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호

박정희, 윤보선에게 대장계급장 요구하다

  • 김준하

    입력2005-04-08 14: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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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소리를 들은 지 사흘이 지났다. 위험하고 주마등 같은 나날이었다. 장면 총리가 정권을 내놓고 순화동 자택으로 돌아감으로써 혁명위원회의 정권 인수가 완료된 것이다.

    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고 내각수반에 장도영 장군을 임명했다. 새로운 각료 명단도 발표했다. 거의가 현역 군인이다. 내각 수반은, 헌법 어느 구석에서도 그러한 직책을 찾아볼 수 없지만 따지고 보면 국무총리직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내각책임제도 대통령책임제도 아닌 전무후무한 국가의 지도체제가 탄생한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각책임제 헌법은 공중에 떠버린 것이나 다름없었고 대통령의 위상 문제가 청와대에서 논의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에게 비상계엄령 인준 요구

    헌법에 대통령은 민·참 양원 합동회의에서 재적 3분의 2 이상의 투표를 거쳐 선출하도록 규정돼 있었다. 그런데 대통령을 선출한 근거가 되는 민·참 양원은 모두 해체되고, 대통령이 임명한 장내각은 소멸되지 않았던가. 입법·사법·행정권은 최고회의가 접수(?)해버린 것이 아닌가.

    헌법이 공중에 떠버렸다는 이론이 차츰 힘을 얻고 있었다. 쿠데타 세력이 유린한 헌법의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국가를 대표한다’는 규정은 휴지조각이 된 것이 분명하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그 무렵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다. 최고회의가 전일 장면 내각이 결의한 비상계엄령의 인준안을 청와대로 이송해온 것이다. 그들이 아직 윤보선씨를 대통령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청와대에서는 양론이 있었다. 반송하자는 주장과 결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대통령은 후자를 택했다. 형식이야 어찌되었든 장내각이 의결한 계엄령을 장내각을 성립시킨 헌법상의 대통령이 인준 결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합헌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도장을 찍고 나서 바로 하야할 것을 결심했다.

    즉각 최고회의에 사람을 보내 하야의 뜻을 전하려고 장도영 내각수반이나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을 청와대로 오도록 요청했다. 자신이 하야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 사람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연락도 없었다. 그들은 18일에 있었던 육사생도들의 혁명지지 행진과 19일 아침에 벌어진 공사생도들의 같은 내용의 행진에 고무됐고, 장면 내각의 퇴진으로 혁명 성공의 축배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청와대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대통령의 하야 결의는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이미 작성한 대통령 하야성명을 방송국과 신문사에 배포했다. 대통령의 하야성명은 19일 오후 8시30분 방송국에서 전국민에게 공표됐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일종의 허탈감을 맛보았다. 성명을 발표하기 전에 야당인 신민당 당수 김도연 박사는 쿠데타측과 야당이 거국내각을 구성할 것을 인편을 통해 제안해왔다. 이른바 ‘군민(軍民) 거국내각’을 의미했다. ‘혁명, 즉 정권’이라는 야심에 불타 는 정치 군인들의 야욕을 이해 못하는 김당수가 대통령에게는 못내 서글프게 여겨졌다. 만일 쿠데타측이 헌법에 티끌만큼이라도 관심을 두었다면 각료 임명은 별 문제라 하더라도 내각수반에 대해서만은 국무총리 임면권자인 대통령과 한마디라도 상의해야 하지 않는가?

    대통령의 하야성명

    하야성명을 내면서 대통령은 몇 가지 점에서 위안을 느꼈다. 그중 하나는 살기 넘치는 쿠데타 와중에도 피를 흘리는 일이 없었다는 것, 둘째는 형식이야 어쨌든지 장내각의 의결을 거쳐 계엄령 선포를 인준해서 최소한의 합법성을 초지일관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 셋째는 초헌법적이라고 하지만 정부 형태가 어느 정도 갖춰지고 18일의 한미 공동성명으로 미국이 한국의 혁명을 조건부로 용인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방위체제를 그런대로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하야성명에서 먼저 국민에게 사과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원래 덕이 없는 사람이 국가원수직에 있어 국민의 마음과 생활을 편하게 하지 못한 책임이 크고 군사혁명을 발생하게 한 모든 국가적 현실을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께 부담시켰다는 것을 생각할 때 죄송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대통령은 “군사혁명이 발생하면서 무엇보다 귀중한 인명 희생이 없기를 바랐으며 순조롭게 수습되기를 바랐다”고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끝으로 대통령은 “군사혁명위원회 사람들은 충성을 다해 이 나라를 발전시키고 국민을 궁핍에서 건져내 주기 바란다”고 부탁의 말도 잊지 않았다.

    대통령의 하야성명이 나가자 최고회의가 긴급 소집됐다. 그들은 뜻하지 않게 대통령의 하야를 반대한다는 결의안을 내고 장도영 의장과 박정희 부의장을 청와대로 파견할 것을 결정했다. 나는 이 점에 대해 아직도 이해 못하고 있다.

    대통령이 하야하면 최고회의의장인 장도영 장군이 대통령권한대행을 겸직하면 될 것이고 (후일에 박정희 의장은 겸직했음) 공중에 떠버린 헌법에 비춰보나 현실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대통령은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장도영 의장과 박정희 부의장은 그날 밤 청와대를 찾아왔다.

    두 사람은 “앞으로 혁명과업을 수행하는 데 대통령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어 대통령의 번의를 촉구했다. 대통령은 두 사람의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나는 결코 여러분에게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한시도 이 자리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다”는 굳은 결의를 표명했다. 심야까지 계속된 3자 회담은 성과 없이 끝났다.

    두 사람이 물러간 후 10여 명의 기자가 대통령과 회견을 요청하면서 물러나지 않았다. 왜 하야성명을 냈느냐? 자의냐? 군대의 압력 때문이냐? 하야 후의 계획은 무엇이냐? 나는 기자들의 질문에 진땀을 뺐다. 나는 대통령의 승인을 얻어 다음날인 20일 오후 4시에 ‘하야 기자회견’을 갖기로 약속하고 기자들을 겨우 돌려보냈다. 또다시 밤을 새워야 할 판이다. 회견 내용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대통령의 하야문제를 논의하던 최고회의에서는 격렬하게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하루빨리 대통령을 끌어내려 구정권의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주장과 “혁명에 대해 아직까지 부정적이고 비협조적인 미8군이나 앞으로 전개될 대미 협상을 고려해 상징적이나마 대통령을 그 자리에 머물게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주장이 있었다고 한다.

