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8월호

킥 앤드 러시 전술 구사하는 ‘혁명무력’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09-13 14: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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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부 인민군의 전력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의 피날레를 장식한 6월15일 오찬장에서 아주 흥미로운 발언을 했다. “군을 그대로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다 보면, 주적 개념만 갖게 되니, 경의선 철도를 인민군을 동원해서 놓고, 6·25 행사도 하지 말자”

    ‘군대는 가만히 내버려두면 속성상 주적 연구만 하게 되니, 나는 인민군대가 딴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경의선 철도를 놓는데 인민군을 투입하겠다. 그리고 남북 군대 모두가 주적을 생각하지 않도록 6·25 행사도 갖지 말자’ 정도로 해석되는 이 말은, 적잖은 국민들을 놀라게 했었다. ‘아무리 김정일이지만 한국 방송 앞에서 인민군을 저렇게 비하해도 되는 것일까’ ‘김정일 위원장의 발언은 진심일까’ ‘과연 김정일 위원장은 인민군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는 것일까’ 등등.

    남북 분단은 양쪽 군대간의 치열한 싸움 때문에 고착화됐다. 각각 80만 정도로 추산되는 양쪽 병사가 전사했기 때문에, 돌이키기 힘든 ‘정서상’의 분단에 놓여 있다. 정서상의 분단은 주적을 만들었고, 주적을 의식해 치열한 군비 경쟁을 벌여왔다. 정서상의 분단·주적·군비경쟁은 남북 분단의 본질을 적시하는 단어들이라, 공개석상에서는 감히 입에 올리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것을 해결하지 않는 한 남북 평화통일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경협과 이산가족 상봉도 결국은 양쪽 군부의 신뢰 여부에 따라 흔들리는 ‘가랑잎’일 뿐이다.

    이제 통일을 꿈꾸는 운동가들은 차분히 조선인민군 연구에 착수해야 한다. 군대는 속성상 비밀 그 자체다. 이러한 한계가 있어도 조선인민군의 특성과 장점 단점을 정확히 분석해야만 남북은 군축에 들어가고 평화통일의 마당을 열 수가 있다. 조선인민군의 실체를 벗겨 본다.



    “진짜로 붙었으면 한국 함정도 격침”

    조선로동당, 구체적으로 말하면 김정일의 지배를 받는 조선인민군의 전력은 어느 정도일까. 최근들어 북한은 계속된 경제난 유류난으로 인민군의 전력이 크게 저하됐다고 한다. 지난 해 6월 연평해전 승리를 계기로 인민군에 대한 국군의 자신감은 매우 높아졌다.

    육군본부 분석에 따르면 국군 병사들의 평균 신장은 171cm, 체중은 66kg인데 반해 인민군 병사들의 평균신장과 체중은 162cm에 47~49kg이다. 국군이 복싱의 웰터급 선수라면 인민군은 플라이급 선수인 것이다. 그러나 귀순자들은 “아무리 파철(破鐵)더미라도 그것을 쏘면 다치는 것은 한국뿐이다. 세계적인 무력을 갖췄다는 러시아도 조그만 체첸을 꺾지 못해 절절 매는데, 경제난 유류난이 심하다고 또 체구가 작다고 국군이 인민군을 완전 제압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오산”이라고 경고했다. 한 군사소식통은 “연평해전이 진짜 해전이었다면 한국 해군 함정도 몇 척 격침됐을 것이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북한 어뢰정이 어뢰를 한 발이라도 쐈는가. 북한이 진짜로 싸울 의사가 있었으면 어뢰뿐만 아니라 해주 쪽 해안에 배치된 해상 대 해상 미사일(실크웜)을 쏘았을 것이다. 어뢰와 미사일을 쐈다면 한국 해군 함정도 한두 척은 격침될 수밖에 없다. 물론 더 많은 피해를 보는 쪽은 북한 해군이겠지만 연평해전에서처럼 완승을 거둘 수는 없는 것이다. 연평해전을 보고 인민군을 과소 평가하는 것은 곤란하다.”

    인민군의 전력을 구체적으로 알려면 인민군과 전면전을 벌여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는 매우 어리석은 선택이므로 간접적인 방법으로 체크하여야 한다. 군대의 전력을 조사하려면 인간애(人間愛)에 기초한 ‘연민의 마음’을 버리고 아주 냉철하고 객관적인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요즘 파월 국군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일부 언론과 진보적 인사들은 파월 국군의 월남민 학살 사실을 찾아내 “국군이 가지 말아야 했을 전투에 참전했다. 국군은 미군의 용병이었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는 일면 옳은 말일 것이다. 미국이 일으킨 명분 없는 전쟁에 참전해 국군이 월남민과 불구대천의 원수가 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번쯤은 다른 각도에서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국군이 월남전에 참전하기 불과 16년 전, 미군은 6·25전쟁에 참전해 다 죽어가던 우리를 살려주었다. 미군은 한국에서만 3만4000여 명이 전사하고 미국으로 후송된 후 사망한 병사까지 합치면 도합 5만4000여 명이 희생됐다. 미국이 그들의 국익을 위해 6·25전쟁에 참전했다고 해도 이 5만4000여 명의 부모는 아들을 희생시킬 이유가 없다. 이러한 희생은 우리로서는 큰 빚이 아닐 수 없다. 국군의 월남전 참전은 이러한 빚을 갚는 의미도 있다.

    국군의 월남전 참전은 미국으로부터 신형 무기를 제공받는 등의 전력 증강은 물론이고, ‘실전 경험’이라는 엄청난 효과를 얻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실전 경험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6·25전쟁 때 터키나 에티오피아 등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한국과는 별관계가 없는 나라들이 참전한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한다.

    실전 경험을 쌓아온 남북한 군

    그들은 참전을 통해 실전 경험을 얻었다. 미군을 비롯한 세계 최고의 군대와 협력함으로써 ‘군사 노하우’도 전수받았다(노하우는 기술 분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나라 군대와 연합작전을 펼치면서 다른 나라 군대와 비교해 부족한 점을 찾아내기도 한다. 타국과 연합작전 경험이 많을수록 자국이 공격을 받았을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나라도 많아진다.

    인민군도 ‘꿩 먹고 알 먹는’ 해외 파병에 열심이다. 그러나 북한은 6·25전쟁 때 UN에서 ‘침략자’로 규정된 바 있어 대체로 지상군 파병은 꺼리는 편이다. 북한은 6·25전쟁 때 미군기의 공습으로 아주 고전한 적이 있어 공군력을 키우는데 매우 노력해왔으므로, 주로 공군 조종사를 파병해 실전 경험을 쌓아 왔다. 북한은 이스라엘의 반대편 그러니까 아랍 연맹 국가들을 많이 도왔다.

    북한은 시리아를 수리아라고 부른다. 82년 중동전이 일어나자 수리아는 골란고원에 설치된 이스라엘의 대공 레이저 기지 때문에 곤경에 처했다. 그래서 이 기지를 파괴하고자 수 차례 전투기를 띄웠지만 이스라엘의 전투기와 대공 미사일에 걸려 여지없이 당하기만 했다. 북한은 이러한 수리아를 위해 일단의 대위에서 소좌급 조종사를 파병했다.

