수사팀은 그에 관련된 민간인들을 불러 조사했다.

수사에 참여했던 한 검찰관은 K씨의 능력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사건을 찾아내는 데 비상한 재주가 있어요. 군의관들은 (면제)판정만 했을 뿐이지 행정이나 서류에 대해선 몰라요. 기억이 정확지 않으니 대충 몇 년 몇 월 경 누구에게 청탁 받아 부정면제판정을 한 것 같다고 진술해요. 그 정도만 얘기하면 K씨가 귀신같이 찾아내요. 병무청에서 보내준 5만 건의 자료는 뒤죽박죽 돼 있었어요. 일부러 막 흩뜨려 놓은 거죠. 찾다가 지치게. 옛날부터 쓰던 수법이죠. 그런데 K씨는 찾아내요.”

C호텔에 머물고 있던 K씨는 수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군검찰팀과 합숙하다시피 했다. 각 조사실을 돌아다니며 신문방법을 조언해주거나 수사관들에게 받은 비리 관련자들의 진술내용을 분석해 다시 수사관들에게 넘겼다. K씨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에게 ‘족집게’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딱 보면 표가 나요”

─군의관들이 청탁자나 면제자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기는 힘들지 않습니까.

“이름과 시기를 정확히 기억한다는 건 무리지요. 하지만 상황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어요. 기억을 잘 못하면 내가 비슷한 시기의 관련 자료들을 뽑아다 군의관 앞에 늘어놓고 하나하나 물어보며 기억을 되살리게 해요. 브로커 노릇을 하는 사람은 대개 평소 안면 있는 사람이고, 또 같은 사람에게 한두 번 부탁 받은 게 아니니까. 만약 한두 달 범위에서 못 찾으면 1년치를 다 갖다 보여주는 겁니다. 군의관들의 기억을 자꾸 되살려 면제비리 관련자들의 이름을 끄집어내는 게 내 일이었습니다.”

─진단서를 보고 부정면제라는 걸 어떻게 알아냅니까.

“딱 보면 표가 나요. 병무비리를 파악하려면 의학상식 신검규정 병무행정 등 16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5급 판정을 받은 사람은 정상인 생활이 힘든, 한마디로 병신이라는 얘기예요. 만약 신검 당시 진짜 문제가 있었다면 신검에서 빠지는 게 자연스럽죠. 치료가 급하지 판정은 나중 일이거든요. 그런데 입영일 일주일을 남기고 억지로 재검 신청을 해요. 누군가 방법을 일러줬다는 얘기지요. 병적카드에 기록된 발병일 신검일 병명 발병부위 등을 비교해 보면 표가 납니다.”

─만약 청탁자가 군의관에게 돈 준 일 없다고 잡아떼면 어떻게 밝혀냅니까.

“병무비리는 본인, 보호자 또는 부모, 알선자, 군의관 등 한 건에 보통 네댓 명이 관련돼 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이 아무리 입을 맞춰도 군의관이 불어버리면 소용없어요. 본인과 보호자는 돈만 줬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면제가 됐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심지어 병명도 몰라요. 자신이 어디가 아파 면제가 됐는지. 진짜 아팠다면 그후 치료를 해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러면 병원 다닌 기록이 있어야죠. 현재의 몸상태와 비교하면 빈틈이 보여요. 관련자들에게 수사관들이 따로따로 붙어 동시에 조사하면 말이 다 달라요. 군의관은 허위로 면제판정을 해줬다는데 보호자가 돈 준 사실 없다고 하면, 안 되는 걸 되게 했으니 군의관만 나쁜 놈 되거든요. 그럼 군의관이 가만히 안 있죠. 결국 무너지게 돼 있어요. 수사관이 조사할 때 내가 옆에 앉아 들어보면 다 알죠.”

그 무렵 군의관들 입에선 기관요원 관련 진술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자 기무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99년 2월 들어서는 고석 검찰부장이 자신이 수사팀을 이끌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이를 계기로 군검찰팀 내 불화가 빚어졌다. 수사팀장인 이명현 소령은 수사기밀이 밖으로 새나가는 데 대해 고부장을 의심했다. 고부장이 기무사와 가깝다고 판단했던 것. 그래서 기무요원들이 관련된 사건에 대해선 일절 보고하지 않았다. 이에 고부장은 이소령이 자신에게 수사내용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는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3월20일경 이명현 소령은 박선기 법무관리관 방으로 불려갔다. 박법무관리관에 따르면 고부장이 자신이 수사팀에서 배제된 데 대해 강하게 항의했다는 것. 결국 그 사건 후 고부장은 공식적으로 수사팀을 지휘했다. 그러나 이소령과 K씨는 그를 따르지 않았다.

