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7월호

대반격 노리는 ‘家臣군단’ 동교동계

  • 김기영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ades@donga.com

    입력2005-05-20 15: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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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반격 노리는 ‘家臣군단’ 동교동계
    2001년 6월14일 오후 2시 서울 마포 일신빌딩 8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오른쪽 복도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사무실이 눈길을 끈다. 같은 층의 다른 사무실들이 두터운 철문으로 닫혀 있지만 유독 이 사무실만은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아예 출입문이 유리문으로 돼 있어 내부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구조다.

    들어서면 정면에 안내데스크가 있고 좌우로 유리 칸막이로 구획된 제법 큰방들이 배치돼 있다. 마치 어느 벤처기업 사무실을 연상케 하는 산뜻한 인테리어. 그러나 넓은 공간에 비해 어딘가 허전한 느낌이다. 주인은 없고 객들만 진치고 있는 묘한 사무실. ‘딱’ ‘딱’… 경쾌한 마찰음이 들린다.

    입구 오른편 휴식공간인 듯한 방에 50~60대 중년 남자 4명이 짝을 지어 마주앉아 바둑을 두고 있다. 또 다른 남자 하나는 바둑을 두는 사람들 사이를 서성이며 훈수를 두고 있다. 그 맞은편 방에 들어서자 여사무원이 보인다. “이 방 주인은 언제 오느냐”는 질문에 여사무원은 “오시는 날도 있고 안 오시는 날도 있어요”라고 간단하게 대답한 뒤 제 볼일을 본다.

    이곳이 바로 동교동계의 계보사무실인 ‘내외연구소’다. 그리고 방의 주인은 민주당 권노갑 전최고위원, 지금 정치권에서 가장 화제를 몰고 다니는 바로 그다. 중년 남자 몇이서 한가롭게 바둑을 즐기던 그 날, 권 전위원은 이 사무실을 찾지 않았다. 오후 늦도록 바둑돌 놓는 소리만 요란하게 건물에 울려 퍼졌다.

    권노갑의 2인자 처신 원칙



    그러면 권 전위원이 모습을 나타낼 때 내외연구소의 풍경은 어떨까. 민주당 한 고위 관계자는 지난 3월 개소식 직후 마포사무실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지난 3월달 개소식 직후였습니다. 아침 10시경 권 전위원이 나타나기 전부터 그를 만나러 온 정객들로 50여평 사무실이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민주당 현역의원들도 몇 명 있었습니다. 다들 내로라하는 사람들인데 한참을 기다린 끝에 5분 남짓 권 전위원과 면담하고 나오는 모습도 눈에 띄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정권에서도 대통령 다음의 실력자는 있었다. 전두환 정권 때는 노태우씨가 2인자였고, 노태우 대통령 때는 박철언 전의원이, 김영삼 대통령 때는 김현철씨가 각각 막강 2인자로 군림했었다. 김대중 정권의 2인자는 누가 뭐라 해도 권노갑 전위원이다.

    그러나 권 전위원은 역대정권의 2인자들과는 그 처신에서 뚜렷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호시탐탐 1인자의 자리로 승격을 꿈꾸는 과거의 2인자들과 달리, 권 전위원은 1인자 자리를 넘보지 않는 유일한 2인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인자이면서 1인자의 자리를 넘보지 않는다는 원칙, 바로 이 점이 김대통령이 권 전위원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결정적 이유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비서 출신인 한 측근인사의 전언.

    “YS와 DJ 두 사람 모두 가신을 뒀지만 YS는 가신그룹 내부의 경쟁과 서열 상승을 위한 갈등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편이었습니다. 중간보스의 자율성을 보장해줬다는 거죠. 그러나 DJ의 동교동계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동교동계가 다른 정치집단보다 정치적 탄압을 많이 받기도 한 까닭에 DJ를 정점으로 철저히 종적 질서를 강조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 두 가신그룹의 정치문화의 차이는 2인자들의 처신에도 영향을 끼쳤죠. 김대통령이 권 전위원에게 어느 정도 권력을 인정할 뿐 아니라, 주변의 비난 여론에도 권 전위원을 쉽게 배척하지 않는 데는 언제나 자신의 역할에 한계를 정하고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은 권 전위원의 처신이 결정적 이유로 작용했다고 봐도 될 겁니다.”

    DJ로부터 정치를 배운 권 전위원은 자신을 따르는 정치인들과의 관계에서도 철저히 DJ스타일을 따라하고 있다. 어쩌면 DJ보다 더 DJ다운 방식으로 사람과 조직을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의 비서출신 인사의 말.

