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호

국군포로 한만택 강제 북송

외교부, “탈북 예정, 준비요망” 최초 진정서 방치…‘협조공한 받기 전 북송’ 중국 통보 확인도 안해

  •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5-12-27 14: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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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년 1월 정부 관계부처를 당혹케 했던 ‘한만택 사건’이 1년 가까이 지난 지금 다시 불거졌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빠져나온 국군포로가 강제로 북송된 이 사상 초유의 사건과 관련해 새로운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것. 사건의 처음과 끝을 재구성해봄으로써, 갖가지 시각차이와 이해관계가 엇갈린 국군포로 귀환 문제와 외교통상부 등 관련부처 초기 대응의 문제점을 낱낱이 해부한다.
    국군포로 한만택 강제 북송

    2005년 3월28일 함경도 무산 자택에서 연금중일 때의 한만택씨와 2005년 12월22일 한만택씨 가족이 외교부에 보낸 첫 번째 진정서.

    두만강의 밤은 차가웠다. 꽁꽁 얼어붙은 수십m 너비의 강 위로 매운 바람이 휭휭 지나갔다. 2004년 12월27일 밤 10시, 함경북도 무산과 중국 지린(吉林)성 난핑(南平) 사이의 두만강 기슭. 노인 한 명과 젊은 남자 두 명이 캄캄한 어둠을 뚫고 얼음 위를 걸었다. 노인의 이름은 한만택(73). 6·25전쟁 당시 붙잡혀 반세기 동안 북한에서 살아야 했던 국군포로다. 한씨의 탈북 과정에 관여한 인사는 “고령이지만 무산 집과 두만강이 뻔히 보이는 거리여서 도보로 충분히 국경을 넘을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고 말했다.

    강 건너에는 세 명의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씨와 함께 국경을 넘은 안내자들을 관리하는 A씨, 한씨를 90km가량 떨어진 옌지(延吉)로 데리고 갈 안내자 B씨와 운전수 C씨였다. 휴대전화가 잘 연결되지 않아 고심했지만 ‘물건’은 정확히 약속한 시간에 도착했다. 정해놓은 암호도 틀림없었다.

    국경을 넘은 안내자들은 약속했던 돈을 받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C씨가 모는 구형 자동차는 ‘물건’을 태우자마자 쏜살같이 달려 옌지의 아지트에 당도했다. 시간은 어느새 자정. 한국에 있는 한씨의 조카에게 전화를 걸었다. 순조로운 진행이었다.

    아지트에서 밤을 보내고 난 이튿날 저녁 무렵, 이들은 시내에 있는 고려호텔로 향했다. 호텔로 들어서는 순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갑자기 들이닥친 공안(公安)들이 순식간에 한씨와 안내자들을 체포해 경찰차에 태웠다. 목적지는 시내 중심에 있는 지린성 옌볜(延邊)주 공안국 국내안전보위지대, 혐의는 ‘비법월경죄(非法越境罪)’. 지난밤 헤어진 A씨마저 곧 체포되어 유치장으로 끌려왔다. 두만강을 넘은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삼촌이 살아 있다”



    193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한만택씨는 3남4녀를 둔 농사꾼 집안의 일 잘하는 총각이었다. 부모님과 큰형님, 큰형수 밑에서 걱정할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포성이 울리자마자 세 형제 중 두 동생이 입대해 전선으로 갔다. 휴전 협상이 막바지에 이른 1953년 6월, 한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치열하게 대치하며 숱한 희생자를 낸 강원도 금화지구 전투에서 형 만순씨는 사망했고 만택씨는 행방불명이 됐다. 정부는 이들을 모두 사망자로 처리해 서울 국립현충원에 위패를 만들고 만택씨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했다. 남은 가족은 매년 6월이면 제사를 지냈다. 그렇게 50여 년이 흘렀다.

    큰형은 세상을 떠나고 형수만이 지키고 있는 진주의 옛집으로 중국에서 편지 한 통이 날아든 것은 2004년 11월이었다. 한씨의 지인을 통해 보내온 편지는 본인임을 입증하는 이야기와 북한 무산의 현 주소, 그간의 사연을 담고 있었다.

    5~6년 전에도 비슷한 소식이 있었지만 4억~5억원에 달하는 국군포로 보상금을 노린 사기성 브로커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먼 친척에 관한 이야기를 맞춰보며 한만택씨가 맞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형수와 조카들은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한만택씨를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한 준비가 시작됐다.

