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호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3단계 방안

주한미군 후방이전, 대북지원 연계해 상호군축 추진해야

  • 글: 한용섭 국방대 교수·안보정책학 yshan@kndu.ac.kr

    입력2004-03-26 17: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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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3단계 방안
    지난 3월5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는 박정희 정부 이후 34년 만에 처음으로 국가안보전략서에 해당하는 ‘평화번영과 국가안보 : 참여정부의 안보정책구상’을 발표했다. 이 정책구상에서 NSC는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노력과 함께 남북한간 신뢰구축과 군비통제의 기반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즉 한반도의 평화·안정과 동북아의 평화번영을 위해 남북한간 군사적 신뢰구축을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동서냉전 체제가 해체되던 1990년대 초반, 한반도에서도 변화하는 세계안보환경에 대응해 남북한간에 불가침협정을 논의한 바 있다. 1992년 2월 발효되었던 남북기본합의서 중 불가침에 관한 장절(章節)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조항은 북핵문제 우선해결방침에 부딪쳐 이행되지 못했고 1993년 북한이 이를 사실상 효력정지시킨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0년이 지난 2003년, 북핵문제는 다시 세계적으로 가장 위험한 안보문제로 대두됐으며 현재 어렵사리 마련된 6자회담에서 이 사안을 논의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6자회담을 통해 북핵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마련된다면 그 해결과정에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과 대결을 완화시키기 위한 조치들이 다각적으로 논의되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다.

    한편 한반도의 남쪽에서는 군사부문에서 지각변동이 시작되었다. 우선 인계철선을 근거로 한 주한미군의 전진배치 방어전략이 바뀌어 50년 이상 전방에 배치되었던 주한미군이 후방으로 이전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한미군의 규모가 감축될 가능성도 있다. 주한미군의 후방이전과 관련해 북한은 미국이 핵문제에 대한 압박을 가하고자 선제공격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북핵문제가 3년 이내에 풀려야 하는 사안인데 비해 그때까지 주한미군 재조정의 핵심 조치들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는 주한미군 재조정 등으로 인한 안보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이른바 ‘자주국방’을 추진하고 있다. 자주적 방위능력의 확충은 상당한 규모의 군사비 증가를 요구한다. 주변환경의 급속한 변동은 남한으로 하여금 자주적인 방위력의 증강과 북한과의 협상을 통한 군사적 위협 감소를 동시에 추구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케 하고 있다.



    그러나 북쪽을 보면 군비통제의 전망은 불투명하다. 북한은 체제위기에도 선군(先軍)정치에 근거하여 군비를 증강하고 대량살상무기 확산을 시도하고 있다. 한반도에는 허약한 정전협정에 기댄 불안한 평화가 이어지고 있고, 남북한간, 미-북한간에 상호불신은 해소되지 않았으며, 군비경쟁과 적대관계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6자회담에서 북한의 대량살상무기가 폐기될 전기가 마련된다면 남는 것은 남북한간 재래식 군사위협을 감소하는 문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남북한 관계에서 비군사분야뿐만 아니라 군사분야의 관계를 개선·발전시키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기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전략과 비전은 무엇인가. 기존 접근법이 가진 한계는 무엇이고 또 그 대안은 무엇인가. 이 글에서는 평화체제관련 쟁점들과 그 해결방안을 제시함으로써 6자회담의 진전 이후 한반도의 재래식 군비통제 방안을 모색해 본다.

    평화체제의 주요 장애물

    한반도의 공고한 평화건설을 가로막는 첫번째 요소가 남한과 북한, 북한과 미국, 남한과 미국 사이에 조성된 안보불안과 불신이라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한미양국은 북한의 위협에 불안감을 갖고 있으며 북한은 한미양국의 위협에 불안을 느끼고 있다. 안보불안에서 초래되는 상호불신뿐 아니라 역사적, 현실적 차원의 상호불신도 만만치 않다. 또한 대(對)북한 관계와는 다른 양상이지만 한미양국 사이에도 상호불신이 있어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데 하나의 장애요소가 되고 있다.