    “지난 연말에 권 전위원의 비서들이 송년회를 겸해 한자리에 모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올 6월초에 다시 모임을 갖기까지 한번도 비서진끼리 자리를 같이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사이 권 전위원이 정치적으로 어려운 적도 있었는데, 그럴 때도 비서출신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한다거나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비서진들과 권 전위원 사이가 소원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권 전위원과 비서들 사이에는 1대1로 수시로 의견교환이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권 전위원이 필요한 사항을 물어오면 이에 답하는 식으로 권 전위원과 비서들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되고 있었던 거죠. 그러니 비서들 사이에 횡적인 모임이 필요가 없는 겁니다. 권 전위원을 정점으로 한사람 한사람을 1대1로 관리하는 방식, 이런 사람 관리는 전형적인 김대통령 스타일인데 그걸 그대로 배운 거죠.”

    권 전위원은 내외연구소 외에 마포 인근에 별도의 사무실을 두고 있다. 이곳에서는 젊은 비서진들이 모여 권 전위원의 비서업무 및 정무업무를 돕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권 전위원의 이런 사람관리 방식은 최근 민주당 내분과정에서 또 다른 의미에서 주목을 받았다. 소장파 의원들은 당초 민주당 내 ‘구악(舊惡)’으로 동교동계를 지목했지만 권 전위원을 제외하고는 그 실체가 분명하지 않았다. 성명파 의원들마다 거론한 쇄신대상 인사가 달랐는데, 여기에는 김대통령에서 권 전위원을 거쳐 개별 정치인으로 이어지는 독특한 동교동의 조직문화 탓에 집단으로서의 동교동계 영역이 불투명한 것도 한몫을 했다. 어디까지가 동교동계인지, 누가 동교동계인지 사람마다 평가가 다른 까닭에 표적이 일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권 전의원 측근인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상도동과 달리 동교동계를 표현할 때 ‘범(凡)동교동계’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교동계라고 내세우는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핵심 동교동계와는 별도로 ‘범’이라는 접두사가 붙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런 저런 인연으로 DJ와 인연을 맺은 비서 출신만 해도 300명이 넘다 보니 이런 현상이 나타난 거죠. 그만큼 동교동계는 권 전위원과 김옥두, 한화갑 의원 등 몇 명을 제외하고는 특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세력이 방대합니다.”

    우리나라 가신정치의 대표는 동교동계와 상도동계다. 그러나 두 가신집단의 문화는 많이 다르다. 민주당 이윤수 의원은 “동교동계는 상도동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치적 탄압을 심하게 받았다. 그 때문에 동교동계의 결속력은 상도동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수장인 YS, DJ 두 김씨의 조직관리 방식의 차이가 조직문화의 차이를 가져왔다는 게 중론이다.

    상도동계가 YS 밑에 고만고만한 중간 보스급을 다수 배치하고 그들 나름의 독자영역을 인정하는 횡적 조직이라면, 동교동계는 김대통령에서 권 전위원까지는 분명한 선이 있지만 그 이하는 권 전위원이 ‘장형’으로 지휘하는 종적인 조직구조를 갖추고 있다. 동교동계 정치인들 사이에 ‘노갑이형’이라는 호칭은 자연스럽지만 ‘옥두형’ ‘화갑이형’이라는 호칭은 어딘가 낯선 것도 이 때문이다.

    통상 2인자는 1인자인 대통령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대통령을 만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사람들로서는 2인자를 ‘알현(謁見)’하는 것만으로도 대리만족을 누릴 수 있다. 그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과 곧바로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런 까닭에 2인자에게는 돈과 사람이 쏠리게 마련이다. 돈과 사람은 곧 권력으로 외화(外化)된다. 사람이 넘쳐나는 마포사무실 풍경은 김대중 정권의 권력 쏠림 현상이 어느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정치권의 분쟁은 바로 권력의 소유를 놓고 벌어진다. 현재 진행중인 민주당의 정풍(整風)파동도 사실 따지고 보면 권력의 독점에 대한 소외계층의 반발이 그 본질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문 하나. 과연 권노갑 전최고위원으로 대표되는 동교동계는 실제 여권의 최대 권력집단이었느냐 하는 점이다. 권 전위원과 동교동계로 돈과 사람이 쏠리는 현실을 인정하더라도 과연 그것이 소장파들로부터 “비선그룹의 전횡”이라는 비난과 함께 집단반발을 불러올 만큼 심각한 수준이었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석은 엇갈린다. 동교동계와 민주당 소장파 인사들 사이의 시각 차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다.