    편지를 보낸 중국의 지인과 다시 접촉한 가족들은, 12월 중순 지인을 무산에 들여보내 본인과 통화하는 데 성공했다. 한씨의 탈북의사를 확인한 가족들은 주선해줄 사람을 물색했다. 국군포로 송환에 경험이 있는 남북이산가족협의회의 심구섭 대표가 안내자 섭외 등 작업에 나섰다.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계획의 윤곽이 잡힌 12월22일, 한씨 가족과 심 대표는 외교부와 국방부 앞으로 첫 번째 진정서를 보낸다. ‘국군포로 한만택씨가 무산에 살고 있음을 확인했으며 조만간 귀환을 추진 중이니 사전에 조치를 취해달라’는 내용이었다. 12월24일, 중국 내 지인과의 전화통화를 통해 구체적인 일정과 계획이 확정됐다. 탈북 시간은 12월27일 밤. 한씨의 조카인 한정구씨와 그의 아내 심정옥씨는 12월29일에 옌지에 마중 나가기로 했다.

    진정서의 행방

    그러나 한씨 가족이 외교부에 보낸 첫 번째 진정서는 담당부서인 동북아2과에 전달되지 못했다. 나중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진정서는 문서수발담당자의 실수로 업무와 전혀 무관한 외교부 감사실에 보내졌다. 한만택 사건과 관련해 외교부가 저지른 첫 번째 실수다. 이 실수 때문에 외교부 담당부서는 국방부가 한씨의 체포 사실을 통보한 12월30일까지 ‘국군포로 한만택’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심구섭 대표는 “이 때문에 중국 외교부를 통한 사전협조나 주중영사관의 준비 등 외교부 차원에서의 관련 조치가 전혀 이뤄지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외교부 관계자는 가족들에게 “초기 문서수발에 실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외교부는 2005년 7월27일 심씨에게 보낸 비공식 문서를 통해 “12월22일 외교부에 제출한 진정서는 국방부에도 동시에 접수됐으므로 결과적으로 진정서 처리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국방부 차원에서 가족과 연락을 취해 준비작업을 진행했으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논리다. 관련규정에 따르면 외교부는 국방부의 통보가 있어야 공식대응이 가능하다는 해명도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반론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공식적으로는 국군포로가 탈북하기 전에 한국 외교부가 개입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탈북 계획을 확인하면 현지에서 미리 준비하거나 협조를 요청하는 게 관례이기 때문이다. 한씨의 탈북을 진행한 이들은 주중영사관의 담당자가 내용을 사전에 몰랐다는 것도 사건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최소한 가족들이 체포 사실을 확인한 12월29일 아침부터 외교부가 중국측에 협조공한을 보낸 12월30일 저녁까지의 시간은 벌 수 있었다는 것이다.

    길지 않아 보이는 이 이틀의 시간은 사실 한만택씨의 북송 여부를 가르는 데 매우 중요한 시점이었다. 외교부의 문서처리 실수가 없었다면 한씨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이러한 논리로 심구섭 대표는 외교부에 “담당부서의 직무유기로 송환이 실패했으므로 준비에 들어간 비용을 변상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북측 가족이 탈북 꺼린다?

    한씨가 두만강을 건넌 12월27일 밤, 경기도 안양에 사는 조카 한정구씨 부부는 성공적으로 옌지에 도착한 삼촌의 전화를 받는다. 12월29일 아침 출국을 위해 공항에 나간 부부는 현지 안내자와 연락해온 심구섭 대표에게서 날벼락 같은 말을 듣는다. 한씨의 체포 소식이었다.

    심 대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국을 강행한 한씨 부부는, 그날 저녁 옌지의 호텔에 도착해 체포 사실을 알리는 팩스를 외교부와 국방부에 보낸다. 국방부 대북정책과는 이날 밤 관련내용을 외교부에 의뢰하고, 외교부는 이튿날 아침 상황을 파악한 뒤 주중영사관을 통해 중국측에 협조공한을 발송한다. 이때가 12월30일 저녁. 한정구씨의 부인 심정옥씨는 “그때는 정부가 빨리 움직였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놀랐지만, 심 대표나 안내자들은 이때만 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중국측이 국군포로 신분을 확인하면 결국 한국으로 보내온 관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문을 받는 와중에 고생은 하겠지만 며칠 후면 서울로 가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같은 유치장에 있다가 보름쯤 후 풀려난 안내자 B씨가 “한씨가 조사과정에서 자신의 군계급을 말하는 등 국군포로 신분을 분명하게 밝혔다”고 전했던 것도 좋은 소식이었다.

