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호

‘도박사’ 김정일, 호랑이 등에 올라타다

  • 글: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대우 hoon@donga.com

    입력2002-11-04 15: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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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박사’ 김정일, 호랑이 등에 올라타다

    웃는 남북(위), 냉랭한 북·일

    북한의 적극적인 변화 시도로 한반도 문제가 속도 빠르게 전개되고 있다. ‘미녀 응원단’을 앞세운 북한은 부산아시안게임에 ‘웃는 얼굴’로 참여하였고, 중국계 네덜란드인인 양빈(楊斌) 행정장관의 낙마로 빛이 바래긴 했지만 9월12일 신의주를 경제특구로 전격 발표했다.

    9월17일 김정일(金正日)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를 평양으로 불러들여 사상 최초로 북·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같은 날 북한은 지난 1년간 미뤄오던 ‘남북철도와 도로 공사의 군사적 보장을 위한 합의서’ 교환에 응함으로써, 경의선과 동해선을 잇기 위한 비무장지대 내의 지뢰제거 작업을 가능케 했다.

    부시의 ‘매’ 앞에서 옷 벗은 북한

    그러나 한번 돌이켜 살펴보자. 일본 근해로 침투하던 북한 공작선이 일본 해상자위대와 해상보안청에 발각된 것은 지난해 12월21일이었다. 도주에 도주를 거듭하던 이 공작선은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자, 자폭(自爆)해 동중국해에 침몰했다.

    지난 9월1l일 일본 해상보안청은 이 공작선을 인양했는데, 이 공작선은 무려 네 개의 스크류를 단 초고속 선박으로 확인되었다(상선은 한 개, 군함은 보통 두 개의 스크류를 단다).



    지난 6월29일에는 남북한 해군이 서해 연평도 부근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남북한과 북한-일본이 살벌하게 대치하던 것이 바로 엊그제인데, 남북한과 일본에 갑자기 해빙무드가 찾아온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두말할 것도 없이 북한의 선택에 의해 일어났다. 북한은 왜 갑작스럽게 평화공세로 나오는 것일까. 북한은 진정으로 변한 것일까. 이러한 북한의 변화는 과연 동북아의 미래를 평화로 이끌 것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의문을 풀어나기기 위해서는 작금의 사태를 각론으로 나눠 살펴보아야 한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이 비판 받는 첫째 이유는 ‘햇볕정책을 해야 한다’는 총론을 설정해놓고, 그 총론에 각론을 맞추려 했기 때문이다. 총론과 목표는 다른 것이다. 총론 ‘햇볕정책’은 평화통일이라는 목표를 이루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총론은 수많은 각론으로 구성된다.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에서 지혜가 모아져야 하고, 모아진 지혜는 평화통일을 위한 ‘방법론’인 총론을 도출한다. 총론은 각론과 목표 사이에 있는 중간자이지, 각론과 목표를 끌고 나가는 주체가 아니다. 여기서는 각론을 경제·외교·안보·통일로 설정하기로 한다.

    먼저 북한이 유화적으로 나오게 된 외부 요인부터 따져보자. 이 문제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북한의 변화를 선도했느냐,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부시 미국 대통령의 정책이 북한으로 하여금 ‘미소작전’을 선택하게 했느냐란 질문으로 귀결된다.

    남북한은 2000년에 정상회담을 했으나 북한은 올해 6월 서해교전으로 대응하는 등 남북관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를 공격하기 위해 동맹국과 의회의 협조를 얻어나가자, 김대통령의 햇볕정책에 대해서는 뻗대던 북한이 아시안게임에 참여하고 일본과 정상회담을 갖고 켈리 차관보를 만났다. 김정일로 하여금 스스로 외투를 벗게 만든 것은 DJ가 비추는 ‘햇볕’이 아니라 부시가 든 ‘매’였다.

    지난 9월23일 김대통령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에서 북-미 대화 재개와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권유하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정치선언’의 채택을 주도했다. 이 선언은 여러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핵심은 역시 ‘미국은 북한을 (공격하거나) 고립시키지 말고 한국처럼 햇볕정책을 펼쳐라’는 것이었다. 북한을 변화시키지 못한 DJ가 북한을 변화시키고 있는 부시를 향해 ‘잔소리’를 한 격이 되었다. 여기서 북한 문제를 살피는 전문가들은 “부시가 이뤄낸 변화를 DJ가 자기가 주도한 것으로 가로채 간다면 한미관계는 크게 삐걱일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한다.

