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호

정조가 회고하는 ‘개혁정치’의 허상

“하지 않아도 될 일에 몰두하고, 정작 해야 할 일은 등한시했도다”

  •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전통연구실장 hyunmp@aks.ac.kr

    입력2007-03-09 11: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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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가 회고하는 ‘개혁정치’의 허상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조정 관료들이 말을 안 듣는 것은 그렇다 치자. 처음부터 “모나지 않게 그럭저럭 넘어가는 것[無模稜]”(‘정조실록’ 7년 10월21일자, 이하는 7/10/21로 날짜만 표기함. #는 윤달 표시)을 일삼던 그들이 즉위한 지 24년이 지난 지금 새삼스레 충직(忠直)을 바칠 리는 없기 때문이다.

    노론 쪽 신하들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는 중에 노론의 영수 김종수는 “화성 성역은 진나라의 축성(築城)이나 한나라의 매관매직과 다를 바 없다”(20/7/2)고 비난했다. 서울 시전상인들의 독과점 폐해를 막기 위해 내린 시장 직거래[通共] 조치에 대해 그들은 “시장 질서를 혼란시킨다”며 반대했다(15/2/12).

    입으로만 개혁을 떠들었단 말인가

    이런 비난과 반대는 올 들어 더욱 심해졌다. 새해 첫날 나는 국가의 큰 경사인 왕세자 책봉식을 맞아 정치범을 사면했다(24/2/3). 그러자 대사헌 서매수는 자기들을 “그렇게까지 철저히 무시할 수 있느냐”고 대들었다(24/2/5). 국왕의 “일시동인(一視同仁)”도 좋지만 아직 형량이 많이 남아 있는 중죄인까지 모두 사면하면 그동안 사헌부가 기울인 노력은 뭐가 되느냐는 항의였다.

    그가 말하는 중죄인이란 이승훈을 겨냥한 것이리라. 정약용의 매부이자 이가환의 외조카인 이승훈의 석방은 곧 남인의 정계복귀를 뜻하는 신호탄이라 본 것이다. “이제부터는 사대부 가문 중에서 어둠에 묻혀 버려진 사람도 없고, 애매하게 폐쇄된 가문[廢族]도 없게 할 것이다.”(24/2/5) 나는 그에게 이번 사면이 ‘대화합’을 위해 취해진 불가피한 조치였음을 다시 말해주었다.



    이에 대해 좌의정 심환지는 “전하께서 애당초 신들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게다가 일국의 공론까지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대뜸 사면 명령을 반포하셨으니, 이는 결국 파괴를 가져올 것”(24/2/8)이라고 협박하기까지 했다. 국왕의 고유한 권한 행사인 사면조차 저들은 ‘무시’와 ‘파괴적인’ 행위로 간주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로 서운한 것은 바로 나의 측근세력인 이른바 ‘시파(時派)’ 신료들의 태도다. 사면조치를 반대하고 나선 서매수도 그렇거니와, 화성 건설 과정에서 음독자결한 정동준은 일찍이 규장각 내에서 누구보다도 나의 개혁의지를 잘 이해하던 인물이 아니던가. 그런 그가 “화성을 경영하는 일에 대해서는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한다”며 신도시 건설을 공공연히 비방하고 다녔다. “건설 공사비를 횡령한다”는 소문까지 나돌게 해 그나마 나쁜 여론을 더욱 악화시켰다(19/1 /11).

    사도세자 사건 처리 과정에서 같은 노론의 김종수와 대립각을 세워 ‘시파’인 양 행동했던 이병모는 나의 수원행차를 비판하는 쪽으로 돌아섰고(21/8/7), 나를 가리켜 “한·당시대 평범한 군주보다 못하다”(18/5/25)고 폄훼하기까지 했다. 아! 그들은 입으로는 “개혁이야말로 시대적(‘時’) 과제”라고 떠들고 다니면서, 실제로는 시류(‘時’)를 따라 움직이는 한낱 정치적 부초(浮草)에 불과했던 것인가.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남인 쪽 신하들이다. 나의 정치 이상을 가장 잘 이해하고 또 따라주었던 그들이 지금 정국에서 완전히 배제돼 있다. 생각해보면, 재위 19년에 이가환과 정약용을 지방에 좌천한 것이(19/7/25) 잘못이었다. 당시 남인의 영수 채제공의 후계자로 주목받던 이가환과 정약용은 노론과 소론의 심한 질시와 견제를 받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잠시 도성을 떠나 있으라 명했다. 충주목사(이가환)로, 그리고 금정찰방(정약용)의 직위에서 충청도 지방의 천주교 확산을 막으면 자연스레 그들에게 씌워진 ‘천주교도’라는 오명이 벗겨지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 이가환과 정약용을 동시에 내려 보낸 것이 큰 실수였다. 남인 내에서 유일하게 학문적 능력과 정치적 감각을 아울러 갖춘 두 사람이 떠나자 채제공의 판단력이 흐려진 듯했다. 뛰어난 지식과 고급 정보를 가지고 채제공을 좌우에서 보좌하던 그들이 떠난 지 얼마 안 돼 채제공은 “조정의 온갖 일이 재작년보다 작년이 못하고, 작년보다 금년이 더 나빠지고” 있다면서 정승직을 버리고 물러가버렸다(22/6/2).

