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호

“나는 ‘미국판 실미도 부대’ 요원, 11차례 휴전선 넘어 특수임무 수행했다”

미군, 휴전 후 대북침투부대 운용했다

  •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5-03-22 18: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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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미국판 실미도 부대’ 요원, 11차례 휴전선 넘어 특수임무 수행했다”

    반세기의 시간이 흐르고도 상처가 아물지 않은 듯 이제교씨는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내내 담배를 태웠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바람결에 스쳐가는 풍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1957년, 그러니까 휴전이 성립되고 4년이 지난 뒤 미군이 대북작전부대를 가동했다는 내용이었다.

    1949년부터 6·25전쟁 기간에 미8군이 관리한 KLO 등 대북 첩보부대의 한국군 요원들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고, 이와 함께 한국군이 운용한 HID 등 대북 첩보부대 이야기 또한 공공연한 비밀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6·25전쟁 후에 미군이 운영한 첩보부대, 그것도 일본에 거점을 둔 당시 극동사령부(Far East Command·FEC) 정보참모부(G2)의 직할부대가 한국군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군사(軍史)에 밝은 군 관계자 몇몇에게 전화를 걸었다. “개연성은 있지만 들어본 적은 없다”는 게 한결같은 대답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한 국방부 관계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만약 사실이라면 기존에 알려진 부대들과는 사뭇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겠죠. KLO 부대 등은 1953년 여름에 모두 해체된 것으로 돼 있거든요. 특히 그 작전에 한국군 병사들이 차출되어 목숨을 잃었다면 지휘체계와 관련해 복잡한 측면이 있을 것 같은데요.”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생존자를 만나는 것이 가장 급했다. 벌써 48년 전의 일, 우여곡절 끝에 한 제보자로부터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연락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설득이 문제였다. 전화번호를 누르자 컬컬한 목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이유가 뭐요? 다 잊고 사는 중인데….”

    “올 필요 없다”는 노인을 겨우 졸라 주소를 확인했다. 사흘 뒤 눈이 많이 내린 1월 말 어느 날, 경인고속도로를 달려 인천으로 향했다. 주소만 들고 찾아간 자그마한 스포츠장비 가게에서 혼자 작업하고 있던 이제교(가명·69)씨를 만났다. 나이답지 않게 균형 잡힌 체격, 굵은 손마디, 짧게 자른 머리카락이 간단치 않은 삶의 이력을 말해줬다.

    인터뷰는 장시간 진행됐지만 당시의 이야기를 끌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잊고 살았던 기억,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파편처럼 흘려 보이던 이야기를 하나하나 끄집어내는 작업은 만만치 않았다. 1957년 4월 한국군에 입대한 뒤 그해 가을 미군에 의해 차출되어 1957년 11월부터 1960년 5월까지 모두 열한 차례 휴전선을 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과정에서 42명의 부대원 대부분이 사망했고 3명만이 생존했다는 것이다(자세한 내용은 기사 후반부 참조).

    “1950년대와 지금은 다르다”

    어렵사리 이야기를 들었지만, 정작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가 말하는 부대의 존재를 공식 기록이나 문서로 확인하는 작업은 난공불락이었다. 우선 병력차출 등과 관련해 기록이 있다면 이를 보관하고 있을 국방부와 국군정보사령부는 대북 첩보부대 및 작전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언론의 확인 요청은 물론 국방부 산하 연구소의 접근도 통제하고 있는 것이 현실. 공식·비공식적인 타진은 모두 좌절됐다.

