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들어라 수구·냉전세력들아!

진보파의 통박

  • 황태연·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입력2006-08-14 14: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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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남북정상회담과 역사적인 6·15남북공동선언이 있은 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이 역사적 사건은 한국인과 북한주민, 그리고 해외동포 등 나라 안팎의 8000만 겨레를 흥분과 감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고 세계인의 전폭적인 지지를 모아냈다. 이와 함께 민족화해를 향한 김대중대통령의 30년 집념과 리더십에 대한 감탄도 나라 안팎에서 고조되었다.

    냉전세력의 비방과 음모적 뒤틀기

    그러나 정상회담의 흥분이 가라앉은 시점부터 보수를 위장한 극우지식인 중심의 국내 냉전세력은 여론 틈새를 비집고 고개를 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남북정상회담을 김대통령의 공적이 아니라 ‘실책’인 것처럼 몰아가는 어처구니없는 비방과 음모적 뒤틀기(이면합의설, 평화조항의 통일조항 둔갑설, 달러제공설, 북한불변론, 순안비행장-평양간 통치권 공백론, “북측의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에 놀아난 구걸외교”, 심지어 “붉은 포옹” 혐의 등)를 집요하게 퍼뜨렸다. 물론 이 정략적 비방은 대북정책 성공을 위한 합리적 비판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각종 여론조사에 의하면 일반 국민은 변함없이 남북정상회담 성과와 남북화해를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따라서 냉전적 지식층과 정치인들은 한국 인구 가운데 극소수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50여 년 동안 군사정권을 주도하거나 추종하던 냉전세력은 국내의 지식인 구성에서 차지하는 압도적인 비중을 발판으로 학술세미나와 토론대회, 극우매체와 일부 정치세력을 통해 냉전적 곡해와 비방을 확성(擴聲)시키며 국론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민족화해를 수용하지 않는 심리상태는 낡은 냉전적 관점에도 기인하지만 이들의 지극히 정략적인 당파적 이해관계에도 뿌리를 박고 있다. 치유할 수 없는 DJ 적대감으로 이들은 DJ가 성공할수록 더욱 심사가 뒤틀리고, 실패할수록 더욱 신나는 야릇한 ‘심보’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이들의 논조는 종종 DJ에 대한 국민과 세계여론의 평가와 정확히 반대되는 방향을 취한다.

    따라서 이들의 뒤틀기와 정략적 트집잡기는 대부분 논쟁할 가치도, 교정될 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비운의 한국근대사는 이런 당파적 사고방식과 음모적 국론분열 행위가 국익을 좀먹고 민족과 나라를 망치게 한다는 사실을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다.

    남북화해 및 통일정책과 관련된 합리적 논쟁은 정책과 전략을 중심으로 실현가능성이 크고 적은 것을 평가하는 관점에서 진행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또다른 중요한 논쟁점이 있다면 그것은 반세기 동안 지속된 전쟁과 열전형 냉전 과정에 누적된 비극과 상흔, 사무치는 원한과 공포를 어떻게 미래 지향적으로 풀어나가느냐는 것이다.

    냉전·분단의 피해자들 고통 달래줘야

    냉전적 극우지식인들의 교묘한 뒤틀기와 트집잡기에 호응하는 것으로 보이는 20% 안팎의 주민층은 전쟁과 무력도발로 본인과 친족의 희생, 가족해체, 재산손실 및 가난 등 개인적·가족적 비극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람이 다수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주민층과 냉전세력을 구별해야 한다. 이 주민층은 냉전세력의 당파적 의도와 무관한 일반인이기 때문이다.

    피晝개?나는 동족상잔을 겪은 이 주민층의 고통과 상처는 실로 골수에 사무친 것이다. 대북 적개심과 원한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제3자가 미래를 위해 이들에게 ‘이제 잊으라’고 요구하는 것도 심히 경솔한 짓일 것이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이들의 고통을 세심하게 배려하고 정성으로 위로하여 ‘남남화해’의 기반을 다져야 한다.

    우리가 이들을 위해 배려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이라도 만회할 수 있는 소망을 이루도록 돕고 정부 대북정책 방향을 이해하도록 친절히 조언하는 일이다. 이중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전사자유족·전상자·참전용사에 대한 보훈정책을 더욱 철저히 하는 것이다.