    먼저 남한이 느끼는 안보불안 요소를 살펴보면 북한이 전쟁을 도발할 가능성에 대한 불안이 가장 크다. 북한은 기습공격전략을 변경하지 않고 있으며 전방에 과도하게 배치한 공세적 전력도 요지부동이다. 근래에는 북한의 비대칭 위협, 즉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와 미사일, 장사정포 등도 불안요소로 떠올랐다.

    미국이 느끼는 안보불안 요소는 북한의 전쟁 도발 가능성과 함께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전파 가능성이다. 특히 미국은 세계적 차원으로 반(反)테러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와 미사일이 수출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또한 워싱턴은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과 한미동맹의 저해 가능성에 대해서도 불안감을 갖고 있다.

    북한이 느끼는 안보불안 요소는 대외적인 측면과 대내적인 측면으로 나뉜다. 대외적으로는 9·11테러 이후 미국의 대북한 선제공격 가능성, 한미동맹에 근거한 군사위협, 커지는 남북한 국력격차와 그로 인해 남북한 군비경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고, 대내적으로는 점증하는 체제불안이 가장 위협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북한·미국은 각기 다른 안보 불안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각각 다른 국방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특히 군사안보차원에서 한미 양국과 북한 사이에 불안을 해소할 대화채널이 없어 안보불안은 더욱 가중된다. 한미 양국은 동맹을 강화하고 억지력과 자체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있다. 반면 북한은 재래식 무기를 질적으로 개선하곤 비대칭 위협을 증가시키고 있다. 이는 다시 군비경쟁으로 이어져 한반도의 안보불안이 가중된다. 결국 군비를 증강시킬수록 안보는 더욱 더 불안해진다는 안보딜레마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러한 안보구도하에서 주한미군 후방배치와 군사변혁(RMA)은 한국의 안보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미군의 후방배치와 군변혁이 병력규모보다는 능력에 기초한 국방기획의 일환으로 이행되고 있다지만, 북한의 위협이 변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군기지가 후방으로 배치되는 것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정부는 자주국방의 기치를 들고 자위적 군사능력 증가를 선택했다. 물론 여기에 북한의 위협뿐 아니라 증대되는 주변국의 잠재적 위협에 대비하려는 측면도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2003년에 자주국방이 제기된 것은 주한미군 기지의 이전으로 인한 안보공백에 대한 조치로서의 의미와 한미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바꾸려는 성격이 강하다.

    현존하는 안보불안을 해소할 방법과 제도의 결여, 기존의 상호 불신구조는 한미양국과 북한 사이에 불신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이로 인한 안보딜레마와 군비경쟁을 방치하면 한반도는 동북아와 세계의 불안요소로 남게 되며 한반도의 발전은 지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북한은 과도한 군사력 건설로 인한 민간경제에 대한 피해가 커져서 결국은 체제불안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위기가 커지면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도 커진다. 지금 동북아 국가들과 세계는 무한경쟁과 경제적 번영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안보불안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한반도만 낙후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방지하고 한반도에 평화와 번영의 시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건설할 수밖에 없다.

    유럽 경험 반영한 3단계 방안

    그렇다면 한반도 평화체제는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한국정부는 3단계 통일접근법에 맞추어 평화체제구축에 있어 실질적으로 4단계 접근법을 채택해 왔다. 즉 군사적 신뢰구축→제한조치→군축→평화협정의 네 단계가 그것이다. 이런 접근법은 단계가 너무 많고 실현가능성이 희박하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평화체제 접근법을 제안하고자 한다. 남북한-미국, 그리고 주변국의 이익을 고려한 포괄적인 3단계 접근법이 될 것이다.