    오히려 궁금한 것은 국경을 넘은 지 하루도 안 돼 중국 공안이 한씨 등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전례 없이 빠른 대응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생각이 달라졌지만, 한씨의 가족과 탈북에 관여한 이들이 사건 초기 ‘무산에 있는 한씨의 자녀가 북한 당국에 신고한 것 아닐까’ 생각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보위부 등 북한 당국이 중국에 협조를 요청해 수배를 내렸다면 가능한 이야기다.

    많은 경우 북한에 있는 국군포로의 자녀나 아내는 가장의 남한 귀환을 꺼린다. 가장이 국경을 넘을 경우 추후 어떤 일을 당할지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자녀들의 신고로 탈북이 좌절되는 경우도 있고, 적절하게 타이밍을 맞춰 국경을 넘었을 즈음에 신고해 처벌을 최소화하려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한정구씨 부부는 한동안 옌지에 머물면서 관계자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상황을 지켜봤다. 한씨의 지인에게 얼마간 돈을 주어 무산에 들여보내기도 했다. 직접 공안국을 찾아갈까도 생각했지만 섣불리 자극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이라는 현지 관계자의 조언에 따라 포기했다. 1월7일 부부는 낙관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고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한만택씨의 탈북 사실이 ‘문화일보’와 ‘연합뉴스’를 통해 처음 공개된 것이 이 무렵, 2005년 1월10일이었다. 기사에는 ‘북송이 임박한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도 있었지만, 외교부와 국방부 관계자들은 가족들에게 “그런 징후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같은 시기 김동식 목사 납북사건과 관련해 옌지를 방문한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은 관계기관을 방문하려 했지만 당국과 가족은 만류했다. 김하중 주중대사는 김 의원 등 방문한 국회의원들에게 “중국과 긴밀히 협조하고 있으며, 별문제 없이 입국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외교부의 협조공한에 대해 중국측의 반응이 온 것은 체포 후 보름이 지난 1월12일이었다. 외교부 동북아2과가 김문수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중국 외교부 실무자는 주중한국대사관 관계자에게 “한국측 협조요청을 받기 전에 한씨를 중국법에 따라 처리했다”고 구두로 통보했다. 언론에는 공개되지 않았던 이 통보는 가족들이 국방부를 방문한 1월14일에야 한정구씨 부부에게 전달됐다. “그게 정확히 무슨 의미냐”는 가족들의 질문에 당국자들은 “확인 중”이라고 답했다.

    불분명했던 통보의 의미는 1월26일 명확해진다. 이날 외교부는 중국 외교부 차관보가 김하중 대사에게 구두로 “한씨는 이미 12월30일 이전에 북송됐다”고 통보했음을 공식 발표했다(뒤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후에 확인된 정보는 이 같은 중국측 통보가 사실이 아님을 보여준다). 기자회견장에 갔던 한정구씨 부부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이날 오전 주중 담당영사에게서 “새로운 소식이 있으니 오후 4시쯤 외교부에 가보라”는 국제전화를 받고 기대에 부푼 터였다. 그날 밤 진주에 있는 한만택씨 큰형수의 베개는 흥건히 젖었다.

    1월26일까지 일련의 상황을 정리해보면 외교부의 두 번째 실책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측이 통보하기 전까지 외교부는 북송 사실을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월12일 중국측 실무자가 “법에 따라 처리했다”고 말하던 그 시점에, 김하중 대사는 국회의원들에게 “별 문제 없을 것”이라고 보고하고 있었다.

    가족들은 “외교부 현지 담당자들이 직접 중국측 실무자들과 접촉하며 상황변동을 파악했다면 이렇듯 사태전개에 어두울 수 있었겠느냐”고 말한다. 이미 한씨 부부가 옌지에 머물던 1월초 공안국의 담당자 이름과 전화번호를 확인해 우리측 관계자에게 알려줬지만, 담당자들은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며 북송 통보 전까지 직접 접촉을 꺼렸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가 국군포로 처리에 협조적이었던 전례를 믿고 외교부가 지나치게 낙관적인 자세를 취한 듯하다.