    먼저 소장파의 시각. 문제를 제기한 서명파 의원들은 그 누구도 공개적으로 권 전위원과 동교동계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긴장감을 늦추고 사석에서 마주하면 권 전위원의 인사독점을 비난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익명을 요구한 한 초선의원은 “권 전위원의 마포사무실이 뭐 하는 곳이냐. 한마디로 동교동계 사람들 취직 자리 알선하는 곳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초선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과장급까지 낙하산 인사”

    “그 사무실 한편에서 ‘이번에 임기가 끝나는 정부 산하기관의 감사 자리에는 누구를 보내고 또 다른 정부산하기관 이사에는 누구를 보내고 하는 식의 논의가 오간다고 합니다. 정부 산하 공기업 인사가 이곳에서 이뤄지다 보니 동교동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면 권 전위원의 ‘눈도장’을 찍는 일에 결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곳에 사람이 모이고 돈이 모이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정가에서는 정부산하기관 인사에 권 전위원의 핵심측근인 L 의원과 K 전의원 등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 의원들을 거쳐 최종적으로 권 전위원에게까지 인사안이 전달된다는 것이다.

    개각이나 청와대 비서진 개편 등 굵직한 인사의 경우 마포사무실 같은 공개된 장소에서 거론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장차관이나 청와대 비서진 등 요직인사에서도 권 전위원의 영향력이 미친 흔적이 드러나는 상황이고 보면, 마포사무소와 그 사무소의 실질적 주인인 권 전위원의 파워는 달리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다.

    정부산하기관의 한 관계자는 “공기업을 대상으로 한 낙하산 인사가 김대통령의 임기 말로 접어들면서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YS정권 때는 낙하산 인사가 공기업의 ‘계장급’ 자리까지 밀고 들어왔다. 솔직히 표현하면 지금까지 김대중정권의 낙하산 인사의 정도는 YS때만큼 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과장급’까지 낙하산 인사의 표적이 되고 있고 시간이 갈수록 그 횟수가 잦아지고 있어 직원들 사이에 불만 요인이 되고 있다”고 귀띔했다.

    권 전위원과 동교동계의 인사독점을 고발하는 이런 주장과 달리, 당사자인 동교동계는 “실제 내막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고 반발한다.

    권 전위원의 한 측근인사는 “솔직히 권 전위원의 추천으로 정부산하기관 인사가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겠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아무리 권 전위원의 추천이라도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엉뚱한 자리를 차지하는 식의 무리한 인사는 없었다”고 반박했다.

    “얼마 전 제가 잘 아는 사람이 권 전위원을 통해 정부산하기관 간부직에 추천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해당 정부산하기관 쪽에서 일정한 자격요건을 갖출 것을 요구했고, 그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그 사람은 결국 그 기관에 취업을 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제 아무리 권 전위원의 추천이라도 ‘안 될 사람은 안 되는’ 것이 요즘의 분위기입니다. YS정권 때보다 그런 면에서는 투명해진 겁니다. 낙하산 인사라고 해서 능력과 상관없이 아무나 채용하던 시절은 지나갔고 권 전위원과 동교동계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무리한 인사청탁은 사라지고 있는 셈이죠.”

    실제 이 인사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얘기들도 들려온다. 최근 한 경제부처의 장관은 사석에서 “권 전위원의 부탁이라도 10번 가운데 한 번 들어줄까 말까다”고 말해 주위사람을 놀라게 했다.

    여권의 한 중진의원은 “지난해 12월 정동영 최고위원으로부터 2선 퇴진 요구를 받고 물러난 이후, 비록 마포사무실을 내고 정치 일선에 돌아왔지만 권 전위원의 파워가 예전 같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치권에서 권 전위원의 힘에 대한 평가는 앞서 중진의원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김대통령 집권 초기만 해도 그를 통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없을 것 같던 여권 내부 분위기도 최근 들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이번 서명에 참여한 민주당의 한 초선의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권노갑 전최고위원과 한화갑 최고위원, 두 사람은 앞으로 다른 정치행보를 걸을 겁니다. 권 전위원은 김대통령과 정치적 운명을 함께 할 사람입니다. 김대통령이 물러나면 함께 물러설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건 권 전위원의 김대통령에 대한 충성심과 지금까지 김대통령이 정해준 권력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은 정치스타일로 봐 자연스런 결과죠. 그러나 한최고위원은 김대통령 임기 뒤에도 자립할 것으로 보입니다. 당사자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런 두 사람의 처지의 차이가 민주당 갈등사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각차이자 현재 드러나는 동교동 신구파 갈등의 근본이유입니다.”