    ● 1단계 : 운용적 군비통제(operational arms control)의 추진● 2단계 : 구조적 군비통제(structural arms control)의 추진● 3단계 : 정전협정을 대치할 평화협정 체결

    당사자간 신뢰구축과 군축을 위한 회담이 동시에 추진되었던 유럽의 경험은 한반도에서도 유효하다. 한반도 군사문제 해결을 위한 포괄적 협상체제 구축은 오히려 만시지탄인 것이다. 지금까지 평화체제구축을 위한 4자회담은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남북한 회담 또는 남·북·미 3자회담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3자회담을 개최하기 어렵다. 따라서 6자회담이 어느 정도 진전되면 불가침약속을 문자화하는 과정에서 한반도에 무력을 보유하고 있는 남북한과 미국이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여기서 재래식 군비통제를 협의하는 것이 적절한 순서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참여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미국이 직접 참여하든 한미공동으로 마련한 로드맵을 가지고 한국이 참가하든 미국의 입장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1단계인 운용적 군비통제에는 군사적 신뢰구축과 전방에 배치한 병력의 후방배치를 의미하는 제한조치가 포함된다. 종래에는 신뢰구축과 제한조치를 단계별로 이행해야 한다고 간주해 왔으나 주한미군의 후방배치가 추진됨으로써 이를 제때에 활용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는 남북한, 미국의 군사적 의도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다.

    2단계에서는 군사력을 통제하기 위해 군축을 실시하는 구조적 군비통제를 추진한다. 3단계는 정전협정을 대체할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1단계와 2단계에서 군비통제협정을 이행·검증해온 기구를 확대 개편하여 한반도 평화관리기구로 정착시키는 단계다. 1, 2, 3 단계를 더 상세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3단계 방안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은 평화·군사 분야의 합의를 이뤄내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1단계의 운용적 군비통제는 신뢰구축조치(CBM : Confidence Building Measures)와 군비제한조치(military constraint measures)를 포함한다. 이는 유럽의 군비통제에서 발달한 개념이다. CBM은 군사정책과 군의 운용에 관한 투명성, 공개성, 예측가능성을 제고하기 위해 고안된 조치다.

    신뢰구축조치가 이뤄지면 상호 군사력의 보유 및 배치상태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나누고 군사훈련의 통보 및 참관을 통하여 상대방의 전투대비태세와 훈련의 정형, 작전 전술의 운용 등을 알 수가 있다. 특히 현장사찰을 통해 상대방 군사의 사기상태와 무기의 질적 수준 등을 상호 파악할 수 있어 기습공격의 가능성을 상당 정도 약화시킨다. 이 외에도 군인사의 상호교류, 군 고위 당국자간 회담의 상설화, 전술전략 토의, 직통전화 설치 등도 신뢰구축조치에 포함된다.

    군비제한조치는 현재 보유한 군사력을 그대로 인정하되 그 사용과 배치, 운용 등을 규제하는 조치이다. 여기에는 훈련규모의 축소 또는 훈련의 중단, 훈련 빈도의 감소, 대비태세와 전투력의 약화, 전방에 배치한 병력을 후방으로 철수하는 조치, 평화지대의 설치 등이 포함된다. 이는 평시 무력충돌 가능성을 낮추어 전쟁을 예방할 뿐 아니라 기습공격의 가능성을 줄이는 수단으로서 대단히 효과적인 방안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정부가 발표한 군사적 신뢰구축 우선방침과 군비통제의 기반구축은, 운용적 군비통제를 두 가지로 구분하여 신뢰구축을 우선 추진하고 군비제한은 2단계에서 추진하겠다는 것으로 그 실현가능성이 낮다. 특히 북한이 군사적 신뢰구축 대상으로 남한이 아닌 미국을 고집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신뢰구축과 군비제한을 따로 구분해 추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남한이 개성공단 건설자금을 지원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이에 대한 조건으로 북한이 전방 배치한 장사정포를 포함해 기계화부대를 휴전선에서 40km 이상 후방에 배치하도록 요구하는 것도 협상 대안으로 꼽을 수 있다.

