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6월호

특종! ‘작은 장군’ 金正男의 비밀행각

도쿄 · 워싱턴 · 베이징 · 유럽 대북정보망 밀착취재

  • 최영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cyj@donga.com

    입력2005-04-12 14: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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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종! ‘작은 장군’ 金正男의 비밀행각
    “북한 최고권력자 김정일의 아들 김정남은 북한의 미사일 수출업무 총책이다.” ‘신동아’로 날아든 첩보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5월3일 오전 11시30분, 인천공항을 이륙한 도쿄행 대한항공 727편이 정상 고도에 올랐다.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았다. 새벽부터 잠을 설쳐 피곤한데도, 잠은 오지 않고 정신만 말똥말똥해졌다. 긴장한 탓이었다.

    미국 워싱턴DC의 Y선생이 도쿄에 날아와 있는 것도 김정남의 무기 수출 활동을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날 저녁, 도쿄 아카사카의 뉴오타니 호텔에 묵고 있는 Y선생과 통화를 끝내자마자 출장준비를 서둘렀다. 일단 Y선생을 만나야 한다. 그를 만나면 김정남의 그간 행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뒤에 일본 내 관련자들을 만나야 할 것이다. 선약을 하지 않은 상태기 때문에 취재가 제대로 이뤄지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오후 1시30분, 나리타공항에 도착했다. 뉴오타니호텔 로비에서 Y선생을 만난 것은 오후 5시30분. 기초 취재를 끝내고 사케를 한 잔 하기 위해 Y선생과 스시집에서 마주앉았다.



    갑자기 TV에서 긴급뉴스가 터져나왔다. 김정남이 나리타 공항에서 밀입국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보도였다. 이 무슨 기우(寄遇)인가. Y선생이 어깨를 툭 치며 빙그레 웃었다.

    “최기자, 아무래도 이번에 한 건 할 것 같아.”

    그는 김정남이 일본에 밀입국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나는 북조선 김정일의 아들”

    기자가 도쿄로 부랴부랴 입국하기 이틀 전인 5월1일 오후 4시경 일본 나리타 국제공항 제2터미널. 싱가포르에서 날아온 일본 JAL 712편 탑승자들이 게이트를 빠져나와 출입국관리소 입국 심사대 앞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일본인 입국 심사대는 왼쪽, 외국인 입국 심사대는 오른쪽.

    오른쪽 외국인 입국 심사대 앞에 길게 늘어선 외국인 가운데는 고급스러운 옷차림의 동양인 일행 4명이 섞여 있었다. 스포츠형 머리에 레슬링 선수 같은 몸집의 젊은 동양인 남자,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선글라스를 낀 세련된 여인, 7세 정도로 보이는 사내아이와 그의 손을 잡은 30대 초반의 여인. 순서를 기다리던 이들이 마침내 입국 심사대 앞에 섰다. 우람한 체격의 남자가 제일 먼저 여권을 출입국관리소 직원에게 내밀었다. 출입국관리소 직원이 여권 감지기에 그의 여권을 넣는 순간 벨이 울렸다.

    순간 미리 대기하고 있던 출입국관리소 직원 8명이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직원들은 일행 4명을 대열 밖으로 데리고 나와 위층에 있는 조사관실로 데려갔다. 남자는 처음엔 조금 반항하는 듯했으나 출입국관리소 직원과 경찰 여러 명이 그를 에워싸자 저항을 포기했다. 곧바로 다른 일행 3명도 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각기 다른 방에 유치되어 조사받기 시작했다.

    남자는 처음에는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주장했다. 여권에는 그의 출생지가 ‘KOREA’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 그는 다시 중국사람이라고 주장하다가, 여권에 기재된 사실이 허위임이 밝혀지자 “나는 북조선 김정일의 아들”이라고 신분을 밝혔다. 그는 “아이가 도쿄 디즈니랜드를 보고 싶어해 관광차 왔다”고 덧붙였다.

    출입국관리소 직원들도 그가 북한 고위층 인사의 아들일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다 그가 자신이 김정일의 아들이라고 밝히자 비상사태에 들어갔다. 법무성은 출입국관리소에 이 사실이 외부로 새나가지 않도록 지시했다.

    나리타 출입국관리소는 곧바로 이들 일행 4명의 신병을 나리타 공항을 관할하는 이바라키현 불법입국자 수용시설로 옮겼다. 이들은 특실에서 한국말을 할 수 있는 법무성 직원, 검찰, 출입국관리소, 경찰 등 4개 기관 합동조사반으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합동조사반은 남자와 여성 2명을 따로따로 조사했다. 합동조사반은 이 남자가 김정일의 아들 김정남임을 확인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법무성은 외무성과 긴밀하게 통신을 주고받았다. 가와시마 유타카 외무성 사무차관은 5월1일 밤 다카나와 프린스호텔에서 회의중이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신임 총리에게 사태를 보고했다. 5월2일 아침, 총리공관에서는 법무·외무·관방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 각료회의가 열렸다.

    일본 정부는 북한과 중국을 통해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당시 김정남은 중국행을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제 관례상 불법입국자는 별 문제가 없으면 출발지로 돌려보내는 것이 원칙이다. 그렇다면 그를 싱가포르로 추방해야 했다. 범죄사실이 있으면 억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각료들은 김정남 일행의 편의를 최대한 고려해 중국으로 추방하기로 결정하고 중국측과 막후 교섭을 벌이기 시작했다.

    한편 일본 언론사들은 5월2일 오전까지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기자들은 5월1일 저녁부터 외무성 북동아시아국과 법무성 출입국관리국이 문을 잠그고 외부인사 출입을 통제하자 무언가 중대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다 그날 오후 나리타 공항을 출입하는 기자들로부터 ‘5월1일 오후 중국측의 중요 인사 몇 명이 불법 입국하려다가 체포되었다’는 보고가 날아들었다. 언론사들은 곧바로 사실 확인 작업에 나섰다. 결국 5월3일 오후 5시30분 니혼TV(NTV)가 사실을 알아내고 임시 긴급뉴스로 첫 보도를 날렸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에 따르면 법무성이 김정남의 신병을 너무 신중하게 처리하자 화가 난 일본 경시청이 니혼TV에 그의 구속 사실을 귀띔하고 법무성에 그를 밀입국 혐의로 기소하라고 압력을 넣었다고 한다. NTV 보도가 나간 지 20분 뒤에 지지(時事)통신과 교도(共同)통신도 이 사실을 보도했다.