    이 초선의원은 김대통령과 정치적 공동운명체로 엮인 권 전위원과 동교동계로서는 대통령의 레임덕이 곧 자신들의 레임덕으로 이어지는 숙명을 피할 수 없다고 진단했다. 이런 현실을 알기에 대통령의 레임덕을 막아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이어가려는 동교동의 무리수가 안동수 전법무장관 인사파문과 같은 파행을 초래한 또 다른 원인이라는 설명이다.

    한마디로 서명파들로부터 지탄받은 동교동계의 권력과 인사의 독점현상은, 역으로 그만큼 동교동계가 느끼는 위기감이 심각하다는 반증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소장파의 공세에 직면한 동교동계의 정국 돌파전략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풍을 요구하고 나선 소장파들의 동교동계 정국 전망에 대한 반발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앞서의 소장파 의원은 동교동계의 정국인식을 이렇게 비판했다.

    “동교동계의 중심은 김대통령입니다. 김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는 것이 그들의 지상과제입니다. 10%대까지 떨어진 김대통령의 인기를 회복하는 것이 동교동계의 목표죠. 그러다 보니 당보다는 김대통령과 청와대 중심의 정치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소장파들의 목표는 민주당 정권을 재창출하는 겁니다. 회생불능 상태인 김대통령의 인기회복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김대통령과 당이 결별하는 한이 있더라도 당 중심으로 정권재창출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김대통령을 정치적 사고의 중심에 놓는 한 동교동계의 정국인식은 변화를 요구하는 당내 소장파들의 요구와 대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의원의 주장이다. 그러면 당사자인 동교동계 인사들은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동교동계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DJ없는 동교동계’의 앞날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 한 관계자의 말.

    “80년대 이후 등장한 한국의 정치집단으로는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민정계 등을 꼽을 수 있는데 민정계는 여전히 정치세력으로서 생존해 있습니다. 반면 상도동계는 이런 저런 이유로 뿔뿔이 흩어져 정치세력으로서 그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80년대를 풍미했던 두 집단이 오늘날 저렇게 처지가 갈라진 가장 큰 이유는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느냐 여부입니다. 민정계는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을 거치며 정권을 재창출하는 데 성공했고, 이회창 총재의 한나라당에서도 당권을 사실상 장악한 주류세력입니다.

    반면 상도동은 김영삼정권 초기 현철씨와의 갈등으로 김덕룡 의원 등 당시 2인자 그룹으로 성장하려던 세력이 큰 타격을 입었고, 김영삼정권 말기에는 각개 약진을 노리던 최형우씨가 병으로 쓰러지고 서석재씨가 당적을 옮기는 등 분열의 길을 걸었습니다. YS 스스로도 그렇게 노력했지만 후계자를 배출하지 못했고 상도동은 결국 당권도 정권도 잡지 못했습니다. 정권을 못 잡더라도 당권만은 놓지 않아야 정치세력으로서 명맥을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민정계와 상도동계 역사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교동계도 이 점을 눈여겨보았을 겁니다.”

    ‘당권’과 ‘대권’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놓지 않아야 정치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동교동계는 과연 무엇을 선택할까. 정치권에서는 동교동계의 1차 목표를 당권장악으로 보고 있다. 소장파 의원들의 성명파동에 대해 동교동계가 분노한 것은 이들이 당권장악을 노리고 ‘거사’를 일으켰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석에서 만난 동교동계의 한 중진의원은 이번 파동을 “정동영이가 당대표 맡으려고 일을 저질렀다”고 흥분하기도 했다.

    동교동의 당권장악 움직임

    실제 이번 정풍파동이 있기 직전, 권노갑 전최고위원과 한광옥 청와대비서실장 두 사람이 힘을 모아 민주당을 장악하려는 시도들이 동교동계 내부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때 정가에 파다했던 ‘한광옥 대표설’의 진원지가 바로 동교동이었다는 얘기다.