    10월3일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켈리 차관보는 ‘매’를 든 미국의 생각을 그대로 전했다. 즉 미국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WMD)의 생산과 수출을 중단해야 진정으로 변한 것으로 판단하겠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반미주의자들이 말하는 ‘오만한 일방주의(一方主義)’로 북한을 상대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부시 정부의 일관된 자세에 북한이 밀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켈리 차관보가 돌아간 후인 10월7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북한 중앙통신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이렇게 미국을 비난했다.

    “특사는 그 무슨 ‘우려사항’이라는 것을 내들면서, 핵·미사일·상용무력·인권문제 등에 대한 요구를 우리가 먼저 해결해야, 조-미관계는 물론 조-일관계와 북-남관계도 순조롭게 풀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심히 압력적이고 오만하게 나왔다. …부시 행정부가 일방적인 강경 적대시 정책에 계속 매달리고 있다는 것이 확증된 이상, 우리도 특사에게 우리의 원칙적 립장을 똑똑히 밝혀 보냈다. 미국의 변함없는 조선 압살정책은 우리로 하여금 선군(先軍)정치에 따라 필요한 모든 대응조치를 다 취하도록 떠밀어 주는 것으로 되고 있다.”

    외무성 대변인의 대답은 매우 강경한 것 같지만, 그 속뜻을 헤아려 보면 북한은 미국의 태도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처지임을 보여준다. 1990년대 초반의 북한은 이렇지 않았다. 강석주(姜錫柱) 외교부 부부장을 전면에 내세운 북한은 동해로 미사일을 시험발사하는 위협적인 태도로 밀어붙여, 어느 정도까지는 미국을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나갔다. 그 산물이 지금 함경남도 신포에 건설중인 KEDO의 원자로이다. 그러나 지금의 북한에서는 그때 그 시절의 패기가 보이지 않는다.

    북한판 햇볕정책

    북한은 왜 이런 지경이 되었는가. 그 이유를 경제적인 측면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엘리트 탈북자들이 지적하는 북한의 가장 큰 문제점은 10년이 넘도록 계속돼온 북한의 경제위기다. 서방세계 의 관점에서 말하면 북한은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선언한 파산국가가 된 지 오래다. 인민군 장교 출신인 귀순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민군 중에서 가장 경제사정이 좋은 것은 황해도와 경기도에 포진한 전방부대다. 그런데 이 부대마저도 요 몇 년 사이는 부대에서 지은 농산물을 장마당에 내다 팔아, 필요한 부식과 물품을 조달하고 있다. 당에서 주는 것은 소량의 무기와 탄약, 그리고 약간의 식량뿐이다. 부식이나 생필품은 인민군대가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북한에서 가장 대우가 좋다는 군대, 그중에서 가장 보급 사정이 낫다는 서부전선의 최전방부대가 이 지경이라면 다른 부대의 사정은 살펴볼 것도 없다.

    김정일 정권을 떠받치고 있는 양대 축인 군과 당의 조직이 ‘품을 팔아야’ 유지될 지경이라면, 북한의 경제사정은 최악에 최악을 더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는 안보를 지탱하고 안보는 경제를 보호한다. 허약한 경제로는 거대한 군대를 지탱할 수가 없다. 중앙대 이상만 교수는 7월1일 시행된 북한의 경제개혁과 관련된 북한 내부 문건을 입수해 언론에 공개했다.

    이교수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북한은 7·1 경제개혁으로 ▲사실상 붕괴된 배급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가격체제를 도입해 국영상점의 유통망을 복구한다. 이에 따라 배급가격 기준으로 ㎏당 8전 하던 쌀값이 46원으로 인상되는 등 생필품 가격이 20배 이상 올랐다. ▲이러한 물가 상승에 적응할 수 있게 탄광노동자 한 달 임금을 200원 선에서 6000원 선으로 올려주었다고 한다. 물가와 임금을 20∼30배 올려주는 조치를 취한 것, 이것이 7·1 개혁의 요체다.

    왜 북한은 물가와 임금을 동시에 올리는 조치를 취한 것일까.

    한 엘리트 귀순자는 “북한 경제가 사그라드는 원인은 돈이 돌지 않는 데 있다”고 말했다. 한국인은 약간의 용돈만 지갑에 넣어두고, 목돈은 금융기관에 맡겨 놓고 생활한다. 또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여러 개의 금융기관에 계좌를 개설해놓고 있다.

    은행과 현금인출기가 없다면 실생활이 크게 불편해질 정도로 한국인의 일상 생활은 금융기관과 밀착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한 돈’을 받았다든가 하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집에 돈을 쌓아놓고 사는 사람이 없다.

