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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의 혁명’ 꿈꾼 5·16, 정권탈취와 민주압살로 귀결

  • 김영명 한림대 교수·정치학 ym789@hanmail.net

‘구국의 혁명’ 꿈꾼 5·16, 정권탈취와 민주압살로 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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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군, 즉 제1군사령관 이한림은 모호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박정희의 쿠데타에는 반대했으나, 이를 저지할 적극적인 행동 동기나 의지는 갖지 못했다. 또 야전군 부대 안에 뿌리박힌 쿠데타 가담 장교들이 군 출동을 저지하는 데 큰 몫을 담당했다.

여기에다 윤보선의 군 출동 금지 친서는 결정적인 힘을 보탰다. 이한림은 모호한 태도로 일관하다 급기야 쿠데타 세력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장도영 참모총장은 쿠데타 이전부터 모호하고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다가 쿠데타 세력의 추대에 응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초대 의장으로 취임했으나 끝내 숙청되고 말았다.

근거 없는 ‘미국 책임론’

미국은 처음에는 쿠데타에 반대하고 민간 정부를 지지하는 태도를 취했다. 특히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은 강경한 태도를 취해 한미합동군사작전에 의한 무력 진압을 윤보선 대통령에게 요구하기도 했다. 당시 주한 미 대리대사인 그린도 쿠데타에 반대하고 민주당 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주한 미국 관리들의 행동은 워싱턴 당국의 훈령이 없는 상태에서 독자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진압군의 출동이 실패하고 쿠데타 세력이 실제로 권력을 장악하자, 미국 정부는 쿠데타를 현실로 인정하면서 빠른 시일 안에 민정 이양할 것을 요구하게 됐다.



최근 미국이 쿠데타에서 어떤 구실을 했는지를 밝히려는 논문이 많이 나왔다. 이 논문들은 세밀한 논의를 펼치지만, 미국의 구실이 무엇이었는지를 뚜렷하게 밝히지 못하고 당시의 전반적인 정황과 한미관계의 구조를 언급하는 데 그치고 있다.

“미국 군부와 정부가 이승만 정권과 장면 정권에 불만을 가져 이들의 하야를 적극 권했고 소수 모반 장교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또 쿠데타를 결국 인정한 것을 두고 미국의 역할 운운하는데, 이는 쿠데타 성공의 한 요인으로 볼 수는 있으나 미국이 쿠데타에서 적극적인 구실을 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이런 면에서 미국의 역할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쿠데타의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초점이 맞지 않는다. 오히려 ‘구조적 배경’의 하나이며, ‘성공 요인’의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미국이 쿠데타 발발에 개입했다고 주장하려면 미국측이 쿠데타를 사주했거나 주동자들과 사전에 의논했다는 것을 밝혀야 할 텐데, 그런 증거는 없다. 미국이 한국군에 대한 교육과 원조를 통해 남미에서와 같이 일종의 ‘신직업주의(정치 개입주의)’를 부추겼다고 주장하거나, 미국 원조로 한국군이 과대 성장한 것이 필연적으로 쿠데타로 나타났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런 주장들은 쿠데타와 군부 지배의 거시적, 구조적인 배경으로 제시될 수 있는데, 그런 연구는 오히려 없는 것 같다.

어쨌든 국민과 현직 정부, 군부 내 반대세력, 그리고 미국 정부의 효과적인 반대나 저항이 없는 상태에서 쿠데타가 성공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5·16은 전 세계적으로 드물게 피를 적게 흘린 쿠데타였다. 그만큼 쿠데타에 대한 명시적인 반대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광복 후 13년 동안 이어진 국가 건설 시도가 실패했음을 상징한다.

5·16군사정변은 한 해 전에 일어난 4월 봉기보다 장기적으로 더 큰 영향을 한국사회에 끼쳤다. 무엇보다도 쿠데타의 주역들이 압도적인 물리력과 조직력으로 이후 오랜 기간에 걸쳐 한국의 국가와 사회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치 기반을 바탕으로 그들은 자신이 인식한 대로 국가 건설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 결과 한국사회는 엄청난 물질 성장과 개발을 경험했다. 반면 민주주의는 오랫동안 압살됐다.

이러한 변모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5·16군사정변과 이로 인한 사회경제적, 정치적 변화를 쿠데타의 주역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혁명으로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큰 사회경제적인 변화를 이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전에 형성된 사회경제적 구조, 즉 주변부 자본주의적인 구조와 (준)권위주의적인 정치구조에 바탕을 뒀기 때문이다. 그 변화는 현존하는 질서의 변형과 심화이지 사회·정치구조의 근본적인 변혁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통치자 의식

5·16은 4·19의 부정으로만 인식되기에는 미묘한 구석이 있다. 쿠데타는 민주당 정부만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쿠데타 계획은 이승만 정권하에서도 1960년 2월부터 박정희를 중심으로 이미 추진된 바 있다.

따라서 민주당 정부의 혼란에서 쿠데타의 기원을 찾는 것은 잘못이다. 쿠데타의 기원은 이승만 정권에서 찾아야 한다. 근본적으로 쿠데타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경제를 바탕으로 한 국가 건설의 시도가 개인 권력자의 전횡과 미숙한 정부의 무능으로 파탄 상태에 이르자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면서 자본주의 경제성장의 단일 목표를 추구한 군부세력이라는 새로운 국가 건설 대안이 전면에 나섰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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