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검찰 ‘로열 패밀리’, 공안검사 영욕 30년

1980년대‘출세 보증수표’, 2006년고위간부 승진 전원탈락

  • 이태훈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jefflee@donga.com

검찰 ‘로열 패밀리’, 공안검사 영욕 30년

3/5
공동체 의식과 선민의식

빼어난 감각과 빠른 판단 능력을 갖춘 검사가 요구되면서 공안 업무를 경험한 검사가 계속 공안부에 남는 현상이 빚어졌다. 이 때문에 당시 “한번 공안으로 점 찍히면 영원한 공안이 된다”는 말까지 생겼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공안부에서 계속 검사생활을 하는 ‘공안통’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공안검사들은 특수부 검사들이 서로 큰 사건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한 것과는 달리, 주요 시국사건을 함께 처리했기 때문에 ‘공동체 의식’과 선택받았다는 ‘선민의식’이 강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로열 패밀리’를 형성해 검찰 인사에서도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공안 전성시대’를 이끌어갔다.

이 과정에서 1980년 이후 공안통 검사들은 계보를 형성했다. 1981∼82년 대검 공안부장을 지낸 이창우(李彰雨) 전 서울지검장은 ‘공안의 원조’.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88∼92년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을 지낸 김기춘(金淇春·고시사법과 12회) 한나라당 의원과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 법무부 장관을 지낸 최상엽(崔相曄·고시사법과 13회)씨가 그 뒤를 이었다. 최 전 장관은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2년부터 1987년까지 5년간 대검 공안부장을 지내면서 주요 시국사건을 도맡아 처리했다.

사시 1회에서는 1989∼92년 대검 공안부장을 지낸 이건개(李健介) 전 자민련 의원이 대표적인 공안통. 이 전 의원은 1989년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으로 몰아친 공안 정국 당시 ‘공안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을 맡아 77일 동안 수사를 지휘하면서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85명을 구속했다. 사시 6회에서는 1986년 서울지검 공안부장을 거쳐 1993∼94년 대검 공안부장을 지낸 최환(崔桓) 전 부산고검장이 공안 전문가로 통한다. 최 전 부장은 5공 후반기 서울지검 공안부장을 역임하면서 주요 시국사건을 처리했다.



사시 8회의 안강민 전 대검 중수부장도 공안통 검사의 혈통을 이었다. 1981년 5공 최초의 학생·노동운동 조직사건인 전국민주학생연맹·전국노동자연맹 사건을 수사했고, 1989년 서울지검 공안1부장으로 재직하면서 북한을 몰래 방문한 문익환 목사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의 주심을 맡은 주선회(周善會) 헌법재판관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7년 대검 공안부장으로 재직하면서 제5기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간부 전원에게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죄를 적용했다.

5공 시절 공안부 검사들은 ‘빵 찍는 기계’로 불렸다. 정권이나 수뇌부가 지시한 기준에 따라 기계적이라고 할 정도로 사건을 처리한 데서 유래했다. 당시 대학생 시위가 격렬해 대량 연행과 대량 구속 사태가 빈발했다. 공안검사들은 연행자를 극렬행위자 내지 주동자, 적극가담자, 단순가담자, 격리차원 연행자로 분류해 A B C D로 급수를 매겼다. 공안검사들은 자체 기준도 있었지만 ‘상부 지침’에 따라 ‘B급까지 구속’ 또는 ‘C급까지 구속’ ‘전원구속’과 같이 신병문제를 처리했다.

공안검사들은 정권의 안위를 위협하던 대형 시국사건을 처리한 보상으로 검찰의 핵심 보직을 차지했다. 국민으로부터 ‘독재정권의 시녀’ ‘정권의 홍위병’이라고 비난받았지만 당시 현실에서 공안검사 경력은 검찰 안에서 ‘훈장’에 가까웠다.

1980년대 공안검사의 실상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1985년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한 김근태(열린우리당 의원)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은 당시 자신을 수사한 검사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두려움에 얼어붙은 채 남영동에서 검찰로 와 ‘교양 있는’ 검사를 대하면 끊임없이 짝사랑하게 된다. 행여 여기에서 버티다 또 남영동으로 끌려가지 않을까 싶어 가슴이 두 근 반 세 근 반 저려온다. 그래도 끔찍한 고문을 안 해서 감사하고, 때로는 슬쩍 가족 얼굴까지 보게 해주니 우리의 검사님은 너그러움의 표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올가미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것은 세월이 한참 흐른 뒤다.”

실패로 끝난 ‘新공안’ 실험

1987년 민주화 항쟁을 거쳐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면서 공안검사는 수사능력 이외에 한 가지 덕목을 더 지녀야 했다. 판사에 대한 ‘로비력’이었다. 6공화국 들어 진보적인 성향의 판사들이 시국사건 피의자와 피고인의 영장을 기각하거나 무죄 판결을 내리는 사례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중요한 공안사건 피의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려면 먼저 영장이 청구되는 날의 영장당직 판사가 누구인지 확인해야 했다. 진보 성향 판사들이 당직을 서는 날을 피하기 위해 영장청구 날짜를 조정하기도 했다. 공안검사들은 시국사범에 대해 유죄를 받아내면 성과를 인정받지만 무죄나 구속영장이 기각되면 치명타를 입었다. 1989년 박시환(朴時煥·대법관) 판사 등 서울지법 동부지원 판사 5명은 공안검사들로부터 ‘영장 오적’으로 불리기도 했다.

3/5
이태훈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jefflee@donga.com
목록 닫기

검찰 ‘로열 패밀리’, 공안검사 영욕 30년

댓글 창 닫기

2022/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