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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 분석

노무현 대통령 측근비리 발원지 ‘장수천’ A to Z

빚 보증으로 시작해 빚 독촉으로 망가진 ‘정치 실험’

  • 글: 엄상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gangpen@donga.com

노무현 대통령 측근비리 발원지 ‘장수천’ A to 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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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측근비리  발원지 ‘장수천’ A to Z

2003년 5얼28일 노 대통령이 부동산 관련 의혹을 해명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그 시기에 왜 갑자기 생수사업에 뛰어든 것일까. 1993년 노 대통령이 세운 지방자치실무연구소에서 함께 일했던 열린우리당 최동규 공보 부 실장은 “정치인으로서 타인으로부터 후원을 받아야만 하는 경제적 불안정 구조를 깨려는 선각자적 모습으로 이해 해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설명했다.

“정치자금을 남에게 얻지 말고 자력갱생해보자는 새로운 시도였고,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한 사업이 지금에 와서 부도덕한 것으로 공격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의도와 세상에 비쳐지는 것과의 간극이 이렇게 큰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객관적 실체는 간과한 채 정치인이 경제행위를 하려 했다는 오해와 불신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것 같다. 내 생각에는 그런 시각 자체가 문제다.”

이 문제는 당시 노 대통령의 정치적 상황과도 일정하게 맞물리는 부분이 있다. 노 대통령은 1995년 6·27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때 부산시장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안씨의 주장처럼 그해 6월10일 보증요구가 있었다면 선거를 앞두고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고 짐작키 어렵지 않다.

다음해인 1996년 총선에서 노 대통령은 부산지역에 도전장을 냈다가 실패했다. 노 대통령에게 이때의 좌절감은 무척 컸다. 김대중 총재가 국민회의를 만들면서 민주당은 두 동강 났지만 그래도 부산에서만큼은 자신에게 희망을 걸 거라고 믿었던 터였다. DJ를 따라가지 않고 끝까지 민주당을 지키고 싶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총선 결과 DJ의 국민회의는 제1야당이 된 반면, 민주당은 꼬마민주당으로 전락했던 것.

총선 이후 노 대통령은 민주당 당원이긴 했지만 아무런 당직도 없었다. 평범한 변호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1996년 후반기까지 그의 방황은 계속됐다. 지방자치실무연구소의 실무를 맡았던 안희정, 이광재를 비롯, 서갑원, 정윤재, 황이수, 최동규씨 등 이른바 노 대통령의 측근들도 나름의 살길을 찾아 각자 흩어졌던 시기다. 19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이후 연구소를 찾는 발길이 뜸해졌을 뿐만 아니라 두 번의 선거를 치르면서 경제적으로도 연구소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잠시 정치에서 멀어진 노 대통령에게 장수천이라는 생수회사는 새로운 도전의 대상이었다. 1996년 말 찾아온 안희정씨에게 ‘대박 터질 회사’라고 자신감을 보이며 10%의 지분을 양도한 것도 당시 노 대통령의 심리 상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회사는 1997년 3월 한국리스여신으로부터 18억5000만원의 대출을 받아 공장자동화 설비시스템을 설치했다. 이때 보증을 선 사람이 노 대통령과 친형 건평씨, 후원회 회장 이기명씨, 고향선배 오철주씨, 선봉술씨 등이다. 그리고 장수천 공장과 부지, 이후 문제가 된 경남 진영상가와 부지가 담보물로 제공됐다.

그러나 사업은 신통치 않았다. 공장시스템 설치공정은 지연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해 12월 IMF를 맞았다. IMF는 생수시장을 얼어붙게 했다. 더구나 당시 회사는 대기업에 생수를 납품하는 OEM(주문자 상표부착 생산)방식으로 운영되어 원청업체의 장난에 휘둘리기 일쑤였다. 내분도 있었다.

한편 1997년 5월 노 대통령 측근들은 다시 뭉쳤다. 서울 종로구 도렴빌딩에 변호사 사무실 겸 정치인 노무현을 위한 캠프를 차린 것이다. ‘지방자치경영연구소’의 후신인 ‘자치경영연구원’이다. 이 곳은 여느 정치인들의 사무실과는 전혀 다르게 운영됐다.

참여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으로 근무하다 현재 경기도 시흥에서 열린우리당 후보경선을 준비중인 백원우씨의 당시 회고다.

“정치를 하려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돈 문제였다.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그리고 그걸 꿈꿨다. ‘우리끼리 돈을 벌어서 한계를 벗어나자’고 다짐했다. 당시 이광재씨와 서갑원씨는 카페를 공동으로 하고 있었고, 김남수씨는 공구상을 운영했다. 안희정씨는 출판사를 했다. 또 변호사 사무실 한켠에서는 S화재 보험대리점 영업도 했다. 노 대통령의 변호사 업무는 상담이나 자문이 고작이었다. 당시 노 대통령은 아나운서 김자영씨와 함께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그 수입이 가장 짭짤했다. 한 달에 500만∼600만원의 수입을 올렸다. 노 대통령은 ‘노하우 인물관리 프로그램’을 개발해 상용화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참모라고 해서 단순하게 월급만 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자립하면서 정치를 함께 하는, 그런 캠프가 꾸려진 것이다. 노 대통령이 안희정씨를 동지이자 동업자 관계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997년 국민회의 입당 후 대선을 치르면서 노 대통령은 다시 정치전면에 나섰고, 1998년 종로구 보궐선거를 통해 원내 진출에 성공했다. 노 대통령이 이처럼 바쁜 일정을 보내는 사이 장수천의 경영상태는 갈수록 악화됐다. 노 대통령은 회사대표를 선봉술씨로 교체하고 안희정씨를 긴급 투입했다. 그때가 1998년 11월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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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엄상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gang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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