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호

명분은 방만 경영 속셈은 라이벌 견제

  • 안기석 daum@donga.com

    입력2005-05-10 16: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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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7일 목요일 밤 11시. 문화방송 ‘목요 100분 토론’ 사회자 유시민씨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기초자치단체장 임명제안) 발의에 서명한 의원들이 토론에 참석도록 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대부분 국회의원들이 ‘내용을 잘 모르고 서명했다’ ‘자의반 타의반 서명했다’며 토론 참여를 거절했습니다. 심지어 토론 참여를 응락했던 국회의원조차 당지도부의 강한 압력을 이유로 약속을 파기했습니다. 자기 손으로 법안을 발의해놓고도 공개토론에 나오려고 하지 않는 국회의원들의 줏대없고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 매우 강력하게 유감을 표합니다.”

    신문이나 방송에 나설 기회만 있으면 나서기 좋아하는 정치인들이 전국의 수많은 시청자들이 지켜보는 텔레비전 토론을 기피한 이유는 무엇일까. 행정부도 아닌 국회에서 지방자치제의 발전과 역행하는 입법을 한다는 것이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이번 법안을 발의한 대표 의원인 임인배 한나라당 의원은 의원들이 토론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발의에 서명한 여야 의원들이 모두 안 나가기로 결의했어요. 조용히 처리하면 될 일인데 공개적인 토론 자리에 나갈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임의원은 현행 지방자치제의 폐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의원들은 이 개정안에 찬성하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국회 사우나에서 의원들을 만나면 모두 잘했다고 격려해줍니다. 여당 의원들도 당론 때문에 서명에 많이 참여하지 못했지 여야 총재가 묵인만 한다면 이 법안은 통과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난개발로 인한 환경 파괴, 러브호텔의 난립, 방만한 재정 운용 등으로 지방자치단체들이 시민이나 시민단체들로부터 비난을 받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지방 분권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으로 실시된 지방자치제 자체를 폐지하자고 공공연하게 주장한 경우는 없었다.

    지방자치제 존폐 문제가 불거진 것은 지난 11월13일 정기국회 대정부 질문 때 임인배 한나라당 의원이 기초자치단체장을 선출직에서 임명직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 데서 비롯됐다.

    임의원은 대정부 질문에서 현행 지방자치 단계를 3단계에서 2단계로 줄이는 행정개혁이 필요한데 이 문제는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기 때문에 장기적인 연구과제로 남겨두고 기초자치단체장을 임명직으로 바꾸는 것이 시급하다고 발언했다. 임의원은 현행 지방자치제도의 문제점으로 차기선거만 의식한 선심성 전시성 사업의 남발, 방만한 운영으로 인한 지자체 재정난의 가중화, 지방 재정의 확대를 위해 각종 건축허가를 남발함으로써 발생한 난개발, 차기 선거 준비로 인한 행정공백과 인사권의 전횡, 지역이기주의와 기초자치단체장의 제왕적 자세로 인한 종합행정의 어려움 등을 열거했다. 이런 문제점들은 기초자치단체장을 임명직으로 바꿔야 해결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임의원은 대정부 질문 후 자신이 속한 상임위인 건설교통위원회의 여야 의원들과 한나라당 소속 대구 경북지역 의원들 42명의 서명을 받아 임명제를 골자로 하는 지방자치법 개정법률안을 11월29일 발의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전국 시장 군수 구청장 협의회 공동회장단 회의에서는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 국회의장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임명제 법안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한편, 임명제를 골자로 한 지방자치법 개정안 철회와 여야 3당이 공식적인 당론을 표명할 것을 촉구했다.

    한국 YMCA 등 시민단체에서도 기초단체장 임명제 전환 시도에 대한 반박 성명을 냈다.

    전국 시장 군수 구청장 협의회는 12월2일에는 여론조사 기관에 의뢰해 전국 15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여론 조사 대상자의 절대 다수(88.3%)가 시장 군수 구청장 직접 선출 방식을 선호했다. 이런 여론에 힘입은 전국 시장 군수 구청장 협의회는 재차 개정안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한 뒤 여야 3당 총재 및 대표를 방문했다.

