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호

민주당 전천후 공격수 함승희·노관규

검사 때 실력으로 대선자금 폭로 앞장선 투톱

  • 글: 박성원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swpark@donga.com

    입력2003-11-25 17: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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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당 전천후 공격수 함승희·노관규

    성역 없는 수사를 외치고 있는 함승희 의원(왼쪽)과 노관규 위원장.

    한번 검사는 영원한 검사인가. 검사 출신 현역 정치인 가운데 민주당 함승희(咸承熙) 의원과 노관규(盧官圭) 서울 강동갑지구당위원장 두 사람은 유달리 ‘검사 물이 덜 빠졌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보통 정치인들처럼 유들유들하기보다는 사람을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 식으로 바라보는 다소 뻣뻣한 시각을 갖고 있다는 뜻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보다는 잘못된 것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려야 직성이 풀리는 듯한 자세를 아직 갖고 있다는 의미가 더 큰 것 같다.

    특히 비자금 추적의 전문가로 명성을 날린 특수부 검사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두 사람은 요즘 대선자금 정국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자신의 ‘전공’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이들은 SK 비자금 사건으로 실체의 일각을 드러낸 정경유착 고리를 이번 기회에 완전히 끊어내야 한다며 전면에서 또는 막후에서 정치자금에 대한 검찰 수사를 이끌어내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10월29일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 2층 기자실.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노관규 위원장이 당 예결위원장 자격으로 한달여간 벌여온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대선자금 운용과 관련한 민주당 회계자료 기초감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었다.

    그는 “대선에서 민주당 노후보의 당선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분들의 이름이 거명될 수밖에 없는 데 대해 동료정치인 입장에서 마음이 무겁고 괴롭지만 정치개혁의 이정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고 소회를 밝혔다. 당 회계장부 조사 결과 모두 128억5000만원에 해당하는 허위회계 처리가 드러났으며 이상수(李相洙) 당시 민주당 선대위 총무본부장(현 열린우리당 의원)이 중앙당 경리국에 3차례에 걸쳐 허위 회계 처리를 지시해 실제 자금 흐름을 은닉하고, ‘세탁’해 사용한 의혹이 있다는 요지였다.

    그는 특히 이의원이 제주도지부 후원회 명의로 사용했던 무정액 영수증 365장을 민주당에 반납하지 않은 데 대해 의혹을 제기하며 “대선이 끝난 후인 1월 23, 24일 17억원의 거액이 이 작은 지역에 입금된 것은 대규모의 ‘돈 저수지’가 따로 있다는 증좌”라고 분석했다. 돈세탁 여부 등에 관해 끝없이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조목조목 답변해나가던 그는 30분여에 걸친 ‘수사 브리핑’을 마치고는 “더 궁금한 것 없으시죠”라며 두 손을 털고 일어섰다.



    일부 당직자들이 “이목이 집중된 사건인데 기자들과 농담도 하고 카메라 앞에서 포즈도 취하라”고 권유했지만 노위원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검찰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다루려 한다면 신뢰를 받을 수 없듯 민주당이 이 사건을 노대통령과 신당에 대한 공격용으로 다룬다면 단순한 정쟁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이유였다.

    실제 군살없는 그의 조사결과 발표는 여권의 대선자금 전반에 대한 의혹을 증폭시켰다. 검찰은 그의 발표 이후 이의원을 소환하는 것은 물론 SK 비자금뿐만 아니라 여야의 대선자금 전반으로 수사를 확대해나갔다.

    그는 검사 시절인 1998년 변호사와 판사간의 유착으로 문제가 된 의정부 법조 비리 사건 수사를 맡아 회유와 압력에 굴하지 않고 파헤친 주인공이다. 당시 수사 결과 의정부 지원 소속 판사 8명이 옷을 벗었으며, 나머지 판사 30명 전원이 다른 지역으로 전보되는 사법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앞서 1997년 대검 중수부 검사 재직 시절에는 심재륜(沈在淪) 중수부장이 이끄는 ‘드림 수사팀’의 일원으로,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씨 비리 사건을 맡아 대선 잔여금에 조세포탈 혐의를 적용해 현철씨를 구속시켰다. 또 별명이 ‘자물쇠’인 한보 정태수(鄭泰守) 총회장의 입을 열고 수천억원 비자금 사건 비리를 파헤치기도 했다.

