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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박정희기념관 파문

“화해하려면 DJ 혼자 하라”

박정희 기념관을 반대하는 사람들

  • 조성식mairso2@donga.com

“화해하려면 DJ 혼자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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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들은 성명을 통해 “현재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사회 모순의 대부분이 박정희 시대에 이뤄졌으며, 경제성장을 내세우며 그가 자행했던 인권탄압은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전국역사학자모임은 전국의 대학교수, 강사 및 연구원, 대학원생, 중·고교 교사 등 역사 연구자 1100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11월25일엔 71개 단체가 연합한 ‘박정희 기념관 국고지원을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 연석회의’가 출범했다.

그러나 정부 방침은 바뀌지 않았다. 국회는 정부가 제출한 박정희 기념관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해가 바뀐 후 한동안 잠잠하던 박정희 기념관 논란이 다시 불거진 것은 7월20일 이후. 전날 정부가 2002년 월드컵이 열리는 서울 상암동에 5000∼7000평의 박정희 기념관을 짓기로 확정한 것이 촉발제가 됐다.

동아일보와 한겨레신문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의 국고지원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선 가운데 한국기독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 성명(7.21),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대구·경북지역 40개 시민단체의 국회 및 청와대 앞 항의시위(7.31), 민교협(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학단협(학술단체협의회) 소속 교수들의 기자회견 및 서명운동(8.3) 등이 이어졌다.

이런 움직임은 마침내 9월28일 ‘박정희 기념관 반대 국민연대’(이하 국민연대)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국민연대엔 경실련 참여연대 환경연합 녹색연합 등 이른바 빅4 시민단체를 비롯해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전교조, 민족문학작가회의, 4월혁명회, 민족문제연구소, 민주노총, 민언련(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전국역사학자모임 등 모두 247개의 사회·시민단체가 참여했다.

국민연대는 정관 제정과 함께 고문단 공동대표단 상임집행위원장단 등을 구성, 모양새를 갖췄다. 국민연대는 이날 결성선언문을 통해 “박정희 기념관 건립 추진은 민족사를 유린하는 범죄행위”라고 규정하는 한편 김대중 대통령에게 박정희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명예회장직을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10월17일엔 전국 대학교수 649명이 10월유신 선포 28돌을 맞아 박정희 기념관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한편 국민연대는 박정희 사망 21주기인 10월26일 오전 덕수궁 앞에서 회원 5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기념관 건립에 반대하는 항의집회를 열었다.

11월5일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4개 단체 회원들이 서울 문래동에 있는 박정희 기념탑에서 흉상을 끌어내린 것은 박정희 기념관 반대운동의 첫 ‘실력행사’였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991년 반민족문제연구소라는 간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가 1995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는데, 그간 주로 친일파들의 행적을 고발하는 책을 펴내는 한편 그와 관련된 각종 시위와 집회를 주도해왔다.

11월9일 서울 청량리동에 있는 민족문제연구소는 몹시 분주해 보였다. 전화벨이 쉴 새 없이 울려대는 가운데 직원들은 관련단체들의 지지성명을 챙기는 한편 이번 사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느라 정신이 없는 듯싶었다. 기자와 마주 앉은 서우영 기획실장(36)은 박정희 기념관 국고 지원에 대해 “김대중 정부의 천박한 역사의식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 “영남권 지지표를 얻으려는 단세포적 정략”이라고 비난했다.

이날 밤 10시께 방학진 조직부장(29)과 홍익대민주동문회 사무국장 이중기씨(35)가 경찰에서 풀려났다. 철거현장에서 성명서를 낭독했던 곽태영 4월혁명회 대표(64·국민연대 상임공동대표)는 하루 전인 8일 귀가조치됐다. 이제 경찰서에 남은 사람은 김용삼 운영위원장뿐이다.

다음날 오전 방학진씨와 통화했다. 방씨는 “문래동의 흉상은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한 기념비가 아닌, 쿠데타 찬양 기념비이므로 그것을 철거하는 것에 국민이 공감하리라 생각했다. 정통성을 갖춘 정부라면 당연히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노숙자와 실직자들이 박정희 흉상 앞에 술을 올리는 것을 본 적 있다”며 “이런 퇴행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정부가 막지는 못할지언정 오히려 기념관 건립을 추진함으로써 국민의 가치관을 혼란케 하고 있다”고 정부를 비난했다.