    동시에 중요한 것은 이산가족, 북한억류 국군 및 시민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일이다. 남북공동선언은 바로 이 ‘실질적인 해결’의 문을 열었고 후속회담은 이것을 성사시켰다. 남은 문제는 북한을 설득하여 어떻게든 모든 이산가족의 상봉을 이루어내고 자유왕래와 서신교환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키는 것이다. “한 술 밥에 배부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국군포로송환 문제로 조급하게 구는 것은 일을 그르쳐 절망과 그리움에 지친 이산가족들을 더욱 절망시킬 것이다.

    우리가 이 상처입은 주민들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과거의 고통을 느끼고 생각하는 시각을 전환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다시 있어서는 아니 되는’ 그 뼈저린 고통과 비극이 이들의 자식과 손자들에게만큼은 ‘다시 있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냉전세력에 호응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남북화해·협력 중단, 남북대결, 무력충돌, 전쟁 위험을 촉진한다. 자식과 손자들이 그와 같은 고통을 다시 겪을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민족 화해와 평화를 지향하는 것은 이들이 이런 고통을 다시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들이 평화와 번영 속에서 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면, 그 지름길은 대북포용정책을 밀고 나가 한반도 평화체제를 정착시키는 길밖에 없다.

    포용정책은 이러한 간절한 소망을 담아 민족의 숙원을 달성하려는 가장 현실적인 정책이다. 포용정책 및 남북정상회담을 둘러싼 몇 가지 쟁점과 관련해서는 냉전적 비방을 분석적으로 비판하기보다 몇 가지 대안적 전망과 상황분석을 제안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한반도 정치 시대의 개막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본 이념으로 삼는 민주공화국이다. 따라서 대북정책의 이념적 목표와 전망도 민주주의의 확장적 발전의 관점에서 기획되고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원리적으로 특정국가를 뛰어넘는 보편적 세계시민정신과 평화지향성에 기초한 민주주의는 인권, 평화, 세계주의를 민주적 보편가치로 요청한다. 이 ‘보편가치의 한반도화’는 생명권, 귀향권(“모든 인간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다” - 유엔인권협약), 자유왕래, 서신교환 등을 통해 모든 인권을 유린하고 있는 분단조국의 반인도적 무력대치 상황을 해소함으로써 민족구성원들 사이에 인권과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동시에 민주적 보편가치에 입각한 자주적 통일정책은 ‘반외세 자주’가 아니라 동북아 주변국 및 세계의 보편이익과 조화를 추구하는 ‘세계주의적 자주’ 개념을 지향한다.

    이를 구현하려는 대북포용정책은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이질성을 포용하여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킴으로써 민족적 공동발전을 도모하는 정책이다. 이 포용정책의 직접적인 목표는 국가제도적 통일이 아니라 ‘한반도 정치 시대’를 개막하는 것이다.

    포용정책의 최대성과인 남북정상회담과 6·15남북공동선언은 바로 이 역사적인 한반도정치 시대를 개막하였다. 한반도정치 시대는 남북이 ‘반쪽 정치’가 아니라 남북의 공동발전을 위한 ‘전민족적 정치’를 추구하는 시대라는 의미와, 남북이 민족 내부 관계를 자주적으로 발전시켜 동북아 국제관계를 주도적으로 변화, 발전시키는 ‘한반도의 능동적 국제정치’ 시대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대북 포용정책은 북한을 ‘적이면서 동포’라는 이중적 본성을 가진 실체로 보는 관점을 바탕에 깔고 있다. 포용정책은 화해·협력정책을 통해 점진적으로 적대관계를 완화하여 북한의 이중적 본성 가운데 ‘적성(敵性; enemy character)’을 약화시켜 나가는 방향을 취하고 있다.

    이 ‘북한의 이중적 본성’ 때문에 남북 협력과 교류에 따른 상호주의의 새로운 이해가 요청되는 것이다. 본래 엄격한 상호주의는 “줄 것을 주고, 이에 대한 등가적 대가로 받을 것은 받는 것”이다. 이 엄격한 상호주의는 외국이나 적국과의 교류에서 적용된다.