    장도영 의장은 며칠 지나 대통령을 단독으로 만난 자리에서 “대통령이 그만둔다고 하면 빨리 그만두라고 해. 빠를수록 좋지 뭐”라고 박정희 부의장이 자기에게 말한 사실을 전한 바 있었다. 박정희 부의장의 생각은 하루빨리 구정권의 그림자를 말끔히 씻어버리고 ‘박정희 정권’의 꿈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대통령에게 하야의 번의를 권고했던 장도영 의장과 박정희 부의장은 말은 같았으나 속내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 아니었을까? 그날 밤 박부의장이 먼저 자리를 뜬 다음 다시 자리에 주저앉은 장도영 의장은 “대통령의 하야는 군사혁명 수행에 큰 차질을 빚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민정 이양도 순탄치 못하게 될 것”이라고 대통령의 재고를 요청했다. 그래도 대통령이 하야의 뜻을 굽히지 않자 자신의 속마음을 처음으로 드러냈다.

    “내 생각으로는 군정기간이 짧으면 3개월이고 길어야 6개월 정도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니 조금만 참고 견뎌달라는 것이 장도영 의장의 간곡한 요청이었다. 심야까지 계속된 대통령과 장도영 의장의 회담은 대통령의 강경한 태도 때문에 소득 없이 끝이 났다. 대통령의 하야는 굳어졌다.

    대통령은 장도영 장군이 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장관 등 모든 요직을 독점하고 있으나 그는 어디까지나 박정희 소장의 ‘대외용 간판’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박정희 소장의 표정에서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대통령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말로는 대통령의 하야를 말렸으나 속으론 하루라도 빨리 대통령이 하야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나는 밤이 새도록 하야 기자회견 준비를 마치고 20일 아침 일찍 출근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 않은 일이 청와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청와대 본관 뒤쪽 언덕에 자리잡은 팔각정에서 뜻하지 않게 김용식 외무부차관이 같이 따라온 윤석헌 비서관과 함께 대통령을 비롯해 청와대 비서실장과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김차관이 왔을까? 당시 나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5·16 후 30여 년이 흐른 어느날 나는 김용식 차관의 회고록 ‘희망과 도전’을 입수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대통령의 하야소식을 듣고 최고회의로 박정희 부의장을 찾아가 윤대통령 하야가 몰고 올 국가적 위기 상황을 설명했으며 박부의장은 마침내 내 주장에 동감을 표시하고 부관인 최대령에게 명해 대통령과 만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고 기술하고 있었다.

    결국 김차관과 대통령의 면담, 그 후 이뤄진 대통령과 장도영, 박정희 최고회의 정·부의장과 김차관의 4자 회담은 박정희 부의장의 특명에서 비롯된 것임이 판명된 것이다. 박 부의장은 결단을 내리기까지 담배를 거푸 피우며 적잖이 고민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용식 차관은 윤대통령에게 먼저 “지금 우리나라는 혁명 정부가 들어섰다고 하지만 우리와 국교가 있는 50여 개국 가운데서 어느 나라도 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외교상으로는 무정부 상태가 오늘의 현실이다”고 외교부의 견해를 설명했다.

    내각을 발족해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던 군사정부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 아닌가? 그리고 대통령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든 대목은 “대통령이 사임하면 현재의 혁명정부가 국가로서 승인을 못 받은 상태이므로 만일 북괴군이 남침해 올 경우 우리는 속수무책이고 유엔이나 자유우방국에 침략을 호소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김차관은 “우리의 최대 우방인 미국은 군사혁명의 성격과 주동 인물의 정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데 열중하고 있을 뿐 혁명정부의 승인 문제에 대해서는 검토조차 않고 있다”고 미국의 미온적 태도를 설명했다.

    김차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는 대통령의 하야로 유일한 대한민국의 헌법기관이 소멸됨으로써 혁명정권은 국제적 승인을 다시 받아야 하고 그때 소요되는 시간은 예측할 수 없으며, 둘째는 무정부 상태가 현실인 만큼 유엔군이 군사원조를 할 법적 근거가 없어지고, 셋째는 정부 수립 후 54개국과 맺은 조약 등 외교문서가 무효가 된다는 것이다.

    김차관은 대통령을 참으로 난처하게 만들었다. 바로 13시간 전에 국민을 향해 하야성명을 발표했는데 이를 번의하면 국민은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군사혁명의 압력에 못 이겨서, 아니 대통령 자리에 연연해 생각을 바꿨다는 얘기가 나올 것 아닌가. 또 외국에서는 한국 대통령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 대통령에게는 이보다 더 괴로운 순간은 평생 없었을 것이다.

    윤대통령은 하야 후 비서들에게 그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내가 하야의 뜻을 번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마음이 약해서도 아니요, 군인이나 김차관의 간청이 절실해서도 아니요, 나아가 군정이나 내 개인을 위한 것은 더욱 아니었다. 나는 국가원수로서 혁명정부가 들어선 데 대해 책임을 면할 길이 없는 사람인데 그 혁명정부가 국가에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면 나는 더 큰 책임을 면할 길이 없어지는 것 아닌가.”

    5·16을 겪은 국가원수로서 번민과 고뇌가 한데 뭉친 고백이 아니겠는가!

    20일 오후 2시 대통령과 최고회의 정·부의장 그리고 김용식 외무부차관 등 역사적인 4자 회담이 청와대에서 열렸다. 대통령도 박정희 부의장도 김차관에게 자세한 브리핑을 들었던 만큼 두 사람은 모두 입을 다물고 김차관의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김차관은 아침에 자기가 한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장도영 의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박정희 부의장이 말문을 열었다.

    “김차관의 건의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번의를 해주신다면 후세의 사가들이 바른 일을 하신 것으로 기록할 것입니다.”