    많은 사람이 은행에 돈을 맡기고 생활하다 보니, 은행에서는 적잖은 ‘파생통화’가 발생한다. 100원을 은행에 맡기면, 은행은 20% 내외의 지불준비금을 제외한 돈은 대출한다. 대출된 돈은 다시 은행에 들어오는데, 은행은 여기서 지불준비금을 제외한 돈을 또 다시 대출한다. 이런 식으로 대출이 반복되면 사회에는 100원에서 비롯된 상당한 파생통화가 창출된다.

    파생통화는 허구에 불과한 ‘거품’이지만, 이 거품 때문에 한국 경제는 활기차게 돌아간다.

    ‘도박사’ 김정일, 호랑이 등에 올라타다

    중국 단둥에서 바라본 신의주. 신의주 특구사업은 양빈 장관이 중국 공안에 연행됨으로써 초반부터 삐걱거렸다.

    북한에는 이러한 ‘거품’이 없다. 북한에도 창광신용은행·통일발전은행·화려은행·황금의삼각주은행·조선중앙은행·금강은행·대성은행 등 여러 은행이 있다. 북한 인민도 은행을 찾아가 ‘돈 자리(계좌)’를 개설해 거래할 수가 있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인민은 은행에 돈을 맡기려 하지 않는다. 은행에 예금하면 남이 알고 뺏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신용사회고 북한은 불신사회다. 불신과 사회주의 경제체제라는 멍에가 북한 경제의 활력을 죽이고 있다.

    북한의 은행은 지방과 도시 곳곳에 지점을 설치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서민은 은행을 이용하고 싶어도 이용할 방법이 없다. 이러니 파생통화가 생기지 않아 100원을 투입하면 그저 100원만 도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현실은 그 100원도 제대로 유통시키지 못하게 한다.

    장마당은 한때 자본주의식 시장경제 체제가 아니냐는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북한의 장마당에서는 현금을 이용한 거래보다는, 물물교환 방식의 거래가 더 많이 이루어진다. 자본주의가 들어오기 전인 조선시대의 5일장과 유사한 것이 북한의 장마당이다.

    집은 원칙적으로 국가에서 주는 것이고, 생필품은 장마당에서 물물교환으로 마련하다 보니 북한 인민들은 굳이 돈을 돌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이들은 돈을,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불안에 대처하기 위해 집안 어느 곳에 ‘꼬불쳐 놓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귀순자의 분석이다.

    “북한 사회는 한 마디로 거대한 ‘돈 먹는 하마’다. 북한 인민들은 미래가 불안하기 때문에 유일한 대비책으로 현금 보관에 집착한다. 돈을 안전하게 숨기려고 벽에다 돈을 바르고 그 위에 벽지를 바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렇게 현금은 발행하는 족족 각 가정의 장롱 속으로 숨어들어가니 북한 경제는 일어나려야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경제문제를 담당하는 북한 관료들의 고민은 ‘장롱 속으로 숨어드는 현금을 어떻게 꺼내 돌릴 것이냐’에 집중된다. 10년 전인 1992년 7월 북한은 고육책으로, 새로운 화폐를 발행해 구권(舊券)과 강제로 교환하는 조치를 취한 적이 있다. 이때 북한 정부는 노동자 1인당 구권 교환 한도액을 300원으로 한정했다. 이렇게 한도액을 설정한 이유는 300원이 넘는 돈을 가진 가정은 그 돈을 물품을 사는데 쓰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경제는 아주 영악한 ‘생물(生物)’이어서 계획한 사람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튀는 경우가 많다. 이 조치를 취하자 현금을 많이 가진 북한 인민은, 현금이 적은 친척에게 돈을 나눠준 후 한도액인 300원까지 교환케 하였다. 그리고 그 신권을 다시 장롱에 감춰버렸다. 92년 7월의 화폐교환 조치가 실패했기 때문에 10년 후인 2002년 10월 북한은 물가와 임금을 20∼30배 올리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물가와 임금을 똑같이 20∼30배 올린 것은 또 하나의 화폐 교환이다. 물가와 임금이 똑같이 오르면 북한에서 유통되던 화폐의 가치는 한 순간에 20분의 1∼30분의 1로 하락하는게 된다. 화폐 가치가 하락할 것을 안다면 인민은 자발적으로 소비에 나설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일시적으로 돈이 돌아간다.