    이는 미국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대북첩보부대 운영과 관련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2월1일 미 국방부에 질의를 등록하고 수차례에 걸쳐 체크했지만, 3월15일 현재까지 ‘Unresolved(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었다. 하다못해 이씨의 파견근무기록이라도 남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1992년 이전의 군 복무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국립인사기록센터(National Personnel Records Center·NPRC)에 공식 양식을 작성해 제출했지만, “이씨는 미국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확인이 매우 어렵고, 확인한다 해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므로 성사를 장담하기 어렵다”는 회신이 돌아왔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일렀다. 생존해 있는, 1950년대 후반 한국군의 장성급 고위 관계자들을 만났다. 뜻밖에도 이들은 대부분 종전 이후에도 한국군에서 차출된 병력으로 구성된 첩보부대가 미군의 지휘통제를 받아 대북작전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일반부대 병력을 차출했느냐 정보부대 소속 병력을 차출했느냐 등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지만, 상당수 인원이 휴전 이후에도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 훈련을 받고 작전에 투입된 사례는 듣거나 접한 적이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당시 사단장을 지낸 한 퇴역 장성의 설명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전쟁 당시부터 상당기간 많은 한국군 요원이 차출되어 미군 공군기로 북한에 침투해 정보수집이나 거점확보 임무를 수행했고, 주로 해상을 통해 귀환했습니다. 살아 돌아온 이들도 있었지만 사망자도 적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동해상에서 구명정에 의지해 표류하고 있는 요원들을 직접 구한 경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관계자는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잣대로 이를 평가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우선 1950년대에는 미군을 포함해 누구도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대북 첩보작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설명이다. 또한 전쟁을 진두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극동사령부는 한국군을 포함한 연합군의 최고지도부였기 때문에 파견이나 차출 등의 지휘체계 문제도 지금에 비해 훨씬 자유로웠다는 것이다. 이를 지금 상황에 비추어 비판하면 곤란하다는 말이었다.

    전후 첩보보고 176건

    뜻밖이었던 것은 국방부 자료에서도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2003년 12월 펴낸 ‘한국전쟁의 유격전사’에 따르면, 전쟁기간에 미군이 운영했던 KLO 첩보대는 거의 해산되었지만 비하이브(Beehive), 무스(Moose), 캐멀(Camel) 팀 등은 1954년 2월부터 북한에 투하되어 11번의 보고를 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다수의 대원들이 미군 첩보부대에 소속되어 활동했고, 미 중앙정보부(CIA) 또한 1954년 1월 새로운 대북 첩보기구를 창설해 활동을 시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전쟁 이후 계속된 대북 침투요원들의 첩보보고가 모두 176건에 달한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씨가 활동했다는 부대는 과연 어떻게 구성됐을까. 이를 위해서는 당시의 미군 관계자들을 접촉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군 전우회와 연구회 등을 통해 어렵사리 1950년대 후반 미군의 대북 정보업무 최일선 부대였던 공군 6006 항공정보대(Air Intelligence Service Squadron·AISS)와 8군 관계자들, 이들을 지휘한 극동사령부의 정보부대 퇴역장교들을 수소문할 수 있었다.

    전화와 e메일을 통해 이들에게 사실을 확인해달라는 인터뷰를 시도했다. 마감을 앞둔 3월 중순, 한 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6006 AISS와 그 후신인 4499부대에서 근무했으며 퇴역 후 미군의 정보활동에 관해 몇 권의 저술을 남기기도 한 미군 퇴역장교가 보낸 메일이었다. 이후 몇 차례 오간 전화와 메일을 통해 그는 다음과 같이 상황을 정리했다.

    “전쟁 이전부터 한국에서 대북 첩보업무를 총괄한 사람은 도널드 니컬스 대령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조언자이기도 했던 그는,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한국군을 차출해 부대원으로 활용하거나 하위부대를 조직해 대북 첩보업무를 수행하도록 설계했다. KLO 등 미군이 관리한 한국인 첩보부대는 실질적으로 그의 통제 아래 있었다. 휴전 후에는 한국군이 대북 첩보부대를 구성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주고, 훈련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주한미군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던 그의 평판은 매우 좋지 않았다. 이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한국정치에 개입하려 하거나 월권을 행사하고 정보를 독점한다는 이야기였다. 불법행위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1956년부터 위상이 흔들렸고, 급기야 1957년 11월 본국으로 소환되어 장기간의 조사를 받은 끝에 이듬해 봄 퇴역했다.