    미그 21기 넉 대를 몰고 출격한 북한 조종사들은 초저공 비행으로 접근해 이스라엘의 대공 레이더 기지에 정확히 폭탄을 떨구었다. 수리아로서는 ‘앓던 이’를 뽑은 것이고 북한은 수리아를 무대로 실전을 경험한 것이다. 지난 7월 미북간에 재개된 미사일 협상에서 북한은 “미사일 수출을 중단하는 대가로 매년 10억 달러를 제공하라”고 미국에게 요구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북한은 미사일 수출로만 매년 10억 달러를 벌고 있다는 뜻도 된다.

    북한이 미사일을 10억 달러 수출할 수 있게 된 것은 수리아를 비롯한 아랍 국가에 조종사를 파병해 혈맹 관계를 구축해놓았기 때문이다. 이란과 시리아 등 주요 아랍국들이 보유한 미사일은 상당수은 북한이 제공했거나 북한이 제공한 기술을 기반으로 제작된 것이다. 때문에 미국 CIA와 더불어 세계 최강의 해외첩보기관으로 꼽히는 이스라엘의 모사드는 우리 국정원과 협력을 강화해오고 있다.

    96년 9월 강릉 앞바다에 좌초한 북한의 상어급 잠수함 사건은 많은 국민을 놀라게 했다. 그때 강릉으로 상륙한 인민군은 국군에 최고의 실전 훈련 기회를 제공했다. 당시 대간첩 작전을 유심히 지켜본 독자라면 국군이 마치 정규전을 벌이듯 장갑차를 동원하고 헬기를 띄운 광경을 보았을 것이다.

    주적이 자기네 영토에 들어왔을 때는 인민군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대담하게도 남조선 괴뢰군이 아니라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주적’ 미군을 상대로 실전을 연마한다. 우리처럼 우리땅에 상륙한 주적과 실전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온 미군을 덮쳐서 잡는 실전을 벌이고 있다.

    1960년대 말 인민군은 그들이 말하는 주적 미군을 상대로 아주 인상적인 승리를 낚아챘다. 68년 1월23일 원산 앞 바다에서 일어난 푸에블로호 사건과 69년 4월15일 일어난 EC121기 격추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은 이때 당한 패배를 부끄러워해 아직도 상당부분 비밀로 하고 있으나, 북한에서는 이를 아주 영웅적인 행위로 자랑하고 있다.

    푸에블로호사건

    푸에블로호 사건은 북한 영해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일어났다. 북한은 원산만에서부터 대포동 미사일 발사지로 유명한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까지를 직선으로 긋고, 이 직선 안쪽의 동한만 바다를 북한 영토 내에 있는 호수나 강 같은 ‘내수(內水)’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이 직선에서부터 50해리까지를 영해 개념인 군사수역으로 선포해 외국군의 배나 군용기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푸에블로호는 매우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배였다. 벌레로 비유해 설명한다면 적을 공격하는 수단은 하나도 없고, 온몸이 적의 움직임을 탐지하는 더듬이로만 덮여 있는 벌레가 바로 푸에블로호다. 푸에블로호는 적 항구에서 가장 가까운 공해상에 떠서 온갖 안테나를 동원해 적 함정에서 나오는 전파와 음파를 수집한다. 함정들은 같은 클라스(class)일지라도 기계적 특성이 전부 달라, 고유의 음파와 전파를 갖고 있다.

    전쟁 때 가장 중요한 행위는 피아식별이다. 푸에블로호가 수집한 전파 음파는 곧바로 미 해군 정보국을 거쳐 전 세계에 나가 있는 미 해군 잠수함과 전투함에 제공된다. 미 잠수함은 이러한 자료를 컴퓨터에 넣어 갖고 다니다가, 이상한 음파와 전파가 잡히면 이 자료와 비교해 상대가 적군인지 아군인지 판단한다. 때문에 인민군 쪽에서 보면 푸에블로호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푸에블로호는 무장이 형편없지만, 워낙 탐지 능력이 뛰어나 북한 항구에서 함정이 나오면 먼저 발견하고 도주해버린다. 때문에 북한 해군은 매번 뒷북만 쳤다.

    북한의 특수8군단(육군 특전사에 해당)이 서울에 침투해 청와대를 공격한 1·21사태가 일어난 지 불과 이틀째인 1968년 1월23일, 원산 앞 바다는 아주 안개가 심하고 매우 추웠다. 이날 푸에블로호는 방심했는지 돌이킬 수 없는 불운을 만났다. 농무(濃霧) 때문인지 아니면 레이더 병이 졸았는지, 푸에블로호가 미처 포착하지 못한 상태에서, 북한의 해안레이더가 이 배를 탐지하고 어뢰정을 내보낸 것이다.

    현재 경수로 공사가 벌어지고 있는 함경남도 신포군 앞에는 마양도라는 작은 섬이 있다. 이 섬에는 북한 동해함대 사령부 예하의 잠수함 부대 중에서 가장 큰 제4전대와 함정을 건조하는 마양도 조선소가 있다. 마양도에서부터 남쪽으로 동해안을 따라 내려가면 3전대-2전대 등 북한 동해함대의 주력 부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푸에블로호는 마양도 부근에서부터 북한 해안을 따라 내려오며 첩보를 수집했는데, 그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북한 어뢰정과 접촉한 것이다.

    바지에 오줌싼 미군 수병

    북한 어뢰정은 푸에블로호 주위를 한 바퀴 돌며 시위한 후 국제 공용주파수로 정선 신호를 내렸다. 푸에블로호는 그때서야 자신이 포위됐다는 사실을 알고 연막탄을 터뜨리며 도주를 시도했다. 그러자 어뢰정은 기관포를 발사했고 그 즉시 푸에블로호는 멈춰 섰다. 98년 11월 여수 앞 바다에서 한국 해군의 광명함이 북한 로동당 작전부와 사회문화부 소속 공작원이 탄 반잠수정을 격침한 것과 유사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푸에블로호 측은 무장을 하려고 함내에 비치된 무기고를 열려고 했다(무기고를 열어 봤자 소총 등 소화기뿐이라 어뢰정에 대항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북한 어뢰정이 쏜 기관포의 초탄이 선실 유리창을 뚫고 들어와 무기고 앞에서 터져, 무기고를 열려던 미군 수병이 즉사했다. 안 그래도 무장력 차이 때문에 겁을 집어먹고 있었는데 무기고를 열려던 수병이 즉사하자, 푸에블로호 측은 탈출을 포기하고 즉시 배를 세웠다. 얼마 후 어뢰정이 푸에블로호 함미에 배를 붙였다.

    그러나 푸에블로호가 너무 커서 어뢰정 안에 있던 의자를 몇 개 포개 놓은 후에야 수병들을 푸에블로호 갑판으로 올려보낼 수 있었다. 갑판에 올라간 인민군 수병은 네 명이었다. 이들이 AK 소총으로 위협 사격을 하며 선실로 돌진하자, 70여명으로 보이는 미군이 꼼짝도 하지 못했다. 북한 수병들은 자기들 수가 너무 적은 것을 감추기 위해, 거듭 위협 사격을 하며 이들을 갑판으로 내보내 한 줄로 쪼그려 앉게 했다. 그리고는 선실의 침대 시트를 찢어 나눠주고 뒷사람이 앞사람의 눈과 손목을 차례로 묶도록 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당시 인민군 수병들은 전혀 영어를 하지 못했고, 미군은 한국어를 한 마디로 할 줄 몰랐다. 하지만 인민군 수병이 총탁(개머리판)으로 미군을 때리며 고함을 치자 미군은 이심전심으로 알아듣고 행동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 북한 수병 한 명이 갑판 아래에 있는 기관실로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한 흑인 수병이 몽키스패너를 들고 덤벼들었다. 북한 수병은 격투 끝에 흑인 병사를 제압하고 그를 끌어냈다(이것이 푸에블로호에서 있었던 유일한 저항이다).

