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앞서거니 뒤서거니 계산 착오, 5년 헛장사

대선 조연 정몽준·이인제 도박 성적표

  • 글: 박성원 swpark@donga.com

    입력2002-12-31 1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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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거니 뒤서거니 계산 착오, 5년 헛장사

    ‘동병상련’의 아픔을 달래고 있을 법한 이인제 의원과 정몽준 대표. 두 사람의 5년 후가 주목된다.

    전국을 흥분으로 몰고 갔던 2002 대선 드라마의 막이 내렸다. 이제 정치권에서는 5년 뒤의 주연(主演)을 꿈꾸는 두 정치인의 엇갈리는 행보가 관심을 끈다.

    이인제(李仁濟)와 정몽준(鄭夢準). IJ와 MJ로 불리는 두 사람은 모두 50대로 지난 대선을 앞두고 한때 여론조사에서 당선을 넘보던 유력주자였으나, 당내 경선과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에게 뜻밖의 패배를 당해 ‘꿈’을 접어야 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야망을 향한 접근 방식은 사뭇 달랐고, 이로 인해 이들이 맞이하는 정치적 앞날도 판이하게 전개될 것이 분명하다.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공식 선거운동기간에 들어가기 직전인 11월24일 서울 강남의 한 호텔.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 패배 이후 당에서 사실상 마음이 떠나 있던 이인제 의원이 참모들에게 탈당 의사를 밝히면서 말했다.

    “호남 사람들하고는 다시는 정치 같이 안 한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는 절대 화해가 없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 정권이 비참한 대가를 치르도록 해주겠다.”

    이인제의 슬픈 귀환?



    그러나 그로부터 3일 뒤 서울 여의도 한 호텔에서 이의원은 참모진에게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다. 그래도 5년 동안 같이했던 사람들인데 내가 떠날 수야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하지만 다시 3일이 지난 뒤 그는 참모들에게 탈당 결심을 전했다. 측근들에 따르면 이의원은 탈당 직전까지 ‘아침에는 서쪽, 오후에는 동쪽’으로 방황을 거듭했다고 한다.

    노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간 후보단일화를 위한 여론조사가 노후보의 승리로 결론이 난 11월26일 아침 이의원은 충혈된 눈으로 몇몇 측근에게 말했다.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 급진 좌경 정권이 들어서게 됐다. 노무현이 대통령 되는 것만은 절대 두고 볼 수 없다. 차라리 한나라당이 낫다”고 탄식했다. 그러나 그 날 저녁 이의원은 자택에서 참모들과 만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한나라당이 어떤 당이냐. 5년 전 지역주의 광풍으로 나를 버린 ‘동쪽당’ 아니냐. 내가 어찌 거기에 다시 가겠느냐”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다음날 고향인 논산에 내려갔다가 밤 늦게 귀경한 그는 다시 측근들에게 “도저히 안되겠다. 충청도에서 난리다. ‘호남 사람들이 당신을 버렸는데 무슨 미련이 있어서 그런 당에 남아 있느냐. 차라리 한나라당으로 가라’고 말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2002년 3월에 있었던 지역별 대선후보 경선에서 부동(不動)의 1위를 자신했던 이의원은 뚜껑이 열리면서 노후보가 속속 1위를 차지하자 ‘배신감’을 감추지 못했다. 광주 경선이 있던 3월18일 아침 이의원은 측근들에게 굳은 얼굴로 “다 끝난 것 같다. 연청이 돌아서고 모든 당 조직도 노무현 쪽으로 정리된 채 연락조차 안 된다”고 말했다.

    자신의 패배가 ‘부산 출신 노무현’을 후보로 내세워 재집권 가능성을 극대화하려는 호남 정치세력의 ‘전략적 선택’에 따른 것이라는 확신이 굳어지면서 노후보와 민주당에 대한 그의 분노는 갈수록 깊어졌다.