    이어 북한은 고액권인 500원권과 1000원권을 발행했다. 임금과 물가를 동시에 올렸으니 고액권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10원권이나 100원권은 푼돈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물가와 임금을 동시에 올림으로써 북한은 현재의 화폐 가치를 20분의 1에서 30분의 1로 낮추는 통화개혁을 단행한 셈이 되었다.

    통화개혁은 도박에 가까운 경제회생책이다. 한국처럼 돈이 ‘팽팽’하게 돌아가는 나라라면 위험 때문에 섣불리 통화개혁을 감행하지 못한다. 그러나 북한은 경제규모가 원체 작기 때문에 통화개혁이라는 모험을 시도해 볼 수도 있다.

    통화개혁이 성공하려면 그 직후 외국 자본이 물밀듯이 들어와 북한 화폐를 받쳐주어야 한다. 북한은 해외 자산이 거의 없으므로 북한 원화의 가치를 낮춰도 손해볼 것이 없다. 통화개혁이란 달러화에 대비한 북한 화폐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어서, 외국 자본가들이 북한에 투자하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싸다’는 것에 매혹돼 달러가 들어오면, 달러와 환전되는 북한 화폐가 늘어나고, 늘어난 북한 화폐는 북한 경제를 돌리는 윤활유가 된다.

    외국 자본가가 공장을 인수해 정상가동시켜준다면, 북한은 고질적인 ‘생필품 난’에서 해방되고 고용창출 효과까지 누리게 된다. 이렇게 간단한 원리를 북한은 지난 10여년 동안 ‘제국주의 미국’과 ‘남조선 괴뢰’와 싸우느라 시행하지 못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지금, 마지막 회생책으로 신의주 특구 개방과 물가와 임금 동시 인상이라는 극약 처방을 들고 나왔다.

    ‘옷을 벗어’ 상대를 유혹하기로 했으면 확실히 유혹해야 한다. 유혹을 하려면 ‘가장 센 놈’부터 유혹해야 하는데, 북한의 처지에서 ‘가장 센 놈’은 한국이다. 외국 자본가는 북한과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한국이 신의주 특구에 투자하는지 지켜볼 것이다. 한국 기업이 앞다퉈 투자하면 ‘한반도가 안전해졌구나. 북한 정부를 믿어도 되겠구나’나 하고 투자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기업이 투자하지 않는다면 차일피일 재기만 하고 투자를 회피할 가능성이 높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의 한국은, 김정일 정권에게는 ‘가장 편한’ 김대중 정부가 집권하고 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같은 표독스런 지도자보다는 평양까지 방문해준 DJ가 편한 상대이기 때문에 수없이 재고 망설이던 북한은 DJ 정권 말기에 ‘미소정책’을 선택했다.

    미녀 응원단을 앞세워 부산 아시안게임에 적극 참여하고 경의선과 동해선 연결 공사도 추진하는, ‘북한판 햇볕정책’을 펼쳐보기로 한 것이다. 북한 인민들이 말끝마다 “6·15 정신의 이행”을 강조하는데는 이러한 사회과학이 담겨 있다.

    그러나 한국을 낚는 것은 더 큰 지갑을 갖고 있는 일본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이 갖고 있는 ‘돈지갑’은 한국의 돈지갑보다 스무 배 이상 두껍다. 일본은 한국 정부에 게 36년간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한 역사가 있으니, 북조선에 대해서도 상응한 돈을 내놓을 의무가 있다. 이 배상금을 잘 활용한다면 북한 경제는 빠르게 회복될 수 있다.

    9월17일의 북·일 정상회담은 이런 배경 위에 열렸다. 그러나 1963년 한국과 국교정상화 회담을 한 일본과 2002년의 일본은 크게 달랐다.

    일본에서 ‘돈지갑’을 움켜쥐고 있는 사람들은 북한을 적대시한다. 1980년대 이들은 “한반도가 공산화돼 부산에 붉은 기가 나부끼면, 일본이 위험해진다”는 ‘부산 적기론(赤旗論)’에 동조한 세력들이다. 부산 적기론에 동조한 이들은 한국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전두환 정부에게 40억 달러 차관을 제공한 바 있다.

    여기에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 가족의 절규가 합세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러한 것을 의식했기 때문에 ‘웃지 않는’ 얼굴로 김정일과 악수했다. 환한 미소로 김정일과 포옹했던 김대중 대통령과는 태도부터가 달랐던 것이다.