    또 한 수병이 함교로 올라가니, 푸에블로호 함장인 로이드 부처 대령이 만사를 포기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영어를 못하는 북한 수병은 백지에 장교 모자와 철모를 그린 다음 물음표(?)를 그려 그에게 내밀었다. 그림으로 사관(장교)과 수병이 모두 몇 명이냐고 질문한 것이다. 부처 대령은 그 뜻을 정확히 알아듣고, 장교 모자와 철모 밑에 숫자를 적었는데, 그 합계가 82이었다. 이 숫자를 들고나와 갑판에 모아 놓은 미군을 세보니 딱 한 명이 모자랐다. 그 한 명은 무기고를 열려다 기관포탄을 맞고 즉사한 미군 수병이었다.

    98년 속초 앞 바다에서 꽁치 그물에 걸린 북한의 유고급 잠수정을 우리 해군이 나포해 왔을 때 우리 사회가 받은 충격은 상당했었다. 그런데 북한 어뢰정은 자신 보다 20~30배나 큰 미군 함정을, 그것도 현역 대령(함장)이 포함된 미군 81명을 붙잡아 돌아왔으니 북한에서는 ‘난리’가 난 듯 흥분했었다고 한다. 원산항에 도착한 푸에블로호에서 미군 장병들이 손을 들고 내려오는 사진은 즉시 전세계로 타전됐으나, 한국과 미국에서는 뒤늦게, 그리고 작게 보도되었다.

    스커드B 기술 제공 받아

    귀순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 미군들은 상당한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겁을 먹거나 추위를 타면 누구나 오줌이 자주 마려운 법이다. 더군다나 미군은 혹독하게 추운 날 푸에블로호 갑판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으니 얼마나 오줌이 마려웠겠는가. 그런데 인민군과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몇몇 미군은 바지를 입은 채 오줌을 눈 모양이었다. 인민군은 ‘멀대’ 같이 키가 큰 미군들이 바지에 오줌을 싼 것은 두고, “미군은 겁이 많아서 그렇다”고 놀렸다고 한다. 세계 최강이라고 하는 주적에 대한 자신감은 이러한 놀림을 통해 형성되는 법이다. 물론 어뢰정을 타고 간 인민군 수병들은 하루아침에 영웅이 되었다.

    푸에블로호 사건은 북한의 미사일 개발과도 관련 있다고 한다. 다행히도 푸에블로호의 수병들은 북한군이 갑판에 올라오기 전에 각 장비의 핵심 부품과 첩보를 수집한 테이프 등은 빼내 바다에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에서 2중영웅 칭호까지 받았던 대남공작원 출신의 한 귀순자는 “그랬어도 북한은 미국의 최첨단 첩보 장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장비를 소련에 제공하고 그 대가로 스커드 B 제조 기술을 제공받았다. 한국 국방부는 73년 10월 4차 중동전 때 북한이 이집트를 도와주고 그 보답으로 이집트로부터 스커드 B를 제공받은 것으로 정리해 놓고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북한은 68년에 이미 스커드 B 제작 기술을 소련으로부터 제공받았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가진 인민군은 이듬해인 69년 4월15일 한결 대담한 작전을 계획한다. 정기적으로 북한 영공에 접근해 첩보를 수집해가는 미 공군 첩보기 EC121을 격추하기로 한 것이다. 첩보 수집기 EC121은 제트기가 아니라 프로펠러 비행기다. 그래서 속도는 느리지만 워낙 레이더 시설이 좋기 때문에 적기가 뜨면, 먼저 발견하고 도망칠 수가 있다. 한마디로 하늘을 무대로 한 푸에블로호가 EC121인 것이다.

    한국이나 일본의 미 공군 기지에서 발진한 EC121기는 공해상을 통해 한소 국경까지 날아가 소련 극동 공군이 포진한 블라디보스토크를 정찰하고 이어 북한 쪽을 훑으며 남쪽으로 내려오곤 했다. 이 비행기를 노린 것은 북한 공군의 김책공군대학장 김기옥 소장이었다. 김기옥 소장은 북한에서는 6·25 전쟁 2차대전 때 에이스로 명성을 떨쳤던 미 공군 토마스 젤레스의 F86 세이버 전투기를 격추한 조종사로 이름이 높다. 당시 토마스 젤레스는 평남 개천비행장 상공에 매복해, 개천비행장에서 어떠한 항공기도 이륙하지 못하게 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김기옥은 미그15를 몰고 과감히 이륙해 토마스 젤레스의 F86을 격추해버렸다는 것이다.

    어랑비행장은 김책공군대학이 관할하는 공항으로, 이곳에는 속도가 느린 미그15기밖에 없었다. 그래서 김기옥은 평남 북창비행장에 있는 미그21기 두 대를 어랑비행장으로 옮기게 했다. 이때 미그21기가 자력으로 어랑비행장으로 날아오면 미국 첩보위성에 그 사실이 포착되므로, 미그21기를 분해해 야간 열차에 싣고 비밀리에 어랑비행장으로 옮겼다. 그리고 어랑비행장에 대형 텐트를 쳐 미군 첩보위성의 관찰을 차단케 한 후, 미그21기를 재조립했다. 그리고는 1주일 남짓 EC121이 날아오기를 기다렸다.

    4월15일 북한 공군 레이더는 EC121이 예의 항로로 날아온 것을 포착했다. 그 즉시 김기옥은 두 대의 미그21기를 이륙시켜 바다에 바짝 붙어 날아가는 초저공 비행으로 EC121의 예상 진행 항로 쪽으로 날아가게 했다. 물론 EC121은 탁월한 레이더를 가졌기 때문에 어랑비행장을 이륙한 두 대의 비행기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우수한 레이더일지라도 이 항공기가 미그21인지 미그15인지 구분할 수는 없는 법이다. EC121으로서는 그저 미그15겠거니 하고 신경을 쓰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수면에 바짝 붙어 비행하는 전투기는 레이더에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미그21은 초저공으로 바다에 붙어 EC121 진행 항로로 접근하다. 갑자기 치솟아 EC121로 돌진했다. 그 순간 EC121도 속도 빠른 전투기의 출현을 알았겠지만 이미 늦었다. 먼저 미그21 제1번기가 열추적 로켓인 K13을 발사했다. 열추적 로켓은 열이 많이 나오는 제트기를 쫓는데는 탁월하지만, EC121같이 열이 적게 나오는 프로펠러기는 놓칠 수도 있다. 그러나 거리가 가깝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미그21 조종사들은 이 미사일 외에는 다른 적당한 무기가 없었다. 때문에 이 미사일이 맞지 않으면 공중 충돌을 해서라도 EC121을 잡겠다고 결의했었다고 한다. 1번기가 최근거리에서 K13 로켓을 발사하고 옆으로 이탈하고 그 직후 2번기 조종사인 현기수 대위도 K13을 발사했다. 그 얼마 후 EC121기가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동해로 추락했다. 82년 사할린 상공에서 대한항공 007이 소련 공군기의 미사일을 맞고 추락한 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EC121 승무원 31명은 살려달라는 무전 한번 제대로 쳐보지 못하고 전원 사망했다.