    일본 언론들은 체포된 사람이 김정일의 아들 김정남임을 확인했으나 법무성의 요청에 따라 ‘김정일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김정남’ 또는 ‘북조선 김정일 총서기의 아들로 추측되는 김정남’이라는 표현으로 보도해서 일본 정부와 북한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일본 언론들은 국가 이익과 북·일 관계를 고려해 ‘김정일의 아들’이라는 단정적인 표현을 쓰지 않았다.

    급박하게 돌아가던 일본과 중국의 막후 접촉은 잘 풀렸다. 중국이 김정남 일행을 받아들이겠다는 방침을 밝힌 것. 이에 따라 일본은 5월4일 오전 10시에 출발하는 전일본항공(ANA) 편으로 김정남 일행을 추방했다. 이들 일행이 ANA 항공기에 탑승하는 장면은 전세계 언론에 공개되었다. 김정남이 아버지 김정일과는 1년 시차를 두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은둔’에서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일본은 북한의 황태자 김정남 일행을 특별히 배려했다. 6명의 일본 관리를 포함한 김정남 일행은 베이징으로 날아가는 보잉 747기 2층을 독차지했다.

    김정남의 방일 목적

    일본은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해 김정남 사건을 신중하게 처리했다. 사흘 동안 그들의 신병을 확보하고 있다가 마침 평양을 방문중이던 유럽연합(EU) 대표단이 평양을 떠난 뒤에 추방했다. 덕분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체면을 덜 구겼다. 물론 북한 언론은 김정남 체포 사건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김정남 일행은 5월4일 오후 1시11분경 베이징 공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중국과 북한 당국자로 보이는 사람들의 경호를 받으며 공항 귀빈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은둔’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다면 김정남의 방일 목적은 무엇인가? 그 열쇠는 일본 수사 당국이 쥐고 있다. 현재 일본 당국은 김정남 수사 결과를 한국측에 제공하지 않고 있다. 우리 정부가 김정남 사건에 대해서 진상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건 직후 김정남의 일본 방문 목적을 두고 여러 가지 추측이 나왔다. 그는 합동조사반 조사에서도 “아이에게 도쿄 디즈니랜드를 보여주기 위해 입국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정남 정도의 인물이 여행이나 다니려고 일본에 밀입국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는 분명히 모종의 임무를 띠고 일본을 방문했던 것이다.

    북한 전문가들은 “김정일의 묵인 아래 후계자 수업을 하기 위해 비밀 해외여행을 했을 것이다”, “김정남이 북한의 IT산업 책임자인 만큼 일본의 고급 컴퓨터 부품을 구입하고 IT 시장을 둘러보며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입국했을 것이다”, “교착 상태에 빠진 북·일 수교 협상에서 모종의 역할을 하기 위한 방문이었다”는 등 여러 가지 분석을 내놓았다. ‘북·일수교 역할론’은 김정남이 체포된 5월 초순이 일본의 정권 교체기였기 때문에 나온 추측이다. 비록 불발에 그쳤지만, 지난해 모리 총리는 북한과 수교 협상을 시도한 적이 있다(신동아 2001년 5월호 참조).

    단순한 컴퓨터 칩이 아니라, 미사일 부품을 구입하기 위해 밀입국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전문가들의 공통된 주장은 그의 밀입국이 일정한 임무를 띤 것이었다는 점이다. 북한 권력 구조상 김정일의 지시 없이는 함부로 해외여행을 할 수도 없거니와 업무에 필요한 여행이 아니라면 그토록 많은 외화를 소지하고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추측들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기자는 일본 공안 관계자로부터 결정적인 정보를 얻었다. 김정남 일행을 66시간 동안 조사한 일본 공안조사청은 김정남이 북한의 미사일 수출 대금을 수금하기 위해서 도쿄에 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것. 북한은 최근 SAM16A(견착형 대공미사일) 300기를 이라크에 수출했다. 김정남은 이 돈을 챙기려 했다는 것이다. 이라크는 SAM16A 대금을 스위스, 홍콩, 시드니, 도쿄 등 4곳의 비밀 은행 계좌에 분산 예치했다. 대금을 송금한 지역은 국제금융 중심지인 런던이다. 미사일 판매 대금과 같은 거금이 이동하면 국제 정보망에 노출될 위험이 크다. 이라크는 서방 정보기관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판매 대금을 네 곳으로 나누어 송금했다. 런던을 최초 송금지로 택한 이유는 엄청난 규모의 국제자본이 이동하는 곳이라, 현금 이동을 감추기 쉽기 때문이다.

    나리타공항에서 체포되기 전, 김정남의 여행 루트를 보면 이라크가 판매 대금을 분산 예치한 도시 네 곳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는 일본에 오기 전 호주 시드니에 가서 미사일 판매 대금 네 보따리 가운데 하나를 중국의 비밀계좌로 송금했다. 김정남이 미사일 판매대금을 세탁하는 장소는 중국이었다. 중국에서 세탁한 뒤, 이 돈을 평양으로 보내는 방식이다. 그는 3개 도시에 분산 예치된 미사일 대금을 모두 챙긴 뒤, 나머지 4분의 1을 걷으러 도쿄에 들어가다가 덜미를 잡힌 것이다.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김정남 같은 북한의 최고 로열패밀리가 왜 직접 돈을 찾으러 위험한 해외여행을 했느냐는 의문이다. 하지만 현금이야말로 김정일 정권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다. 김정일이 북한의 핵심 세력인 군부를 장악할 수 있는 것도 외화를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에게 외화 수금은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는 핵심 업무다. 더구나 최근 북한에서는 최고 기밀을 가진 권력 수뇌부의 서방 망명이 이어지고 있다. 황장엽씨와 장승길 전 이집트 주재 북한대사가 대표적인 예다.