    그 결과 새천년민주당은 박병석 대변인을 통해 “현행 제도를 유지하는 것이 당의 입장”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개정안 발의에 서명한 42명 중 30여명이 소속되어 있는 한나라당과 자민련은 당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한나라당 서명 의원 중에는 하순봉 의원 등 이총재의 측근으로 알려진 의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총재도 임명제직 전환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방문했던 이재용 대구 남구청장의 말이다.

    “서명 의원 중에는 한나라당 의원이 가장 많았고 이총재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의원들도 있었기 때문에 이총재가 임명제직 전환에 동의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습니다. 이총재는 의원들 각자가 입법기관이기 때문에 서명하거나 발의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했지만 당론이 서 있다면 당총재로서 충분히 조정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들이 이총재를 방문한 다음날 임인배 의원을 만난 이총재는 “어제 구청장들이 찾아와 항의하는 바람에 애먹었다”며 고충을 토로했다고 한다.

    지자체의 폐해사례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지 5년 만에 민주주의의 전당인 의회에서 기초자치단체장의 임명제를 주장하는 법안이 발의된 것은 아이러니다.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42명의 의원이 개정안 발의에 서명한 배경에는 최근 부각된 고양시 일산의 러브호텔 난립과 엄청난 국고를 축낸 하남시 환경박람회, 용인시의 무차별적인 난개발 등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감사원이 2000년 4월부터 6월까지 행자부와 16개 시도, 40개 기초자치단체를 상대로 실시한 지방재정운영실태 특감 결과, 지자체들의 지방채 규모가 94년 말 10조3154억원에서 99년 말 현재 18조190억원으로 75%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자체들이 출자해 설립한 전국 252개 지방공기업도 방만한 경영으로 99년 말 현재 부채 규모가 20조4813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여기에는 지자체 실시 전에 설립된 공기업의 부채도 포함돼 있다.

    지방자치체들이 벌이는 각종 축제도 비판의 도마에 올라 있다. 전국 232개 지자체의 축제는 모두 600여 건으로 지자체 당 평균 3개꼴이다. 이중 하남시의 ‘국제환경박람회’는 낭비가 심해 시민단체로부터 정부보조금 지급결정을 무효화해달라는 소송을 받기도 했다. 하남시는 환경박람회의 총지출액 211억여원 중 88%인 186억여원을 국고에서 지원받았다.

    시민단체인 ‘함께하는 시민행동’은 최악의 선심성 예산 배정과 어처구니 없는 예산낭비 사례를 선정해 매달 ‘밑빠진 독상’을 선정하는데 하남시가 제1회 수상자로 결정된 바 있다.

    이외에도 서울시는 90억원을 들여 ‘미디어시티 서울 2000’을 개최했지만 수입금은 19억원에 불과했고, 인천시도 18억원의 예산을 들여 개최한 ‘인천 세계 춤 축제’ 도 6억원밖에 회수하지 못했다.

    지방자치단체들이 경쟁하듯이 신청사를 짓는 것도 국고를 낭비하고 재정난을 가중시키는 것으로 지적된다. 경실련은 99년 최악의 예산낭비 10가지 사례 중 대전시 신청사를 3위로 발표한 바 있다. 이 청사는 95년 3월 착공해서 99년 11월에 완공된 최첨단 인텔리전트 빌딩으로 1414억원이 들었다. 지하 2층 지상 21층 연면적 2만6380평으로 전국 지자체 청사 중 최대 규모로 꼽힌다. 부산지역 16개 기초자치단체 중 재정자립도가 최하위인 강서구는 연간 지방세 수입 430억원의 65%가 넘는 예산을 들여 대형청사를 지어 지역 시민단체들의 빈축을 샀다. 공사비 중 81억원은 지방채를 발행해 마련했다. 재정자립도가 20.4%인 전북 김제시는 142억여원을 들여 통합시청사를 짓고 있다. 재원 확보 계획도 없이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하다가 공사가 중단된 경우도 있다. 대전 서구청의 경우 97년, 98년 2년간 청사 신축과 실내빙상장-다목적체육관-용문종합사회복지관 건립 등 총규모 800억원에 달하는 ‘4대 대형사업’을 잇달아 발주했다가 재원고갈로 공사가 중단된 상태다.