    2단계에서 추진할 구조적 군비통제는 군비축소, 즉 군축을 의미한다. 군축은 문자 그대로 군사력을 줄이는 것이다. 병력은 민간경제 활동인력으로 전환하고 무기는 일정상한선을 정해 그 이하로 폐기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신뢰구축조치를 통해 군사적 투명성과 예측가능성을 증진시킨다 하더라도 공격무기를 감축하지 않으면 공격할 의도가 없어졌는지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 상호 군비축소는 국방비 절감과 군 인력 감소, 군비경쟁요인 약화라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3단계에서는 현행 정전협정 관리기구를 대체할 평화관리기구를 창설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남·북·미 삼자간 또는 남북간 평화협정을 체결하게 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한반도에서 전쟁의 종식을 선언하고 평화공존상태를 선포하며 정전협정과 정전체제를 대체할 제도적 방안을 합의한다. 이 방안에 남북한간 군사분계선과 관할구역, 경계를 확정하되 단순히 지상경계선뿐 아니라 서해 북방한계선(NLL)에 관한 합의도 반영한다. 비무장지대와 전방지역에서 후방으로 이동시킨 병력과 무기 및 장비를 관리하는 방안도 포함시킨다.

    덧붙여 군사정전위원회를 대체할 남한·북한·미국 3자 평화관리 및 위기관리기구를 창설·운영한다. 1단계와 2단계에서 합의한 운용적 군비통제와 구조적 군비통제조치의 이행여부를 검증할 상설 검증기구를 발족시켜 운영한다. 예를 들어 3단계에서는 1단계 신뢰구축조치 이행여부를 참관하고 검증하는 한시적 기구와 전방병력의 후방배치를 감시·검증하는 상주 감시초소를, 2단계 군축합의 이행여부를 검증하는 검증단을 총지휘·감독할 감시검증위원회를 창설해 제도화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남북한은 미국의 감시자산을 활용해 병력배치 제한지대의 감시검증 및 전후방에서 군비통제합의의 이행여부를 감시·검증하도록 합의한다.

    중국·일본·러시아로부터는 한반도평화협정에 대한 지지와 이행보장을 받아야 한다. 또한 남북한 모두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를 갖지 않도록 계속 보장하며, 군비증강을 일정한도로 제한한다. 아울러 주변국이 남북한 각자에게 무기를 수출하지 못하도록 제한장치를 마련한다. 이것이 평화협정의 핵심사항이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설명한 접근법을 통해 한반도 평화체제를 면밀히 구축해 나가려면 매우 구체적이고도 정교한 추진전략이 마련돼야 한다. 반세기 넘도록 한반도에 뿌리박은 군사적대립을 해소하고 새로운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일은 개념과 원칙으로만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6자회담 등을 통해 북한 핵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면 남북 정상회담을 열어 남북한간 전쟁상태 종식과 상호불가침, 무력사용 포기와 분쟁의 평화적 해결 등의 내용에 합의해야 한다. 정상회담에서는 기본합의서의 불가침분야 관련조항들을 반영하고, 우리의 3단계 평화체제 추진방향의 대강을 북한이 수용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덧붙여 남북 국방장관회담과 군사공동위 재개에 합의해야 한다. 남북 정상간 직통전화(Hot Line)를 개설하고 남북군사공동위의 구성·운영·임무·활동사항을 규정하되 군사공동위의 활동시한을 못박아 상호 군비통제를 신속히 추진하도록 한다. 예를 들어 정상회담 이후 2년내에 운용적 군비통제, 그 후 2년간은 구조적 군비통제를 추진하고, 연이어 평화협정 체결협상을 한다는 식으로 목표시한을 설정해 두는 것이다. 이때 북한의 합의를 끌어내는 방안으로 군사공동위의 협의 진척속도와 대북 경제지원을 연계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주한미군 재배치와 관련해 추진 가능성이 있는 감군과 북한 군비통제를 연계해 북측의 양보를 끌어내는 것도 고려대상이 될 수 있다.

    만약 당분간 북한 핵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지연된다면, 남북한은 기존 장관급 회담채널을 이용해서 군사당국자 회담을 개최해 앞서 설명한 평화체제구축 3단계를 차근차근 밟아나가야 할 것이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한국은 대북한 국력우세와 유리한 국제정세, 북한의 취약성을 활용함으로써 주도적인 역할을 해나가야 한다. 북한의 전략적, 경제적 사정이 재래식 군비경쟁을 이어갈 형편이 못 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대북 경제지원을 조건으로 북한측으로부터 양보를 이끌어내는 형식으로 남북관계와 북한의 대외관계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세계의 이목이 북한 핵문제 해결에 집중되어 있는 시점을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한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북한 핵문제 해결에 경제협력 카드를 다 써버린다면 재래식 긴장완화와 군비통제에 쓸 카드가 없어지므로, 전략적인 차원에서 핵문제 협상과 재래식 군비통제협상에서 쓸 수 있는 경제 유인책을 별도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협상의 타이밍, 협상의 기술