    동교동계의 시선이 당권장악 쪽으로 쏠려 있다는 사실은 동교동계가 스스로 대권주자를 내놓지 못하는 현실과도 관련이 있다. 최고위원 경선 전당대회와 대선후보 선출 전당대회를 2002년 1월과 7월 이후로 각각 분리해 열자는 권전의원 등 동교동계의 주장에는 당권장악을 1차 목표로 삼은 동교동계의 속내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대권주자를 배출하지 못하는 정치세력으로서 불가피하게 당권을 장악한 이후 대선후보 선출에서 주도권을 쥐는 것은 물론, 정권재창출과 관계없이 김대통령 이후에도 살아남으려는 동교동계의 숨은 계산으로 보인다.

    동교동계 인사들은 이런 지적에 대해 “정치세력으로서 당연한 것 아니냐”라는 반응을 나타내기도 했다. 권 전위원측은 “권 전위원도 현실정치인이다. 정치인으로서 김대통령 임기 이후 당의 얼굴로 남고 싶은 욕심이 왜 없겠느냐”고 반문한다.

    지난 연말, 권노갑 전최고위원의 2선 퇴진 이후 김중권 대표체제가 등장하면서 동교동은 당의 요직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3·26개각과 청와대 비서진 개편을 통해 동교동은 청와대 비서실을 사실상 장악했다. 이어 권 전위원은 마포사무실을 열며 본격적으로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소장파가 반격을 가한 것이 지금까지 민주당내 권력투쟁의 큰 줄거리라고 할때, 당권을 두고 동교동과 소장파 간의 대결구도는 앞으로 보다 치열하게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당권을 우선 장악하고 이를 근거로 대선주자 결정과정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동교동계의 구상이 분명하게 드러난 이상, 민주당의 권력투쟁은 내부 갈등에서 본격적인 권력투쟁으로 비화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뭉쳐야 산다”는 동교동계의 세결집 현상도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지난 2월 동교동계는 김홍일 의원의 주선으로 단합모임을 가졌다. 이날 모임은 지난해 8월 전당대회 때 권노갑 전최고위원과 한화갑 최고위원 두 사람의 갈등이 표면화된 이후, 연말 권 전위원의 2선 후퇴, 이어진 김중권체제의 등장 등으로 위축됐던 동교동계가 단합을 다지고 힘을 모으는 일종의 친목모임이었다고 한다.

    이후 모임을 정례화하기로 하고 3월에는 권노갑 전최고위원 초청으로, 4월에는 한화갑 최고위원 초청으로 모임을 가졌다. 4월23일 있었던 이 모임에서는 “2002년 대선에서 김대통령이 선택한 후보라면 그가 누구든, 개인적 이해와 관계없이 함께 움직이자”고 결의했다고 한다. 자신들의 정치적 미래의 선택권마저 김대통령에게 넘기는 동교동계 특유의 충직한 결론이었다.

    5월 들어서는 골프모임을 갖기로 했으나 5월초 ‘호화골프’ 사건으로 여론이 나빠져 이를 취소했다. 6월에는 이윤수 의원이 주최자가 돼 모임을 가질 예정이다.

    이 모임의 기본멤버는 동교동계 가운데서도 김대통령의 비서출신 현역의원들. 회원으로는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이윤수, 이협, 최재승, 박광태, 설훈, 윤철상, 김태식, 정세균, 김덕배 의원과 남궁진 청와대정무수석 등 20명 미만. 한 참석자는 “김대통령의 지지도가 땅에 떨어진 마당에 한때 비서들이었던 우리라도 뭉쳐 대통령의 지지를 올리고 단결해 대처해 나가자는 뜻에서 모임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권 전위원과 한화갑 최고위원 사이의 갈등이 변수이기는 하지만 동교동계 인사들은 “두 사람의 갈등은 지엽적인 문제일 뿐이며 동교동계는 공동목표를 앞두고 항상 행동통일을 해왔다”고 주장한다. 일단은 공동목표인 당권장악을 위해 동교동계가 힘을 모을 것이라는 게 정가의 대체적 관측이다.

    앞서의 비서모임 외에 최근 들어 이들 비서진 가운데서도 핵심 몇 명만 모이는 별도의 동교동계 모임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움직임의 이면에는 당권장악을 위한 동교동계 나름의 계산이 깔려있다는 게 정가의 대체적 시각이다.

    그러나 여권 일각에서는 이와 다른 해석을 내놓는 이들도 있다. 동교동이든 비동교동이든 민주당을 구성하고 있는 정치세력들이 갖는 속성상, 한쪽의 퇴출을 전제로 하는 당권투쟁이라는 극한 대결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민주당 내분 초기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이번 사건을 이렇게 진단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당내 갈등은 정확히 표현하면 ‘내부갈등’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권력을 한쪽이 독점하는데 대한 다른 쪽의 반발로 갈등양상이 빚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를 ‘권력투쟁’으로 보는 시각에는 반대합니다.