    1963년 한국은 무상 2억, 유상 3억 달러의 대일청구권 자금을 받아올 때 일본으로부터 이 자금의 용처에 대해서 절대 관여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박정희 정권은 이 돈을 포항제철 건설에도 투자했지만 일부는 공화당 정치자금으로 활용했다.

    일본은 현재 미국을 제치고 제3세계에 가장 많은 차관을 제공하는 나라다. 지난 10여년간 일본은 상당금액의 ODA(정부개발원조) 자금을 중국에 지원했는데, 중국 정부는 이 돈을 군사용으로 쓸 수 있는 도로나 항만 등을 건설하는데 투자했다.

    일본의 ODA 자금 지원 조건

    ‘도박사’ 김정일, 호랑이 등에 올라타다

    부산아시안게임에 참여한 북한의 미녀응원단. 이들은 북한에 대한 한국인의 적대감을 녹이는 임무를 잘 수행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 정부는 ODA 자금을 지원 받는 나라는 그 사용처를 분명히 공개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북·일정상회담은 일본 정부가 ODA 자금의 활용처를 일일이 확인하는 체계가 확립된 후 열렸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북한은 일본 정부가 제시한 DDA 자금 지원 원칙을 전부 수용했다는 점이다. 북한은 예상 밖으로 ‘어떤 꼬리표를 붙여도 좋으니 일단 돈부터 보내달라’는 저자세로 나왔다.

    이러한 북한의 유혹은 성공을 거둘 것인가. 현재로서는 북한판 햇볕정책은 성공할 가능성이 그리 높아보이지 않는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일본은 ODA 자금을 지원할 경우, 돈을 받는 나라는 ‘반드시’ 일본 기업으로부터 물자를 구입하고 공사는 일본 회사에 발주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있다.

    그러니까 일본 기업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으면 ODA 자금 지원도 힘든 것이다. 일본 기업의 참여가 있으려면 먼저 한국 기업의 대북 러시가 일어나야 한다.

    한국에서는 대우와 현대 등 북한 진출에 열을 올리던 기업들이 하나 같이 쇠락해버렸다. 그러자 ‘조’ 단위로 순익을 남긴다는 삼성그룹이 대북 투자를 극력 회피하게 되었다. 김대중 정부가 아무리 떠밀어도 삼성은 요지부동이다. 99년 윤종용(尹鍾龍) 삼성전자 부회장이 ‘의례적’으로 방북해준 이후 삼성은 북한과의 거래를 철저히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대우와 현대의 전례를 지켜본 여타 기업으로서는 삼성의 투자가 없으니 섣불리 북한에 투자를 하지 않으려 한다.

    일본에서는 북한 공작조직의 일본인 납치 문제가 큰 이슈가 되고 있다. 김정일도 이 문제가 북-일 관계를 개선하는데 걸림돌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고이즈미에게 ‘파격적으로’ 납치를 시인하고 사과했다. 이른바 ‘통큰정치’로 복잡한 문제를 건너 뛰겠다는 전술을 구사한 것이다. 북한은 한국을 상대로 ‘통큰정치’를 구사해 성공을 거둔 바 있다. 1972년 이후락 정보부장이 방북했을 때 김일성은 “1968년의 1·21 사태 등은 아랫사람들이 나 몰래 저지른 짓이다. 그들을 이미 처벌했다. 미안하다”며 화끈하게 사과했다.

    2002년 북·일정상회담에서도 김정일은 통큰 정치를 유감없이 발휘해 한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통큰정치는 ‘냉랭한’ 얼굴로 찾아온 고이즈미와 핏줄이 다른 일본인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일본의 납치자 가족들은 납치를 시인한 김정일을 일본 경찰에 고발했다. 리은혜를 비롯한 상당수의 납치자가 비슷한 시기에 북한에서 사고사로 죽은 것이 알려지자, 적잖은 일본인은 ‘북한이 고의로 이들을 죽인 게 아니냐’고 의심하게 되었다. 김정일의 통큰정치가 오히려 장애를 낳게 된 것이다.

    우물한 개구리의 통큰 정치

    북-일정상회담을 도쿄에서 지켜보고 귀국한 연세대 이기탁(李基鐸) 명예교수(국제정치)는 이렇게 지적했다.

    “김정일이 일본인 납치를 시인한 것은 큰 실수다. 이를 1973년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김대중씨 납치 사건과 비교해보면 북한이 얼마나 외교에 미숙한지 금방 알 수가 있다. 박정권의 김대중씨 납치는 일본의 주권을 침해한 행위였다. 어느 나라든 헌법에 주권 수호를 명시하고 있는데 일본의 주권을 무시하고 한국의 정보기관원들이 김대중씨를 납치해 왔으니 일본의 불쾌감은 극도로 높았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납치 공작을 시인하지 않았다.