    반면 북한이 미국과 불가침협정이나 평화협정을 추진하는 동안에는 남북간 평화협정의 타결 가능성이 별로 없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한국은 기존 평화체제구축방법에서 과감하게 탈피해야 한다. 평화협정에 이르는 단계가 너무 많을 경우, 북한이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은 물론이고 평화체제구축이 지연되어 불확실한 요소들이 늘어나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를 교란할 가능성이 커진다.

    앞으로 남북한 정상회담을 추진할 경우 한반도 전쟁방지, 위협감소, 평화체제구축은 반드시 관철해야 할 과제다. 정상회담이 실현되지 않을 경우에도 한국정부는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의 대강을 발표하고,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한 다음 북한을 협상으로 유도하는 방법을 보여주어야 한다. 유럽의 경우에서 본 바와 같이 관련국간에 상설안보대화채널을 구축하는 것이 신뢰구축의 기본요건이므로, 유명무실해진 정전체제를 개선하고 군사위협감소를 상호 토의할 상설대화체제를 구축하는 일은 지체할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이다.

    한국정부는 2000년 6·15 공동선언에 한반도의 평화·군사에 관련된 합의사항이 없었던 점을 고려하여 평화체제구축을 위한 3단계 방안을 대내외에 공표할 필요성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또한 6·15 공동선언 당시 남북기본합의서를 언급하지 않았던 점을 돌이켜볼 때 앞으로 남북회담에서는 불가침선언과 기본합의서 조항을 재확인해 포괄적 긴장완화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평화체제 접근과정에서 기존의 남북대화 채널을 활용해 북한에 운용적 군비통제를 수용하도록 촉구해야 한다는 지적에도 귀기울여야 한다.

    북한은 미국이 북한을 선제 공격할 것에 대해 매우 불안해 하고 있다. 북한은 당분간 핵 카드를 활용하는 한편으로 남북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함으로써 미국의 대북한 압박과 군사적 옵션을 막기 위해 노력할 것으로 보인다. 남북관계가 발전되고 한국측 인사와 물자가 북한에 자주 왕래하게 되면 미국이 북한을 섣불리 공격하지 못할 것이란 판단에서다. 한국은 북한의 대남 관계개선 동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운용적 군비통제를 실시하는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

    한국은 주한미군 재배치와 한반도의 재래식 위협감소에 대한 관심을 기회로 삼아 한반도에서 위협을 총체적으로 감소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강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동안 북한의 군축요구 또는 주한미군 철수요구에 방어적,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해 오던 데서 공세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반면 한미간 군사 현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는 북한의 한미 이간책을 봉쇄해야 한다. 북한은 최근 “민족공조를 통해 핵전쟁을 막자”고 주장하면서 마치 미국이 핵전쟁을 선호하는 나쁜 국가이며 북한은 민족공조를 위해 노력하는 선한 국가로 보이도록 한국내 여론을 선동하고 있다. 이러한 선동을 막고 한반도에서 참된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 한국정부는 ‘민족공조를 외치려면 북한이 핵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북한당국에 지속적으로 강조해야 하며, 또한 한반도에서 북한이 야기하는 군사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미국과 공동으로 마련해나가야 할 것이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3단계 방안

    지난해 11월 열린 제35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 공동기자회견. 이 회담을 통해 한미 양국은 미 2사단의 후방배치 등 대대적인 주한미군 재배치 조치에 합의했다.

    한반도 평화체제구축의 바탕을 마련하려면 북한과 미국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조치가 필요하다. 우선 6자회담 등을 통해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해 한반도 비핵화를 이루고, 북한이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 기준 이상 미사일의 개발과 수출을 중단하도록 한다.