    대통령의 “알겠소이다”라는 한마디로 회의는 끝났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만둔다면 그만두라지. 빠를수록 좋아”라고 하던 박정희 부의장의 변신을 바라보는 대통령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한 외교관의 간절한 충언이 대통령의 운명을 바꾸어놓았을 뿐 아니라 역사의 방향을 틀어놓았던 것이다.

    하야 번복

    오후 6시 전후해 역사적인 기자회견이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하야 기자회견을 준비하던 나는 ‘하야 번의 회견’은 미처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장도영, 박정희 최고회의 정·부의장과 김용식 차관도 회견에 참여했다. 아무래도 쑥스러웠던 대통령은 “이거 하야 기자회견이 하야 번의 기자회견이 됐구먼” 하는 우스갯소리로 굳은 분위기를 풀었다.

    “나는 정치에 직접 책임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오늘의 사태에 도의적 책임을 지고 하야 결심을 하게 됐다”고 서두를 연 다음 “그러나 나의 하야가 국·내외적으로 영향이 막대하고 나라를 해롭게 한다는 결론이 나서 하야를 번의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만일 앞으로 일이 잘못 진행된다든지 기대와 예측에 어긋나는 일이 생길 때에는 나는 단연코 이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말을 맺었다.

    장·박 두 정·부의장은 대통령의 마지막 충고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기자회견을 계기로 군사정권의 대통령인 윤보선씨의 고달픈 생활이 시작됐다.

    윤대통령이 청와대에 주저앉은 것은 완전히 타의였으나 그때부터 청와대 사람들은 무기력한 적막에 잠겨 석간이나 조간신문을 기다리는 조촐한 생활을 하게 됐다. 신문에 대한 혁명정부의 사전검열 탓도 있으나 신문논조나 대학교수들이 발표하는 시론은 점차 혁명정부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어갔다.

    당시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기성 정치인의 부패, 무능, 비능률, 무괴도한 정권욕과 이조 사색당파를 능가하는 사투로 말미암아 이번의 군사혁명을 불가피하게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지적, 장면 정권의 신·구파 파벌 싸움이 5·16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근본 이념으로 하는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옳게 실천하지 못했고 반공을 국시로 하는 나라에서 반공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다는 불명예를 면할 길이 없다”고 장면 정권의 무능을 나무랐다.

    혁명정부가 5·16 발생 일주일 후 언론정비에 관한 포고 11호를 발표한 이후 혁명에 대한 비판은 전혀 용납되지 않았다. 또한 신문은 혁명을 지지·찬양하는 데 경쟁적으로 열을 올렸다. 그러나 군정 종식을 바라는 국민의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숨을 죽여가면서 사발통문식으로 군사독재에 대한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게 형성돼갔다. 하루는 통신사 간부 한 사람이 UPI 통신 원문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UPI 통신문엔 미국의회가 한국의 군사정권을 독재정권이라고 비난하고 조속히 민간에 정권을 이양할 것을 촉구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미국의 여론은 한국 헌정을 중단시킨 군사혁명에 매우 비판적이라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나는 대통령에게 UPI 통신 내용을 보고했다. 당시 보도 금지된 외신을 외부에 흘리면 그야말로 중죄 중의 중죄로 처벌될 일이었다. 우리나라는 외국의 뉴스나 여론이 완전통제된 전형적 독재국가로 전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매일같이 동양통신과 합동통신을 드나들면서 한국에 대한 외신을 수집해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이 어느새 일과가 돼버렸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차츰 국내에서도 외국여론 못지않게 군사독재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듯했다.

    그 무렵 대통령을 찾아온 정치인이나 언론계 중진들 입에서 “이럴 때 대통령이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되느냐?” “마땅히 국민의 여론을 대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대통령으로 하여금 ‘대리 발언’을 시키려는 정치계나 학계, 언론계의 압력이 날이 갈수록 가열돼 갔다. 대통령은 가끔 나를 보고는 “허 참, 나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하며 한숨 섞인 독백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중요한 외신이 입수됐다. 9월에 소집되는 유엔총회에서 한국 문제가 정식으로 논의될 예정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군사독재정권 문제가 큰 논란거리가 되리라는 전망이었다. 마침내 최고회의 출입기자단 간사가 나를 찾아왔다. 대통령이 하야를 번의한 이후 처음으로 정식 기자회견을 요청해왔다. 국가적인 중대한 시기에 대통령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게 기자들의 주장이었다.

    “조속히 민간에 정권 이양해야”

    그들은 6개항의 질문 요지를 정식으로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그 가운데에는 “9월 유엔 총회를 앞두고 민정이양에 대한 대통령의 견해를 말씀해 주십시오”가 빠지지 않고 들어 있었다.

    대통령은 6월3일 최고회의 기자단과 정식으로 기자회견을 갖기로 결정했다. 기자회견에서는 두말할 것 없이 민정이양 시기가 초점이 됐다. 군사정부로서는 가장 아픈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대통령은 5·16 나흘 후 하야성명을 발표했을 때 장도영 당시 혁명위원장으로부터 민정이양 시기가 “빠르면 3개월, 늦어도 6개월”이라는 말을 들은 바 있었고, 혁명공약 6개항에도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다”고 언급했기 때문에 민정이양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여기고 있었다.

    기자회견이 시작되고 기자들이 민정이양에 대해 질문하게 됐는데 대통령은 분명한 어조로 “나나 군인이나 조속히 민간에 정권을 이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특히 9월에 열리는 유엔 총회를 고려해서 민정이양 문제가 결정돼야 한다”고 못박았다.

    대통령이 9월 유엔총회를 시한으로 제시한 것은 결과적으로 3, 4개월 안에 군정을 끝내라는 말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군사정부측에서는 기자회견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며 한 사람도 입회하지 않았다. 대통령 기자회견은 처음으로 군정당국의 검열을 거치지 않고 발언 내용이 그대로 보도됐다.