    방만한 재정운영으로 전국의 지자체가 안고 있는 빚은 모두 18조원이 넘고 연간 이자 부담만 해도 1조원이 넘는다. 빚을 얻어 빚을 갚아야 할 실정이다. 따라서 재정이 부실한 지자체들은 재정수입 증대를 위해 난개발이나 유흥업소 러브호텔 등의 허가를 남발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행정소송 당하기 쉬워

    지방자치단체의 이런 부작용에 대한 시각은 두 가지로 나뉜다.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제론자는 부작용의 폐해 때문에 기초자치단체장을 임명제로 바꾸는 것은 반대한다. 5년 남짓한 지방자치 역사 속에 아직까지 실질적인 기능과 권한을 갖추지 못하고 제한된 자치권과 재정, 잘못된 법체계와 선거제도 등으로 인한 시행착오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민선체제 출범전과 비교하여 각종 행정서비스가 향상되는 등 지방 행정의 경쟁력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 이재용 대구 남구청장의 말이다.

    “기초자치단체장들이 돈 벌기에 혈안이 돼 난개발이나 러브호텔 난립을 허용하고 있다고 비난하는데 그런 단체장이 일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초자치단체장이 의지를 가지고 이런 것들을 막으면 다른 쪽에서는 권력을 전횡한다고 비난하면서 행정소송을 한다. 현행 법상 행정소송을 하면 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웬만한 소신 없이는 사업자들에게 인허가를 해주지 않을 수 없다.”

    이 구청장은 한때 지역 유흥업소를 정리하려다가 유흥업계로부터 위협을 받기도 했고 현재는 주택가에 고압선을 깔려는 한전에 허가를 해주지 않아 행정소송을 당한 상태다.

    그러나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에서는 현행 법상 기초자치단체장이 난개발이나 유흥업소 난립 등을 막을 수 있는 장치가 미비하지만 기초자치단체장의 의지에 따라 재량권이 있다고 주장한다. 고양시 일산 지역의 러브호텔 난립문제가 여론을 일으키자 고양시장이 신규 호텔 건설을 불허한 것을 예로 든다.

    그러나 기초자치단체장 임명제론자들은 시행착오의 개선 등으로는 지방자치단체의 폐해를 해결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차기 선거를 위해 선심성 전시성 사업을 하다 보면 자금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돈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허가해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지역구가 김천인 임인배 의원의 말이다.

    “경북의 상주 구미 김천시가 버스로 20분대에 인접해 있는데 제각기 문화예술회관과 공설운동장을 짓겠다고 합니다. 한 군데에 700억원이 드는데 3곳 모두 지으면 2100억원이 듭니다. 인구 규모로 볼 때 한 개만 지으면 3곳이 이용하기에 충분한데 각 시가 시민들에게 업적을 자랑하려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많은 돈을 어디서 구합니까. 국고에서 빌리거나 수익사업을 해서 충당하지 않겠습니까. 결국은 지역 주민들의 부담입니다.”

    기초자치단체장의 인사권 전횡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이 나뉜다. 임명제론자는 기초자치단체장을 선거로 뽑으니까 공무원들끼리 순환보직은 되지 않고 기초자치단체장의 선거운동에 공로가 있거나 잘 보이는 공무원만 승진한다는 것. 따라서 선거철만 되면 지방공무원 조직 내부에서는 줄서기가 횡행하고 이로 인해 행정공백 현상까지 생긴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선거제론자는 임명제 시절에도 줄서기 현상은 있었다고 반박한다. 특히 지금은 주민의 눈치라도 보지만 그때는 임명권자의 눈치만 살폈다는 것. 그리고 선거에 따른 논공행상은 중앙정부와 마찬가지로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현행 지방자치제 아래서는 ‘우리 동네는 안된다’는 님비식 지역이기주의 문제도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있다. 시장 군수 구청장이 차기 선거에 당선하기 위해 광역시나 국가 전체 차원에서는 필요하지만 지역주민들의 이해에 반하는 사업은 할 수없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쓰레기 소각장 문제. 가령 서울시 강북구 노원구 도봉구는 한 지역구인데 노원구 주민들의 반대로 소각장을 가동하지 못해 피해가 3개 지역으로 확산돼도 속수무책이라는 것.