    김정남 이전에 북한의 미사일 수출업무는 1997년 8월 미국으로 망명한 장승길 전 대사가 맡고 있었다. 당시 이집트는 북한이 미사일을 개발하고 수출하는 데 중요한 연결고리 노릇을 했다. 북한은 1981년 이집트와 ‘미사일 개발 협정’을 체결하고, 이집트를 통해 소련제 스커드B 미사일 기술을 도입, 1985년에 사정거리 340km의 북한산 스커드B 미사일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북한은 이에 따라 스커드B 미사일을 양산하기 시작해 1987년 이란과 시리아에 160기를 수출해 10억 달러 이상의 외화를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장대사는 김정일의 절대적 신임을 받던 인물로 북한의 외교 정책 결정 과정에 대해 내밀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더구나 장대사와 함께 망명한 장승호 파리주재 북한 총대표부 참사관은 10년 이상 해외에서 외화벌이 전문가로 근무했기 때문에 북한의 외화벌이 실태를 누구보다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황장엽씨와 장대사가 망명한 뒤 김정일 위원장은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믿을 게 가족밖에 없었다. 그래서 김정일은 정권을 지탱하는 데 가장 중요한 ‘현금’과 ‘군부’의 핵심 업무를 큰아들에게 맡긴 것이다. 일본 당국의 수사에서도 김정남은 북한 미사일과 무기 판매를 담당하는 총책임자로 밝혀졌다고 한다. 북한은 6·15 남북 정상회담 이후에도 미사일을 계속 수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정상회담 열기가 드높던 지난 3월9일 미국의 ‘워싱턴타임스’는 미국의 스파이 위성이 북한 남포항에서 스커드B형과 스커드C형 미사일이 선적되는 현장 사진을 찍었다고 보도했다. 기사 전문이다.

    “미국 정보기관 관계자에 따르면 북한은 서해안의 항구에서 미사일 부품을 선적해서 수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미국 스파이 위성이 며칠 전 촬영한 사진을 보면 북한 서해안 남포 근처 항구에서 한 선박이 미사일을 선적하고 있다. 미사일의 정확한 형태는 확신할 수 없지만, 북한이 만든 스커드B나 스커드C의 부품인 것으로 추정된다. 스커드B 미사일은 사정거리가 186마일이고, 스커드C 미사일은 310마일 밖에서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다. 북한은 사정거리 620마일의 노동 미사일도 수출하고 있다.

    한 정보기관 관계자는 ‘문제의 선박에 선적된 물건 가운데는 미사일 탄두에 장착되는 화학무기도 포함돼 있었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선적 물품 가운데는 제트엔진의 연료 탱크도 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몇몇 관계자는 ‘미사일을 실은 선박은 추운 날씨로 항구 일대가 얼어붙어 항구에서 일주일 이상 정박해 있었다’고 했다. 이 관계자들은 선박의 목적지는 알 수 없으며 외교적인 경로나 다른 공작으로 미사일 판매를 봉쇄할 계획이나 수단은 없다’고 밝혔다.

    정보기관 관계자들은 북한은 이집트, 파키스탄, 이란, 리비아 등 여러 나라에 미사일을 수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월 미 의회에 제출된 CIA보고서도 북한이 중동과 남아시아, 북아프리카에 중요한 탄도미사일 부품과 기술을 수출하고 있다고 밝혔다. … ”

    북한의 미사일 수출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클린턴 정부 내내 계속된 ‘미사일 회담’에서 북한은 일관되게 “미사일 개발, 생산, 배치, 수출은 주권과 관련된 사항이다. 다만 수출만큼은 미국이 수출 금액에 해당하는 보상을 해준다면 중단할 용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폐쇄정책과 미국의 경제 봉쇄 때문에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없다. 그런 상태에서 미사일 수출만큼 확실한 외화 획득 수단은 없다.

    재미동포 윤홍준과 김정일

    이번 사건으로 김정남의 일본 내 조직은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 일본 경시청은 이번 조사기간에 김정남 일행의 지문을 채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경시청의 수사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경시청이 수사를 시작하는 첫 단계는 항상 ‘지문’이다. 현재 일본 경시청은 김정남의 지문을 근거로 과거 그의 일본 내 행적을 차근차근 되밟고 있다. 그가 일본에서 접촉했던 사람과 동선을 일일이 체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진행된 조사 결과에 따르면 뜻밖에도 김정남의 일본 내 조직은 조총련과는 전혀 상관 없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김정남의 일본 조직 가운데 핵심인물은 재일동포 의사인 김만우씨다. 그는 조총련과는 무관한 인물로 평양과 나진 선봉에 병원을 세운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도쿄에는 김정일의 알려지지 않은 딸이 유학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당국의 수사 결과 김정남의 무기 수출에는 재미동포 윤홍준씨(34)가 핵심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는 1997년 대선 직전 김대중 후보가 북한측과 접촉했다며 기자회견을 한 인물이다. 1997년 12월15일자 ‘한겨레’ 보도다.

    “재미사업가를 자처하는 윤홍준씨(30)가 12월12일 베이징에서 한국 특파원들에게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 윤씨는 아홉 장짜리 회견문에서 ‘김대중 후보가 지난해 10월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북한 고위층과 몰래 접촉을 시도했으며 지난 71년 대선 때는 선거자금을 지원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김후보가 이사장으로 있는 아태평화재단과 북한의 아태평화위원회가 접촉을 유지하고 있으며, 김후보가 북한의 고려연방제를 지지해주기로 했다고 주장했다. 윤씨는 자신의 회견이 언론에 보도되지 않자 13일에는 일본 도쿄 데이고쿠호텔에서 일부 주일 특파원을 불러 비슷한 내용의 주장을 반복했다.”

    윤씨는 베이징과 도쿄에서 가진 두 차례 기자회견이 모두 언론에 보도되지 않자, 대선 직전인 1997년 12월16일 여의도 63빌딩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뒤 곧바로 미국으로 출국했다. 검찰은 기자회견 당일 출국금지조치와 함께 수사관들을 김포공항으로 급파했으나 검거하는 데 실패했다. 당시 그는 안기부의 준공작원 노릇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 수사 당국에 따르면 이 수수께끼의 인물 윤홍준은 그 동안 북한의 무기 중개상 노릇을 계속해왔다는 것이다. 근래에 밝혀진 윤씨의 ‘대북 작품’이 하나 있다. 최근 북한은 전방 배치 부대뿐만 아니라 전군의 통신체계를 광케이블로 바꾸었다. 주한미군이 북한군의 지하 매설 통신선까지 도청하기 때문이었다. 현재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 8군은 예하부대인 501정보여단을 통해 북한군의 모든 통신활동을 감청하고 있다.