    푸에블로호 사건 때도 그랬지만 이 사건 때도 미국은 데프콘 2까지 선포하면 전쟁 일보 직전까지 돌입했었다. 그러나 푸에블로호사건이 미-북간 협상으로 마무리됐듯, 이 사건 역시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그후 러시아 해군은 이 비행기의 잔해를 건져 미국에 건네주었고, 현기수 대위는 일약 공화국 영웅이 됨과 동시에 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이 되었다.

    조명록의 담대함

    6월15일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대신해 오찬사를 읽었던 조명록 국방위원제 제1부위원장 겸 인민군 총정치국장은 깔끔한 외모와 무골(武骨) 풍채 때문에 눈길을 끌었다. 77년부터 95년까지 18년 간 공군사령관을 지낸 그는 81년 미그기 편대를 백령도 상공으로 집어넣어 한미연합군을 깜짝 놀라게 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그때 조명록이 투입한 미그기는 6대였다. 그러나 한미연합군 레이더는 2대의 항적밖에 잡지 못했다. 남북한 사이에 정치적으로 파도가 높던 때가 아닌지라, 한국은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령도로의 미그기 투입은 조명록 사령관이 단독으로 결정한 것이라고 한다. 조명록은 공군에도 정찰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자기 결정으로 미그기를 백령도 상공에 투입했다고 한다.

    푸에블로호 사건이나 EC121기 격추 사건, 백령도 영공 침공 사건의 공통점은 이러한 작전을 시도한 주체가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아니라 현지 사령관이라는 점이다. 한국은 5·16과 12·12로 대표되는 쿠데타를 겪었기 때문에 ‘군대에 대한 문민의 우위’를 매우 강조한다.

    군대는 문민인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대명제를 구축하기 위해 우리 사회는 국회와 언론 등 군대를 통제할 수 있는 갖가지 제동 장치를 만들어 왔다. 때문에 쿠데타를 꿈꿀 정도로 엉뚱한 지휘관이 아닌 한 국군 지휘관은 북한 군에 대해 단독으로 전력을 투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인민군은 할 수가 있다. 72년 이후락 정보부장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은 68년의 울진·삼척 사건을 거론하며 “군사 모험주의자들이 벌인 일이었다, 박대통령에게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군사 지휘관의 모험주의 기백을 살려줌으로써 전력을 유지하고 그러한 모험주의가 로동당에 대한 충성으로 이해되는 것이 인민군의 정서인 것이다.

    국군도 ‘국군의 사명’을 갖고 있듯 인민군도 ‘인민군의 사명’이 있다. 인민군 병사는 입대하면서부터 이를 달달 외워야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인민군은 조선로동당이 이룩한 혁명적 전취물(戰取物)을 목숨으로 사수하며, 외래 침략자들로부터 조국을 보호하며 조선반도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실현을 무력으로 담보한다.”

    킥 앤드 러시 전술

    한마디로 로동당의 군대로서 한반도 전체에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무력이 되겠다는 것이 인민군의 사명인 것이다. 이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인민군은 전력을 매우 조밀하게 배치해 놓고 있다.

    먼저 가장 규모가 큰 인민군 육군부터 살펴보자. 육군은 12개 보병군단, 4개의 기계화군단, 1개의 전차군단, 2개의 포병군단, 그리고 우리의 수도방위사령부와 비슷한 평양방어사령부의 총 20개 군단으로 구성돼 있다. 이러한 군단급 부대와 별도로 총참모부 직속으로 우리의 특전사와 비슷한 경보교도지도국이 있고 정보사와 흡사한 정찰국이 있다.

    인민군의 보병군단은 ‘대연합부대’로 불리는데, 예하에 3∼4개의 보병사단과 1개씩의 포병여단·전차여단·경보병여단·저격여단·해안포여단·교도여단 등을 거느리고 있다. 지난 해 전미과학자협회(FAS)는 그들이 운영하는 인터넷 홈페이지(www.fas.org)를 통해 97년 미 해병대 정보단이 분석한 인민군 작전 계획을 공개했다. 이 자료는 인민군 작전의 가장 큰 특징은 속전속결이고, 방어는 없고 공격만 하는 ‘킥 앤드 러시’ 전술을 구사한다고 밝히고 있다.

    맨 처음 ‘킥(kick)’을 하는 부대는 스커드B 미사일 부대와 북한 공군기가 될 것이다. 이어 휴전선에 배치된 4개 보병 군단이 본격적인 킥을 시작한다. 이 군단은 서울을 점령하거나 포위하는 것이 임무다. 그 다음에는 ‘러시(rush)’가 시작되는데 주력은 4개 기계화 군단과 2개 포병군단 1개 전차군단이다. 이 기동부대에게 서울과 같은 대도시는 수렁이다. 때문에 이들은 서울에 들어오지 않고 남해를 향해 곧장 남진할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때 한국에 있는 한미 공군과 특전사·해병대 등도 북한 곳곳으로 침투할 것이므로, 이에 대한 대책도 세워놓았다. 즉 평양 방어를 위해서는 우리의 수도방위사령부와 흡사한 ‘평양방어사령부(평방사)’를 만들었다.

    6·25전쟁 때 김일성은 미군기의 공습을 하도 많이 당해서 평양 상공의 방공(防空)망 구축에 남달리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때문에 평방사는 대공전력 위주로 편성돼 있어, 평양 상공으로 적기가 들어오면 마치 빗자루로 쓸 듯이 모든 사격 수단을 구사한다고 한다.

    후방으로 침투한 국군 특전사와 해병대를 상대하는 것은 후방에 있는 인민군 8군단-3군단-7군단-6군단이다. 이 군단에는 특수전을 익힌 경보여단이 있어 국군 침투부대를 상대로 추격전을 펼친다고 한다. 북한을 방문해 해안가에 가본 사람들은 하나 같이 “바닷가 백사장에는 바다를 볼 수 없도록 거대한 모래산이 쌓여 있다”고 말한다. 왜 북한은 육지와 바다를 차단하는 모래언덕을 쌓아 놓았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상륙작전 방지위한 해안 모래언덕

    한 소식통은 “6·25때 당한 인천상륙작전 경험 때문이다. 언제 어느 해안으로 상륙할지 모르는 한미 해병대는 인민군에도 스트레스다. 그래서 만든 것이 해안가의 모래산이다. 요즘 상륙작전은 속도 빠른 공기부양정을 타고 바다에서 곧바로 해안선으로 올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해안에 지뢰를 설치해 봤자 무용지물이다. 그러나 모래산을 쌓아 놓으면 공기부양정이 올라오지 못한다. 모래언덕은 함포 사격을 받아도 퍽퍽 터지며 조금씩 흘러내리기만 할 뿐, 뚫리지 않는다. 한국이 해안선에 철조망을 쳐서 간첩 침투를 막았다면 북한은 모래 언덕을 쌓아 한미연합군의 반격에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민군의 기계화 군단 등이 돌진할 때 이 부대 전면으로 사전 침투해 기동로를 개척해주는 부대가 경보교도지도국이다. 이 부대 요원들은 AN-2기나 잠수정·땅굴 등 갖가지 방법으로 사전 침투해, 기동부대가 통과할 교통 요점을 선점한다고 한다. 이러한 킥 앤드 러시 전술로 미 증원군이 오기 전에 한반도 전역을 석권하는 것이 인민군의 작전 계획이다.