    이 같은 수사력에는 검사 임용 전 8년간 세무 공무원 생활을 통해 익힌 경험이 큰 힘으로 작용했다. 전남 장흥 출생으로 순천 매산고 출신인 그는 학교 졸업 뒤 서울에 올라와 구로3공단에서 1년간 일했으며 1979년 세무공무원이 됐다. 이후 1992년 32세 때 늦깎이로 사법고시(34회)에 합격한 뒤 검사로서 세무장부 분석과 계좌 추적에 탁월한 솜씨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그가 정치권에 입문한 것은 2000년 초. 수원지검 특수부 검사를 끝으로 검사직에서 물러난 그는 4·13 총선 ‘새 피’ 수혈에 총력을 기울이던 민주당의 영입 제의를 받아들여 한나라당 이부영(李富榮·현 열린우리당) 의원과 맞붙는 모험을 치렀다. 50일이라는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42%(4만2000여 표)를 얻을 정도로 선전(善戰)했다. 변호사라는 직업에 어울리지 않게 33평 전세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두 아들 중 장남(11세)이 태어나면서부터 혈액종양(에반스 증후군)을 앓고 있다.

    그러고 보면 그는 공교롭게도 노대통령과 공통점이 많다. 고졸 출신 변호사에 같은 광주 노(盧)씨다. 가난한 성장기를 보내다가 법조인이 돼 명성을 쌓은 뒤 정치권에 입문한 것도 같다. 그런데 한 사람은 대선자금 실체를 토해내라고 닥달하고, 한 사람은 “꿀릴 게 없으니 다 파헤쳐 보라”는 식으로 맞서고 있다.

    11월5일 기자와 만난 노위원장은 “주변에서 ‘대통령과 싸우는 셈인데 괜찮으냐’고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내가 간단치 않은 일을 저질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일을 벌여놓고 별 소득을 거두지 못한 채 끝난다면 어찌할 것이냐”는 질문에 “나의 일이 비록 작지만 사회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내년 총선에 출마하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정치자금 부패를 근절하는 데 작은 보탬이라도 될 것이다”고 답했다.

    그는 ‘민주당판 정형근(鄭亨根)’이라는 소리가 제일 듣기 싫은 수식어라고 한다. 여권의 약점을 공격적으로 치고 나와 이슈화함으로써 소속당의 정치적 이해를 관철시키는 ‘폭로전문가’와 정치자금 부패구조를 내부고발하는 데 한 몸을 던지기로 한 자신의 활동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이유에서다.

    “검은 돈봉투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개혁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며칠 전에는 정치권의 검은 돈 얘기가 TV 화면을 가득 메우다가 나의 대선자금 조사결과 발표 장면이 나오니까 초등학교 2학년짜리 아들이 ‘아빠, 돈 먹어서 나온 것 아니지?’라고 묻습디다. 이것이 내가 정치판에서 ‘검은 돈과의 전쟁’을 벌여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그는 “정치권의 부패구조가 고쳐지지 않으면, 쓸모 있는 인재가 정치권에 들어와도 얼마 못가 국민에게 짜증을 주는 인물로 비쳐지고 마는 악순환을 막을 수 없다”며 “한국판 마니 풀리테 같은 대대적인 비리척결 수사가 전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자금이란 ‘괴물’과 맞선 이유

    그는 “기업에 미치는 충격을 이유로, 또는 정치권의 정쟁 때문에 번번이 정치권력의 부패에 대한 검찰 수사가 좌절됐던 전철을 되풀이한다면 정치권은 영영 정치자금과 관련한 비리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 바탕 위에서 정치권이 대선자금에 대한 특검을 스스로 결의해 성역 없는 수사를 받은 뒤 제도개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것.