    만약 북한이 단지 ‘적국’일 뿐이라면 대북교섭은 엄격한 상호주의에 입각하는 것이 옳다. 이것은 남북한의 냉전세력이 채택하고 있는 상호주의다. 반대로 경제난에 처한 북한이 순수히 ‘동포’이기만 하다면, 북한보다 잘 사는 남한은 상호주의적 이익타산을 떠나 북한을 아낌없이 지원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보통 남한내의 감상적 통일론자들이 취하는 또 다른 극단적 태도다. 그러나 이중적 속성의 북한에 대해 한 극단으로만 치우친 정책을 펴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양극단에 대한 중용적 입장은 바로 탄력적 상호주의다. 이 상호주의의 ‘탄력성’ 내지 ‘신축성’은 (1)제공하는 양(量)보다 더 적은 또는 더 많은 양을 되돌려 받을 수도 있는 비등가성 (2)주는 시점보다 늦게 되돌려 받을 수도 있는 비동시성 (3)주는 것과는 다른 성질의 것, 즉 경제적 이익을 주고 이산가족상봉 또는 화해나 평화를 받을 수도 있는 비대칭성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자”는 엄격한 상호주의를 주장하며 탄력적 상호주의를 ‘저자세 외교’로 비방하는 것은 북한의 이중적 속성을 고려치 않은, 시대착오적 냉전세력의 주장을 무분별하게 대변한 정치공세다.

    탄력적 상호주의만이 남북 화해와 교류협력을 확대시켜 민족내부 특수관계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북한의 적성(敵性)이 약화되고 상호주의의 탄력성이 더욱 커진다면, 마침내 ‘아낌없이 서로 돕는’ 사실상의 통일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상승 메커니즘의 발전은 여러 단계를 거쳐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평화통일로 귀착될 것이다.

    ‘한반도정치’의 개막을 통해 가시권(可視圈)에 들어온 평화통일은 적어도 20~30년 동안 여러 단계를 거쳐 달성될 것이지만, 크게 보아 ‘민족통일’과 ‘국가통일’의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민족통일은 교류·협력의 점진적 확대를 통해 화해와 평화가 정착하고 민족내부의 자유 왕래와 교류·협력이 제도적으로 완전히 보장된 단계, 정부가 말하는 ‘사실상의 통일’ 단계를 가리킨다. 이전 정부에서 확정된 남북연합(confederation) 방안은 이 민족통일의 완성 상태일 것이다.

    이 상태는 ‘국가통일’로 들어가는 시발점이 된다. 포용정책은 일단 ‘국가통일’을 뒤로 미루고 바로 이 ‘사실상의 통일’, 즉 ‘민족통일’의 달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국가통일’은 남북연합을 시발점으로 ‘연방국가’의 중간 단계를 거쳐 완전한 통일을 이루는 전 과정을 가리킨다.

    이 통일국가의 체제 성격은 세계사의 흐름, 중국의 이데올로기적 변화, 남북한의 국력 격차 및 북한의 ‘현대화’ 정책 등을 감안할 때 역사 필연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귀착될 것이다. 따라서 국가통일은 암묵적으로 북한이 ‘현대화’를 통해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접근하는 변화를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단계에서는 헌법에 명시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입각한 통일’이라는 말을 삼키는 것이 통일 전략 면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입각한 통일’을 촉진한다.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통일’은 실은 흡수통일이기 때문에 이 말을 자꾸 쏟아내면 북한은 정치적으로 긴장하여 지금 진행중인 남북 협력조차도 더 확대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입각한 통일’을 외치는 냉전세력은 결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입각한 통일’을 달성할 수 없다.

    지금 중요한 것은 북한이 스스로 변화해 나갈 수 있는 분위기와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다.

    “대북 구걸 외교를 하지 말고 대북 협상 과정에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입각한 통일을 떳떳이 주장하라”는 냉전 세력의 요구는 전략적 우매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이번 남북공동선언문이 통일상태의 체제성격을 모호하게 방치하고 있다는 트집도 같은 수준의 것이다.

    냉전적 대북정책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남북의 국력 격차를 크게 벌려 북한을 압박, 붕괴시키는 흡수통일의 기조에 서 있었다. 그러나 탈냉전과 긴장 완화 속에서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려는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이 남북 격차 확대 전략을 고수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문제를 초래할 것이다.

    남북한간의 교류·왕래 폭과 기회가 확대돼 가면 필경 현재 수준의 남북격차를 방치하는 것조차 큰 부조리를 야기한다. 나중의 통일비용도 비용이려니와 현격한 남북격차로 치러야 할 남북한의 사회비용도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북한내 냉전세력의 남한내정 간섭

    가령 10만 명 정도의 탈북자만 남한으로 유입되어도 남한의 초보적 복지체제는 붕괴되고 말 것이다. 북한도 남한의 각종 사이비종교 및 범죄집단의 유입으로 몸살을 앓을 것이다. 이럴 경우 남북한은 통일을 추구하면서 되레 철조망을 더 겹겹으로 둘러쳐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한다.