    이러한 인민군의 작전계획은 예상대로 이뤄질 것인가. 한미연합군은 인민군의 이러한 전략 구사에 대비해 ‘5027-98’로 불리는 작전계획을 만들어 놓고 있다. 인민군의 작전계획이 방어는 없고 오로지 공격인데 반해 ‘5027-98’은 방어전을 펼친 후 반격전을 구사하는 것으로 짜여 있다. 제2의 한반도 전쟁은 200만에 이르는 대부대가 조밀하게 맞붙는 매우 치열한 전쟁이 될 것이다. 결정적인 승자도 패자도 없이 막대한 소모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

    [조선인민군의 역사]

    보안대라는 경찰 조직에서 탄생한 조선인민군

    조선인민군은 과연 북한 주장대로 ‘항일유격대’에서 비롯됐을까. 정답부터 말하면 “아니다”이다. 광복 직후 남북한에서 펼쳐진 미소 군정은 한국민이 군대를 갖는 것을 금지하는 것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북한 전역에서 군정을 펼치기 위해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은, 1945년 10월12일 25군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 명의로 “북한 지역 내의 모든 무장대는 해산하고, 모든 무기와 군용물자는 군 경무(警務) 사령관에 바쳐라”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소군정은 북한 치안을 위해 경찰 창설을 준비했다. 1945년 10월21일 소련군 출신의 한인 2000여 명을 근간으로 북한 전역에 ‘보안대’를 출범시킨 것이다. 당시 철도는 가장 중요한 수송수단이자 최대의 국가 재산이었다. 1946년 1월11일 소군정은 이러한 철도를 지키기 위해 별도로 ‘철도 보안대’를 편성하였다(지금도 철도에는 ‘공안’이라는 경찰 조직이 있다. 요즘도 가장 중요한 수송 수단인 항공기에는 ‘보안관’이 탑승한다. 공안과 보안관은 모두 철도 보안대 개념이 이어진 것이다).

    공산국가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행정 조직에는 지휘관(군관)과 이 조직을 정치적으로 이끌 ‘정치간부’를 함께 배치한다는 점이다. 1945년 11월 소군정은 이러한 보안대를 정치적으로 지도할 요원을 양성하기 위해 ‘평양학원’을 만들었다.

    1946년 6월에는 보안대를 지휘할 군관을 만들기 위해 ‘중앙보안간부학교’를 창설했다. 평양학원은 보안대가 조선인민군으로 재편된 후인 1949년 1월 ‘인민군 제2군관학교’로 개칭되고, 그보다 앞선 1948년 12월 중앙보안간부학교는 제2군관학교로 개칭된다.

    이렇게 보안대 조직이 확충되자 1946년 8월15일 소군정은 ‘보안간부 훈련대대부’(訓練大隊部)를 만들었다. 보안간부 훈련대대부는 간부를 훈련하는 대대인 것양 이름지었지만 실제로는 전체 보안대를 지휘하는 사령부였다.

    이 대대부의 초대 사령관이 김일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에서 제4사장으로 활동했다는 최용건(崔庸健)이다. 최용건은 김일성보다 10세 이상 나이가 많았는데, 그는 6·25 때 민족보위상(국방부장관에 해당)을 맡아 인민군의 서울 점령을 총지휘했다.

    1947년 5월17일 보안간부 훈련대대부는 ‘인민집단군 총사령부’로 개칭되고, 보안대는 ‘인민집단군’으로 바뀌었다. 경찰의 색깔을 벗고 군대 색채를 띠기 시작한 것이다. 여전히 소군정기이던 1948년 2월4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민족보위국’(한국 국방부에 해당, 지금은 인민무력성)을 만들고, 4일 후인 2월8일 인민집단군을 ‘조선인민군’으로 개칭했다.

    인민군 간부 중에는 최용건이나 최현처럼 과거 김일성과 같이 항일유격대를 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개인으로 인민군에 들어온 것이지 항일유격대로 들어온 것이 아니다. 인민군을 편성하는데 크게 영향을 준 것은 중공군이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인민군은 10개 사단을 편성했는데 이중 3개 사단은 중공군에서 넘겨받았다.

    이 3개 사단은 6·25 때 문산을 거쳐 서울에 입성하고 나중에는 미 24사단장 딘 소장까지 사로잡아 ‘2중 영웅’ 칭호를 받은 방호산(方虎山) 소장의 6사단(구 중공군 166사), 안동에서 국군 수도사단을 격파할 때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도 군의관에게 “내 목숨을 15분만 더 연장시켜 달라”고 부탁하며 마지막까지 작전을 지휘하다 죽었다는 최춘국(崔春國) 소장의 12사단(구 중공군 독립 15사), 그리고 전창덕(全昌德) 소장의 5사단(구 중공군 164사)이다.

    A씨는 중공군과 함께 북한에 들어와 인민군 장교가 됐다가 6·25전쟁 때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형기만료로 출소할 때까지 전향을 하지 않았고 지금도 전향서를 쓰지 않은 채 자유롭게 살고 있다. 이러한 A씨도 북한이 인민군 창건일을 바꾼 것을 비판했다. “역사적인 사실은 사실로 남겨 놓아야지 필요성 때문에 자꾸 조작하면, 결국 그 군대는 사병(私兵)이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본 국민들은 김정일이 ‘국방위원장’이라는 직함을 쓰고 있는데 대해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공산국가에서는 공산당의 서기장이나 총서기, 또는 국가 주석이 최고위직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소련이나 중국 공산당에서 서기장 또는 총서기라고 하는 자리가 북한 조선로동당에서는 총비서다. 김정일은 물론 총비서를 겸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상회담 내내 국방위원장으로 불렸다. 조선인민군을 이해하려면 김정일이 국방위원장으로 불리는 이유부터 살아야 한다. 북한에서는 헌법보다 로동당 규약(한국의 정당들은 규약대신 ‘당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이 상위법으로 해석된다. 인민군이 로동당의 군대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로동당 규약 제46조는 ‘조선인민군은 항일무장 투쟁의 영광스러운 혁명전통을 계승한 조선로동당의 혁명적 무장력이다’고 밝히고 있다.

