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표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 1987년부터 해병대 정신표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해병 현역·예비역은 물론 일반 국민들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엔 ‘불가능은 없다’는 해병대 정신에 대한 특별한 자부심이 배어 있다.
이와 비슷하면서도 정서적으로 훨씬 더 자극적인 것이 바로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표어다. 육체적·정신적 한계에 도전하는 강인한 훈련에 대한 자부심과 타군과의 배타성을 강조하는 이 표어는 해병대를 지원하는 수많은 젊은이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이처럼 그간 강인한 사내들의 세계로 인식돼 온 해병대에 최근 그야말로 혁명적인 변화가 일고 있다. 금녀의 영역이던 각군 사관학교에 여자 생도들이 입학한 것을 계기로 해병대에도 여성 장교가 탄생한 것이다.
지난해 해군은 20명의 여성장교를 배출했다. 일반 대학 학사 이상 출신인 이들은 필기시험을 거쳐 지난해 3월 해군사관후보생 96차로 입교했다. 남자들과 함께 14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7월1일 소위로 임관했다. 20명 중 해병간부후보생은 7명. 해간(해병 간부) 기수로는 87기다. 7명 중 4명은 보병에, 나머지는 헌병, 통신, 보급 병과에 각각 1명씩 배치됐다.
이 중 1사단에 근무하는 조윤정 소위를 만나봤다. 헌병 병과인 조소위는 교통 소대장을 맡고 있다. 사단 영문 보초를 서는 헌병들이 그녀의 부하다. 올해 27세. 모자를 벗은 그녀의 모습은 얼른 보아 여느 여성과 다르지 않다. 홍조 띤 얼굴과 짙은 쌍꺼풀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외모로 해병대 여성장교를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소위는 해병대 입대 동기에 대해 서슴없이 이렇게 말했다.
“육군은 너무 많이 뽑아 싫었다. 기왕이면 소수정예군에 들어가고 싶었다. 해병대를 택한 이유는 딱 하나다. 가장 강한 군대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표어가 맘에 들었다.”
조소위와 같은 기간에 같은 곳에서 훈련을 받고 임관한 남성해병장교는 170명이다. 어떻게 배겨냈을까, 하는 의문은 그녀의 명쾌하고도 단호한 답변 앞에 맥없이 풀려버렸다.
“육체적 고통은 참을 만했다. 그 순간만 지나면 되기 때문이다. 정작 힘든 것은 정신적 고통이었다. 식사시간에 노래를 틀어줄 때는 맘이 흐트러지기도 했다. 여자라고 훈련에서 봐주는 경우는 없었다. 오히려 체력이 우리보다 못한 남자들도 있었다. 구보에서도 절대 안 뒤졌다. 악기(氣)로 버텼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조소위는 장교 임관 후 후반기교육을 육군에 가서 받았다. 그때 육군 관계자들로부터 “눈이 반짝반짝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조소위의 눈빛이 평범하지 않다. 혹독한 훈련을 이겨낸 자들에게서 엿볼 수 있는 강렬한 눈빛이다.
남자들과 함께 병영생활을 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느냐고 묻자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여자들은 괜찮은데 남자들이 오히려 더 불편한 듯싶다. 사단에 온 지 얼마 안돼 체력측정훈련을 할 때였다. 윗몸 일으키기를 하면 몸이 옆으로 움직이지 않도록 다른 사람이 양팔로 무릎을 꽉 감싸안아야 한다. 그런데 사병들이 남자 장교의 무릎은 잘 잡아주면서도 내가 할 때는 쑥스러워서인지 겨우 발목만 잡았다.”
장기근무를 원한다는 조소위는 해병훈련을 받은 후 자신이 강해졌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한다. 남한테 의지하는 태도가 사라지고 바깥사회에 나가 뭘 해도 먹고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는 것이다.
60㎜박격포 소대에 근무하는 임종원(24) 하사도 1사단이 내세우는 화제의 인물. 임하사는 얼마 전 병역기피소동을 일으켜 지탄을 받은 가수 유승준씨와 비교되는 경력을 갖고 있다. 미국 영주권자로,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군에 가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미국에 7년 동안 거주했다는 그는 워싱턴주립대 3학년 재학중 병역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귀국했다. 현재 연세대에 편입학한 상태. 그가 해병대를 선택한 이유는 조소위와 비슷하다. “가장 세다고 해서”다.
“한국에서 남자 구실 하려면 군에 갔다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무조건 군대를 가야 한다는 집안 분위기도 영향을 끼쳤다. 외조부는 직업군인으로 20년 동안 복무했고 아버지는 나처럼 해병대를 지원했으나 평발이 문제가 돼 뜻을 이루지 못했다.”
2000년 7월 입대한 임하사는 훈련소 시절 훈련관들의 명령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고생 꽤나 했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영어만 사용하다보니 국어에 어두워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말 사용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부대생활에도 잘 적응하고 있다.
소규모의 특수부대로 출발한 해병대는 창설된 지 1년 만에 발생한 한국전에서 전사에 길이 빛나는 공을 세웠다. ‘귀신 잡는 해병대’니 ‘무적해병’이니 하는 애칭은 모두 한국전 당시에 얻은 것이다.
최초의 승전은 진동리전투. 1950년 8월 미 25사단과 그 배속부대들은 개전 이래 최초의 반격작전을 개시했는데 목표는 진주 탈환이었다. 경남 마산 진동리 부근의 수리봉 서북산 등 주요 고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이 전투에서 해병대 김성은 부대 장병들은 눈부신 전과를 올림으로써 해병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통영지구작전도 전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고 있다.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힌 인민군은 기수를 남해안으로 돌렸다. 거제도를 점령한 인민군 7사단은 전략적 요충지인 진해·마산항을 봉쇄할 목적으로 통영 방면으로 공격해왔다.
이에 해병대는 한국군 최초의 상륙작전을 감행함으로써 적을 격퇴하고 통영 지구를 방어했다. 진동리전투와 통영 상륙작전에서의 잇따른 전과로 해병대는 전군 최초로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안았다. 한편 미국 뉴욕타임스의 여기자 마거랏 히킨즈는 이 작전의 성공을 보도하는 기사에서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찬사를 썼다. 이것은 뒷날 한국 해병대의 대표적인 애칭으로 자리잡았다.
해병전사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마도 1950년 9월에 전개된 인천상륙작전일 것이다. 낙동강전선의 교착상태가 계속되자 맥아더 사령관은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한다. 주력부대는 미 해병대 1사단. 여기에 한국 해병대가 가세했다. 서울을 탈환한 해병대 용사들은 중앙청 옥상에 태극기를 올리는 영예를 누렸다. 세계전사에서도 꼽히는 인천상륙작전 참가는 한국 해병대에 상당한 자부심을 안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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