    이런 이유에서 남북격차를 벌리거나 방치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통일에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당면한 민족화해도 해칠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정치 시대’는 남북 격차 확대 또는 방치에서 남북격차 완화로 나아가는 근본적 전략수정을 요구한다.

    따라서 대북 포용정책은 교류 협력과 통일 과정의 원활한 진전과 사회적 비용 절감을 위해 남북격차를 줄이고 한반도에서 민족의 공동발전을 추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을 수 없다. 이번 남북공동선언의 “민족경제의 균형발전” 조항은 이런 전략적 의지를 담은 것이다.

    우리는 이 남북 공동 발전 과정에 북측 냉전세력이 저지를 수 있는 실책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가령 북한의 국영매체나 사회단체를 위장한 대남공작기구의 강경세력들이 남한 야당의 주장이나 특정신문의 논조를 비판하는 것은 실은 북한의 국가기관이 남측의 ‘내부문제’를 간섭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 ‘내부문제 불간섭’ 조항에 위배되는 것이고 남북정상회담 및 의 기본정신과 배치되는 것이다. 야당과 언론이 정부·여당과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것은 한국의 기본질서에 속한다. 따라서 북측의 당 및 정부기구만이 아니라 당이나 정부가 운영하는 매체와 대중조직이 야당과 언론의 논리를 공격하거나 국내의 대북정책 논쟁에 개입하는 것은 바로 ‘내부문제간섭’에 해당한다.

    한국정부의 기본 입장은 북측 냉전세력들의 이런 실책을 공식적으로 지적하고 시정하는 것이다. “남한의 특정 정파나 매체의 북한비판에 대해 국영매체와 당기관지를 통하는 것 외에 달리 대응할 수 없다”는 북측의 불만은 어디까지나 북한체제의 옹색한 특이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만약 북한에 정부와 당도 비판할 수 있는 정당과 언론이 존재한다면, 이들이 남한 야당과 특정매체의 논조를 공격하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무장평화와 영구평화

    탄력적 상호주의에 기초한 남북교류의 확대와 남북공동발전을 정치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한반도의 평화다. 한반도 평화정착의 출발점은 일단 남한의 튼튼한 안보체제와 국방력이다. 남한의 강력한 안보체제는 북한이 무력도발과 전쟁을 포기하고 평화적 해결책으로 나아가도록 유도하는 기본적 강제력이다. 튼튼한 안보체제는 따라서 대북 포용정책의 전제다. 이것은 일종의 ‘무장평화’를 보장한다.

    그러나 이 무장평화를 뛰어넘는 ‘영구평화’를 창설하고 정착하는 관점에서는 두 가지 유형의 평화를 구별해야 한다. 첫째의 평화는 휴전협정을 위반하여 벌어지는 무력도발을 종식하는 것이다. 무력도발의 완전한 종식은 사실상의 영구평화다. 또 다른 의미의 평화는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법적 영구평화다.

    이 평화는 둘다 정치·군사적 화해의 진전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 전자, 즉 사실상의 평화는 ‘군사행동 무력사용 중지’ 및 ‘긴장완화’라는 말로 에 다 명시된 것이므로 남북이 당사자로서 합의서를 실천에 옮기기만 하면 해결할 수 있다.

    이에 반해 후자의 영구평화는 휴전협정 당사자들(북한, 미국, 중국)과 남한을 포함한 다자간 평화협정 체결에 의해서만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남북공동선언에서 ‘평화’ 조항이 빠졌다고 비난하는 것은 남북한 문제의 다차원성과 국제법적 사실관계를 무시한 당파적 트집이다.

    남북한 상호간의 적성 및 북한주적론의 완화와 해소도 이 두 가지 평화상태의 달성과정과 연계해 진행해야 한다. 물론 사실상의 평화가 정착하더라도 아직 평화협정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한 상황에 군사적 주적 개념 철폐는 시기상조일 것이다.