    “인민군은 로동당의 무장력이다”

    이러한 자리 매김을 우리 식으로 옮긴다면,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이 당헌에 ‘국군은 새천년 민주당의 무력이다’라고 명시해 놓은 것과 같다(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용인할 수 없다). 인민군은 로동당에 철저히 예속된 무력이기 때문에 김정일은 한국 언론 앞에서 공공연히 “군대는 가만히 두면 자꾸 주적 개념만 만들려고 하니까, 도로나 철도 공사에 투입해야 한다”는 소리를 내뱉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인민군을 로동당 예하에 두려는 북한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48년 2월8일 북한은 그때까지 ‘인민집단군’으로 불리던 부대를 ‘조선인민군’으로 개칭했다. 때문에 1977년까지 2월8일을 조선인민군 창건일로 기념해왔는데 1978년 김일성이 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해 항일유격대를 조직했다는 1935년 4월25일을 인민군 창건일로 변경해버렸다. 인민군의 근원은 ‘항일유격대’라고 주장을 공식화한 것이다. 이러니 인민군은 로동당의 품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인민군을 혁명적 무장력으로 껴안고 있는 조선로동당의 총비서가 김정일이다. 로동당을 비롯한 공산당 조직은 ‘위원회’를 아주 좋아하는 것이 특징이다. 로동당 규약이 정한 명목상의 로동당 최고 기관은 중앙위원회다. 그러나 위원회는 기본적으로 자유발언과 난상토론을 전제로 한 조직이라, 결정된 사항을 집행하는 능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때문에 위원회를 움직이는 별도 기관을 만드는데, 중앙위원회에서는 비서국이 그 일을 한다. 이러한 비서국의 최선임자가 바로 로동당에서는 서열 1번으로 꼽히는 총비서이다.

    그런데 로동당은 군 문제만은 중앙위원회와 동급인 중앙군사위원회가 전담하고 있다. 중앙군사위원회는 1962년 12월 로동당이, “전인민의 무장화, 전국의 요새화, 전군의 간부화, 전군의 현대화”를 기치로 내건 ‘4대 군사노선’을 주창했을 때, 이 문제를 다룰 중앙위원회 하부 기관으로(당시 이름은 ‘군사위원회’)로 처음 출범했다. 그러다 1982년 11월 이 위원회를 ‘중앙군사위원회’로 개칭하면서 중앙위원회와 동급으로 끌어올렸다.

    로동당 규약 27조는 ‘중앙군사위원회는 당 군사정책 수행방법을 토의 결정하며 인민군을 포함한 전무장력 강화와 군수산업 발전에 관한 사업을 조직·지도하며 우리나라 군대를 지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 때문에 중앙군사위원회는 인민군뿐만 아니라 호위총국(대통령 경호실에 해당) 사회안전성(경찰청) 국가안전보위부(국가정보원) 노농적위대(민방위본부) 교도대(향토예비군) 등 모든 무력 기관을 통합 지휘할 수가 있고 군사력 증강 방안에 대한 결정권도 갖고 있다.

    김일성 생전에 중앙군사위원장은 총비서인 김일성이 겸했고, 위원은 김정일·오진우(吳振宇) 등 17명이었다. 김일성 3년상이 끝난 1997년 10월8일 김정일은 로동당 총비서에 추대됐으나, 어찌된 일인지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는 추대되지 않았다(항간에는 김정일이 효자임을 보이기 위해 중앙군사위원장에 취임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현재 로동당 중앙위원회는 위원장을 공석으로 둔 가운데, 김정일·조명록 등 14명이 위원으로 있다.

    북한에서는 로동당 규약이 최고의 법이지만, 명목상으로는 최고법인 헌법이 있다. 1948년 북한은 ‘인민공화국 헌법’을 제정해 운영해 오다가 1972년 12월27일 ‘사회주의 헌법’으로 바꾸었다.

    사회주의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북한 최고 권력 기관으로 중앙인민위원회를 설치했다는 점이다(로동당의 최고 권력기관은 ‘인민’자가 빠진 ‘중앙위원회’다). 이 중앙인민위원회의 최고 우두머리 자리가 바로 주석이었다.

    이때 중앙인민위원회를 보좌하는 하급 기관으로 창설한 것이 국방위원회다. 1990년 5월 이 국방위원회는 중앙인민위원회와 동급으로 승격했고 김일성 주석이 국방위원장을 겸하게 되었다. 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가 중앙위원회의 하부기관으로 출발했다가 중앙위원회와 동급으로 재편됐듯, 국방위원회도 중앙인민위원회의 하급 기관으로 창설됐다가 동급으로 승격한 것이다.

    강화된 국방위원장

    북한에서 국가 원수는 로동당 총비서와 중앙군사위원장, 국가 주석과 국방위원장, 그리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모자를 함께 쓴다. 김일성은 죽기 전에 이 다섯 개 ‘모자’ 중에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91년 12월24일)과 국방위원장(93년 4월7일) 모자를 아들 김정일에게 물려주었다. 김일성이 죽은 후 김정일은 나머지 세 개 모자 중에서 로동당 총비서 모자를 ‘추대’ 형식으로 쓰게 되었다. 하지만 김정일은 총비서보다도 국방위원장으로 불리는 걸 좋아했다(국방위원장의 임기는 5년이고, 북한의 국회인 최고인민회의에서 형식적으로 선출된다).

    주석제를 도입한 사회주의 헌법은 그 후 두 번 수정(개헌)됐는데, 98년 9월5일 두 번째로 수정된 헌법이 지금의 북한 헌법이다. 두 번째로 수정된 사회주의 헌법의 서문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사상과 영도를 구현한 주체의 사회주의 조국이다’라고 시작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주체적인 국가 건설사상과 국가 건설업적을 법화한 김일성 헌법이다’로 끝나고 있어, ‘김일성 헌법’으로 불린다.

    김일성 헌법을 통해 북한은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으로 모시고 동시에 주석제를 폐지하였다. 김일성 헌법을 채택하면서 대외적으로 북한을 대표하는 원수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金永南·72)이 되었고, 대내적으로는 내각의 총리(洪成南·71)가 북한의 수반이 되었다.

    그리고 북한을 대표한다는 구체적인 문구는 없지만, 국방위원장의 권한을 강화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내각 총리-국방위원장이 북한을 이끄는 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이 3개 보직 중에서 최고 실권석은 김정일이 맡고 있는 국방위원장이다.

    김일성 헌법은 국방위원장의 권한에 대해 ‘국가 주권의 최고 군사지도기관이며 전반적 국방관리 기관이다’(100조) ‘일체의 무력을 지휘하며 국방사업 전반을 지도한다’(102조) ‘중요 군사간부를 임명 또는 해임한다’ ‘나라의 전시상태와 동원령을 선포한다’ ‘국방 부문의 중앙 기관을 내오거나 없앤다’(이상 103조)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국방위원장의 권한을 한층 더 강화한 것으로 국방위원장이 군정권과 군령권 모두를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정일은 김일성 생전에 국방위원장에 취임했기 때문에 굳이 아버지가 맡았던 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국방위원장의 권한을 강화하는 쪽으로 헌법을 수정함으로써, 굳이 로동당의 중앙군사위원장이 되지 않아도 인민군을 비롯한 모든 무력 기관을 지휘할 수 있게 했다. 혹자는 로동당 규약이 김일성 헌법보다 사실상 우위라는 점을 거론해 ‘중앙군사위원회와 국방위원회 사이에 다툼이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란 의문을 품어볼 수도 있다. 그러나 국방위원이 로동당 중앙군사위원을 겸하고 있어 현실적으로 두 기관 사이에 다툼은 일어날 수가 없다.