    1956~57년의 ‘새로운 시도’

    1956~57년은 여러 모로 의미 있는 시기였다. 니컬스 대령의 위상이 흔들리면서 기존의 대북 첩보 시스템을 재편하는 시도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에 나와 있던 극동사령부 G2의 예하부대인 6006 AISS가 오산의 4499부대로 재편되면서, 그간 이 부대가 독자적으로 수행하던 대북 첩보업무 일부를 일본에 있던 사령부가 직접 수행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북한에서 활동이 가능한 한국군 요원을 직접 훈련시켜 대북 침투임무를 수행토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오래 가지 못했다. 우선 북한의 대공경계망과 내부 경비가 강화됨에 따라 희생이 만만치 않았고, 한국군으로부터 인원을 파견받는 문제도 깔끔하지 못했다고(비공식적인 파견이었다는 뜻인 듯) 들었다. 더욱이 정전협정의 당사자인 미군이 휴전 후에도 대북 침투임무를 직접 다룬다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195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미군기가 북한지역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요원을 공수해 침투시키는 식의 작전은 매우 위험했다. 반면 한국군은 1960년대 들어 체계를 갖춰갔고 항공기를 제외한 다양한 경로로 북한에 침투하는 독자적인 첩보부대를 구성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 후 미군이 자체적으로 대북 첩보부대를 운용한 일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신이 말한 경우는 1957년에 시도된 독자적인 부대 운용의 한 사례일 가능성이 있다. 침투경로와 퇴로의 구성, 조 편성과 훈련기간 등의 내용은 상당부분 당시 미군의 대북 첩보부대 운용 스타일과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그러한 부대 운영에 직접 개입하지 않은 나로서는 구체적인 내용이나 임무 등이 정확하게 사실과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다.”

    기자가 확인할 수 있었던 내용은 여기까지다. 휴전 이후에도 한동안 미군이 운용하던 대북 첩보부대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했다. 이제교씨의 회고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 타당성을 무시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대북 첩보부대 활동 같은 기밀사항을 형사사건 재판기록처럼 낱낱이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싶었다. 그러한 이유로 작전을 수행하다 목숨을 잃은 이들의 이야기는 어느 곳에도 남지 않게 됐지만 말이다.

    10여 차례에 걸친 인터뷰 및 전화통화를 통해 이씨가 회고한 내용을 아래에 기록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남북 대치의 또 다른 한 자락 비극이 고스란히 담긴 까닭이다. 이씨의 회고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모두 39명의 남한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다. 북한에서도 그 못지않은 숫자의 젊은이들이 첩보전의 틈바구니에서 숨을 거뒀을 것이다. 이씨의 경우뿐 아니라 첨예한 군사대립 상황에서 휴전선을 넘었던 많은 첩보부대원들의 감춰진 이야기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단 한 사람의 독자라도 그들의 죽음을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이 회고담의 가치는 충분하리라 믿는다.

    [이제교씨의 회고] “가혹한 경험은 끈질기게 기억된다”

    1957년 늦가을부터 1960년 5월까지, 내게는 이름이 없었다. 46번. 그것이 내 이름이었다.

    그 시절,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어두컴컴한 C-46 수송기에서 처음 만난 우리들은 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42명의 동료 가운데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 이는 훈련소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몇 사람뿐이었다. 훈련중에, 침투중에, 바다를 빠져 나오면서 동료들이 하나 둘씩 줄어들었다. 결국에는 세 사람만이 살았남았다. 그때는 살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이었다.

    아마도 입대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백수나 다름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포 길거리에서의 싸움질, 경찰서 유치장을 드나들며 ‘어깨에 힘이 들어간’ 친구들과 어울렸다. 우리 나이로 스물두 살 되던 1957년 4월 어느 날, 친구들과 벌인 한판의 패싸움 때문에 경찰에 쫓기게 됐다. 군대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히 입영열차를 탔다.

    논산 훈련소에서 시간을 보내던 어느날 KMAT와 KMQT라는 일종의 아이큐 시험을 치렀다. 다른 한편으로는 훈련병 동기들 중에 가족이 이북에서 월남했거나, 군인이나 경찰이던 가족이 북한에 납치됐거나 살해당한 사람들을 따로 모았다. 이렇게저렇게 해서 모인 게 모두 42명이었다. 차출된 것이다. 다른 훈련병들은 자대배치를 받아 뿔뿔이 흩어졌지만 우리의 자대배치는 서류상으로만 이뤄졌다.