    측근들은 경선 패배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의원에게 세 가지 선택 방안을 건의했다. 1안은 깨끗이 미련을 접고 노후보를 돕는 것이고, 2안은 후보단일화를 주창해서 정몽준 의원을 돕는 것이고, 3안은 한나라당 탈당의 명분이었던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의혹이 해소될 경우 ‘원인 소멸’을 내세워 한나라당에 ‘복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모두 거부한 채 결국 자민련행을 택했다. 한 측근은 “동쪽당(한나라당)에서 버림받고 서쪽당(민주당)에서 역시 지역주의 ‘음모’에 의해 배신당했다는, 뼈저린 인식을 하고 있는 IJ로선 한국정치 현실에서 역시 믿을 것은 고향뿐이라는 판단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충청도당’으로서의 간판 유지조차 어려워진 자민련과 JP가 최소한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줌으로써 고향 사람들로부터 ‘의리와 도의를 지킨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재기를 도모해 보겠다는 얘기다.

    그러나 명분이 있고 없고를 떠나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무기는 지역이고 고향뿐’이라는 IJ의 선택은, 1997년 대선에서 3김 정치 청산과 영호남 지역주의 타파를 외친 그에게 표를 찍어준 500만 유권자들에게 허탈하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다.

    1998년 6·4 지방선거에서 국민신당이 참패한 직후 경기도 교외의 한 음식점에서 기자와 만난 이의원은 쓴 소주잔을 연거푸 들이키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 사람들은 다수를 따르는 ‘들쥐’와 같다고 1980년대 초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이 말했듯이 우리 국민성은 일단 센 쪽에 붙고 보려는 성향이 있다. 3김 정치를 타파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다 ‘그렇다’고 답하면서도 정작 투표할 때는 YS의 유산을 ‘강탈한’ 한나라당을 찍거나 아니면 DJ당을 찍는다.”

    그렇게 국민의 ‘낮은 정치의식’을 야속해하던 이의원은 이듬해 민주당에 전격 합류한 뒤 당내 최대주주였던 동교동계와의 밀월 속에 유일한 ‘이회창 대항마’로서 위상을 누렸다. 그러다가 어이없이 예선에서 패배한 뒤 그가 받은 충격은 아마 5년 전 한나라당 후보경선 패배에서 받았던 충격보다 컸을 법도 하다.

    민주당 탈당 직전, 그가 측근들에게 “내가 여기서 뭘 하겠느냐. 당내에서 내 목소리가 어디 있느냐. 잡음밖에 더 되느냐”고 토로했던 점에서도 그의 심경의 일단이 묻어난다.

    그러나 자민련이 그의 목소리를 되찾아줄 튼튼한 ‘확성기’가 돼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금세라도 ‘충청 맹주’의 옥쇄(玉碎)를 내어줄 것처럼 보였던 JP가 2004년 총선 공천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하며 ‘석양을 벌겋게 물들이겠다’는 욕심을 버리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 JP 밑에 발이 묶인 그의 운신폭은 좁게만 보이기 때문이다. 이의원은 이제 자민련 총재권한대행이다.

    5년 뒤를 겨냥한 공간확보를 위해 변신을 거듭해 온 이대행의 목소리가 힘과 설득력을 가지려면 ‘경선불복’이라는 딱지를 상쇄할 만한 명분 있는 모습과 신뢰 회복이 급선무가 아닐까 싶다.

    기업가형 정치인 정몽준의 셈법

    반면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는 지난 대선에서 후보단일화 약속 이행을 통해 ‘승복의 역사’를 처음으로 남겼다는 명분을 얻음으로써 한때 차기 경쟁에서 누구보다 유리한 정치적 자산을 갖고 출발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후보단일화 여론조사에서 노후보에게 뜻밖의 패배를 당한 뒤 지원유세를 통해 선거공조 약속을 실천에 옮기기까지는 19일이라는 뜸들이기 시간이 필요했다. 이 마저도 집권 이후 권력 주도권을 둘러싼 노 후보와의 줄다리기 끝에 투표일을 눈앞에 둔 12월18일 전격적인 지지철회 결정으로 빛이 바래고 말았다.

    그는 ‘약속 이행’과 ‘억울한 예선패배’ 사이를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갔다.

    12월5일 울산에서 기자들과 만났을 때는 “내가 대통령후보가 됐다면 지금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을 텐데, 또다시 지역감정 선거로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자신이 단일후보가 되지 못한 아쉬움을 거듭 토로했다.