    북한의 핵 폐기 검증은 지역국가들과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공동으로 핵사찰체제를 만들어 담당한다. 또 북한이 화생무기폐기협약에 가입하도록 유도한다. 그런 다음 북미 양국은 국교정상화에 합의하며 테러지원국 및 적성국 대상에서 북한을 제외한다. 이를 통해 남·북·미를 포함한 다자간 불가침선언을 유도한다. 미국이 한반도 재래식위협 감소를 희망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 3자 군사회담을 개최하도록 북미간에 합의한다.

    한편 한국과 미국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조치가 선행되어야 한다. 미국은 한국의 3단계 평화구축구상에 지지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미국은 주한미군 재배치와 지상군 감소를 북한군의 후방배치와 감축에 연계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으로 보인다.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군 변혁의 일환으로 매우 신속하게 일방적으로 처리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북한의 위협에 아무런 변화가 없고 핵 위협까지 높아지는 현실에서 일방적으로 억지력과 한미연합방위능력만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낳고 있다. 따라서 주한미군 후방배치가 북한군의 후방배치와 연계되도록 미국을 설득할 필요가 있다. 일부에서는 이미 이 연계방안을 추진할 시기가 지난 것이 아니냐고 비판하지만, 주한 미 2사단의 후방배치는 4~5년 후에 이루어질 예정이므로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조치는 1960년대 말 유럽에서 미군을 철수시키려고 했을 때 소련이 재래식군사력의 균형감축협상(MBFR : Mutually Balanced Force Reduction Talks)에 나온 것과 유사하다. 이를 교훈 삼아 우리도 전방에 배치한 미군의 후방이전을 대북 협상카드로 활용해야 한다.

    1989년 넌워너법안에 근거해 미국이 주한미군을 감축할 때 남한은 북한과의 협상에서 이 문제를 활용하지 못하고 기회를 놓쳐버렸다. 북한이 주한미군을 위협요인으로 규정하고 있는 지금 주한미군의 정책변화를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완화와 상호 위협감소 요인으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언제 활용할 것인가.

    3단계에서 한국·미국·북한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평화관리기구가 작동할 시점에 이르면, 한미연합사 및 유엔사는 해체되고 한미연합사령관의 전시작전통제권은 한국군에 이양된다. 주한미군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근거하여 주둔하는 지역 안정형으로 변경되어 해·공군 중심의 소규모 전력으로 전환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동북아 평화의 꿈

    한국 정부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주도적 역할을 할 때 미국뿐 아니라 중국, 일본, 러시아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한반도 주변 국가들은 한반도에서 평화와 안정을 원하지만 어느 누구도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따라서 주도적인 역할은 한국이 맡아야 한다. 평화체제 구축의 3단계 방안을 중국, 일본, 그리고 러시아 정부에 상세하게 설명하며 이들의 지지를 확보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한국정부는 북핵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보이고 한반도에서 운용적 군비통제가 시작될 시점에 동북아 6자간 안보협력회의의 창설을 제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동북아안보협력회의에서 관련국들은 억지력을 중심으로 한 절대안보에서 공존공영을 향한 공동안보로 안보철학을 바꾸게 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군사적 신뢰구축이나 군비통제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문화, 과학기술, 인권, 환경, 테러와 초국가적 범죄 등에 대해 상호 포괄적인 협력을 증대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한 기초작업으로 한국은 동북아 6자간 안보전문가 포럼을 창설하는 일에 앞장설 것을 제안한다. 또한 동북아안보협력회의가 뿌리내리는 시점에서 동북아 전체의 안보협력과 경제협력을 연결하는 보다 큰 틀의 ‘동북아 평화협력체제’를 구축하는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유럽에서 냉전구조가 해체되는 데 45년이 걸렸고, 유럽안보협력회의 창설 시점부터 따져도 17년이 걸렸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동북아에서 탈냉전과 평화체제를 꿈꾸는 것은 시기상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동북아안보협력체를 출범시키지 않는다면 언제 냉전의 남긴 과제를 청산할 수 있을 것인가. 참여정부가 말하는 ‘동북아 평화협력체제’는 이런 것이 아니었던가. 이 과제를 성공적으로 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최단의 지름길을 찾는 두뇌와 이를 실천에 옮기는 실행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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