    또 주한 미대사관 내에는 ‘FBIS(해외방송청취반)’가 있는데 FBIS의 주된 업무가 대북 감청이다. 북한군에 주한 미군의 감청을 피하기 위한 광케이블을 공급한 이가 바로 윤홍준씨다. 그리고 광케이블 교체사업을 맡은 북한측 책임자가 김정남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떻게 김정남을 체포했을까? 출입국 관리 업무에 밝은 한 관계자는 “김정남의 도미니카 여권은 그 자체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나리타공항 출입국 관리소가 김정남을 잡은 것은 그가 김정남 또는 북한의 문제 인물이라는 첩보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전에 입수된 정보가 없었다면 그렇게 전격 작전식으로 체포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김정남이 지난해 10월과 12월에도 세 차례나 이번과 똑같은 도미니카 공화국 여권으로 일본에 입국했던 사실을 보면 이 관계자의 증언은 설득력이 있다. 최첨단 여권 감지기를 설치한 나리타공항에서 세 번이나 위조 여권 소지자를 놓치고 네 번째에야 적발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일본에는 정보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기구가 세 군데 있다.

    내각조사실은 한국의 국정원에 해당하는 정보기관이다. 하지만 이곳의 인원은 300∼400명에 지나지 않고, 직접 발로 뛰는 인원도 없다. 이곳은 미국으로 치면 중앙정보국(CIA)의 상급기관인 NSA(미국가안보국)처럼 현장에서 올라온 정보를 분석하는 기관이다. 이곳에서 취합 분석된 정보는 곧바로 총리에게 보고된다. 내각조사실은 수사권이나 체포권이 없다. 하지만 내각조사실의 최고간부는 내무성 차관과 법무성 차관, 경시청장이 맡고 있는데, 내각조사실장은 반드시 경시청장이 맡는다.

    내각조사실의 손발 노릇을 하는 기구가 법무성 산하의 공안조사청이다. 공안조사청은 내각조사실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공작기관이자 수사기관이다. 방위청 통신실(FI·別班)은 통신 감청만 하는 기구다. 태평양전쟁을 치른 국가인 일본의 감청 수준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이 독일에 보낸 간첩 조르게를 잡아낸 곳은 서울 용산의 일본군 주둔기지였다. 일본이 통신 정보에 유리한 것은 일명 ‘코끼리 코’라고 불리는 거대한 안테나를 북해도 바로 밑에 있는 에히메현과 오키나와현에 설치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막강한 정보력을 가지고 있는 일본이 미국에 뒤지는 분야는 영상(LCD) 정보다. 미국은 어지간한 정보는 우주공간의 위성에서 찍는 위성사진으로 얻는다.

    한국 정부 알고 있었나?

    일본 정보 소식통에 따르면 김정남의 일본 밀입국 정보를 알아챈 것은 일본 공안 당국이 아니라 미국 CIA였다. CIA는 진작부터 재미동포 윤홍준과 김정남의 무기거래 커넥션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CIA는 김정남의 일본 밀입국 사실과 무기 거래대금 세탁에 관한 정보를 일본에 흘려 일본이 김정남을 잡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다.

    한편 한국 정부는 일본 언론의 보도가 나오기 직전까지 사건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과 일본 정부가 관련 정보를 우리 정부에 전혀 통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외교당국이 이 사건 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5월3일 오전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상세한 내용을 전하지 않고 “김정일의 아들 김정남 같은 사람이 들어온 것 같다”는 첩보수준의 정보를 우리 정부에 전했을 뿐이다.

    한승수 외교통상부 장관은 5월4일 국회 외교통상위에 출석해 “일본 정부에 문의했으나 끝까지 공식확인을 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청와대도 이 사건에 대해서 언론 발표 수준 이상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 사건 직후 한국 정보 당국이 일본 정보 당국에 김정남의 체포 경위 자료를 요구하자 일본은 이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정보 관계자는 이를 최근 한·일 정보 당국간에 형성된 ‘불쾌한 감정’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9월2일 우리 정부는 북한행을 희망한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를 북한에 송환했다. 이들 가운데는 일본측이 ‘일본인 납치 사건’(80년 오사카에서 일어난 요코하마의 중국식당 종업원 납북사건)의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신광수씨가 끼어 있었다. 한국 언론에 크게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이 사건은 한·일간의 외교문제로 번졌다. 일본 정부는 일본인 납치 사건을 미사일 문제와 함께 북·일 수교 협상 이전에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보고 있다.

    당시 주한 일본대사관과 일본 수사당국은 한국까지 찾아와 신광수씨의 접견을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당사자에게 직접 허가를 얻어라. 정부가 관여할 사항이 아니다”며 접견을 허용하지 않고 신광수씨를 북송해 버렸다.

    한·일 정보당국이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 것은 예사로운 사안이 아니다.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다. 김정남의 미사일 판매 행각과 동선은 미국 CIA가 낱낱이 꿰고 있었다. 그러나 CIA는 이 정보를 한국측에 제공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 일본은 한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맹국이다. 이번 사건은 별다른 문제 없이 해결됐지만, 군사적 충돌 같은 사태가 발생했을 때 이처럼 한·미·일 간에 정보 교류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사태는 엉뚱한 방향으로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

    5월3일 낮까지 이 사건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한국정부뿐이다. 베이징의 한 북한소식통도 이날 낮 동아일보의 모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와 ‘나리타 공항의 빅뉴스’를 전하기도 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1974년부터 본격적으로 김정일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한 수순에 들어갔다. 이 무렵 김주석이 김정일에게 맡긴 곳이 대남공작의 핵심 부서인 노동당 ‘대남 연락부’였다. 일명 ‘35호실’로 불렸던 이 부서는 지금은 ‘조사부’로 불린다. 김정일은 이 부서를 책임지며 지도자 수업을 시작했다. 김정일이 김정남을 후계자로 만들려고 했다면 외국여행과 특수 임무를 권했을 가능성이 크다.

    김정남이 성인이 된 이후의 얼굴은 그 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 공안 관계자에 따르면 김정남은 여권 10여 개를 가지고 1990년대 초부터 일본, 중국, 모스크바, 싱가포르, 마카오, 홍콩, 태국, 프랑스, 독일, 호주, 남미 등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고 한다. 서울의 한 정보 관계자는 “김정남의 얼굴을 아는 이가 없기 때문에 그가 서울에 왔을 가능성도 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김정남이 마음만 먹으면 제주도쯤은 얼마든지 들락거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김대중 정부는 출범 직후 제주도를 중국인과 일본인에게 무사증(무비자) 입국지역으로 개방했다. 중국이나 일본 여권만 있으면 손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제주도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김정남은 서울에 두 번, 제주도에 한 번 들어왔다고 한다. 정보통신 산업에 관심이 많은 김정남에게 서울의 용산전자상가 같은 곳은 매력적인 여행지가 아닐 수 없다.