    특히 문제가 된 동아일보 기사의 제목은 ‘조속한 정권이양 필요’, 부제목은 ‘반공 체제 확립 강조’였다. 신문이 나오자마자 군정당국은 동아일보의 김영상 편집국장을 비롯해 최고회의 출입기자인 이만섭(현재 국회의장) 기자를 연행했고, 6일에는 이진희 기자(1980년 당시 공보부장관), 그리고 7일에는 정치부 데스크인 조용중 차장(뒷날 연통사장 역임)과 정치부의 박경석 기자(뒷날 국회의원 역임)를 연행했다. 군정당국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조속한 정권이양’이라는 큰 활자의 제목이었다.

    군정당국은 대통령이든 누구든 앞으로 다시는 ‘정권이양’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겠다는 심산이 분명했다. 동아일보뿐 아니라 청와대의 유동준 비서관도 최고회의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정권을 빨리 이양하라는 대통령의 진의가 무엇이냐?”고 다그쳤다.

    박정희 소장은 직접 청와대 비서를 불러놓고 “우리가 목숨을 걸고 한 혁명인데 누구에게 함부로 정권을 내주라고 한단 말인가?”라고 흥분했다고 한다. 최고회의가 청와대 비서를 잡아간 것은 실은 대통령을 잡아간 것과 다름없었다. 동아일보가 고초를 겪는 동안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나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자회견을 준비한 장본인인데다 동아일보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만섭 기자는 7·29 선거 전까지 나와 함께 국회를 출입하던 기자였고 이진희 기자도 내가 동아일보에 있을 때 수습기자로 같이 일하던 사이였다.

    동아 사태에 대해 청와대는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대통령에게 장도영 의장을 불러 선처(?)를 부탁하라고 건의했다. 대통령은 장도영 의장을 불러 “당신이 짧으면 3개월, 길어도 6개월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한 말이 무엇이 잘못이냐?”고 야단쳤다. 장도영 의장은 도리어 엉뚱한 말을 했다. 사실 자기가 박부의장에게 “군정 기간을 6개월 정도로 하면 어떻겠느냐?”라고 물었더니 박부의장이 “어림도 없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혁명과업은 절대 완수할 수 없습니다”라고 강한 불만을 보였다고 털어놓았다. 다시 말해 3개월이니 6개월이니 하는 소리는 장도영 의장의 개인 생각이었고 혁명 주체인 박정희 부의장은 그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도영 의장의 말을 믿은 대통령의 오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아 사태를 계기로 박정희 소장의 야심은 차츰 본색을 드러냈다. 연행된 동아의 김영상 국장, 조용중 차장, 박경석 이진희 기자는 석방됐으나 이만섭 기자는 ‘유언비어죄’로 끝내 구속됐다.

    최고회의는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심흥선 공보부장 명의로 기상천외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지난 6월3일 서울 모 일간지가 대통령 기자회견 석상에서 대통령께서 하신 말의 일부를 고의로 사실과 유리되는 기사로 조작하여 보도했음은 용인할 수 없는 일이며 혁명정신에 위배되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최고회의의 담화는 국민을 완전히 기만하는 것이었다. 동아의 대통령 회견기사는 정확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회견을 ‘유언비어’로 몰아붙인 최고회의의 행동은 이성을 잃은 행동일 뿐 아니라 독재적 사고의 발로이기도 했다. 동아사태를 계기로 대통령의 입을 막아 버리려는 군사정권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청와대와 최고회의 사이는 완전히 금이 가고 만 것이다.

    동아일보 기자의 구속사건을 전후해 청와대를 놀라게 하는 몇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장면 정권의 2인자격이었던 민의원의장 곽상훈씨가 자기들이 수립한 장면 정권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나섰다. 그뿐 아니라 5·16혁명을 적극 지지할 것을 호소하는 특별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군사정권이 본격적으로 정치공작을 시작한 것으로 생각됐다.

    장면 정권에 참여했던 국무위원 가운데 곽상훈씨와 같은 행동을 취하는 몇몇 인사가 있다는 풍문도 나돌았다. 곽의장의 성명은 너무나 파격적이었다. 그는 “해산된 국회가 무능·부패하고 정쟁으로 시종했다는 국민적 비판과 역사적 판단을 전적으로 시인한다”고 말하고 “정계의 추악한 양상은 어떤 비상수단이 아니고는 도저히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고질화했다”고 말함으로써 5·16쿠데타의 필연성을 강조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번 국군장병의 의거는 실로 대의를 살리기 위해 소아를 굽힌 것”이라고까지 격찬했다. 곽상훈 의장은 어떤 인물인가? 일제시대에는 동아일보 인천 지사장을 지내며 독립운동을 했고 광복 후에는 민주화 운동에 헌신해 곧은 선비로 추앙받던 인물이 아닌가.

    장면 정권을 배신한 곽의장의 행위는 청와대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장면 정권에서 선출된 대통령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모욕적인 성명이기도 했다. 기자회견 사태 이후 군사정권은 본격적으로 청와대를 감시 대상처로 지목했다. 외신을 수집하던 나에게도 정보원이 따라붙었다. 누구와 만나고 어떤 뉴스가 청와대에 전달되는지 유리알처럼 알아내려고 했다. 어쩌다가 시골로 낚시를 가면 으레 지방 경찰이 따라붙었다. 민정이양을 운운하는 청와대는 그대로 놔둘 수 없다는 것이 군사정권의 생각인 듯했다.

    7월에 접어들어 장도영 의장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 박정희 부의장이 앉았다. 송요찬 장군이 내각수반을 맡고 나섰다. 장도영 장군은 완전 실각했다. ‘육군참모 총장’ 직함을 이용해 대내외적으로 쿠데타를 합리화하고, 쿠데타에 무게를 얹어줬던 장도영 의장은 이용당할 대로 이용당하고 용도폐기됐다. 드디어 ‘박정희 시대’가 온 것이다.

    청와대는 난처한 처지가 됐다. 대통령 기자회견은 청와대와 박정희 장군의 관계를 더욱 싸늘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알고 보면 장도영 장군은 최고회의의 ‘대통령 담당역’을 해왔던 것이다. 가끔 최고회의의 정보를 청와대에 전달하기도 하고 대통령의 생각을 최고회의에 전달하기도 했다. 장도영 장군이 숙청되자 청와대와 최고회의의 파이프라인이 두절되고 만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생각지도 않은 일이 내 가슴을 설레게 했다.