    따라서 이런 과도기 상황에는 사실상 의미를 잃은 주적 개념을 형식적으로 존속하되 가령 일본식의 ‘잠재적 위협’ 개념으로 변형시켜 ‘주적 개념’의 해소를 준비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한반도정치 시대에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어느 때보다 더 큰 역사적 용기와 새로운 상상력이다. 막 개막된 ‘한반도정치’를 더욱 발전시키고 통일을 실질적으로 추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 냉전적 고정관념이라는 ‘걸림돌’을 제거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전적 고정관념만이 아니라 지정학적 고정관념도 통일을 향한 역사적 용기와 상상력을 결정적으로 제약하는 ‘걸림돌’이다. 이른바 중국·러시아의 대륙세력과 미국·일본의 해양세력 간의 ‘험악한’ 갈등구조 속에서 통일은 지극히 어려운 일일 것이라는 비관적 관점이 그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종종 남북통일을 한반도 ‘전체’가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중 어느 한 쪽에 ‘몽땅’ 편입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이 지정학적 이분법은 우리의 주체적 힘을 유난히 왜소화한다. 게다가 어느 한 세력을 반도에서 추방하는 과정에 안팎으로 격렬한 갈등을 치러야 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에서 “차라리 분단되어 사는 것이 낫겠다”는 식의 자포자기에 빠져든다.

    그러나 러시아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이미 완전히 변했고 중국 또한 급속히 변해가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간 이데올로기적 갈등 가능성은 점차 완화될 것이라는 점이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

    체제이데올로기적 갈등이 약화되더라도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간의 정치군사적 이익 갈등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향후 20년 동안 대륙세력이 해양세력의 군사력에 필적할 만한 군사강국으로 올라서거나 독자적인 경제권과 지식·정보·문화·기술적 영향권을 형성할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

    조셉 나이(Joseph Nye jr.)교수에 의하면 현재의 국제관계는 복잡한 3차원적 세력장(勢力場)으로 짜여 있다. 군사적 ‘하드 파워(hard power)’ 게임 판인 상위 세력장은 미국 중심의 단극(單極) 체제다. 중간 세력장은 경제력, 정치문화적 영향력 등 ‘소프트 파워(soft power)’ 중심의 게임 판으로 미국, 유럽, 일본의 3극 체제로 짜여 있다.

    하위 세력장은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국경을 넘나드는 금융자본 등 다양한 초국가적 세력의 각축장이다. 이곳에서는 어떤 국가도 지배적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바로 중간 세력장과 하위 세력장에서 자국의 상대적 지위를 보강하기 위해 미국은 1994년 미일 동맹관계를 재정립하였다. 중장기적으로 미국은 미·일 및 미국·유럽 동맹관계와 첨단을 달리는 정보혁명을 바탕으로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 양면에서 변함없이 세계 최강국가로 남을 것이다.

    따라서 미일(美日)의 해양세력은 동북아에서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를 불문하고 대륙세력을 압도할 것이다. 대륙세력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하드 파워’ 면에서 열세일 뿐만 아니라 ‘소프트 파워’ 면에서도 해양세력을 추종하는 처지를 면치 못할 것이다.

    특히 양대세력 간의 ‘디지털 격차’는 해가 갈수록 더 벌어질 것이다. 게다가 중국과 러시아의 방대한 인구와 영토는 지식·정보혁명 시대에 국력의 구성요소라는 의미를 점차 잃고 오히려 불균등발전과 지역분열을 야기하는 ‘부담’으로 전도될 것이다. 따라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관계는 대등한 갈등관계가 아니라 해양세력에 대한 대륙세력의 의존관계에 의해 지배될 것으로 관측된다.

    반도세력의 성장과 미군의 역할

    나아가 한반도정치 시대에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외에 독자적인 ‘반도세력’의 성장에도 주목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반도세력은 약화되면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에 번갈아 침략당하고 분점되어 사분오열 상황에 처한다. 반면 힘을 얻으면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천혜의 지정학적 이점을 활용, 강대한 국가를 건설하게 된다.

    약화된 반도세력의 비극적 운명은 고대로마 이래 1000여 년 동안 사분오열되었던 이탈리아의 중세사와 비운의 한국근대사가 증언한다. 반대로 강력한 반도세력의 좋은 사례는 서양세계를 제패한 고대 로마, 극동을 제패한 고구려, 고려, 조선 등이다. 우리는 지금 다시 ‘강력한 반도세력’으로 발돋움하는 단계에 와 있다.