    그는 특히 “선관위 정도의 인력과 전문성을 갖고는 정당 회계감사를 제대로 하기 어렵다”며 “공인회계사 시민단체 등이 망라된 조사기구를 통해 정치자금에 대한 실질적인 외부감사를 제도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선거 때면 정신없이 돈을 끌어다 쓰고나서 선거 후 이리저리 꿰어 맞춘 회계장부를 내놓는 ‘분식회계’가 일반화된 것이 우리 정치판인 만큼 정치자금에 대한 철저한 검증장치가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그는 친정인 검찰에 대해서도 주문이 많았다. “최도술(崔導術) 전 대통령총무비서관이 SK에서 받은 11억원의 비자금 가운데 4억3000만원은 총선에 쓰려고 가명계좌에 남겨뒀다는데 그 차명인이 누구인지는 왜 밝히지 않는 겁니까. 또 SK 이외에 7, 8개 기업에서 돈을 더 받았다는데 어느 기업에서 무슨 명목으로 받았는지 더 조사해야 합니다.”

    전문수사관도, 밀폐된 조사실도 없는 정당에서, 그것도 공식적으로 맞춰놓은 자금서류 위주로 조사를 할 수밖에 없는 자신과 달리 검찰은 보다 깊숙하고 본질적인 부위에 메스를 들이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반(反)정치자금론자’는 아닌 것 같다. 그는 “좋은 정치인을 육성하기 위한 후원금 자체는 나쁜 게 아니다”며 “다만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 뺏기는 기분으로 내놓는 정치자금은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노무현 캠프의 대선자금에 대한 일종의 ‘사설(私設) 특검’ 역할을 마치면 훌훌 털고 몸이 불편한 큰아들의 요양에 전념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잘못된 일을 보았을 때 피하거나 꺾이지 않는 모습을 아들에게 보여주는 것, 그것이 내가 여권의 대선자금 의혹이라는 거대한 괴물과 맞서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민주당 전천후 공격수 함승희·노관규

    결연한 수사의지를 보이고 있는 송광수 검찰총장의 뒤를 안대희 중수부장이 따르고 있다.

    노위원장이 국회 밖에서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를 압박하는 역할을 하는 반면 국회 안에서 검찰의 성역 없는 대선자금 수사를 채근하는 시어머니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이는 같은 당 함승희 의원이다.

    함의원은 10월9일 대검 국정감사장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SK 비자금을 각각 70억원 이상씩 수수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데 사실이냐”고 추궁, 검찰을 곤혹스럽게 했다. 검찰은 바로 다음날 한나라당 최돈웅(崔燉雄) 의원을 전격 소환, SK 비자금 100억원 수수 혐의를 밝혀냄으로써 그의 지적이 사실로 입증됐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함의원의 폭로가 SK 비자금의 수사 속도를 조절하려던 검찰로 하여금 적극적인 수사를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못박는 역할을 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에 대해 그는 “검찰내부에 대한 ‘취재’를 통해 미리 현황을 파악한 뒤 검찰이 발을 못 빼게 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질문했다”고만 밝혔다.

    2001년 서울지검 국정감사에서는 G&G그룹 회장 이용호(李容湖)씨가 거액을 횡령한 혐의로 내사를 받고도 입건되지 않은 데 대해 집중 추궁해 대검의 감찰조사 및 직접 조사를 이끌어냈다. 결국 당초 축소 은폐수사를 했던 검찰간부들이 줄줄이 옷을 벗고 신승남(愼承男) 검찰총장이 불구속 기소됐을 뿐만 아니라 김대중(金大中) 당시 대통령의 차남 홍업(弘業)씨가 구속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른바 ‘이용호 게이트’였다.