    지난 3월 김정일의 생일 무렵 평양을 방문해 김정남을 만난 조총련 관계자 A씨도 김정남이 “우리 다음에는 제주에서 만나자”고 말했다고 전해 그의 말을 뒷받침했다. A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김정남은 제주도를 과거에 방문했을 수도 있다. 제주도는 최근 김용순 등 북한 인사들이 방문한 곳이다. 그래서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김정남이 일본 여권이나 중국 여권을 가지고 제주도로 들어오는 상황은 충분히 가정할 수 있는 일이다. 도쿄에만 들어오면 제주도에는 큰 어려움 없이 입국할 수 있다.

    김정남 여권의 비밀

    경찰의 한 대공관계자는 “최근 제주는 북한의 대남 공작 소굴이 되고 있다. 북한 공작원들이 일본과 중국 여권만 가지고 있으면 공항을 통해 들어와도 단속할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교수도 “김정남 같은 인물이 서울에 오려면 그를 받아들일 만한 북한측 조직이 서울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 정보기관은 이런 사항을 조사할 분위기가 아니다. 우리 정부도 이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김정남의 도미니카 공화국 여권에 기재된 이름은 ‘팡시옹(PANG XIONG)’이고 생년월일은 1971년 5월10일로 되어 있다.생년월일은 실제와 같다. 여권을 만든 것은 2000년 4월1일이며 만료기간은 2006년 4월1일이었다. 김정남은 이 여권으로 지난해 10월3∼6일, 12월2∼9일, 12월25∼29일 등 세 차례 일본에 입국한 사실이 밝혀졌다.

    언론은 문제가 된 김정남의 여권을 ‘위조 여권’이라고 보도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한국 여권이 종종 거래되고, 전담 브로커까지 있다. 한국 여행객의 여권을 훔치거나, 브로커와 결탁한 한국인이 여권을 브로커에게 건넨 뒤 임시여행증을 발급받아 한국으로 돌아오는 수법이 흔하다. 분실된 여권은 사진만 다른 인물로 갈아 붙이면, 한국 외에는 세계 어느 나라든지 여행할 수 있는 여권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김정남의 여권은 엄밀히 말하면 ‘위조 여권’이 아니라 도미니카 공화국이 정식으로 발행한 ‘차명 여권’으로 보아야 맞다. 차명 여권은 북한과 도미니카공화국의 합의 아래 발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김정남의 여권이 위조 여권이었다면 사진을 갈아 끼웠다든지, 도미니카공화국 외무부의 직인이 가짜라든지, 여권 번호가 틀렸다든지 하는 등의 수사 결과가 나와야 한다.

    하지만 이런 발표는 아직까지 없었다. 따라서 김정남은 위조여권을 사용한 것도, 밀입국을 한 것도 아니다. 다만 차명 여권을 사용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김정남 정도의 인사가 들통날 가능성이 큰 위조 여권을 사용할 리도 없다.

    차명 여권은 각국 정부의 ‘중요 인사’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사용하는 것이다. 김영삼 정부 때 아들 현철씨도 비밀 임무를 띠고 외국으로 나갈 때는 차명 여권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태우 정부가 북방정책을 추진할 때 밀사로 다녔던 인사들도 차명 여권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 정보기관 관계자에 따르면 대우그룹 김우중씨가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다니는 것은 카자흐스탄에서 여권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외국 정보기관들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차명 여권으로 요원을 국외로 파견한다. 김영삼 정부 당시 리비아의 카다피 대통령의 아들도 1년에 한 차례 정도 한국을 방문했는데 매번차명 여권을 사용했다.

    워싱턴의 한 소식통에 따르면 김정남이 “1998∼1999년 사이에 중국인 사업가로 위장해서 중국 여권을 가지고 뉴욕을 한 번 다녀왔다”고 말했다. 당시 뉴욕에 있는 중국인 무역회사가 김정남을 초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남은 중국, 홍콩, 일본, 러시아, 도미니카의 차명 여권을 가지고 있으며 항상 평양에서 베이징을 거쳐 외국으로 나간다고 한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나갈 때는 북한 여권을 사용하고, 중국을 떠날 때는 중국 여권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김정남이 유럽을 다닐 때는 북한과 수교한 나라에서는 북한 여권을 사용하지만 북한과 외교관계가 없는 나라에 입국할 때는 해당국에서 거부 반응이 없는 나라의 차명 여권을 사용한다고 한다. 미국 언론은 김정남이 일본에 불법 입국하려다 체포된 사실이 밝혀지자, 1999년에 김정남으로 추측되는 동양인이 미국 플로리다 공항을 통해서 입국하려다 위조비자로 판명되어 입국을 거부당한 사실이 있으며, 2000년에는 하와이 공항을 통해 입국하려다 추방된 사실이 있다고 보도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도미니카 여권을 가지고 있었을까? 북한 당국이 자체적으로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코리아 게이트 사건의 주인공인 로비스트 박동선씨가 주선했을 가능성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박동선씨는 북한 최고 수뇌부와 선을 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동아’ 2000년 3월호 인터뷰에서 박씨는 북한 고위층에게 국제기구와 지역기구, 서방 선진국으로 입지를 넓혀가기 위한 외교수완을 조언한다고 밝혔다. 주로 만나는 사람은 아태평화위원회 사람들이라고 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에 평양에 다녀왔는데, 유엔과 세계은행, IMF에 대해 집중적으로 묻더군요. 놀라웠던 것은 아직 한국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있는 EU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더라는 점이에요. 이들의 지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어디로 줄을 대야 하는지 이런 걸 가르쳐 달라는 겁니다. 미국과 중남미 국가들이 참여하는 미주기구(OAS), 아프리카단결기구(OAU) 등과 북한을 연결하기 위한 내 경험과 노하우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박동선씨가 북한 최고 수뇌부와 선을 댄 계기는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전 유엔 사무총장의 방북이었다. 갈리 총장과 절친했던 박씨는 그와 함께 북한을 방문한 뒤 지금까지 북한을 수시로 드나들고 있다. 그런 박동선씨가 도미니카 공화국 여권을 소지하고 있으며, 도미니카 공화국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그 영향력을 증명하는 사례가 있다.