양측의 갈등은 날로 깊어졌다. 1차 수사결과 발표 이틀 후인 4월29일. 마침내 터질 것이 터졌다. 그날은 이명현 소령이 박법무관리관의 지시로 모든 수사자료를 고부장팀, 곧 2차수사팀에 넘겨준 날이기도 했다. 고부장과 K씨는 욕설에 멱살잡이까지 벌였다. K씨가 그토록 화를 낸 것은 고부장이 군의관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드러낸 것을 알았기 때문.

K씨로서는 흥분할 만한 일이었다. 애초 군검찰은 그를 수사팀에 합류시킬 때 그의 신분과 전력을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정보원 보호라는, 수사의 기본사항이기도 했다. ‘신동아’가 확보한 군의관들 진술에 따르면 당시 K씨의 과거를 알게 된 군의관들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2차수사결과 발표가 끝난 직후인 99년 7월 중순. 당시 김인종 국방부 정책보좌관(현재 2군사령관. 대장)은 수사본부에 찾아와 고부장, 이소령, K씨 등을 한자리에 불러놓고 고부장과 기무사의 관계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그 자리에서 김인종 정책보좌관은 고부장이 K씨의 신분을 드러낸 사실을 한 군의관의 증언으로 확인됐다.

기무요원들의 추적

한편 군의관 면책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열심히 수사에 협조한 군의관들은 구속되고 끝까지 버틴 군의관들은 살아남는 모순이 생겼다. 그후 군의관들은 입을 닫아버렸다. 그에 따라 군의관 자백을 토대로 상당한 성과를 올리던 병무비리수사는 큰 차질을 빚게 됐다. 이에 대해 1차수사팀 관계자들은 군검찰의 방침을 못마땅히 여긴 특정 세력이 언론플레이를 하고 청와대에도 그런 내용을 보고한 것으로 믿고 있다.

군의관 면책과 관련, 이명현 1차수사팀장은 2차수사결과 발표 직후인 99년 7월11일 국방부장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병무비리사건의 특성상 어느 일방의 적극적인 협조 없이는 침묵의 연결고리를 끊을 수 없으며, 병무비리는 면제자 쪽에 대한 비난 가능성이 더 크다는 전제하에 국방장관님, 서울지검과 협의를 통해 군의관을 면책한다는 조건하에 자백을 받아…”라고 밝힌 바 있다. 이소령은 또 이 편지를 통해 고부장의 기무 관련 수사 축소·은폐 의혹을 진정했다. 1차수사팀의 강력한 문제 제기에 국방부는 7월19일 기관(기무·헌병) 관련 병무비리 특별수사팀을 만들었다. 고부장은 배제됐고 대신 2차수사 당시 비켜서 있던 K씨가 다시 합류했다.

K씨에 대한 기무요원들의 직접 공격이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기무요원들은 먼저 K씨의 병무비리 전력을 파고들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K씨는 98년 7월 국방부 검찰부에 찾아갔을 때 자신이 관련된 몇 건의 병무비리를 자백한 바 있다. 그중 기무사의 추적대상이 된 것은 자민련 고위간부 L씨 아들의 면제비리였다. 이는 K씨가 관련된 병무비리사건 중 가장 최근의 것으로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아 문제를 삼을 만한 것이었다.

99년 7월19일. 기무부대 수사관 L씨와 군무원 H씨가 경기병무청과 서울병무청에 찾아가 자민련 간부 L씨 아들의 병적기록표 등 관련자료를 요구했다. 병무청 담당자의 협조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이들은 7월20일 서울병무청에 다시 들러 원하던 자료를 복사했다.

또 일부 기무요원은 병무비리와 관련해 군검찰의 조사를 받은 군의관들을 찾아다니며 K씨의 전과사실을 공개하는 한편 그의 비위사실을 캐내려 했다. 7월23일. 기무사 수사관 H씨를 비롯한 기무요원 3명이 모 지역병원 한 군의관을 찾아갔다. 그들은 군의관에게 K씨 관련 사항을 질의했다. ▲조사 당시 K씨로부터 가혹행위를 당한 적 없느냐 ▲K씨와 검찰관들이 기무사 부분을 의도적으로 집중수사하지 않았냐 ▲K씨가 소환자들에게 면책 약속을 내걸고 금품을 요구하지 않았냐 등 10여 개의 질문이었다.

대부분의 질의에 대해 군의관이 “그런 적 없다”고 부인하자 이번엔 K씨 처벌을 요구하는 진정서 작성을 종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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