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표적인 공안통 검사들. 왼쪽부터 이창우, 김기춘, 최상엽, 이건개, 최환, 안강민, 주선회.
서울지검 공안부는 검사를 충원하는 방식도 다른 부서와 달랐다. 검사로서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모두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가 되지는 못했다. 서울지검에서 평검사를 배치하는 인사는 통상 지검장 소관이지만 공안부 검사를 배치하는 인사는 대검 공안부장과 검찰총장이 직접 챙겼다.
서울지검 공안부에 결원이 1명 발생하면 지검장은 후보 검사를 3배수로 압축해 대검 공안부장에게 보고했고, 대검 공안부장은 능력과 지역, 출신성분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그중에서 1명을 낙점한 뒤 검찰총장에게 보고했다. 최종 인사는 총장의 OK 사인이 떨어져야 가능했다.
1980년 중반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근무했던 전직 검찰 간부는 “서울지검 공안부장은 보안이 요구되는 민감한 사안에 한해 직속상관인 차장검사를 건너뛰어 지검장에게 직보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그만큼 서울지검 공안부는 특별한 부서였다”고 회고했다.
공안검사들도 정치권력에 저항한 역사가 있었다. 1964년 중앙정보부는 6·3한일회담반대운동의 배후에 북한 간첩의 지령을 받아 조직된 인민혁명당이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이용훈(李龍薰) 서울지검 공안부장과 김병리(金秉?)·장원찬(張元燦) 검사는 수사 자료를 검토한 끝에 증거가 부족하다며 피의자들을 기소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서울지검 공안부의 기소 포기는 검찰 수뇌부와 청와대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중앙정보부가 공소장에 서명하라고 압력을 넣자 세 검사는 사표제출로 맞섰다. 당황한 검찰 수뇌부는 서울지검 차장검사 등에게 서명을 요청했으나 모두 거절당했고, 결국 그날 밤 당직을 섰던 검사가 서명을 해 겨우 기소할 수 있었다. 당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한 검찰 수뇌부가 검사들의 사표를 만류하기 위해 설득에 나선 결과 김 검사와 장 검사는 사표를 철회했으나 이 부장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공안검사들은 민주주의를 억압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본래 업무인 국가 안위를 지키는 것보다 정권의 안위를 지키는 데 더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 실체가 과장된 것으로 밝혀진 ‘동백림 사건’이다. 중앙정보부는 1967년 독일에서 활약한 작곡가 고(故) 윤이상씨 등 국내외 예술가와 학자 194명이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을 드나들었고, 이 가운데 일부가 입북해 노동당 입당, 간첩행위를 했다고 발표했다. 검찰은 이 가운데 간첩죄 혐의로 23명 등 총 41명을 기소했다.
그러나 최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사건은 단순 친북 행위를 간첩조직 사건으로 과장한 것으로, 중앙정보부와 검찰이 무리하게 간첩죄를 적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번 공안이면 영원한 공안’
공안검사들은 1980년대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5공과 6공을 거치면서 검찰은 점점 더 권력에 종속돼 갔고, 당시 검찰에서는 ‘출세하려면 공안통이 되라’는 말이 유행했다. 전두환 정권에 맞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거세질수록 ‘공안 수요’가 급증했고, 공안검사의 위상은 더 높아졌다.
전성기를 누리면서 조직도 대폭 확대됐다. 1986년 4월에는 서울지검 공안부가 공안 1, 2부로 확대 개편됐고, 같은 해 10월에는 대검 공안부에 기존의 공안 1, 2과에 이어 공안 3, 4과와 공안기획관이 신설됐다. 이후 공안 3, 4과는 폐지됐지만 공안기획관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5공 시절에 공안검사가 되려면 이른바 ‘감각’이 뛰어나야 했다. 대형 노사분규와 시국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회·경제적 피해가 가장 적은 방법을 택해 사건을 처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따라서 상황 판단과 법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력이 최우선으로 요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