    선거제론자들도 지역이기주의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 이 문제를 임명제가 해결해줄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임명제하에서 행정력이나 물리력으로 지역이기주의를 눌러버리면 폭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원자로 폐기물 시설 건립을 반대했던 안면도사태를 예로 든다. 지역이기주의 문제는 주민들의 이해가 반영된 것이므로 설득과 적절한 보상으로 주민 의식의 변화를 유도해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기초자치단체장 임명제 문제와 관련해서 찬반 양측의 주장을 분석해보면 찬성하는 쪽에서는 지방자치단체의 폐해라는 각론을 부각시키려고 하고 반대하는 쪽에서는 지방 분권화는 세계사적 대세라는 총론을 앞세운다.

    시장 군수 구청장이나 시민단체들은 발의에 서명한 의원들의 자질에 대해서 의혹을 갖고 있다. 이번 법안 발의는 “세계사적 대세에 대한 몰지각과 정치적 이기주의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광역자치단체장은 선출직으로 하고 시장 군수 구청장은 임명제로 전환하는 것이 지방자치의 포기가 아니라는 주장은 지방자치의 기본 단위는 주민에 가장 가까운 기초자치단체인 시 군 구라는 지방자치의 기초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동안 학계에서 논의돼온 ‘도폐지론’ 등의 광역자치단체 폐지론에도 어긋나는 후진적 발상입니다.

    국회의 공전과 파행적 운영, 국민은 생각지도 않고 당쟁만 일삼고 있는 것에 대해 국민들이 무관심의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고 국회의원 임명제로 바꾸라는 소리가 있습니까. 국회의원들의 이번 발의는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는 겸허한 자세를 갖기는커녕 각 개별법의 합리적 개정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인 문제까지도 지방자치단체장에게 전가시키면서 입법기관이라는 권한을 남용하여 과거 단체장 임명시절에 지역에서 제왕으로 군림하던 독점적 지위를 다시 누리려는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집권론자와 분권론자의 충돌

    시장 군수 구청장들은 이번 발의가 최근에 야기됐던 행정자치부 부단체장의 국가직 전환 시도 등과 함께 지방자치의 부정적 요소를 과장하여 중앙집권적 통제 체제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의 일환으로 본다. 임명제 시절에 지역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누리던 일부 정치권과 지방행정기관에 군림하던 중앙정부의 이기주의적 사고와 행태가 바탕에 깔려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임인배 의원은 “이번 발의는 지방자치제를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며 현행 선거제의 폐해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행정개혁이 이뤄질 때까지만 임명제로 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지방자치라고 하면 주민들과 가장 가까운 기초자치단체의 자치를 의미한다. 학계에서는 광역시장이나 도지사는 임명제로 하더라도 기초단체장은 반드시 선거제로 하는 것을 지방자치의 핵심으로 평가한다. 외국의 경우를 보면 미국과 일본에서는 주민이 시장을 직선하며,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스웨덴 등 유럽 각국에서는 지방의회가 기초단체장을 선출하거나 지방의회의장이 기초단체장을 겸임하고 있다. 프랑스는 자치단체장을 지방의회에서 선출하는데 1982년 신지방분권법을 제정하기 이전에는 도지사는 임명제였지만 시 읍 면장은 선거제였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권위주의적 중앙집권 체제의 폐단을 타파하고 주민에게 권리를 되돌려주기 위해 오랜 투쟁과 산고 끝에 95년에 지방자치가 시작됐다.

    따라서 기초자치단체장을 임명제로 하자는 것은 지방자치체의 포기이며 그 배경에는 다른 의도가 있다는 것이 시장 군수 구청장들의 주장이다. 학계에서도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정세욱 명지대 교수는 한 논문에서 “통치권자가 중앙집권화를 위해 자치단체장 임명제를 추진한다면 이에 적극 반대해야 할 의원들이 자치단체장의 임명제를 앞장서서 주장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전제한 뒤, 기초단체장을 임명제로 바꾸자는 국회의원들의 주장은 경쟁자가 생길 여지를 아예 봉쇄해버리자는 의도로 해석했다.