    사세보 바닷가의 훈련장

    인솔할 하사관이 도착했다. 미군이었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용산일까. 한참 달려 도착하고 보니 낯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여의도 비행장. 강 건너 부모님이 계시는 마포 집이 보일 정도였다. C-46 수송기에 실렸다. 이번에도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걱정과 함께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착륙의 굉음이 들렸다. 일본이라고 했다. 사세보에 있던 미군 극동사령부 소속의 캠프 모우어(Camp Mower). 우리를 불러모은 것은 극동사령부의 G2였다. 부대장인 대령과 작전참모가 나왔다. 앞으로 힘겨운 훈련과정을 거쳐 대북 침투작전을 수행하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1957년 늦가을, 아마 11월이었을 것이다. 훈련이 시작됐다. 기본과정만 16주, 그러나 중간에 꽤 오랜 시간 중단되곤 했기 때문에 기간은 더욱 길어졌다. 사진촬영, 폭파, 침투…. 크게 보면 12과목, 세분하면 수십 개 과목이었다. 교관들은 2차 세계대전 때부터 이 분야에서 일한 베테랑들이었다.

    사세보의 훈련장은 활주로에서부터 편의시설까지 모든 시설이 부대 안에 있었다. 공식적으로 일본에서의 영외활동은 허락되지 않았다. 대신 휴가나 외박은 모두 여의도 비행장을 오가는 비행기를 통해 이뤄졌다.

    사세보 바닷가의 교육장은 바람이 거셌다. 침투훈련은 먼 바다로 나가는 것으로 시작했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장비와 공포탄을 챙겨 배에서 출발해 24시간 안에 경비병력에게 들키기 않고 무사히 부대 안까지 들어오는 식이었다. 간혹 비행기에서 투하되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성공한 사람이 없었지만 훈련이 계속되니 점차 요령이 생겼다. 민가 마당에 널려 있는 빨래를 걷어 변장을 하는 식이었다. 부대 곳곳의 허술한 부분에 대해서도 노하우가 쌓였다. 모두 30여 차례 진행된 침투훈련 가운데 실패한 것은 초반의 세 번뿐이었다. 성적이 좋은 편이었다. 훈련은 매우 거칠었다. 훈련중에 사고로 죽는 동료가 있을 정도였다. 암벽을 기어오르다 발생한 추락 사고였다.

    부대는 6명씩 7개조로 구성되었다. 교육과정 또한 조별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조별로 숙지하는 지역이 따로 있었다. 나는 함경도 지역 조의 조장이었다. 평안도는 남도와 북도가 구분되어 있었지만 함경도는 한 조가 담당했다. 각 조원은 대개 해당지역에 연고가 있거나 지리에 밝은 사람들이 배치되었다. 큰 작전이 있을 경우에는 해당지역 담당 조가 다른 조를 이끌었다.

    우리 조에 첫 출동명령이 떨어진 것은 1958년 5월 무렵이었다. 16주는 이미 지났지만 훈련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목적지는 원산 인근, 임무는 해안동굴에 설치되는 대형 포대를 정찰하는 것이었다. 원산 앞바다 수 km 지점, 조원들이 몸을 던졌다. 아직 바닷물이 써늘했다. 1인용 보트나 다름없는 구명정에 몸을 의지해 한참을 헤엄쳐 들어가야 했다.

    “나는 ‘미국판 실미도 부대’ 요원, 11차례 휴전선 넘어 특수임무 수행했다”

    일본 사세보의 미 해군기지.

    좌표를 따라 도착해보니 곧추선 암벽이었다. 그 조그마한 바닷가 절벽 위에 U자형 동굴이 있었다. 긴장한 탓인지 온몸이 떨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천천히 벽을 기어올라 사진을 촬영했다. 포대를 설치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었다. 철문이 3중으로 돼 있는 큰 포대였다.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였을까, 다행히 경비는 생각보다 허술했고 순찰간격도 빡빡하지 않았다. 첫 임무치고는 싱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암벽을 내려와서 온 길을 그대로 돌아 바닷가로 나왔다. 먼 바다로 나서는 순간 구명정에 달려 있는 송신기가 신호를 보냈다. 2시간 가까이 바다 위에 떠 있자 갑자기 쏴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밑으로 빨려들어갔다. 귀환용 잠수함이었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조원들을 태운 잠수함은 공해상으로 나와 사세보 본부를 향해 달렸다. 본부 인근에 이르자 멀리 픽업 보트가 우리를 마중하러 나와 있었다.