    북한으로 돌려보내진 후 한만택씨는 회령에 있는 국가안전보위부 지부에서 한 달여 조사를 받는다. 이곳에서 한씨는 심하게 구타를 당하고 강도 높은 심문을 받았다. 조사가 마무리된 2월 중순 무산 자택으로 돌려보내진 한씨는 가택연금 상태에 놓인다.

    송환이 실패하자 함께 행동해온 한정구씨 부부와 심구섭 대표도 그간 들어간 2000만원가량의 비용을 누가 책임질 것이냐를 두고 불화를 빚는다. 이후 한씨 부부는 심 대표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납북자가족모임의 최성용 대표와 대책을 논의했다. 이들은 다시 무산에 사람을 들여보내기 시작했다. 한만택씨의 집 주변에는 보위부 요원들의 도청과 감시가 삼엄했기 때문에 위험부담이 한층 커진 상황이었다. 최성용 대표는 “묘한 오기가 생겼다. 한번 실패한 사람을 다시 빼내온다면 큰 사건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中, 협조공한 받고도 북송 강행?

    3월28일 남한의 가족은 수차례 시도 끝에 다시 한씨와 전화통화하는 데 성공한다. 의뢰를 받고 무산에 들어간 한씨의 지인이 가져간 중국 휴대전화로 국제전화를 건 것. 한씨의 집이 국경에서 지척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씨는 잡음이 심한 전화를 통해 먼저 형수의 안부부터 묻지만, 여든을 넘긴 형수는 한씨의 북송 소식에 충격을 받고 와병 상태였다. 한씨는 구타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하다고 말했다.

    한만택씨의 사진을 찍어 보내기도 한 이 지인은 한정구씨 부부와 한 통화에서 “한씨가 1월6일까지 총 9일 정도 중국에 있었다”고 말한다. 옌지 공안국에서 이틀 머물다 대기소로 옮겨 일주일가량 지냈다는 설명이었다. 이는 12월30일 이전에 북한으로 보내졌다는 1월26일 중국측의 통보나 외교통상부의 공식발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여기서 외교부의 세 번째 실책을 확인할 수 있다. 1월26일 중국의 통보가 사실인지를 철저히 확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1월26일은 한씨가 실제로 북한으로 돌려보내졌다는 1월6일에서 한참 지난 시점이므로 북송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12월30일’과 ‘1월6일’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1월6일 북한에 보내졌다면 이는 중국 정부가 한국측의 12월30일 협조공한을 받고도 그대로 북송을 감행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1월26일 발표 당시 외교부는 “우리측이 협조를 요청했을 무렵에는 중국 정부도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2월11일 이태식 외교부 차관과 면담한 자리에서 리빈 주한중국대사는 “중앙정부에서 사건을 인지했을 때는 한씨가 북송된 후였다. 중앙정부와 지방당국간 연락이 원활하지 못한 결과”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는 3월28일 무산에서 한 통화내용에 비춰보면 거짓말이 된다.

    한씨의 북송 사실이 알려진 당시부터 “그처럼 빠른 북송은 불가능하다”는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12월28일 저녁 체포된 한씨가 12월30일 저녁 이전에 북한으로 보내졌다면, 총 48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얘기다. 통상 중국 당국이 탈북자를 조사해 북송하는 데 수주가 걸리는 것에 비춰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당시 외교부는 “중국 정부의 설명이 사실과 다르다는 징후가 없다”며 별도의 사실 확인 계획이 없음을 시사했다. 관련 증거를 수집해 정식으로 중국 외교부에 확인을 요청하는 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가족들이 한씨가 1월6일 이후에야 북송됐다는 증언을 정부에 전달한 4월 이후에도 외교 부는 공식적으로 중국 정부에 이에 대한 추가설명이나 확인을 요청하지 않았다. 가족들이 “혹시 모두 책임을 피하기 위해 한중 외교 당국이 ‘12월30일 이전’이라는 날짜를 짜맞춰 발표한 것 아니냐”고 의심할 만도 한 대목이다.