    한반도는 해양세력의 선진적 경제력과 지식·정보·문화·기술을 대륙에 전달하는 교통과 통상의 요충지라는 이점이 있다. 동시에 독자적인 경제력과 지식·정보·문화창조력을 가진 ‘강력한 반도세력’으로 성장하여 해양과 대륙의 양방향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 곧 완공될 영종도국제공항과 경의선 복구를 통해 개설될 ‘철의 실크로드’는 한반도 전체가 ‘신(新)통상국가’로 발돋움하는 기반시설이 되어 줄 것이다.

    여기에 선진국에 뒤지지 않는 한국의 정보통신산업과 문화산업의 잠재력은 영토와 인구의 크기가 힘을 잃는 21세기에 한국이 독자적으로도 ‘지식정보강국’이 될 수 있는 전망을 제공한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은 양대세력에 교통과 통상의 이익을 주고, 해양으로부터 대륙세력에 지속적으로 앞선 문화·기술적 영향력을 중개하거나 자기 안으로부터 내뿜을 수도 있다.

    대륙세력이 한반도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남북한이 대립과 분단을 청산, 통일을 달성하여 남한의 지식·정보와 물자가 원활히 북상(北上)할 수 있을 때 극대화될 것이다. 따라서 대륙세력은 한반도 통일국가의 출현을 해양세력의 북진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해양세력을 완충하고 대륙세력에 이익을 주는 ‘독자적인 반도세력’의 부상으로 간주할 수 있다.

    한편 통일 이후 미군의 계속 주둔은 통일한국에 위해(危害)를 주는 동북아의 군비경쟁을 막고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대륙세력도 미군의 계속주둔을 바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미군이 철수한다면 일본이 재무장하여 동북아에서 미증유의 군비경쟁이 벌어질 위험이 매우 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반도 미군은 앞으로도 일본의 재무장에 대한 억제 요소로 존재 가치를 가질 것이다.

    물론 통일 이후 미군 주둔 조건은 서독의 미 주둔군이 독일 통일 이후 동진(東進)하지 않았듯이, 북진하지 않고 현재 위치를 고수하는 것이다. 가령 군비 통제의 일환으로 남북 양측이 통일 이전에 이미-가량 휴전선 100km 밖으로 군대를 철군한 상태라면, 통일 시점에 미군은 현재 위치보다 100km 이상 남하해 있을 수도 있다. 나아가 미군이 통일에 발맞춰 병력 구성을 해군·공군력 중심으로 개편하면 더욱 부담 없는 존재로 변할 것이다.

    역사적 용기와 새로운 상상력 필요한 때

    전언에 의하면 해양세력도 강력한 통일한국의 등장을 동북아의 중요한 세력균형 요소로 간주한다. 대륙세력의 남진을 완충할 수 있는 반도세력의 성장은 대륙세력에 대한 해양세력의 견제 노력과 군사·정치적 비용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강력한 반도세력의 통일국가는 양대세력의 어느 한쪽으로 편입되지 않으면서 양대 세력을 완충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이 통일국가는 양대 세력을 둘 다 우호 세력으로 삼고 오히려 양대 세력 간의 갈등을 완화하여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할 것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좀더 대등한 한미동맹, 더욱 튼튼한 한일우호 및 한미일 협조관계와 더욱 긴밀한 한중·한러 우호친선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가 강력한 반도세력으로 성장하여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보편가치 확산과 일치하는 역사적 진운(進運)이기도 할 것이다. 근거 없이 우울한 전망을 낳는 이른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양분법적 고정관념은 21세기의 지식·정보혁명에 따른 역학관계 변화를 무시하고 독자적인 반도세력 형성과 발전을 도외시하는 점에서 그릇된 것이다. 이런 고정관념을 해체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더욱 큰 용기와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 새로운 역사적 용기와 상상력은 바로 남북화해의 ‘디딤돌’이다. 반대로 오늘날 최대의 ‘걸림돌’은 복고적·당파적 냉전 관점에서 사사건건 국론분열을 부채질하고 남북화해를 가로막는 것이며, 또 구태의연한 지정학적 이분법 시각에서 남북정상회담으로 더욱 전망이 밝아진 남북통일을 반대로 암울하게 색칠하는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으로 인해 국민의 대북관이 흔들리고 있다”고 외치며 남북화해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냉전적 언동이나 강력한 반도세력의 성장가능성을 소거한 그릇된 지정학적 고정관념을 자꾸 퍼뜨리는 것은, 이 순간에 운명을 다할지도 모를 1000만 이산가족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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