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11일 실미도를 찾은 당시 기간병들이 35년만에 처음 공개된 공작원 조석구씨 무덤 앞에서 묵념하고 있다.
그러나 실미도 부대원의 무덤이 처음으로 발견돼 공개됐음에도 불구하고 국방부측이 적극적인 사실 확인 작업에 나서지 않아 가족들의 애를 태우고 있다. 조씨의 동생 달구씨는 “무덤이 확인된 지 사흘이 지나 국방부측에 시신 발굴 등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려 했지만 국방부는 ‘확인 작업이 필요하다’ ‘더이상은 답변할 수 없다’는 무성의로 일관하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조씨는 “국방부가 가족 몰래 시신을 은닉하려는 것 아니냐”며 의구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나마 조씨의 무덤이 발견된 것을 제외하면 공작원들의 시신과 유해, 그리고 부대 운영과 관련한 증거를 찾는 작업은 전혀 진전되지 않고 있다. 기자는 취재 과정에서 당시 오류동 정보부대로 불렸던 공군 제2325부대 공작과에 근무했던 한 관계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 관계자는 “사건 직후 내가 실미도 관련 서류를 모두 파기했다”고 증언했다. 이 관계자는 “당시 2325부대 각 파견대에서는 보통 분기에 한번씩 보관기한이 지난 서류를 파기하는데 그 당시 상부의 지시에 따라 기한이 되지 않았는데도 실미도 관련 서류를 모두 파기해버렸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 관계자와의 일문일답.
관련 서류 모두 소각
-실미도 사건 당시 어디에 근무했습니까?
“1970년 11월 당시 10명이 차출돼서 3개월간 실미도에 있다가 인천 207 파견대로 나온 뒤 실미도 사건이 난 후 2325부대 공작과로 들어와 근무했습니다. 사건 이후에는 공작선을 타고 현장에 들어가 사건 처리를 담당했습니다.”
-시신 처리도 직접 담당했나요?
“그래요. 내가 다 했습니다.”
-정보부대 공작과에서 근무했으면 공작원 희생자들의 시신 처리 과정을 알고 있을텐데요.
“나는 실미도에서 현역병들의 시체 처리만 했고 노량진에서 발생한 시체는 내가 직접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관련 서류는 사건 다음달인 1971년 9월경 내가 모두 소각해 버렸습니다.”
-소각한 서류는 주로 어떤 것들이었나요?
“정확한 기억은 안 나지만 각종 계획서, 현장 보고서 등이었던 것 같습니다.”
-파기 일자도 안 된 서류를 일개 사병이 처리할 수 있습니까?
“책임자가 있으니까 지시를 받아서 파기한 겁니다.”
-그 밖에 생각나는 것은 없습니까?
“실미도에서 훈련받던 사람들에게도 봉급이 나왔었습니다. 일반 사병 봉급에 준해 돈이 나왔는데 정작 훈련병들한테는 하나도 안 주었었어요.”
-그럼 그 돈은 중간에 어떻게 했단 말인가요?
“위에서 먹어 치운 것으로 압니다.”
-부대 창설 초기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처음에는 제대로 지급해줬는데 나중에는 그걸 그냥 다 착복해 버렸어요. 보급품으로 지급되는 기름도 위에서 착복해 버리고 훈련병들은 나무를 베어다 때면서 겨울을 났으니까요.”
-시신 처리 과정을 알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 겁니다. 당시 서울에는 공군 사격장이 오류동 부대 밖에 없어서 이 곳을 선택하기는 했지만 부대원들을 다 내보낸 상태에서 사형을 집행했기 때문에 증언자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 관계자가 밝힌 내용은 북파 계획이 무산될 조짐이 보이면서 실미도에 미묘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할 무렵의 이야기이다. 부대 창설 이후 몇 달 동안은 각종 보급품이며 군수 지원이 웬만한 간부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해빙 무드로 돌아서면서 실미도 부대의 활용 가치가 상실될 기미가 보이자 각종 보급 지원 수준은 형편없이 떨어졌던 것이다.
더더욱 실미도에 불안한 그림자를 드리운 것은 보급품이 아니라 인원 배치였다.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공작원들은 최고의 훈련으로 단련돼 있는 상황인데 군 내에서는 실미도가 점점 기피 부서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시간이 흐를수록 공작원들과 기간병들의 수준이 역전되는 경우도 나타났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