    그후 한 달 동안은 집중적으로 폭파훈련을 받았다. 얘기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사진을 찍어 온 원산의 포대를 폭파하는 것이 다음 임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이 되자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두 번째 임무가 주어졌다.

    두 번째 살인은 느낌이 없다

    목적지는 같았지만 분위기는 다를 게 분명했다. 이미 상당부분 대포가 설치되기 시작한 포대는 경비병력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따로따로 움직이는 것이 옳았다. 낙하지점부터 달랐다. 각자 적당한 낙하지점을 고르고 대신 집결지를 정해 시간에 맞춰 모이는 식이었다.

    비행은 동해를 크게 돌아 북에서 남쪽으로 이뤄졌다. 내가 가장 먼저 낙하했다. 이번에는 포대에서 수십 km 떨어진 지점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뭍에 올라 육로로 접근하기로 했다. 교육받은 대로 해안도로를 따라 오가는 문서연락병을 기다리기로 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가는 줄을 길에 쳐두었다가 오토바이 위에 탄 문서연락병의 목을 걸어 넘어뜨리는 식이었다.

    멀리 능선을 넘어오는 오토바이를 확인하고 나무에 줄을 걸어두었다. 점점 소리가 커졌다. 타이밍을 맞춰 줄을 당겼다. 연락병이 컥 하는 소리와 함께 나자빠진다. 달려갔더니 이미 목의 상처가 깊었다. 첫 번째 살인이었다. 험한 시절을 살아오면서 많은 경험을 했지만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처음이었다. 한동안 멍하니 정신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오토바이를 찾았다. 소련제를 닮은 북한 오토바이는 튼튼했다. 둔덕 밑으로 굴러떨어졌지만 아무런 이상 없이 시동이 걸렸다. 한달음에 포대 인근에 도착해 오토바이를 숨겨두고 집결지를 찾았다. 시간이 됐지만 여섯 명의 조원 중 두 명이 도착하지 않았다. 궁금했지만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포대로 숨어들었다. 순찰병의 목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두 번째 살인. 첫 번째와는 달리 별다른 느낌이 없다.

    네 개의 포대 가운데 둘은 이미 무기가 반입되고 있었고 다른 둘은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폭발물을 설치하고 타이머를 맞췄다. 들어간 길을 되짚어 나와 모퉁이를 도는데 폭음이 들렸다. 쫓기기 시작했다. 네 명의 조원이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뒤쫓는 이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모퉁이에서 바다로 뛰어들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헤엄쳐 나와 구명정 위에서 하늘을 보고 누웠다. 이미 송신은 시작됐을 것이다. 네 시간만 기다리면 잠수함이 도착할 것이다.

    함께 도망친 네 명 중에 한 명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여섯 명이 떠나 절반이 살아온 것이다.

    그날 저녁, 살아온 대원들은 허드렛일을 해주던 이들에게 부탁해 술과 음식을 장만했다. 북한 쪽을 향해 상을 차려놓고 제를 지냈다. 그리고 많이 울었다. 밤이 깊어 술에 취한 우리들이 막사 안에 있던 집기들을 닥치는 대로 부쉈지만, 뜯어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한번 떠날 때마다 부대원은 급격히 줄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인원을 보충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마다 조를 다시 짜야 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임무가 반복될수록 비트(비밀 아지트)가 늘고 거점이 확보되면서 생존율도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내가 만든 비트는 함경도(지금의 양강도) 백암군 부근의 설령봉이라는 산에 있었다. 바위가 많고 험한 곳이어서 등산에 능한 사람이 아니면 좀처럼 접근하기 쉽지 않은 곳이었다.

    ‘양어머니’의 눈물

    함남에 있던 AK-47 자동소총 공장을 정찰하러 간 적이 있는데 주로 군수물자나 부대배치를 파악하러 가는 경우가 많았다. 철도역 근처에서 지나가는 화차에 실린 무기를 확인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물건을 전달하는 일도 있었다. 내가 만나 물건을 전해준 사람은 기독교인이었다. 일요일 아침, 그는 함께 올라간 비트에서 혼자 성경책을 펴놓고 눈물을 흘렸다. 전달한 것은 묵직한 금속이었는데, 아마 금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가 북한에서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미군이 왜 그에게 금을 주는지는 묻지 못했다.