    1995년 9월1일 중앙일보 김영희 기자가 도미니카의 박동선씨 저택을 방문했을 때 그를 마중 나오던 흑인 운전사가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그러자 도미니카 공화국 외무장관과 부통령을 지낸 여당총재를 비롯한 저명인사들이 줄줄이 조문전화를 해왔다고 한다. 박씨는 그 무렵 일본으로부터 3000만 달러의 무상원조를 도미니카공화국에 주선했다고 하니 그랬을 법도 하다.

    박동선씨의 도미니카 저택은 은퇴한 미국의 억만장자나 거부들이 별장을 갖고 있는 라노마나의 카사 데 캄포에 있다. 대지 5000평에 본채와 게스트하우스, 하인들이 사는 두 채의 집으로 이루어진 이 저택은 이 부촌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다. 해안선이 두 군데나 깊숙이 파고든 정원의 한 면이 바다와 접해 있어 풍광이 뛰어나며 집사, 요리사, 정원사 등 관리인 9명이 집을 돌보고 있다. 이 저택은 그가 1970년대에 미국 정치인들을 위한 휴양지로 쓰려고 거액을 들여 지은 것이다.

    하지만 박동선씨의 측근은 ‘신동아’와의 통화에서 박씨가 김정남에게 도미니카 여권을 주선해줬다는 설을 전면 부인했다. 그의 말.

    “박동선 회장은 지금 해외 체류중이다. 파리와 워싱턴 등지를 거쳐 5월 말경 한국에 들어올 계획이다. 현재 정확한 소재지는 나도 모른다. 박회장이 이쪽으로 연락을 해올 뿐 내가 박회장에게 연락할 방법은 없다. 박회장이 김정남의 여권을 만들어주었다는 얘기는 말도 안 된다. 그가 도미니카 여권을 가지고 있었고 박회장의 집이 도미니카에 있기 때문에 나온 루머 같은데, 박회장은 도미니카에 1년에 한 두 번 휴양차 갈 뿐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김정남의 여권을 만들어준단 말인가? 박회장이 북한에 드나드는 것은 인삼합작사업 같은 용무가 있어서지, 그런 일 때문이 아니다. 루머에 불과하다.”

    김정남 사건이 터진 뒤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김정남과 함께 체포된 여인 두 명 가운데 선글라스를 낀 세련된 외모의 여인은 김정남의 애인 김미진(29·일본 이름 ‘미치코’)이라고 밝혔다. 이 소식통에 따르면 김미진은 북한의 고려항공회사를 운영하는 김창선의 딸로 일본에서 공부했다. 캐나다, 중국, 일본에 사는 김정남의 친구들이 평양을 방문하면 김정남이 김미진을 데리고 나와 통역을 하거나 안내역을 시킨다는 것이다. 이 소식통은 아이의 손을 잡고 있던 여성은 나이가 33세이며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보모라고 전했다.

    김정일의 숨겨진 아들 김남일

    그러나 5월15일 일본 법무성의 마치다 유키오(町田幸雄) 입국관리국장은 중의원 예산위에서 민주당 가이에다 반리(海江田萬里) 의원의 질의에 아이의 손을 잡고 있던 여인이 김정남의 부인이며 이름은 ‘신정희’라고 답변했다. 선글라스를 낀 여인은 신정희의 친척인 ‘이경희’라고 밝혔다. 마치다 국장에 따르면 두 사람의 여권에 신정희는 1971년 9월7일, 이경희는 1968년 7월2일로 생년월일이 기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언론에 공개된 사진을 보면 줄무늬 상의를 입고 아이 손을 잡은 여인(일본 법무성이 신정희라고 밝힌 여인)은 이중턱이 생길 정도로 목에 살집이 잡혔고, 복장과 외모도 1971년생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만큼 나이 들어 보인다. 반면 일본 법무성이 이경희라고 밝힌 여인은 1968년생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젊어 보인다. 두 사람의 생년월일이 바뀐 것이라면 모를까. 그리고 앞서 밝힌 대로 이들의 여권은 모두 차명 여권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여권에 적힌 이름과 생년월일을 그대로 믿을 수도 없다. 김정남만 해도 여권에 기재된 이름은 중국인 ‘팡시온’이었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일본 법무성 당국자가 신정희와 이경희라고 확인했기 때문에 달리 추측할 수는 없다. 다만 ‘김미진’이라는 제3의 인물을 상정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일본 공안 당국은 어린아이의 이름만은 밝히지 않고 있다. 외신과 국내 언론은 야구점퍼와 검정 바지, 하얀 운동화를 신고 있던 7세 가량의 어린이를 지금까지 김정남의 아들로 추정했다. 그러나 ‘신동아’는 이 아이와 관련, 뜻밖의 장소에서 새로운 정보를 입수했다. 이 정보에 따르면 아이는 김정남의 아들이 아니라, 김정일의 숨겨진 아들 ‘김남일(가명일 가능성이 큼)’이다. 이 정보를 제공한 것은 프랑스 파리 7구 세브르가(街) 42번지에 있는 라에넥병원 관계자다. 이 병원은 한국으로 치면 박정희 대통령의 시신이 안치된 수도육군병원처럼 프랑스의 고위 공무원이나 군인들이 이용하는 병원이다. 미테랑 대통령도 이곳에서 사망했다. 프랑스의 VIP들이 이용하는 병원인 만큼, 이곳은 환자들에 대한 보안이 매우 철저하다.

    프랑스는 국교가 없거나 테러국가로 지정한 나라의 요인들조차 신병치료를 요청할 때는 관대하게 대처해왔다. 프랑스는 1993년에도 이란 외무장관 타렉 하지즈를 극비리에 수술해준 적이 있다. 1992년에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산하 단체의 총수 하바시의 수술 역시 ‘인도적 차원’에서 해주기도 했다.