    軍 최고 실세, 총정치국장

    인민군을 비롯한 북한의 모든 무장 부대를 지휘하는 국방위원회의 멤버 구성은 매우 독특하다. 수석부위원장에 해당하는 1부위원장이 인민군 총정치국장인 조명록(趙明祿·70) 차수이고, 부위원장은 인민무력상인 김일철(金鎰喆·67) 차수와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지낸 리용무(李用茂·77) 차수이다. 인민군 총정치국장은 국군에 비교한다면 국군기무사령관과 전군의 정훈 업무를 총괄하는 국방부 정훈공보관을 합친 것과 비슷하다.

    과거 국군에서도 보안사령관은 대통령을 독대할 수가 있어, 국방부장관보다 실권이 센 적이 있었다. 그러나 보안사가 기무사로 바뀐 후 기무사령관은 국방부장관에게 보고를 하고 있어 국방부장관보다 실권이 셀 수가 없다. 국군에서 정훈공보관의 실권을 거론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북한 국방위원회에서는 총정치국장이 인민무력상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다.

    국방위원의 구성도 재미있다. 6명의 위원 중에서 순수한 인민군은 인민군 총참모장 김영춘(金英春·64) 차수와 김철만(金鐵萬·82) 대장뿐이다. 국방위원에는 우리의 대통령 경호실장에 비교되는 호위사령관 리을설(李乙雪·79) 원수와 경찰청장에 비교되는 사회안정상 백학림(白鶴林·82) 차수, 그리고 문민으로 정무원 총리를 지낸 연형묵(延亨默·69) 자강도 당 책임비서와 전병호(全炳浩·74) 로동당 군수 담당 비서가 포함돼 있는 것이다.

    전병호는 로동당에서 군수분야 담당 비서니 국방위원이 될 수 있다고 쳐도. 연형묵은 순수 민간인인데 왜 국방위원이 된 것일까? 이러한 의문은 연형묵이 과거에 한 일을 살펴보면 풀린다. 연형묵은 85년 정무원에서 ‘금속 및 기계공업 위원장’을 맡기 전부터 북한의 군수 산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군수 전문가이다. 정무원 총리까지 지낸 그가 현재 자강도당 비서로 내려간 것은, 자강도가 북한의 군수산업의 메카이기 때문이다. 계급이나 신분을 따지지 않고 일만 잘하면 데려다 쓰는 것이 북한 정치 체제의 특성인 것이다.

    기무사와 정훈(政訓)을 합친 조직

    국군 장성은 계급정년이나 연령 정년이 있어 퇴직하지만, 인민군 장령들에겐 정년이 없다. 인민군은 장성을 ‘장령’으로, 계급을 ‘군사칭호’로 부르고 있다. 북한에서의 계급은 ‘신분계급(class)’을 의미한다. 인민군 장령들은 군사칭호를 60∼70세가 넘어 죽을 때까지 붙일 수 있기 때문에 김정일과 로동당, 공화국에 대한 충성이 매우 강하다. 리을설과 백학림 국방위원이 그런 경우로, 두 사람은 인민군 출신의 원로들이다. 김정일은 원로를 배려한다는 차원에서 타 보직에 가 있는 두 사람을 국방위원에 임명한 것이다.

    북한을 사실상 지배하는 국방위원회의 제1부위원장이 인민무력상이 아니고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이란 사실은, 총정치국이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총정치국은 국군의 기무사와 정훈 병과를 합쳐놓은 것과 흡사하다고 설명했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총정치국은 인민군 안에 있는 로동당 조직을 총괄하는 조직체이다. 다시 말해서 ‘인민군은 로동당의 군대’라는 대명제를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인민군을 로동당에 꽁꽁 붙들어 매놓고 있는 핵심 주체가 총정치국인 것이다.

    인민군의 모든 교육계획서와 명령서는 군 지휘관과 함께 정치장교의 서명이 있어야 효력을 발휘한다. 때문에 군 지휘관은 작전이나 훈련 계획을 세울 때 미리 정치장교를 찾아가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인민군은 몸뚱이는 하나인데 머리가 둘인 구조다 보니 두 머리가 싸울 때는 몸뚱이에 대한 통제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는 약점이 있다. 그러나 ‘두 머리’ 체제도 나름대로는 전통이고, 또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문제점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적당히 대처해 나가고 있다고 귀순자들은 전한다.

    로동당이 총정치국을 만들면서까지 군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려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군 지휘관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쿠데타를 막는 것을 전문용어로는 對顚覆이라고 한다). 대전복 임무만 확실히 수행하면 군은 언제나 최고 통수권자에게 철저히 복종할 수밖에 없다. 국군에서는 기무사가 대전복 업무를 수행하지만 인민군에서는 당성이 강한 총정치국이 그 일을 담당한다.

    총정치국 라인의 정치간부들은 인민군 장병들에게 그들이 왜 싸워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일도 한다. 주적에 대해 적개심을 갖게 하고 적에게 잡혔을 때는 어떻게 행동하라는 것 등을 가르치는 것이 정치간부들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상식 또 하나를 점검하기로 하자. 남북정상회담 이후 국방부는 “북괴군 대신 북한군으로 부르겠다”고 발표했다. 일부 식자층은 “북한군을 주적으로 하고 있는 지금의 주적 개념을 바꾸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괴뢰군이라는 용어는 인민군도 사용해왔다. 북한의 공식 6·25 전쟁사인 ‘조국해방전쟁사’ 등의 문건을 보면 국군은 모두 ‘남조선 괴뢰군’으로 표기돼 있다. 괴뢰군(傀儡軍)은 남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군’이라는 뜻이니, 북한군이 남조선 괴뢰군을 주적으로 삼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그래서인지 북한군은 미군을 주적으로 삼고 있다. ‘주적’ 미군은 침략군이고, 남조선군은 미군의 조종을 받는 ‘괴뢰군’이라는 것이 북한의 주적관(主敵觀)이다.

    북한이 로동과 대포동(북한에서는 ‘화성5호’와 ‘화성6호’라고 한다) 미사일을 개발해온 것은 남조선 괴뢰군이 아니라 주적 미군을 타격하기 위해서였다. 강성대국론을 외치며 핵 개발에 몰두했던 것도 주적인 미국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논리와 명분을 아주 중요시하는 특징이 있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김정일이 한국 텔레비전 앞에서 “주적”을 운운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주적은 어디까지나 미군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기없는 보위사령부

    그렇다면 인민군은 남조선 괴뢰군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것일까.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과거 미군과 한국군이 팀스피리트훈련을 벌이면 북한은 즉각 준전시상태에 들어갔다. 지금도 한미연합군이 독수리훈련 등을 벌이면 북한은 준전시상태에 버금가는 비상대기에 들어간다.

    그렇다면 한국군이 독자적으로 훈련할 때는 전혀 반응하지 않을까. 천만에 말씀. 한국군이 호국훈련 등 대규모 기동훈련에 들어가면 인민군도 비상대기에 들어간다. 말로는 괴뢰군이지만 주적은 엄연히 국군이라는 현실을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주적과 괴뢰군에 대한 교육을 담당한 것이 총정치국이다 보니, 총정치국은 국군의 정훈(政訓) 병과에 비교할 수도 있다. 국군의 정훈 장교들은 정상회담 후 병사들에게 왜 훈련을 해야 하는지, 주적이 누구인지 가르칠 방법을 찾지 못해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인민군은 논리상 주적이 다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고민이 적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간과하고 국군과 인민군을 똑같은 잣대로 비교하면 자칫 큰 실수를 범할 수 있다.