    함의원은 이처럼 검찰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감찰관’ 노릇을 하고 있다. 8월13일에는 국회 법사위에서 고(故) 정몽헌(鄭夢憲) 현대아산이사회 회장의 자살 동기를 둘러싸고 검찰의 가혹행위 의혹을 제기,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는 이름을 날린 특수통 검사였다. 1980년 사법고시(22회)에 합격한 후 1982년 초임 검사 시절부터 특수부 근무를 시작, 1994년 서산지청장을 끝으로 옷을 벗을 때까지 굵직굵직한 사건을 수사했다. 이북 말투가 밴 어눌한 강원도 사투리의 소유자이지만, 피의자를 날카롭게 추궁하며 몰아붙일 때는 서늘한 칼바람이 일기로 유명하다.

    5공 비리사건, 새마을본부 전경환(全敬煥)씨 비리 수사, 서울시장 염보현(廉普鉉)씨 독직사건 등이 그가 수사한 대형 비리의혹사건들이다. 1990년 서울지검 특수부 검사 시절에는 호화 외제 의류 밀수사범을 수사하다가 30만원짜리 수입 팬티를 사 입은 집권층 부인들에게 망신을 준 일화도 있다.

    특히 김영삼 정부 초기인 1993년 동화은행 비자금사건 때는 한보그룹 정태수 총회장과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의 관계를 구체적인 물증으로 파헤치는 개가를 올렸다. 김종인(金鍾仁)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등 노태우 정권의 핵심 실세도 줄줄이 잡아들였다.

    ‘자금세탁’을 거친 복잡한 비자금 흐름을 치밀하게 추적해낸 이 수사를 계기로 그는 비자금 수사, 돈세탁 수사의 최고전문가로 명성을 얻었다. 그가 비자금 전문가가 된 데는 1988년 미국 연방검찰청과 FBI에서 연수를 받을 당시 습득한 자금세탁수사 기법이 밑천이 됐다.

    1989년 당시 대검 검찰연구관으로 있던 그는 대검 간부 전원이 참석한 자리에서 연구발표를 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자금세탁 방지법을 만들지 않으면 검은 자금은 차단이 불가능하다”는 그의 발표에 “자금세탁이 뭐냐”는 검사들의 질문이 튀어나올 정도로 자금세탁은 한국에선 낯선 분야였다. 그 전까지만 해도 ‘입’(자백)에 의존해오던 수사에 미국의 자금세탁 수사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마약·밀수·뇌물·사건 수사에 증거위주 수사로 과학화되는 진전을 이루게 됐다.

    하지만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을 계기로 그는 검사복을 벗어야 했다. ‘성역 없는 수사’를 추구하던 그에게 권력은 수사망의 접근을 용인하지 않았던 것. 그가 훗날 국회의원이 되어 집요하게 입안을 주도한 법안이 2001년 제정된 ‘자금세탁방지법’과 ‘금융정보원법’ 등 이른바 ‘돈세탁 방지 관련법’들이었던 점도 우연이 아니다.

    2000년 1월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한 뒤 그 해 치러진 16대 총선에서 당선된 그는 원내진출 이후 검찰간부들에게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비리를 파헤치는 검찰이 돼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주문해왔다.

    그는 7일 저녁 기자와 만나 “며느리를 호되게 나무라는 시어머니 노릇은 그 집안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며 “검찰에 대한 애정과 못다한 일에 대한 미련이 검찰에 대해 ‘미운 시어머니’ 역할을 하도록 자꾸 등을 떠미는 것 같다”고 허허 웃었다.

    그러나 함의원이 검찰을 다그치기만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 검찰과 국회 관계자들 얘기다. 그는 7일 국회 법사위에서 법무부 예산안 심의 도중 정부가 21억원으로 편성해 제출한 공안수사활동비를 24억원으로 증액시켰다. 특수수사에 비해 주목을 덜 받는 공안수사가 위축된다면 자유민주체제 수호활동이 위축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최근 그는 송광수(宋光洙) 검찰총장과 만나 식사를 함께하며 위로와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과거 동화은행 사건을 캐다가 정치권 관련 대목에서 역풍을 맞아 좌절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절호의 기회이지 않습니까.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으니 표적수사니 기획수사니 오해받을 소지도 없고 검찰이 바로 설 수 있는 기회입니다”며 성역 없는 수사를 당부했다. 이에 송총장도 “솔직히 검찰총장이나 서울지검장 자리는 한번 맡았다는 데 의미가 있지 얼마나 더 오래했느냐는 의미가 없다. 최선을 다하겠다”며 적극 공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평소 잘 못하는 포도주를 3병이나 마셨을 정도로 의기투합했다고 한다.