    라에넥병원은 1994년 10월27일 북한의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이 폐암을 치료하기 위해 들러 한국에 알려진 곳이다. 당시 ‘신동아’는 현장에 기자를 급파해, 병원 관계자와 파리의 국제기구에 몸담고 있던 북측 인사 Q씨를 단독 인터뷰해서 기사를 내보낸 바 있다(1994년 11월호 참조). 이 병원 관계자에 따르면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을 치료한 후에도, 이 병원은 북한의 VIP들을 치료했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이 병원이 의사를 평양으로 파견해 김정일을 치료한 적도 있다고 밝혔다.

    2000년 11월경, 북한측이 라에넥병원에 특별한 ‘요인’이 심장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방문할 테니 치료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병원측은 북한측이 보낸 환자의 신상기록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요인’이 7세밖에 안 된 꼬마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수행하는 경호원이 수십 명이나 있었다.

    병원측은 심상치 않은 인물임을 깨닫고 ‘김남일’이라는 이름을 쓰는 이 어린 환자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사방에 수소문했다. 그 결과 ‘김정일의 알려지지 않은 아들’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어린 환자 ‘김남일’은, 사정이 생겨 이 병원에 와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라에넥 병원에 신상기록을 보낸 어린이와 도쿄에 김정남과 함께 나타난 어린이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다.

    최악의 이미지로 국제 무대에 데뷔한 김정남은 5월4일 베이징 공항에 도착한 뒤, 다시 사라졌다. 그 뒤 곧바로 평양으로 돌아갔다, 며칠 있다 돌아갔다는 등 추측이 분분했다. 어쨌든 평양으로 돌아간 김정남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난 3월 김정일의 생일 무렵 평양을 방문해 김정남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하고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낸 A씨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김정남과 함께 어울리는 그룹이 20여 명 있는데, 그들은 김용순, 장성택, 조명록 등 북한 최고 수뇌부의 자녀들이라고 한다. 이들은 중국으로 치면 ‘태자당’과 비슷한 존재인 것 같다.

    황장엽씨가 망명하기 전에는 황씨의 아들도 이 그룹에 속해 있었으나, 지금은 지방 농촌 일터로 전출되었다고 한다. 황씨의 아들은 사실 총살 대상자였으나 김정남이 보호하여 총살을 면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남은 평양의 외교가에 있는 평양 주재 러시아대사관 옆에 큰 집을 갖고 있는데, 이 집에서 최고위층 자녀 그룹과 자주 파티를 연다. 이 집은 군인들이 경호하고 있다고 한다. 집 안에는 커다란 TV (CNN과 일본 TV, 한국 TV까지 볼 수 있음)와 일본·미국의 포르노필름, 가라오케, 골프 세트, 사냥총, 당구대, 값비싼 양주까지 갖춰져 있다고 한다. A씨에 따르면 김정남은 음악 감상을 좋아하는데 일본 TV를 보다가 A씨 일행에게 일본의 젊은 가수 CD를 사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김정남은 평소에 벤츠380을 타고 다니는데, 그가 이 차를 타고 나갈 때는 앞뒤에 호위차량이 붙는다고 한다. 그는 요트도 가지고 있다. 이 요트를 타고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호사스러운 생활을 증명하듯 일본 나리타공항에서 체포될 때 김정남의 가방 속에는 약 10만 달러가 있었으며, 지갑 속에도 3cm 두께의 100달러 지폐, 일본 1만 엔권이 가득 들어 있었다. 김정남은 금목걸이를 걸고, 손목에는 롤렉스 백금시계를 차고 있었다. 여성 2명이 든 핸드백은 루이비통과 이탈리아 제품이었다.

    김정남은 북한에서 해외수출을 목적으로 개발중인 소프트웨어 사업 개발 분야에서 주도적 임무를 맡고 있다. 미확인 보도에 따르면 그는 2년 전 엘리트 컴퓨터 전문가를 양성할 목적으로 설립한 한 정부 위원회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북한은 소프트웨어 공학을 촉진하고 해외 정보기술(IT)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평양에 대형 컴퓨터센터를 설립했다. 소프트웨어 개발은 돈보다는 두뇌에 더 의존한다. 북한이 이 분야에 공을 들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김정남은 ‘작은 장군’으로 불리며 인민군 대좌(한국군의 대령에 해당) 계급장을 단 인민군복을 입고 김일성종합대학 대학원에 재학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그가 맡고 있는 직위와 관련해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컴퓨터위원회 위원장’, ‘인민군 보위사령부 핵심간부’, ‘국가안전보위부 간부’, ‘노동당 총무부 간부’ 등 소문만 무성하다.

    A씨에 따르면 북한은 최근 스커드C형 미사일 생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 미사일을 중국과 홍콩, 스위스를 통해 거래하고 있는데, 이 거래를 김정남이 직접 나서서 지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남은 공식적으로 무슨 직위를 맡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자신의 집을 방문한 조총련 인사들에게 “미국놈이 뭐라고 해도 우리는 무기를 만들어야 살 수 있다. 그래서 무기 부속품을 수입해야 한다. 미그기도 우리가 조립해서 수출한다. 중국과 홍콩, 스위스에 무기를 구입하는 내 사무실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하면서 그는 조총련의 젊은 그룹들에게 스커드C형 미사일 부품과 컴퓨터칩 등을 사달라고 주문했다는 것이다. 김정남은 또 하늘을 향해 발사 태세를 취하고 있는 스커드C 미사일 3기가 있는 사진을 보여주며 “판로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만약 판로가 확보되면 자신에게 모든 사항을 직접 연락하라고 했다는 것.

    어릴 때부터 외국 유학

    이날 그가 판로를 찾아달라며 보여준 무기 사진들에는 스커드C 미사일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종류가 다른 미사일 여섯 가지, 견착식 대공포(사진을 보고 구체적으로 어떤 제품인지 식별하지 못했음), 지뢰(역시 구체적인 종류를 식별하지 못함), 미그기(사진을 본 사람이 기종을 식별하지 못함) 등이었다. 김정남은 또 A씨 등 친구들에게 김일성대학에 있는 정보통신센터와 현재 건설중인 북한의 IT센터를 구경시켜 주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김정남은 중국을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으며, 베이징에는 고급 아파트까지 사놓고 골프와 사냥을 즐긴다고 한다. 또 베이징에서 조선족 고위관리의 딸 및 또 다른 중국여인과 동거하고 있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김정남을 체포해서 수사한 일본 법무성, 검찰, 경찰, 출입국관리소 조사반 등 4개 부처 합동수사반의 조사에서 드러나고 있다.