    작전에 투입되고 나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함께 나갔던 조원들 중 혼자 살아 돌아오는 경우였다. 체포당했다가 포섭됐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가혹한 심문을 받아야 했다. 며칠 동안 잠을 안 재우며 작전시간 동안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설명해야 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처음부터 다시 반복했다. 고문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런 외부적인 고통은 정작 자기와의 싸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장 큰 고통은 언제나 두려움이었다. 한번 작전에 나섰다가 돌아오면 몸서리가 쳐져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1959년 여름에는 해안 대신 육로로 휴전선을 넘어오다가 강원도 김화의 오성산 근처 군사분계선 안에서 비트를 파고 숨어 있던 요원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며칠을 그렇게 보낸 다음 돌아와서는 임무를 시도하다 실패했노라고 보고하려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를 비난할 수도 없었다.

    나도 서울로 가는 비행기에 몰래 숨어들어 탈영한 적이 있다. 여의도에서 한강을 헤엄쳐 건너면 바로 집이었으니까. 아는 이들 집을 전전하며 서울을 헤매다가 미군 범죄수사대(CID)와 방첩대(CIC) 수사관들에게 붙들렸다. 이태원에 있던 구치소를 거쳐 양평동 6관구 사령부에서 재판을 받았다. 단순탈영, 2개월형이었다. 남한산성에 막 짓고 있던 군 교도소로 끌려갔다.

    이 무렵 나를 가장 염려해준 사람은 대장의 부인이었다. 외아들이 6·25전쟁에 공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그에게 스무 살 초반의 부대원들은 자식이나 다름없었다. 늘 고된 훈련을 받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임무를 띠고 떠나는 젊은이들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특히 나는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나 또한 그를 ‘양어머니’라 부르며 따랐다.

    형기를 마쳐도 무슨 수를 써서든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미군과 함께 일한다는 뿌듯함도, 작전을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받는 보상금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적군에 대한 분노나 적개심도 계속 이어지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출소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부대를 비울 수 없는 대장 대신 작전참모와 양어머니가 찾아왔다. 귀대하지 않겠다는 나를 설득하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상황이 심각했다. 중국계 미군 소위가 정찰임무를 수행하러 들어갔다가 붙잡혔기 때문에 그를 구하러 가야 한다고 했다. 작전참모는 “목숨을 국가에 바치겠다고 서약하지 않았냐”고 다그쳤고, 양어머니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지금도 궁금한 것은 과연 양어머니가 본인의 뜻에 따라 내게 왔을까 하는 점이다. 혹은 내가 그를 따르는 것을 안 대장의 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온 것이었을까. 마음이 흔들렸다. 이튿날, 그들과 함께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취소된 마지막 임무

    붙잡힌 미군 소위는 평안북도 구장군 인근의 지하 군사시설을 탐지하러 투입된 사람이었다. 이전에도 안면이 있었다. 거듭되는 임무에 부대원들이 줄어들자 직접 들어간 것이다. 다른 부대원들이 붙잡혔을 때는 그런 일이 없다가 이번에만 구조작전을 벌인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지만, 정보누출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그가 어디로 호송될지 추측하는 정보가 올라왔다. 상황에 맞춰 미리 훈련을 할 틈도 없었다. 애초에 42명이었던 부대원은 어느새 18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3개조를 구성했다. 부대로 돌아온 지 사흘 만에 다시 북한으로 향했다. 1959년 초겨울의 일이다.

    미리 설정해둔 지점에서 소위를 태운 호송차량을 기다렸다. 소위는 평북에서 평양으로 이송되는 중이라고 했다. 길바닥에 폭발물 세 개를 묻었다.