    최고회의에서 뜻하지 않은 연락이 왔다. “7월15일 서울 근교의 순환철도가 준공돼 개통식과 시승식을 하기로 했으니 대통령께서 괜찮다면 시승식에 나오시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처음에는 시승식 행사에 가는 것을 꺼리는 눈치였다. 비서실장과 나는 시승식 행사에 대통령이 나가도록 적극 권했다. 왜냐하면 장도영 장군이 거세된 이후 최고회의와 연락이 두절되고 청와대에 대한 감시가 강화됐을 뿐 아니라 군인들이 청와대를 적대하는 경향마저 농후해졌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기자 구속한 적 있나?”

    그리고 나는 나대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이 시승식에 가면 틀림없이 박정희 의장을 만날 것이고 그런 기회를 이용해 동아의 이만섭 기자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대통령은 마지못해 우리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7월15일 아침 대통령이 서울역을 향해 청와대를 출발한 후 나는 차 안에서 “오늘 박의장을 만나면 이만섭 기자 이야기를 꼭 말씀해 주시지요”라고 건의했다. 대통령은 “이 사람아, 내가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하나” 하며 몹시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대통령은 이기자를 구속한 것은 바로 자기를 구속하고 싶다는 간접적인 표현일 뿐 아니라 설혹 이기자에 대한 구속사유가 타당하다 치더라도 대통령의 회견 내용을 두고 기자를 구속하려면 적어도 대통령에게 사전보고와 양해는 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대통령 차에 동승해 서울역으로 가는 도중 몇 번이고 이기자 문제를 꺼내고 싶었으나 대통령의 심중을 헤아리는 처지에서 더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시승한 기차가 서울역을 떠나 한참 지났을 때 나는 의도적으로 대통령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대통령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나는 대통령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뚫어지게 바라보는 내 시선에서 ‘저자가 그예 이기자 얘기를 하라는구나’ 하고 느꼈는지 대통령은 “여보, 박의장” 하고 무거운 입을 열었다.

    “얼마 전 내 기자회견으로 동아 기자가 잘못된 일이 생긴 모양인데, 기사가 좀 과장된 점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여기까지 대통령의 말이 이어졌을 때 박의장은 “네” 하더니 “김부장 오라고 해. 김부장 어디 있나”(김부장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하며 숨쉴 여유도 없이 김부장을 찾았다. 김종필 부장이 그 자리에 나타나기가 무섭게 박의장이 다그치듯 말했다.

    “김부장 동아일보 기자 구속한 일 있나??

    “네.?

    “석방해!”

    이기자의 석방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저 박의장 좀 봐라?’

    이만섭 기자가 구속된 것을 동아일보가 대서특필했고 도하 신문이 모두 보도했을 뿐 아니라 최고회의 공보실장이 특별담화까지 발표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마치 처음 듣는 얘기라는 듯 태연하게 김부장에게 물어보는 박의장의 태도는 당돌하다고나 할까 능청맞다고나 할까, 독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기차가 서울역으로 되돌아온 후 최고회의 공보실장은 이만섭 기자를 석방해 친절(?)하게도 동아일보사까지 직접 데려다 주었다. 아무리 군정 치하라지만 “석방해” 한마디로 결정되다니. 실력자의 말 한마디가 법 이상의 위력을 갖는 시대였다.

    박정희 소장이 최고회의 의장으로 승격(?)한 이후 청와대는 감시와 사찰 대상이 되었다. 차츰 청와대를 죄어드는 징조가 보였다. 하루는 대통령이 “여보게. 자네 세무서에 잘 아는 사람이 있나?”라고 내게 물었다. 그 이유는 윤대통령이 갖고 있는 종로의 한 빌딩에 대해 세무서에서 특별조사를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중림동에 있는 대통령의 개인토지도 문제 삼고 있다고 했다. 대통령 당선 후 “대통령 땅이니 집을 짓고 보자”는 주민들의 불법행동 탓에 상당한 면적의 토지가 무상으로 시민들에게 분양된 일이 있는데 세무서에서 그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 개인에 대한 조사가 은밀히 진행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 이상한 일은 당시에는 도청장치 같은 것이 전혀 없었는데도 비서관 회의 내용이 어김없이 밖으로 새나가곤 했다. 앞으로 말하겠지만, 8·15를 기해 대통령이 하야할 생각을 하고 그 준비를 극비리에 진행하고 있었는데 주한미국 대사가 어떻게 알았는지 청와대를 방문해 대통령의 하야를 만류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정보정치의 무서운 그림자가 청와대를 둘러싼 듯한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어처구니없는 흑색 선전까지 나돌았다. 대통령을 모시던 이재항 비서실장이 극비리에 군사정부에 협력한 공이 인정돼 머지않아 대사로 진출할 것이라는 소문이 그것이었다. 물론 이실장은 주일대사관 공사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대사가 아니라 그 이상의 요직에 앉을 자격과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대통령 실제(實弟)의 친구이기도 했다. 루머는 그의 인격뿐 아니라 그의 인간 전체를 모독하는 악의에 찬 계략임에 틀림없었다.

    어느날 나는 “요사이 실장에게 좋은 소식이 있던데요”라고 농을 걸었다. 그랬더니 이실장은 “팔자에 없는 비서실장을 한 김에 박정희 장군의 비서실장이나 해볼까요”라고 말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이실장은 뒷날 대통령이 하야한 이후 10년 동안 대통령을 돕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 청와대 내부의 분열과 불신을 조장하려는 악의에 찬 정보정치의 마수가 뻗치고 있었던 것이다.