    유권자도 정치부패 공범

    함의원과 아주 가까운 사법고시 동기가 바로 노무현 정부의 실세로 꼽히는 문재인(文在寅)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다. 서로 바쁜 요즘에도 한 달에 한번 정도는 만나 저녁을 같이할 정도다. 그는 최근에도 문수석을 만난 자리에서 “민정수석으로서 할 일만 하라. 쓸데없는 일에 관여해서 청문회에 나가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대선 비자금 수사와 관련해 그는 노관규 위원장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수사를 통해 기업과 정치권 사이의 정치자금 유통구조의 투명성을 높이는 것이 장기적으로 국가신인도를 높이는 길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는 “기업이 언제까지나 정치자금에 묶여 있다면 국가경쟁력이 강화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정치자금 문제에서 자유로운 외국기업과 정치인들에게 코가 꿰인 채 시달려야 하는 우리 기업의 경쟁력은 비교할 수가 없다는 것. 이 때문에 여야 정치자금 문제가 드러난 이상 일시적으로는 아프더라도 검찰은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털고 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기업들도 미래경쟁력을 위해 한번 겪고 나아간다는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면서 “정치인의 자기반성과 철저한 수사 못지않게 국민도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SK 비자금을 100억원이나 수수한) 최돈웅 의원이 누굽니까? 돈선거로 기소돼 의원직이 상실될 위기에 처하니까 스스로 의원직을 내던져 2001년 10·25 재보선에 나섰는데 그 사람을 압도적으로 뽑아준 사람들은 뭡니까?” 그는 “정치부패 혐의로 지탄을 받은 사람에 대해 다시 공천을 주는 공당(公黨)의 지도부와 그를 다시 뽑아주는 유권자들이야말로 정치부패의 공범들”이라며 “식당에서 국회의원을 만나면 밥값을 계산하게 하는 유권자가 있는 한 정치에서 ‘검은 돈’의 유혹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정치인이나 국민이나 모두 정치자금 문제에 대해 도덕적 불감증에 걸려 있는 상황에서 걸린 사람을 잡아 넣어봐야 ‘재수’ 탓만 할 뿐 누구도 반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인이 자기들끼리 사면한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고 비열한 야합입니다. 고해성사는 종교에서만 할 수 있고, 진정한 사면은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10년’

    그는 1993년 동화은행 사건 당시 이원조(李源祚) 전 의원이 대선 자금 수백억원을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선 캠프에 밀어넣은 대목을 수사하다가 유야무야된 것에 대해 지금도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당시 내가, 우리 검찰이 이 전 의원이나 YS를 과단성 있게 처리할 수 있었다면 정치자금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검사가 정치권에 밀리면서 그 모순이 오늘까지 10년간 존속하게 된 것입니다. 만일 여기서 또 검찰이 밀리면 정치자금 수사는 또다시 ‘잃어버린 10년’을 허망하게 보내야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는 특히 “YS 정권 초기였던 당시는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90%에 육박했던 반면 지금은 대통령의 힘이 훨씬 떨어져 있고, 검찰에 대한 국민 지지는 당시보다 월등히 높은 만큼 정치자금 부패에 대해 성역 없이 수사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여건”이라고 말했다. 그는 “만일 여기서 야당 쪽만 건드리고 대통령의 측근 대목은 어물어물 넘어간다면 편파수사 시비 등으로 인해 차라리 손대지 않느니만 못한 수사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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