    ‘노선과 정책이 다른 노무현을 도와서는 안 된다’는 주위 압력이 정대표의 허전한 마음을 파고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모 재벌 계열사의 사장단 6명은 ‘노-정 대선공조’가 타결을 향해 급진전하던 12월6일 통합21의 핵심 당직자를 불러, “노무현이 대통령 되면 나라가 뒤집힐텐데 어쩌자고 그러느냐. 정대표가 이회창 후보를 돕도록 설득해 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정대표 스스로도 “영남에서는 단일화 약속을 약속이라고 생각하는 유권자가 4분의 1도 안 된다. (노후보를 돕지 말라는) 4분의 3의 뜻을 거스르지 말라는 압력이 많았다”고 고백했다. 한나라당의 한 전국구 의원은 노골적으로 정대표에게 사신(私信)을 보내 “이념과 노선이 다른 노후보를 지지하면 결국 DJ에게 배신당했던 JP와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대표가 노후보 지원을 머뭇거렸던 진짜 이유는 지원의 ‘대가’를 최대한 확실히 보장받기 위한 협상 전략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없지 않다.

    노후보에게 단일후보 자리를 내준 이후 그는 ‘분권형 대통령제’라는 카드에 사인할 것을 노후보에게 요구해 관철시키더니 정책조율이라는 명목으로 10여 일간 자신의 주요 정책을 대선공약으로 채택해야 한다고 노후보측에 요구했다. 노후보측이 고심 끝에 이를 대부분 받아들인 뒤에는 ‘공동의 정책을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 담보’를 요구하며 사실상 공동정부 형태의 국정운영을 국민 앞에 공약해 줄 것을 또 요구했다.

    막판에는 한나라당 이후보가 제시한 ‘임기 중 (권력분산형) 개헌’에 대해 호평을 하는가 하면 대선 중립까지도 불사할 듯한 분위기를 보여 노후보의 몸을 달게 만들었다.

    결국 마음이 급한 노후보가 12월12일 사실상의 공동정부 수용 의사를 전화통화에서 밝혀오고, 다음날 회동 직후 이를 국민 앞에 못박은 이후에야 그는 지원 유세를 시작했다. 하지만 6일 만인 18일 그는 노후보가 공동 유세장에서 ‘차기 대통령 정몽준’이라는 플래카드에 대해 “과속하지 말라”며 ‘차기 주자’ 문제에 관한 묵시적 합의를 파기하는 태도를 보이자 미련없이 지지철회를 선언했다.

    이 같은 정대표의 정치 스타일은 기업 가문에서 성장한 그의 계약에 대한 집착, 협상 또는 흥정을 당연한 과정으로 여기는 인식 때문이 아니냐는 분석도 없지 않다.

    이인제 대행이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깜짝 행동’을 정당화하는 ‘YS식 정치’를 구사한다면 정대표는 구체적 보상을 위한 담보물을 손에 잡지 않고는 정치적 약속을 믿지 못하는 ‘기업가형 정치’를 선보이고 있는 셈이다.

    측근들은 “단일화 직후 약속대로 노후보의 손을 덥석 잡고 무조건 지원 유세에 나섰다면 그 날로 정대표의 존재 가치는 없어졌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가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패배한 이후 여론조사 전말에 대해 민주당측과의 협상에 참여했던 당직자들을 대상으로 ‘시말서’를 연상케 하는 경위조사 보고서 작성 작업을 벌인 것도 가히 기업 오너다운 발상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대선이 끝난 이후 그는 ‘정치인 정몽준’으로서 본격 시험대에 올라 있다.

    단일화 승복으로 얻었던 여론의 박수나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이라는 천재일우의 조건은 이유 여하를 떠나 그가 ‘공조파기’를 선언함으로써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 모를 과거의 추억에 머물 수도 있다. 조석으로 변하는 게 정치인의 인기임을 감안할 때 자신이 내걸었던 원내 정당, 정책중심 정당 구현과 정치개혁을 구체적으로 주도하지 못할 경우 5년 뒤를 향한 그의 ‘꿈’은 한낱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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