    권력투쟁이란 패배자의 퇴출을 전제로 한 싸움입니다. 정당에서는 ‘탈당’이나 ‘출당’과 같은 사태를 말하는데 이번 갈등에서 패한 세력이 당을 떠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한계가 분명한 싸움이라는 얘깁니다. 민주당에 자리잡은 어느 정치세력도 당 울타리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존재하기란 어렵습니다. 당을 벗어나는 순간, 사냥꾼의 먹잇감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싸움은 당내 분쟁 정도에서 그칠 거라는 얘깁니다.”

    민주당의 5대 그룹

    이 관계자는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현재 민주당의 당내 세력을 크게 5개 그룹으로 나눴다. 첫째그룹은 동교동 구파, 권노갑 전최고위원을 대표로 따르는 동교동계 인사들이 그들이다. 두 번째 그룹은 한화갑 최고위원을 구심으로 한 동교동 신파. 세 번째 그룹은 이인제 최고위원을 따르는 당내 중부권 인사들, 구체적으로 수도권과 경기·강원·충청지역 출신 인사들을 꼽을 수 있다. 네 번째 그룹은 김근태 최고위원과 노무현 전해양수산부장관을 따르는 개혁파.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소수이기는 하지만 김중권 대표를 구심으로 한 구여권 출신과 당내 영남권 인사들이다.

    그런데 이들 5대그룹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몇 가지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친 DJ세력’의 결집이라는 것이다. 과거 YS의 신한국당과는 달리 DJ와 정서적 유대감을 공유한 세력들의 결집이라는 점을 눈여겨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만약 대통령이 결단을 내린다면 결국 모두들 수긍할 것이라는 점은 민주당의 중요한 자산이다.

    둘째로 ‘반(反)이회창 세력’이라는 점이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와는 정치적 유대감을 찾아볼 수 없는 세력들이 민주당을 우산으로 모여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민주당내 5대그룹 누구도 이회창 총재가 집권할 경우 자유로울 수 없으며 ‘정권재창출만이 살길’이라는 묵시적 명제에 동의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당을 깨고 나가는 모험을 감행할 정치세력은 민주당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앞서의 청와대 관계자의 해석이다. 따라서 극한 대립 끝에 당이 깨지는 상황으로까지는 비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재미있는 것은 지난 5월말 안동수 법무장관 인선파문 때 비선조직 척결과 당 쇄신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던 초재선 의원들이 정치적 성향으로 보면 앞서의 5대 그룹에 골고루 흩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들 초재선들이 통일된 주장을 펴지 못하고, 쇄신의 대상으로 구체적인 인물을 적시하지 못한 것도 이들이 속한 당내 정치세력이 제 각각이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현재의 봉합국면이 앞으로 상당기간 이어질 것이라는 앞서의 청와대 관계자의 전망은 어느 정도는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사건 초기의 격렬했던 대립이 무색할 만큼 겉으로는 조용하다. 김대통령의 결단을 기다리고는 있다지만, 대격돌을 벌였던 양대 세력인 동교동계와 초재선 그룹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고 있다.

    전당대회가 격전장 될 듯

    상황초기 기세 등등하던 초재선 의원들도 요즘 들어 “일단 우리가 할 말은 했으니 결과(대통령의 결단)를 지켜보자”며 나서서 말하기를 꺼리고 있다. 동교동계 인사들 역시 뒷공론이 어떻든 면전에서 초재선 그룹에 대한 개별적 비난은 자제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갈등의 원인이었던 권력의 쏠림 현상이 시정되지 않은 현실에서 근본적인 사태해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현재로는 그 해결의 열쇠를 김대통령이 쥐고 있다.

    최근 부쩍 모임 회수를 늘리고 있는 동교동계의 심상찮은 움직임으로 미루어 시간이 지날수록 당권을 둘러싼 당내 갈등요인은 커져갈 것으로 예상된다. 내년 초로 예정된 민주당 전당대회는 ‘포스트 김대중’ 시대 선두주자를 꿈꾸는 민주당내 정치세력간의 사활을 건 격전장이 될 것 같다.

    ‘마지막 가신군단’ 동교동계가 생존을 건 승부수를 던질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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