국가테러리즘의 시대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대한 논란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 곧 박정희의 공과에 대한 시시비비다. 반대론자들은 대체로 박정희는 기념관을 세워 기릴 만한 업적이 없으며, 오히려 역사적 과오가 크다고 주장한다. 논쟁의 또다른 초점은 국고 지원의 타당성 여부. 기념관 자체를 반대하기보다는 국민의 세금으로, 곧 정부 지원으로 기념관을 세우는 데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박정희 찬양론자 또는 추종자들이 사비를 들여 박정희의 고향에 기념관을 세우는 것은 반대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박정희의 과오 중 가장 보편적으로 거론되는 것은 민주주의 억압과 인권 탄압이다. 박정희가 집권한 기간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2년을 포함하면 총 18년에 이른다. 1963년 군복을 벗고 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박정희는 1979년 사망 당시 9대 대통령이었다. 장기집권의 포석이 된 것은 1969년의 3선개헌이다. 당시 여당인 공화당 내에서도 반대가 많았던 이 불법개헌을 성사시킨 1등 공신은 공작정치의 산실로 불리던 중앙정보부였다. 그러나 이는 독재의 서곡에 지나지 않았다. 1972년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제정, 영구집권의 길을 닦았다. 이른바 총통시대의 출현이었다.

박정희 절대권력을 뒷받침한 것은 공포정치와 공작정치였다. 국가테러리즘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부르짖는 수많은 정치인 종교인 법조인 언론인 교수 학생 문인 노동자들이 고문을 당하거나 옥에 갇히거나 의문사했다. 정적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과 탄압도 빼놓을 수 없다. 박정희를 비판하는 야당 의원들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과 구타를 당하는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었다.

1971년 7대 대통령선거에서 95만 표 차이로 선전해 박정희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김대중 신민당 의원은 일본 동경에서 괴한들에 납치 당해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다. 중앙정보부의 공작이었다. 1979년엔 야당 총재인 김영삼 의원이 국회에서 제명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미국 언론과 인터뷰하며 박정희 체제를 비판한 것을 문제삼아서였다. 이 일은 부산·마산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만약 박정희가 김재규 손에 죽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역사적 가정이다. 김재규의 법정진술에 따르면 박정희는 죽기 8일 전인 1979년 10월18일 “부마사태가 전국적인 민중봉기로 확산될 조짐이 있다”는 김재규의 보고를 받고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서울에서 4·19와 같은 데모가 일어난다면 내가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김재규는 이때 박정희의 심복인 차지철 경호실장이 “캄보디아에서 300만 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가 100만이나 200만 명 정도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 문제냐”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소름이 끼쳤다고 진술했다. 이를 근거로 학계 일부에선 “만약 박정희가 김재규 손에 죽지 않았다면 부산이나 마산에서 1980년 5월의 광주학살처럼 대규모 학살극이 벌어졌을지 모른다”는 주장마저 제기하고 있다.



계엄령, 위수령, 긴급조치

18년 동안 집권하면서 박정희는 계엄령을 세 차례(31개월) 발동했다. 군대가 주요 시설물을 점거해 경비하는 위수령과 각종 비상조치를 포함하면 총 105개월 동안 ‘비정상적’ 통치를 했다(한국정치연구회, ‘박정희를 넘어서’, 도서출판 푸른숲, 1998). 이는 그의 통치기간인 220개월의 약 절반에 달하는 기간이다. 1974년 1호로 시작해 1979년 9호까지 이어진 긴급조치는 체제비판을 원천봉쇄하는 초헌법적인 명령이었다.

긴급조치 위반자는 영장도 없이 체포돼 비상군법회의에서 처벌받았다. 한성대 사학과 윤성로 교수의 ‘박정희 정권의 인권 탄압과 그 부정적 유산’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1970∼1979년까지 10년 동안 국가보안법 반공법 노동법 긴급조치 등을 위반한 죄로 구속된 양심수는 총 2704명(그중 1184명은 구류)에 이른다.

한국의 파시스트 논리를 비판한 책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의 저자로 유명한 진중권씨(36)는 박정희를 파시스트로 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진씨는 지난 11월7일 민언련 강당에서 열린 ‘박정희와 조선일보’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유신 이후 한국 정치는 파시스트 체제였으며 이는 히틀러가 비상대권을 휘두른 독일의 나치즘, 반미·반공주의를 내세운 일본의 신우익과 맥락이 닿아 있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기념관 반대론자들은 박정희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되는 경제발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한마디로 개발독재의 폐해다. 개발독재가 낳은 경제성장보다는 그 폐해가 한국 경제에 끼친 악영향에 더 주목하는 것이다. 정경유착, 관치금융, 경제력의 지역격차, 소득분배 불균형 등을 대표적 후유증으로 본다. 또한 가시적인 성과와 실적 위주의 성장제일주의에 따른 구조적 모순이 한국 경제의 기반을 취약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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