    김정남이 자유롭게 외국을 돌아다니는 것은 그가 어릴 때부터 외국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김정남은 평양에서 교육을 받으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되기 쉽고, 앞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치를 하려면 바깥 세상을 알아야 한다며 어릴 때부터 외국 유학을 했다.

    김정남의 이종사촌형인 이한영씨가 쓴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에 따르면 김정남의 유학 대상국으로 맨 처음 떠오른 나라는 러시아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러시아는 북한이 잘 아는 나라여서 크게 배울 게 없다는 것이었다.

    남조선 통일까지 염두에 둔다면, 교육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받는 게 좋다는 의견이었다. 그래서 북한 당국은 자본주의 국가 가운데서도 교육시스템이 가장 잘 되어 있다는 나라를 고르다가 스위스를 선택했고, 그중에서도 제네바국제학교를 골랐다.

    제네바국제학교는 스위스에서도 가장 명망 있는 학교다. 인도의 간디 등 저명한 인물들이 거쳐간, 역사와 전통이 깊은 학교다. 한 반 정원이 10명 이내이고, 교육은 원탁에 둘러앉아 이루어진다. 등록금이 비싸서 한 달에 1000달러가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에서도 아무나 자본주의 국가에 유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김정일의 직계가족이 아니면 꿈도 꿀 수 없다. 김정일 직계 가족 중에서도 자본주의 국가에 공부하러 간 것은 김정남이 최초였다. 다른 로열패밀리들은 대개 러시아나 체코, 폴란드, 중국에 유학간다. 이한영씨는 김정일과 고영희의 아들인 김정철(20)이 스위스 베른의 국제학교에 다녔다고 회고했다.

    김정남이 제네바국제학교에 입학하던 날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 국제학교답게 학생들이 각기 제 나라 국기를 들고 입학식에 참석했는데, 김정남만 국기를 안 들고 서 있었던 것이다.

    당시 스위스 주재 한국 대사가 노신영씨였는데, 입학식에 왔던 노대사가 국기 없이 서 있는 ‘동양 어린이’를 보고 다가갔다. 뒤에 서 있던 경호원들이 바짝 긴장했지만, 노대사는 어린 김정남에게 다가가서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김정남은 큰 소리로 “피양(평양)서 왔시요”라고 대답했다.

    노대사는 깜짝 놀랐으나 김정남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갔다고 한다. 김정남은 이때부터 프랑스어를 배웠다. 이한영씨가 81년 여름방학 스위스에 갔을 즈음 김정남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이때 김정남과 이한영씨는 스위스는 물론 오스트리아 빈 등 여러 곳으로 놀러다녔는데, 김정남이 계속 통역을 했다고 한다.

    김정남은 제네바에서 2년 정도 공부하다가 1982년 봄 귀국했다. 집 부근에서 남한 자동차가 눈에 띈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후 김정남은 모스크바의 프랑스대사관 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84년께 그는 다시 제네바로 가 국제학교에 편입했다. 10대 시절, 그의 제네바 유학은 순탄하지 못했다. 학과공부에 흥미를 붙이지 못했고, 또래 친구를 사귀는 법도 몰랐다고 한다. 사춘기에 외로운 외국생활을 하다가 한때는 술과 여자에 빠져들었다. 결국 그는 유학생활을 다 마치지 못하고 1988년 다시 평양으로 돌아갔다.

    김정남 사건은 향후 남북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미국은 현재 북한을 망나니국가, 불량국가 또는 테러집단으로 규정하고 있다. 김정남 사건으로 이런 인식은 더욱 굳어질 가능성이 크다. 최고 권력자의 아들이 떳떳하지 못하게 불법적인 방법으로 외국을 출입하는 것을 보고 전세계는 북한정권이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권력집단’이라는 인식을 재확인했다. 더구나 유럽연합(EU) 의장국인 스웨덴의 페르손 총리가 방북하고 김정일의 서울 답방이 준비되고 있는 시점에 터진 이번 사건은 남북 관계와 한국의 여론에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지난해 6·15 남북 정상회담 이후 우리 국민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 동안의 이미지와는 달리 매우 명석하고 대화가 가능한 사람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보고 그런 인식은 많이 달라졌다. 1995년 이후 수백만이 굶주리던 북한의 최고권력자 아들이 최고급 의류와 액세서리를 걸치고 가방에 달러 다발을 가득 채운 채 여행을 다닌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

    한 북한 전문가는 “이번 사건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런 부도덕한 나라에 현금과 비료, 쌀을 주어서 되느냐, 또 이런 정권과 진지한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도덕적으로 위험한 행동이 아닌가 하는 반발 여론이 형성될 것이다”고 말했다.

    북한은 이번 사건으로 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사건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커다란 돈줄 가운데 하나를 끊어놓았다. 북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던 현대의 지원마저 시들해진 마당에 이는 심각한 타격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나마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해 친아들을 동원해 외화를 조달하고 있었는데, 그 존재마저 노출되었다는 것은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서방의 대북한 공작은 하루 이틀 동안 이뤄진 것이 아니다. 이에 대응하는 김정일 정권의 운신 폭은 과거보다 점점 좁아지고 있다.

    한·미·일 간에 전략 정보가 공유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심각한 문제다. 이번 사건은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진행된 한·미 간의 불협화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라는 지적이 있다. 이번 사건에 대한 정보를 최초로 흘린 게 정말 CIA라면 부시 행정부는 한반도 정책을 ‘대외정책’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공작’ 차원으로 접근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는 한마디로 햇볕정책을 펴는 김대중 정부에 점잖게 대응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북한 전문가들은 김대중 정부가 한반도 문제에 중국, 러시아, EU를 끌어들이는 것에 대해 미국은 자신의 대북한 정책을 고립화하려는 의도로 본다고 말한다. 유감스럽게도 김정남이 도쿄에서 붙잡힌 시기는 페르손 총리가 남북을 오가며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던 시기였다.

    미국 사정에 정통한 한 정보 관계자는 “지난해 9월 초 북한 최고인민회의 김영남 상임위원장을 심하게 몸수색해서 미국 방문을 취소하게 만든 것은 클린턴의 의사와는 관계없는 CIA의 공작이었다. 김정남 사건의 의미도 이를 연상하면 된다”고 말했다.

    한 북한 전문가는 부시 행정부가 ‘김정일의 국가 권력을 해체하는 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김정남 사건은 그 신호탄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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