    길모퉁이를 돌아오는 트럭과 앞뒤로 붙은 호위차량이 보였다. 트럭에 경비병력이 타고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트럭을 노려 첫 번째 폭발단추를 눌렀다. 트럭이 뒤집혔다. 두 번째 폭발, 이번에는 앞선 지프차였다. 예상과는 달리 트럭에는 경비병력이 아니라 구해내야 하는 미군 소위가 타고 있었다. 뒤로 꺾인 두 손과 목이 새끼줄로 연결돼 묶인 상태였다. 미군 소위는 얼마나 호되게 심문을 당했는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뒤집히지 않은 지프차를 탈취해 소위를 태웠다. 몇 사람은 소위를 데리고 가기 위해 지프에 동승했지만 나를 포함한 나머지는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살아나갈 수 있는지는 각자의 능력에 달려 있었다.

    일부러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산길을 달리고 오토바이를 빼앗아 타며 대각선으로 북한 땅을 가로질러 동해안으로 나왔다. 꼬박 사흘이 걸렸다. 문제의 미군 소위는 무사히 탈출에 성공했지만 그를 구하기 위해 출발했던 18명의 부대원 중 네 명만이 살아 돌아왔다. 참혹한 결과였다.

    살아 돌아온 네 명에게는 표창이 주어질 것이라고 했지만 아무런 의미도 느낄 수 없었다. 자신이 복귀하라고 설득했기 때문일까. 양어머니는 내가 살아 돌아온 것에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듯했다. 복잡했던 그의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1960년 초, 아주 추운 겨울에 떨어진 마지막 임무는 평양행이었다. 김일성 관저에 관한 첩보를 수집하는 임무였다. 언제나 그랬듯 집결지를 정하고 남은 네 명의 부대원이 길을 떠났다. 대동강변, 김일성 관저를 코앞에 둔 선교리가 집결지였다. 무선을 통해 지령이 수정됐다. 작전이 취소됐으니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시 흩어져 들어간 길을 되짚어 나왔지만, 한 사람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부대가 해체된 것은 평양에서 돌아와 몇 달이 지난 1960년 5월이었다. 살아남은 부대원 세 명은 사세보를 떠났다. 서울에 오니 4·19혁명으로 난리였다. 모두 새로 부대에 배치되었지만 쉽게 적응할 리가 없었다. 내가 배치받은 부대는 육군 모 사단의 정비중대였다. 누구도 내게 간섭을 하지 않았다. 기억에 남는 일이 없을 정도로 무료하게 시간을 때우는 생활이었다.

    그해 10월30일, 제대명령이 떨어졌다. 세상에 나왔지만 이미 나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어려운 사람이 돼 있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쫓겨본 기억, 살인을 했다는 경험은 생각보다 가혹했다. 그 무렵만 해도 전쟁을 겪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터라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많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세보에서 살아 돌아온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몇 년 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훈련소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였다. 애초에 평북을 담당하던 조에 소속됐던 그는 아버지가 6·25전쟁에서 전사했다고 했다. 떠나기 전날 함께 소주를 마셨다. 다른 한 사람은 미군과 함께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베트남에서도 첩보계통에서 일했던 모양이다. 나는 지금도 그의 이름 대신 36번이라는 번호가 더욱 친근하다. 그와도 베트남으로 떠나기 전 종로3가의 대포집에서 만나 막걸리를 마셨다. 그때 말렸어야 했다.

    제대한 지 십수년이 지난 뒤에 미국에서 전갈이 왔다. 양어머니라 부르며 따랐던 부대장의 부인이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부대장은 그 두 해 전에 죽었다고 했다. 양어머니가 나를 많이 보고 싶어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이후 결혼을 했지만 가정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이혼을 했고, 지금은 자식과도 만나지 않는다. 집 한 칸 없을 만큼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못하다. 아직도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면 예배 끝에 목사님이 하는 축도를 받을 수 없어 먼저 나오곤 한다. 죄를 사해준다는 축도를 받을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다. 어쨌거나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모든 것이 그때의 경험 탓이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더 힘든 경험을 하고도 훌륭하게 사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미군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는 않는다. 거듭 말하지만, 내게는 국방의 의무였을 뿐이다. 1950년대는 모든 이들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말을 믿을 때였다. 나 또한 그랬다.

    기억을 되짚다 보니, 요즘 들어 더욱 악몽에 시달린다. 손이 떨리고 몸이 춥다. 그럼에도 굳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죽은 39명의 동료들을 누군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생각 때문이다. 길고 긴 이야기, 내게는 쉽지 않은 이야기를 이렇듯 풀어놓은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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