    청와대를 모함하는 흑색 선전은 끊이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사용하던 물건이 이화장에서 청와대로 옮겨지는 과정에 그 업무를 담당한 비서가 많은 재물을 횡령했을 뿐만 아니라 귀중품 일부를 대통령이 챙겼다는 소문도 돌았다.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모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내 처가는 전북에서 조그마한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기관원들이 찾아와 회사 세무조사는 물론 내 재산 상태, 심지어 혼인을 하게 된 경위까지 조사해갔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어느날 나는 친구들과 강화로 낚시를 떠났다. 새벽에 김포경찰서를 지날 무렵 뜻하지 않게 김영섭이라는 중학교 동창을 만났다. 그는 당시 김포서장이었는데, 위스키 한 병을 들고 길가에 서 있었다. 어떻게 알고 나왔느냐고 물었더니 “야, 너 조심해야 되겠어. 내가 너와 동창인 것을 모르고 네 행동을 체크해서 보고하라는 통보가 있었어” 하고 말했다. 청와대에 대한 군사정부의 적대적 감시 태도가 짐작되는 대목이다. 나는 군사정권에 대해 더욱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못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청와대는 그들에게 귀찮은 존재로 전락해가고 있었다.

    윤대통령과 박정희 의장 사이를 왕래하며 가교역(?)을 담당했던 장도영 장군이 거세되자 두 사람은 직접 만나서 현안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됐다. 풍문에 따르면 민정이양 시기를 놓고 두 장군 사이에 이견이 생겨 장도영 장군이 거세됐다는 말이 파다했다.

    8월 초 들어 돌연 박의장이 단독으로 청와대를 찾아왔다. 최고회의 의장이 되고 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혁명 당일과 마찬가지로 예의 단정했고 대통령이 좌정하기 전에는 절대로 먼저 자리에 앉는 법이 없었다. 그의 거수경례는 언제 보아도 모범적이었다. 나는 박의장의 표정이 그날따라 매우 부드럽고 비서들과도 일일이 악수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놓였다.

    박의장은 “민정이양 시기를 논의하러 왔다”고 방문 목적을 설명했다. “대통령 각하! 민정이양 시기 때문에 아주 골치가 아픕니다. 대통령께서는 그 시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민정이양 문제를 언급했다가 엄청난 소란이 빚어진 일도 있고 해서 “혁명공약대로 조속히 민정을 이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하고 아주 원론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박의장은 달랐다. “나는 민정이양 시기를 1년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최고위원들 가운데 1년 반을 주장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라고 엉거주춤하게 이야기했다. 최고회의의 대세가 ‘1년 반’이기 때문에 자기로서는 골치가 아프다는 뉘앙스였다.

    대통령은 ‘박의장 자신은 1년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최고회의가 1년 반을 주장하기 때문에 1년 반이 불가피하다’는 뜻으로 박의장의 말을 받아들였다. 박의장은 약 한 시간 동안 경제발전 문제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청와대를 떠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박정희의 정치적 야망’은 확실한 방향을 못 잡고 있는 듯했다.

    민정이양 시기 약속 깬 박정희

    박의장이 민정이양 문제를 대통령과 협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비밀사찰로 위축될 대로 위축된 청와대 분위기가 약간 부드러워지는 듯했다. 그러나 청와대를 다녀간 지 일주일이 되던 8월12일, 박의장은 국내외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키는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내용은 “앞으로 2년 더 군정을 실시하고 1963년 여름에 민정이양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격노했다. 나는 점잖기로 유명한 대통령이 그때처럼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박정희 의장에게 배신감과 모멸감을 느낀 듯했다. 일주일 전 만부득이 해서 1년 반이라고 한 사람이 일언반구의 사전협의 없이 2년을 들고 나오자 대통령을 철저하게 무시한 행동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대통령은 8·15 기념일을 기해 하야를 강행하겠다는 것과 이번에는 최고회의나 언론기관에 연락하지 말고 대변인 성명으로 끝내자고 했다. 하야성명의 골자는 “2년 군사정권을 반대한다”는 것으로 지정해주기까지 했다. 나는 이번 기회에 반드시 대통령의 하야가 실현되기를 바랐다. 특히 당시의 군사정권이 온 국민에게 밀고를 장려하고 밀고한 자에게 포상하는 전무후무한 정책을 발표한 것에 나름대로 불만이 컸기 때문이다.

    중학교 시절 38선 이북이 고향인 나는 북한의 김일성이 집권 초기 밀고 행위를 국민적 애국행위로 찬양하고 친구 사이는 물론 부자간에도 밀고를 장려해 서로 믿지 못하게 만든 과거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통령의 두 번째 하야성명을 기초하던 내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 발생했다. 하야 결정은 대통령과 비서실장, 그리고 나 세 사람만 알고 있던 일인데 비밀이 그날로 외부에 새나간 것이다.

    하야가 결정된 다음날인 13일 아침 새로 부임한 새뮤얼 버거 미 대사가 급히 청와대를 방문하고 대통령의 하야 소식(?)에 대한 진위를 물어왔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이제 무방비 상태가 된 것이 아닌가? 대통령이 버거 대사에게 “어떻게 알았는가?”라고 물었을 때 버거 대사는 웃기만 하면서 답변을 피했다. 버거 대사는 강력하게 대통령의 하야를 반대하면서 자신의 행동은 개인 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고 미 국무성의 공식 견해라고까지 강조했다. 대통령의 2차 하야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8월13일은 대통령 취임 1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박정희 의장은 5·16 당시 소장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중장 계급을 달았다. 청와대는 그의 승진을 신문을 보고 알았을 정도다. 11월11일 박정희 의장의 워싱턴 방문이 결정됐다. 방미 일정이 결정된 직후 돌연 박의장이 청와대를 단독으로 방문했다.

    민정이양 시기 때문에 대통령은 박의장의 행동을 몹시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날따라 박의장은 좀처럼 보기 드물게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비서들과 일일이 악수도 하고 대통령을 만나러 들어갔다. 비서들은 모처럼 외국 여행에 앞서 인사차 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박의장의 방문 목적을 듣고 고소(苦笑)를 금할 수 없었다.