    대신 사과하는 의미로 김종필(金鍾泌) 총리를 보내 일본 실력자와 면담케 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이것이 외교다. 외국 지도자와 와인잔을 마주치는 것만이 외교의 전부가 아니다. 외교는 법적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를 뻔뻔한 얼굴과 능소능대한 굴신(屈身)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한국은 납치공작을 시인하지 않았고 공식적으로 사과하지도 않은 채로 김대중씨 납치문제를 해결지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자기 입으로 납치를 시인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김정일의 통큰정치는 그가 독재자이며 ‘우물안 개구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2000년 정상회담에 참여했던 한 고위인사는 회담장에 들어가지 못한 북한의 김영춘 총참모장이 자신에게 “위원장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냐고 자꾸 묻더라”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평소에도 김정일은 통큰정치를 보여주기 위해 즉흥적으로 지시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즉흥적인 지시는 과거의 지시나 정책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북한에서 현지지도를 할 때는 김정일이 그렇게 해도 밑에 사람들이 알아서 해결한다. 그런데 외교를 할 때 즉흥 발언을 하면 골치 아파진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김정일에게 직언을 할 처지도 못돼서, 그저 위원장이 무슨 말을 했는지라도 먼저 알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오죽 답답했으면 인민군 총참모장이라는 사람이 우리를 붙잡고 ‘장군님이 뭐라고 하셨는가’를 묻겠는가.”

    통은 크지만 ‘나이브(naive)’한 장군님의 한계를 또한번 보여준 것이 신의주특구 행정장관 임명이다. 북한의 가장 큰 괴로움은 외국 기업이 투자를 꺼린다는 점이다. 나진·선봉 특구도 외국 기업의 투자가 이어지지 않아 실패했다. 나진·선봉은 김정일의 승인으로 시작된 것이지만, 실패하자 모든 책임을 대표 실무자였던 김정우(金正宇)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장에게 돌렸다.

    신의주 특구는 북한이 선택한 거의 마지막 카드다. 때문에 외국인의 신뢰를 모으기 위해 김정일은 외국인을 장관으로 임명하는 초강수를 택했다. 여기까지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홍콩의 리카싱(李嘉誠)이나 언론 보도가 있었던 한국의 박태준(朴泰俊) 일본의 손정의(孫正義) 같은 괜찮은 경제인이 행정장관이 돼 준다면, 국제사회에 대한 북한의 신뢰는 크게 올라갈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행정장관 임명을 거부해, 탈세범으로 쫓기는 양빈(楊斌)이 선택되었다.

    북한 행정장관 직함을 활용해 심양의 네덜란드촌 분양 사업을 하려던 양빈의 ‘검은 속셈’은 중국 공안이 그를 연행함으로써 남가일몽(南柯一夢)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로인해 북한은 초장부터 특구 사업이 삐걱이는 불운을 맞았다.

    북한은 신의주에서 주민 20여 만명을 소개하고, 철책으로 울타리를 친 후 작은 운하까지 파, 북한과는 완전 단절된 자본주의 섬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문제는 신의주로 어떤 기업이 들어갈 것인가다.

    북한에 가장 바람직한 것은 공장이 들어와 물품을 생산해주는 것이다. 이 경우 신의주는 박정희 정권이 만들었던 마산수출공단 같은 지역으로 발전할 수 있다. 신의주는 북한에서 화교가 가장 많이 사는 곳이다. 홍콩의 영향을 받아 중국의 심천(深?)이 발전했듯, 중국 단둥(丹東)의 활력을 받아 신의주가 발전한다면 북한으로서는 ‘달러박스’를 확보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모든 문제는 과연 외국 제조업체가 신의주에 공장을 지을 것인가로 귀결된다.

    여기서 적잖은 전문가는 머리를 가로 젓는다. 한국에서는 삼성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고 일본에서는 납치자 문제가 발목이 잡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일본 정보기관은 북-일 정상회담에 배석한 북한 외교부 일본과장이 과거 공작원으로 일본에 비밀리에 침투했다는 사실까지 파악하고 있다(소식통에 따르면 과거에 확보한 지문과 이번에 확보한 지문이 같다고 한다). 일본은 납치자 문제가 풀릴 때까지 상당기간 ODA자금 지원을 지연시킬 가능성이 있다.