    이에 대해 중국 사정에 정통한 한 전문가는 “대외창구가 외교부로 단일화한 중국의 현실상, 한국 정부가 공식통보를 의심해 지방의 말단 공안에게 상황을 묻는 식으로 사실을 확인하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싶다. 국력 차이 같은 환경적인 제약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용한 외교론’

    외교부의 이 같은 태도는 국군포로 문제의 경우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옳다는 기본방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조용한 외교론’이다. 공격적으로 대응하면 북한은 물론 중국을 자극할 수 있고, 자칫 한씨의 송환에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논리다. 최악의 경우 ‘국군포로 신분이 확인되면 한국으로 보낸다’는 한중 간의 ‘묵계’가 깨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 외교부 관계자는 익명을 전제로 “북한을 드나들며 국군포로를 탈북시키는 사람들의 활동에도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한만택씨의 경우도 주중영사관 관계자가 옌지에 마중나가도록 미리 조치했으면 문제없이 송환이 가능했으리라는 주장이다. 안내자들이 가족에게서 돈을 받지 않으면 사람을 넘겨주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졌다는 것. “12월22일 한씨 가족이 보낸 ‘사전 준비’ 진정서를 외교부가 잘못 처리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설득력이 없다”는 지적에 이 관계자는 “일반론을 얘기한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논리로 외교부는 한만택씨 가족들에게도 공개활동을 자제해달라고 당부해왔다.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이 2월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를 추진하려 했을 때도 외교부는 김 의원을 만류하라고 가족들을 설득했다. 3월28일 남측 가족이 무산과의 통화에 성공해 1월6일 북송 사실을 확인한 후에도 정부는 이를 언론에 공개하지 말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가족들은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 상태다. 늘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뤄지는 것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가족들은 한씨가 자택으로 돌아온 2월 중순 이후 끊임없이 재탈북을 추진했다. 한정구씨 부부는 “총 7~8차례 시도했고, 거의 성공할 뻔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부인 심정옥씨는 “그 동안 마음 졸인 것 생각하면 잠이 잘 안 올 지경”이라고 토로했다.

    심씨의 말에 따르면 한번 사람을 보내 무산에 들어갔다 나오는 데는 10일이 넘게 걸렸다. 돈을 받기 전에는 조금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원망스럽기도 했다고 한다. 송금과정에서 수수료를 떼는 ‘환치기 브로커’들의 농간도 만만치 않았다. 어렵게 들여보낸 사람 가운데는 휴대전화 소지 같은 혐의로 체포된 일도 있었다. 심씨는 “비용도 비용이지만, 삼촌 한 분 빼내자고 여러 사람에게 죄를 짓고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이나 내일이라도…”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4월 중순 한만택씨가 북창에 있는 관리소(수용소)에 수감됨에 따라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한 곳이어서 소식도 거의 완전히 끊겼다는 설명이다. 이때부터 한씨 가족들은 통일부를 통한 구명요청에 힘을 쏟았다. 9월13일 남북장관급회담에서 한씨의 송환을 공식적으로 요청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실제로 9월 장관급회담을 준비하는 실무협의 과정에서 한씨 문제가 거론되긴 했지만, 북측이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 정식의제로 채택되지는 못했다는 후문이다. 10월 들어 가족들은 12월 열리는 회담에서는 정식으로 거론해달라는 공문을 보내고 정동영 장관과의 면담을 요구하지만, 11월17일 통일부는 “담당 국장부터 먼저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답한다.

    정부에 더는 기대할 게 없다고 판단한 가족들은, 7개월 남짓 보관한 한만택씨의 사진과 전화통화 녹음, 편지를 공개하기로 마음먹고 12월5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언론에 터뜨려 시끄러워져야 진척이 빠르고, 북한도 한씨를 건드리기 어려워진다”는 최성용 대표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이날 저녁 TV는 한만택씨의 육성을 내보냈고 이튿날 신문들도 대대적으로 기사를 실었다. 가족들은 12월14일 장관급 회담이 열리는 제주도에서 선상시위를 벌이겠다고 밝혔다.

    기자가 안양에 있는 한정구씨 자택을 방문한 것은 12월9일 오후였다. 부인 심정옥씨는 “아직까지 통일부에서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이번엔 사전협의에서조차 얘기가 안 된 것 같다. 오늘 내일이라도 전화가 오면 좋을 텐데…” 하고 말했다. 닷새가 지난 12월14일 저녁, TV뉴스에서는 한만택씨의 사진을 목에 걸고 배 위에서 시위를 벌이는 한정구씨 부부의 모습이 클로즈업됐다. 부부가 삼촌과 첫 접촉에 성공한 지 1년이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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