    “의원들은 기초단체장의 행태를 나무랄 자격이 없다. 들끓는 비판여론과 질타를 무시하고 파렴치한 행동을 해온 것은 기초단체장이 아니라 다수의 의원들이다. 과거 총선 양상을 보면 여야 후보들은 선심성 공약을 내걸고 경쟁적으로 돈을 뿌려 사회분위기를 이완시켰다. 기초단체장을 임명제로 전환하자는 국회의원들의 저의는 순수하지 않으며 그들의 편협한 이기주의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정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자치단체장 임명제 시절인 95년 6월 이전에는 국회의원들이 민선 대표직을 사실상 독점적으로 누려왔다. 그래서 주민들이 의원들을 찾아와 아쉬운 부탁을 했고 의원에게만 의지하려 했다. 의원들은 시장 군수 구청장 임명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들을 마치 자기 부하로 여겼다. 한마디로 그 지방의 ‘제왕’으로 군림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95년 7월에 민선단체장이 들어서면서 국민의 대표직을 기초단체장과 분담하게 되었고 국회의원들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약화되면서 민선단체장이 의원들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경쟁자로 부상하고 있어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는 분석이다.

    시장과 의원의 자리 배치 신경전

    실제로 지역구에서는 의원들과 시장 군수 구청장 간에 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 가령 지역 행사가 있어 의원들이 참석하게 되면 의전상 자리배치가 기초자치단체장, 지방의회의장, 그 다음이 의원이라는 것이다. 지역이 큰 기초자치체에서는 단체장 1명에 국회의원이 3, 4명인 경우 의원들은 완전히 찬밥신세다. 다음은 임인배 의원의 말이다.

    “저는 그동안 지역행사에 참석하면 김천시장 다음으로 자리를 배치해주더니 이번에 발의하고 내려가니까 제 자리를 가장 상석에 배치해놓았어요. 그러니까 기분이 더 나빠요.”

    이런 자리 배치에 대해 유정복 김포시장은 다음과 같은 반론을 폈다.

    “경기도 부천시, 성남시는 의원이 4명이니까 시의장 자리가 2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원들이 의자 배치에 신경쓰는 것은 권위주의적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축하하러 온 것이지 주최가 아니지 않습니까.”

    자리 배치문제 보다도 의원들이 더욱 신경 쓰는 것은 ‘돈’과 관련된 문제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참담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지역구에 내려가서 경로잔치나 새마을체육대회에 참석하게 되면 위신이 서지 않습니다. 의원들은 후원회 기금을 여러 곳에 쪼개 쓰다보니까 몇십만원 정도밖에 못 주는데 시장은 몇백만원, 천여만원씩 쾌척합니다. 시민들이 보기에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장이 내는 그 돈이 누구 돈인데 생색은 혼자서 냅니까. 단체장들은 주민들 돈으로 평상시에도 공공연히 선거운동을 하는 셈입니다. 지방 공기업에 대한 인사에서도 단체장들이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의원들은 영향력을 행사하기가 힘듭니다.”

    이에 대해 유정복 김포시장은 “국회의원은 중앙무대에서 국가를 위해 좋은 정책이나 입법을 하는 것이 주임무인데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 자체가 잘못된 발상”라고 반박했다.

    임명제 법안에 서명을 한 의원들은 이번 발의를 기초자치단체장에 대한 경쟁의식의 발로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경계했다. 의원들에 따라 그런 불만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엽적인 문제라는 것.

    “서명을 한 의원들이 자기 지역 기초단체장과 사이가 나쁘기 때문에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서 발의했다든지, 차기의 라이벌을 제거하기 위해서 임명제로 전환을 시도한다는 등의 주장이 있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만약 임명제가 통과되면 차기 총선에서 현행 기초자치단체장들이 대거 출마할 터인데 그것이 더 불리한 것 아닙니까.”

    임명제론자들은 이번 발의가 통과되지 않더라도 지자체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소득이 있다고 평가했다. 선거제론자들도 이번 기회를 통해 국민들이 지자체 제도의 보완과 개선의 필요성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됐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다.