    인민군은 총정치국과 별도로 ‘보위사령부’(사령관 元應熙 대장)라는 또 하나의 조직을 갖고 있다. 보위사령부는 업무 성격상 국군기무사와 바로 비교할 수 있는 것으로, 대전복 업무와 함께 군내에 침투한 간첩을 잡고(방첩), 군사 기밀이 새나가는 것을 막는 일(보안)을 한다. 총정치국이 양지에서 대전복 업무를 수행한다면, 음지에서 대전복 등의 업무를 하는 곳이 보위사라고 할 수가 있다.

    인민군 보위사령관 원응희(61) 대장은, 중장(국군의 소장) 계급을 달고 인민군 총참모부 보위국장을 할 때인 92년, 소련에 유학한 장교들이 북한 체제에 불만을 품고 쿠데타를 모의한 ‘프룬제 사건’을 적발한 바 있다. 그 바람에 상장을 거치지 않고 일약 대장으로 진급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국군은 장성을 2계급 특진시킬 수 없다(병사일지라도 1계급 특진이 전부다). 총정치국과 보위사를 통한 철저한 통제와, 더불어 파격적인 승진은 김정일만이 할 수 있는 특유의 군부 장악술이다.

    잠시 여담 하나를 하고 지나가자. 인민군은 총정치국과 보위사 중에서 어디를 더 선호할까. 북한 귀순자들은 하나 같이 “인민군 장령(장성)들은 자기 아들을 총정치국에 보내고 싶어하지, 보위사에 보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같은 비밀경찰 업무를 담당해도 총정치국은 ‘자랑스러운 자리’이고 보위사는 남의 뒤를 캐는 ‘비열한 자리’로 인식되고 있다. 총정치국은 군내 어떤 부서보다 인기가 좋다”고 말한다. 남북한 어디에서든 남의 뒤나 캐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나 보다.

    “인민군을 얕보지 말라”

    이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기자는 많은 귀순자를 만났다. 익명을 보장할 테니 인민군 실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자, 공개석상에서는 인민군이 형편없다고 발언해온 그들은 하나같이 인민군의 장점을 나열하며 “인민군을 얕보지 말라”고 경고했다. 협상을 하다가 도저히 안되면벼랑끝 전술까지도 구사하는 것이 북한인데, 쉽게 봐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남북한이 군비를 증강하고 교묘한 작전술을 연구해 온 것은 6·25전쟁을 통해 세게 붙어 보았기 때문이다. 남북 평화통일 협상은 이때 생긴 불신을 풀어나가자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로가 ‘빡빡하게’ 여기고 있는 과도한 군비를 적정 규모로 줄이는 것이 평화통일로 가는 첫 걸음이다.

    이를 위해서는 상대를 정확히 아는 것이 필요하다. 남북정상회담으로 통일의 물꼬가 트였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가장 골치 아픈 문제가 펼쳐졌다는 인식 위에 상대에 대한 연구부터 착수하여야 한다. 조선인민군 연구는 이러한 숙제 중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평화통일은 이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인민군의 독특한 계급 체계]입대하자마자 원수 계급장을 단 김정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공화국 원수’라는 군사칭호를 갖고 있지만 그는 조선인민군에서 소위로 임관한 적이 없다. 1960년 9월, 그러니까 우리 개념으로는 60학번으로 김일성종합대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한 김정일은 64년 봄 ‘사회주의 건설에서 군(郡)의 위치와 역할‘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쓰고 김일성대학을 졸업했다.

    현재 북한은 우리처럼 의무병제이만, 당시는 모병제였다(북한에서는 출세하려면 로동당원이 되어야 하고, 로동당원이 되려면 군대에 가는 것이 가장 빠르기 때문에 모병제일지라도 군 입대율이 매우 높았다). 그러나 김정일은 하루아침에 로동당원이 되었기 때문에 ‘붉은 군대’에 지원하지 않았다.

    64년 6월19일 로동당에 들어간 김정일은 조직지도부 지도원→선전선동부 과장→문화예술부장→조직 및 선전선동 담당 비서 겸 조직지도부장→중앙정치위원회 위원→중앙군사위원회 위원(80년 10월)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74년 2월부터 로동신문 등 북한 언론은 이러한 김정일을 가르켜 ‘당 중앙’으로 호칭했고, 75년 2월부터는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로 불렀다. 83년 5월 북한 언론은 김정일이 정식으로 인민군을 이끌게 되지도 않았는데 ‘최고사령관’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90년 5월 김정일은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되었고, 91년 12월24일에는 ‘준전시 상태’까지는 선포할 수 있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정식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김정일은 ‘군사칭호’가 없었다. 문민이었던 것이다. 김일성의 80회 생일(4월15일)을 이틀 앞둔 92년 4월13일 로동당 중앙위와 중앙군사위, 중앙인민위와 국방위는 김일성 주석을 ‘대원수’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1주일이 지난 4월20일 김정일에게도 ‘원수’ 칭호를 부여하였다. 김정일은 입대하자마자 원수 계급장을 달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3일이 지난 4월23일, 김정일은 인민군 최고사령관 자격으로 인민무력부장 오진우(사망)에게 원수 계급장을 달아주는 등 664명의 장령(장성)에 대해 대대적인 승진인사를 단행했다. 김일성 사후인 95년 10월 김정일은 최광(崔光, 97년 사망)과 호위사령관 리을설(李乙雪·79)에게 원수를 달아주었다.

    이때부터 같은 원수지만 김정일은 ‘공화국의 원수’로 불리고, 김정일을 제외한 3명의 원수 중 유일한 생존자인 리을설은 ‘인민군 원수’로 불리게 되었다(김일성은 영원한 대원수).

    인민군에는 원수가 있는데 왜 국군에는 원수(元帥)가 없는지 의아해 하는 사람이 많다. 국군의 계급 체계를 밝혀놓은 ‘군인사법’은 제3조와 8조 등에서 ‘종신토록 별 다섯 개를 다는 원수를 둘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국군은 건국 후 단 한 번도 원수 계급자를 탄생시키지 않았다.

    원수는 주로 전시에 탄생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들은 계급·연령 정년이 없어진다. 하지만 진급은 자격 요건과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이뤄지므로, 전쟁이 길어질수록 전쟁 지휘부에는 대장 계급자가 ‘버글거릴’ 수밖에 없다.

    이럴 때 대장 중의 한 명(또는 여러 명)을 원수로 진급시켜 최고사령관으로 삼는 것이다. 현재 국군과 미군에 원수가 없다는 것은 두 나라 군대가 비전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거꾸로 인민군에 원수-차수가 많은 것은 북한이 ‘전시국가’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민군의 군사 칭호 중에서 가장 독특한 것이 ‘차수(次帥)’다. 차수는 북한군만이 갖고 있는 계급니다. 현재 인민군에는 조명록·김일철·김영춘 등 13명의 차수가 있다. 인민군 장령들은 정년도 없이 죽을 때까지 군복을 입고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을 진급시키기 위해 차수라는 독특한 계급을 만들고, 원수도 공화국 원수와 인민군 원수로 구분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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