    한국과 일본의 투자가 늦어질 경우 북한이 택할 수 있는 차선책은 신의주를 오락과 유흥도시로 개발하는 것이다. 이는 신의주를 홍콩 모델이 아니라 카지노의 도시인 마카오식으로 개발하는 것이다. 오락산업은 환경오염을 전혀 일으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현금 유통과 수입이 빠르다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카지노로 몰려오는 돈에는 뒤가 구린 것이 많다. 이러한 돈은 명암(明暗)과 청탁(淸濁)을 구분하지 않는다. 오히려 약간 어둡고 탁한 곳이 활동하기에 더 편하다. 북한이라는 신용불량국가가 굴뚝산업을 유치하겠다고 하면 투자자가 적어도, 유흥산업을 유치한다면 청탁을 불문하는 검은 자본이 유입될 가능성이 있다. 북한은 달러 확보가 절실하고, 전 인민의 정신까지도 지배할 수 있는 병영국가이니 주민통제에 자신이 있다면, 유흥산업의 도입을 검토할 가능성이 있다.

    도박과 유흥은 가장 천민(賤民)적인 자본주의다.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나 선진국에서는 도박을 잘 관리해 현금을 생산하는 ‘클린 산업’으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카리브해의 섬나라처럼 공권력이 불안한 나라의 도박장은 국제적인 돈 세탁기지로 활용된다.

    오락산업을 유치할 경우 신의주는 어느 방향으로 발전할 것인가. 다수의 북한 전문가는 “신의주가 라스베이가스나 모나코 같은 고급 유흥도시로 발전하기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예정된 2003년 위기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안보 분야다. 북한의 안보는 김정일 정권의 안보와 동일시되는데, 김정일은 정권안보가 흔들릴 정도로 경제개혁을 추진하지는 않을 것이다. 안보 관계에서 주목할 것은 최근 계속해서 보도가 나오고 있는 북한의 감군(減軍)설과 2003년까지의 미사일 발사유예 선언이다.

    북한이 경제개혁에 박차를 가할 경우, 여기에 참여할 젊은 일꾼은 군대에서 보충되어야 하므로 북한의 감군 가능성은 오래전에서부터 예측돼 왔었다. 병력을 줄이면 로동당은 그만큼 ‘군 입’을 던다는 이득이 있다.

    북한은 공장마다 직장예비군과 유사한 조직인 ‘교도대’를 운영하고 있다. 교도대는 한국의 직장예비군보다 훨씬 더 군사적이다. 때문에 1개 군단 병력을 교도대로 돌렸다가 필요시에는 교도대를 1개 군단으로 재편하는 것이 상당히 자유롭다.

    북한이 어떤 형식으로든 감군하면, 한국도 화답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군은 전방의 1군과 3군을 통합해 지상작전사령부를 만들고, 2군 예하의 두 개 군단을 해체한다는 복안을 세워놓고 있다.

    이 경우 남북이 어떤 기준으로 감군할 것이냐가 문제가 된다. 병력이 많은 북한은 동일한 수의 병력을 줄이자고 할 것이고 한국은 이에 반대할 것이다. 무기 감축에 있어서는 더욱 복잡한 신경전이 예상된다. 그러나 아무리 군축을 하더라도 김정일 정권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줄이지는 않을 것이다. 군비축소는 남북한 사이에 새로운 갈등을 낳을 수도 있다.

    또 주목할 것이 2003년까지의 미사일 시험발사를 유예한다는 북한의 태도다. 김정일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났을 때와 고이즈미 총리를 만났을 때 2003년까지 미사일 시험발사를 유예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2003년은 애초 KEDO가 북한에 원자로 2기를 완공해주기로 한 때이다. 그러나 현재의 공사 진척도로 봐서는 2003년 경수로 완공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2003년 경수로가 완공되지 않을 경우 북한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과거처럼 미사일을 시험발사하고 불바다 발언을 하며 벼랑끝 전술을 펼칠 것인가.

    1990년대 북한의 미사일 위협이 있은 후 동북아에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일본 해상자위대는 발사된 미사일의 추적과 요격이 가능한 이지스 구축함을 네 척 도입한데 이어 추가로 네 척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 해군도 이지스 구축함 세 척 도입을 확정지었다. 일본 육상자위대와 주한미군은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고, 한국 공군도 도입계획을 서둘러 추진하고 있다.