    미국 정부에 권위를 보이기 위해 자신의 군 계급을 중장에서 대장으로 승진해야겠다는 것이 요지였다. 7개월 만에 소장에서 2계급 특진하자는 것이다. 대통령에게는 군인을 독자적으로 특진시킬 권한이 없던 만큼 박의장의 대장 특진은 일종의 통고 성격을 띠고 있었다. 국방부나 최고회의에서 특진을 결정하면 될 일을 굳이 청와대에 사전통보한 속사정은 따로 있었다. 대장 계급장을 대통령이 직접 달아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박의장은 방미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끝날 무렵 “대통령께서 직접 계급장을 달아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라고 직설적으로 요청했다. 박의장에게는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됐다. 옆에 서 있던 비서들은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물론 관례에 따라 대통령이 계급장을 달아주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당시의 분위기에 비춰 염치 없는 박의장의 행동은 ‘돌출’로 비치기도 했다. 솔직히 대통령을 철저히 이용하려는 행동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박의장이 청와대를 다녀가고 며칠이 지나 청와대 대회의실에서는 ‘박정희 의장 대장 진급식’이 성대하게 거행됐다. 송요찬 내각 수반은 물론 최고회의 간부, 최고회의 출입기자까지 진급식에 모습을 나타냈다. 박정희 의장과 김종오 장군에게 직접 계급장을 달아주던 대통령이 “두 분은 다같이 키가 작군요”라고 주위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농담을 했다. 장내에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박의장은 정색을 하고 대꾸했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말 소리도 주위 사람이 모두 알아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주위에 있던 군인들은 웃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박의장은 작은 키에 심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키가 작다”는 말을 들으면 노골적으로 화를 냈다고 한다. 윤대통령은 후일 자신이 대장 계급장을 박의장 어깨에 달아준 것에 대해 “숙명적인 들러리를 서게 됐다”고 술회했다.

    군사정부는 박의장의 방미에 앞서 그들의 세력을 강화했다. 돌이켜보면 5월에는 ‘부정축재 처리 요강’을 발표한 후 철저한 조사를 거쳐 20여 명의 기업인에게 400억원을 추징하는가 하면 정치인과 공무원 20여 명에게도 70억원을 추징했다.

    헌법재판소를 설치해 그해 가을까지 부정부패, 부정선거 죄목으로 250여 명을 처단하기도 했다. 장면 정권이 미적거리고 눈치만 보고 있던 혁명과업(?)을 힘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그뿐 아니라 ‘농어촌 고리채 정리법’을 제정해서 농어민이 안고 있던 200억원의 채무를 2년 거치 5년 분할 상환토록 조치했다. 그해 ‘5개년 개발계획’을 수립해 활발한 경제정책을 밀고 나가기도 했다. 한편 군사정권은 장래를 대비한 조치로서 ‘재건 국민운동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정국을 도·군·면 단위로 조직화해 나갔다. 이 조직은 후일 공화당 모태가 되지만 당시는 그럴듯한 명분을 붙여 조직을 강화했다.

    군사정권은 언론에는 특히 잔인했다. ‘포고 11호’를 발동해서 ‘사이비 언론’이라는 미명하에 언론기관을 대량 정비하고 나중에는 ‘신문정책 10개 지침’이라는 것을 만들어 수많은 언론인을 현직에서 추방했다. 언론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공포에 떨었고 오직 혁명정부가 발표하는 내용만 보도하고 찬양하는 ‘메신저 보이(전달 소년)’로 전락했다.

    국내에서 완벽에 가까운 독재를 강행하던 군사정권이 결정적으로 자신을 얻게 된 계기는 11월14, 15일 이틀에 걸친 ‘박·케네디’ 정상회담이었다. 특히 14일의 ‘박·케네디’ 공동성명은 박정희 군사정권을 미국이 실질적으로 승인하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박의장의 설명을 환영했으며 한국 신정부가 성취한 발전에 만족을 표명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국이 “1963년 여름까지 군사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겠다고 천명한 한국 정부의 발표를 환영한다”고 민정이양 시기까지 받아들인 것이다. 혁명 정권은 ‘미국의 쿠데타 반대’라는 크나큰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1962년 새해 들어 더욱 자신을 얻은 혁명정권은 숙원이던 장기집권 계획을 암암리에 도모하기 시작했다. 대외적으로는 민정이양을 가장하고 군복을 벗고 민간인으로 변신해 계속 정권을 장악하려는 본심을 차츰 드러냈다.

    그 첫째 공작은 혁명세력과 경쟁자로 등장할 것이 분명한 구정치인이나 정치세력을 정계에서 모조리 추방하는 작전이었다. 1962년 3월16일 구정치인의 정치활동을 완전 봉쇄하는 ‘정치활동정화법’을 최고회의가 전격적으로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처사는 군사정권의 저의를 드러낸 또 하나의 정치 쿠데타였다.

    청와대는 군사정권이 “비밀을 누설한 자는 처벌한다”는 내규까지 만들면서 극비리에 추진한 ‘정정법’에 대해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이상한 풍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박의장을 비롯해 혁명에 가담했던 정치군인들이 결국 군복을 벗고 민정에 참가한다더라” “4·19혁명으로 정치일선에서 도태된 자유당 출신 정치인이 군인들을 배후에서 조종한다더라” “구정치인 가운데 적지 않은 인사가 이미 군사정권에 포섭됐다더라” 등등 각양각색의 내용이었다.

    루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정치활동정화법’이 3월16일 최고회의에서 통과되고 공포됐다. 라디오로 정정법 공포 뉴스를 들은 국민들은 또다시 쿠데타가 일어난 것 이상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혁명군인들이 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려고 하는가? 앞날이 캄캄하게 생각됐다. 야망에 불타는 정치군인들에게는 미국의 지지가 백만원군보다 든든했고 국민이나 법은 눈에 보이지 않는 듯싶었다. 총 대신 ‘정정법’이라는 새 무기로 제2의 정치 쿠데타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장도영과 박정희 장군을 비롯해 쿠데타를 감행한 최고위원들은 처음부터 윤보선 대통령을 극히 조심스럽게 대했다. 그들은 대통령을 완고하고 고집 세고 유아독존의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이해한 듯싶었다.

    장면 내각의 몰락으로 정치적 힘도 지지세력도 모두 잃은 대통령이지만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노인’으로 간주한 듯했다. 그러나 윤대통령은 군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완고하거나 고집스럽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자상하고 따뜻한 체온을 느끼게 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19개월의 청와대 생활에서 내가 체험한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 널리 알려지지 않은 윤대통령의 인간상을 조명해볼까 한다.