    현행 지자체 제도의 문제점을 보완하거나 개선하기 위해서는 어떤 논의가 있는 것일까. 먼저 행정자치부에서는 기초자치단체장의 부단체장을 국가직으로 임명하는 방안을 도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명분은 중앙정부와 인사교류를 꾀하고 지방자치체의 재정부담을 들어주자는 것인데 시장 군수 구청장들은 중앙정부가 기초자치단체를 견제하려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행자부의 시도를 거부하는 입장이다.

    경실련에서는 지방자치단체 부단체장을 ‘개방형임용제’로 전환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에 필요한 인사는 자치단체장이 바라는 전문성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기 때문에 반드시 국가직으로 못박을 필요는 없고 지방의회에 의한 인사청문회를 거쳐 동의를 받으면 된다는 주장이다.

    강형기 충북대 교수는 “지방자치가 다소 부작용이 있다고 해서 자꾸 중앙의 통제를 강화하는 것은 샘물이 혼탁하다고 소독약을 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시적인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지방 자치 능력을 해치게 된다”고 지적했다.

    대부분의 시민단체들은 시장 군수 구청장의 권한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주민 참여를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 YMCA는 임명제 발의에 대해 반대 성명을 내면서 주민참여의 제도화를 강조했다.

    “올바른 지방자치의 정착은 주민참여(주민 소환, 주민투표, 주민소송 등) 제도화에 있음을 누누이 강조한 바 있다. 여기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의원들이 자치단체장 임명제라는, 역사를 후퇴시키는 입법안을 제안한 것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지자체 존립은 의원들 손에

    주민 소환제에 대해서는 시장 군수 구청장마다 생각이 약간 달랐다.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검토해볼 수는 있다며 유보 입장을 보인 경우도 많다. 그러나 지역 주민의 이해와 직접 관련된 특정 사안에 대해서는 주민투표제를 도입할 만하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김근태 민주당 최고위원은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제는 찬성하지만 주민 소환제에 대해서는 유보적이다.

    “현 단계에서 주민소환제는 유보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역 주민들이 단체장 자질을 보고 선출해야지 소환하면 지자체가 불안정해집니다. 그러나 주민발의제나 주민투표제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무엇보다도 지방의회가 단체장을 견제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재는 명예직이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지방자치제의 역사가 오래된 다른 나라에서는 재력이 있는 봉건 영주나 귀족들이 명예직 차원에서 지방의원이 됐지만 우리나라는 사정이 다릅니다. 지방의원들을 전문화해서 최소한의 생활비를 보장해줘야 합니다.”

    발의에 서명한 한 의원은 주민참여제나 지방의회의 견제 기능 자체에 대해 회의적이다.

    “시의회는 1000명당 시의원 1명인데 감히 시장에게 대들 수 없습니다. 대드는 시의원에게는 예산 안 줍니다. 따라서 현재 지방의회는 단체장의 들러리에 불과합니다. 박수부대일 뿐이지요. 주민이 단체장을 감시할 수 있는 제도로 주민감시, 주민투표제, 주민소환제 등을 말하는데 누가 누구인지 다 아는 좁은 지자체 안에서 시장에게 대들 사람이 있겠습니까.”

    현행 기초자치단체장 정당 공천 문제에 대해서는 의원과 시장 군수 구청장의 입장이 판이했다. 의원들은 양보를 하더라도 최소한 연합공천이라도 해야 한다는 주장이고 기초자치단체장은 기초자치단체가 여야 정치구도에 휩쓸리지 않고 독자적인 운영을 하기 위해서는 정당 공천을 배제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정치권이 기초자치단체장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끈인 ‘공천’문제에서 양보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앙집권시대에서 분권화시대로 넘어가면 힘의 분산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과거 임명제 때 행정력만 갖고 있던 시장 군수 구청장들은 이제 행정력 뿐 아니라 주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정치력까지 갖게 됐다. 기초자치단체장들의 정치력이 강해지면서 지역구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원들과 충돌하는 와중에 나온 것이 바로 ‘임명제 발의’로 풀이된다. 이번 발의는 통과 여부와 관계없이 의원들이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제의 생사 여탈권을 여전히 쥐고 있음을 과시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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