    한·미·일 세 나라는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처할 ‘철모’를 만들어 깊이 눌러쓰게 된 것이다. 이 시기 한국은 MTCR(미사일기술통제체제)에 가입해 사정거리 300km의 미사일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 공군은 F-15K를 도입하면서 사거리 300km의 SLAM-ER 대지 공격용 크루즈 미사일을 미국에서 도입한다. MTCR 가입으로 500km와 1000km를 비행하는 로켓을 연구할 수 있는 자유도 얻었다.

    반면 지난 7∼8년 사이 국제사회는 북한 미사일의 비밀을 상당히 간파했다. 한·미·일 첩보기관은 북한이 노동이나 대포동 미사일 양산에 실패했다는 증거를 확보해놓고 있다.

    미사일을 한번 만들어보는 것과 양산은 크게 다르다. 한번 만들어본 것 중에서 실제 양산에 들어가는 것은 10%도 되지 않을 정도로 양산은 만들어보는 것보다 한 차원 높은 기술을 요구한다.

    한국과 일본이 북한에 투자하지 않고, KEDO가 2003년까지 경수로를 완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북한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고 중국에 대해서는 탈북자 수용소 건설을 강하게 요구 한다면, 북한은 노동이나 대포동 미사일을 시험발사하는 것으로 대응할 수 있다. 그러나 미사일 발사는 과거와 달리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미사일 시험발사가 여의치 않을 경우 북한은 서해 북방한계선 도발 등으로 군부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한편으로 국제사회에 압력을 넣으려고 할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해 한국이 94년의 김영삼 정부처럼 굴복한다면 북한은 체면을 지킬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반대라면 군부의 불만이 높아진다 군부의 불만의 군축과 실패한 경제 개혁에 대한 불만으로 확대된다면 군사쿠테타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북한의 인권문제와 중국의 태도 변화다. 탈북자 지원단체에 따르면 현재 중국은 ‘탈북자를 숨겨준 중국인에 대해서는 벌금 4000위안, 탈북자를 신고한 중국인에 대해서는 포상금 4000위안’을 걸어놓고 대대적으로 탈북자를 단속하고 있다고 한다. 그 결과 탈북자들은 조선족 사회로 숨어들지 못하고 북만주의 산속으로 쫓겨가 토굴 생활을 하고 있다. 북만주의 겨울은 매우 춥다.

    한 대북사업가는 이러한 사실을 전하면서 “중국 정부의 조치는 사실상의 인종청소다. 북만주의 잔혹한 추위를 못견뎌 여름 옷을 입고 빠져나온 탈북자들은 올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얼어죽고 굶어죽을 것이다. 내년 봄 도처에서 탈북자의 시신이 발견되면 국제사회에서는 중국 정부의 비인도성과 한국 정부의 무관심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북, 쿠데타 가능성 배제 못해

    계속된 탈북자들의 외국 기관 망명사태는 중국으로 하여금 새로운 정책을 선택케 하는 요소가 될 가능성이 있다. 올림픽 유치 국가로서 체면이 깎이는 우(愚)를 피하기 위해 탈북자를 난민으로 인정하지는 않더라도, 보호시설에 수용하는 타협안을 채택할 수도 있다.

    실제로 중국의 한반도 문제 연구자들은 ‘한국이 얼마만큼을 중국에 내놓게 할 것이냐’란 문제를 놓고 토의할 정도로 탈북자 수용소 건설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은 탈북자 문제가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금방 수용소 건설로 전환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북한은 인권탄압국가라는 이유로 더욱 고립된다. 여기에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성공적으로 완수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면, 북한이 받는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부담이 안으로 곪으면 김정일 정권은 큰 위기를 맞을 수 있다.

    결국 북한은 개혁 개방을 너무 늦게 선택했다. 김일성이 살아 있던 1993~ 1994년쯤 나진·선봉을 성공적으로 개방했다면, 북한은 지금의 중국처럼 정치와 군부가 계속해서 로동당이 지배하며 발전하는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나진·선봉을 개방할 당시 북한은 이 지역에 한정해서 통용하는 것으로 500원권과 1000원권을 발행했다. 그러나 이 고액권은 어느 틈엔가 사장되고 말았다. 2002년에 북한은 10여년 전에 만들었다가 성공시키지 못한 계획을 다시 추진하려 한다.

    북한의 힘이 약화된 상태에서 실시하는 개혁조치가 실패할 경우 김정일은 수족같이 부리던 군부와 당으로부터 배척받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점에서 김정일이 올라탄 개혁은 ‘거대한 호랑이’다. 김정일이 호랑이를 잘 다룬다면 그는 동아시아의 영웅이 된다. 그러나 그가 올라탄 호랑이는 너무 사나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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