    장면 정권 초기, 청와대는 정치군인들이 쿠데타를 추진하는지, 또 그들에 대한 구명운동을 벌이던 민주당 신파 내 노·소장파의 대립 상황을 전혀 알 길이 없었다. 별천지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처음부터 장면 정권이 방향타를 잃고 표류를 거듭하자 그들과 대치할 가능성이 점쳐졌던 세력은 제일 야당인 신민당뿐이었다. 신민당은 원내에서 거의 과반수에 육박하는 의석을 가지고 있었다. 청와대 대변인은 별정직이기 때문에 정당 활동이 허용되었다.

    7·29선거에서 실패한 나는 그 후 신민당 철원군 당위원장에 출마해 압도적 표차로 당선됐다. 군당부의 조직을 정비하면서 나는 차기 선거에 대비했는데, 초창기 장면 정권은 길어야 2년, 그렇지 않으면 그 안에 끝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출입기자로 10년 가까이 국회와 정당을 드나들었지만 막상 정당에 입당하고 보니 정당이라는 세계는 외부에서 보는 것과는 천양지차였다. 어떠한 형태가 됐든 정당 내의 활동은 계파에 가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고, 외톨이 정당인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 한국 정당의 현주소였다. 일요일은 지역구에서 살아야 했고 집에서의 아침식사는 고향에서 찾아온 방문객과 같이하는 것이 일상 생활이 되었다. 가족들과 단란한 아침식사는 한 달에 며칠이나 됐을까?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윤대통령은 자신의 대변인 노릇을 하는 한편 차기를 바라보면서 정당 생활을 겸하고 있던 나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 선거에서 내가 국회에 진출하기를 은근히 바라는 눈치였다.

    장면 정권 초창기의 일이다. 대통령이 수복지구의 군부대를 시찰할 기회가 있었다. 군부대 방문을 마치고 귀로에 철원군청에 들러 수복민의 현황을 보고받는 일정이 짜여 있었다. 군단장과 동승한 대통령 승용차가 신철원읍 근처에 다다랐을 때 돌연 멈춰섰다. 대통령은 뒤따르던 나를 손짓으로 불렀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대통령은 군단장을 향해 웃음 짓는 얼굴로 “군단장! 이 사람과 같이 군청사까지 걸어서 갑시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군청까지 500∼600m나 되는 거리에는 제2공화국 발족 이후 처음으로 내방하는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해 많은 군민이 도열해 박수로 대통령을 환영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나와 나란히 걸어가자”고 한 뜻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유권자들에게 대통령과 나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군청에서 브리핑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상좌에 대통령 자리를, 그리고 바로 그 뒤에 군단장의 자리를 마련했던 군청당국은 대통령의 즉석 지시에 따라 지구당위원장인 나를 군단장 옆자리에 앉히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선거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고마운 배려였다.

    “철원 쌀을 사들이면 어떨까”

    또 언젠가 가을 추수가 끝날 무렵,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대통령은 나를 찾았다. 철원 지방의 농작 상황을 물어본 후 이런 얘기를 꺼냈다.

    “철원은 쌀의 명산지지. 나도 철원 북방 휴전선 근처에 얼마간 토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김일성도 6·25 사변으로 철원을 빼앗기고 눈물을 흘렸다는 거야. 여보게. 우리(청와대)는 경비원들을 위해 많은 쌀을 구입하고 있지 않은가. 비서실장에게 말해 기왕이면 철원 쌀을 사들이면 어떨까?”

    청와대가 철원쌀을 구입하는 데 중간역을 맡으라는 것이다. 청와대가 철원 쌀을 구입한다는 소문이 퍼지면 나에 대한 철원 농민들의 반응이 나쁠 리가 있겠는가. 선거에 관한 한 백전노장인 대통령의 섬세한 배려가 고맙기만 했다.

    윤대통령은 취임 직후 청와대 개방을 적극 검토하라고 지시한 일이 있다. 옛날 경무대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을 뿐 아니라 내각책임제에서 청와대는 비교적 한가했고 관광 측면에서도 훌륭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구당 관리에 열을 올리던 나는 시일을 택해 군당과 면당 간부를 합쳐 30여 명을 청와대에 초대한 일이 있었다. 대통령은 어떻게 알았는지 경호원으로 하여금 그들을 특별히 안내하게 한 다음 청와대 안에 있는 경호원 식당에서 점심까지 대접하도록 특별조치를 취했다. 그뿐 아니라 대통령 표장이 새겨진 선물세트를 마련해 그들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대통령은 언제 올지 모르는 차기 선거에 대비해 나를 각별히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은 팔순 노모와 부인, 그리고 나이 어린 상구, 동구 두 아들을 거느리고 청와대 생활을 했다. 대통령의 효심은 세상에 알려진 대로 지극했다. 아침 저녁으로 노모에게 꼭 문안을 드리고 항상 노모의 건강을 체크했다. 5·16 아침 비서들이 청와대를 떠날 것을 권유했을 때 그것을 거부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혼자 피신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사생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그분이 넥타이를 매지 않은 모습을 본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 같다. 청와대에서 거의 동거하다시피 했던 나도 대통령을 만날 때는 반드시 정장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점잖기로 유명한 대통령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운동을 했다. 특기는 줄넘기와 아령이다. 그리고 청와대 뒷산을 산책하는 일이었다. 윤대통령에게도 누구나 갖고 있는 특징이 있었다. 대통령은 개인적인 일, 혹은 정치나 국무에 대해 절대로 결론을 빨리 내는 법이 없었다. 남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본인이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그러고 나서 일단 사안에 대한 결정이나 결심이 서면 변경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실례를 두 가지만 들어보면 5·16 아침 박정희 소장이 계엄령을 선포해 놓고 인준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끝까지 이를 거부했던 일, 그리고 자신을 지지하고 오랜 세월 정치적 동지였던 유진산 의원이 5대 대통령선거 직전에 그를 배신했다고 판단했을 때 수많은 동지가 유의원에게 관용과 화해를 베풀라고 건의했으나 끝내 거절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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