    노론의 ‘왕비가문 사수’ 의지

    정조가 회고하는 ‘개혁정치’의 허상

    정조의 화성 행차를 구경하는 백성들(능행도).

    그러자 노론과 소론은 기다렸다는 듯 그 공백을 자기들 사람으로 채웠다. 이후 남인의 재등용은 결사적으로 저지됐다. 설상가상으로 지난해 1월에 채제공이 죽자(23/1/18) 남인은 더욱 더 소외됐다. 내가 정승의 천거 없이 이가환 등을 등용하려고 하면 노론과 소론은, 이번 이승훈의 경우에서 보듯이, 일제히 천주교 문제를 들고 나와 그 시도를 좌절시켜버리곤 했다. 남인의 소외는 곧 나의 고립을 의미했다.

    내가 지난해 세밑에 왕세자의 책봉을 받아들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움쭉달싹도 않는 정국을 돌파할 계기가 필요했다. 7년 전부터 노론 신하들은 왕세자 책봉을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정국이 바뀌기 전에, 국가 중대사의 결정권을 자기들이 가지고 있을 때 국가혼례[國婚]를 치르겠다는 심사였다. 하지만 나는 원자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하곤 했다(17/11/19).

    더욱 정확히 말하면 100여 년간 노론의 최우선 전략이 돼온 ‘왕비가문 사수(死守)’ 의지를 그대로 받아들일 순 없었다. 장희빈이 숙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남인의 세상이 됐고, 장희빈의 아들(경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노론(당시는 서인)은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노론의 핵심인물 네 사람이 죽어 나가기까지 했다(‘신임사화’). 이후 노론은 ‘국혼의 절대 고수[勿失國婚]’를 당론의 제일원칙으로 삼았다. 왕비가문을 놓치는 것은 작게는 국구(國舅, 왕의 장인)가 맡게 돼 있는 국왕 경호업무 및 그와 관련된 핵심 정보원을 잃는 것이요, 크게는 정권 재창출의 기회(왕자 출생)를 놓치는 것을 의미했다.

    이 때문에 노론은 숙종 29년(1703년)에 연잉군(나중의 영조)의 배필로 군수 서종제의 딸을 고를 때나, 나의 생부 사도세자의 빈으로 홍봉한의 따님을 고를 때, 그리고 지금의 왕비인 김시묵의 여식을 간택할 때도 치밀한 준비와 철저한 대응으로 목표를 달성했다.

    요즘 온 나라의 관심은 두 가지에 쏠려 있다. 그 하나는 누가 왕세자의 스승이 되느냐이고, 다른 하나는 누구의 딸이 세자빈이 되느냐다. 이 두 가지는 워낙 예민한 사안이기 때문에 아마 상당한 정치적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노론과 소론 사이에, 또는 적어도 노론 내부에 초래될 분열이 그것이다. 그러면 그 틈에 남인의 재기와 같은 정국의 변동 내지 나의 고립 탈피가 가능하지 않을까.

    실망스럽게도 나의 이런 기대는 어긋났다. 우선 세자시강원 구성에서 노론과 소론은 예상외로 공동전선전략을 폈다. 최고책임자는 노론이 맡고, 실질교육자는 노론과 소론의 신하들이 교묘히 배분하는 형식이었다. 세자의 사(師)와 부(傅)는 노론의 이병모와 심환지가, 세자교육을 담당하는 제조는 소론의 홍양호와 이만수가 맡았다. 남인은 철저하게 배제됐다(24/1/1). 도무지 노론과 소론의 강고한 연대를 뚫고 들어갈 길이 없다. 결국 나의 탕평책은 이렇게 무력화되고 마는 것인가.

    간택이 아닌 중매로

    이제 세자빈 간택밖에는 길이 없다. 오직 하나의 가문만이 채택되는 국혼에서는 배분의 여지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11세에서 13세 이르는 처녀들을 대상으로 금혼령을 내렸다(24/1/2). 그리고 관례에 따라 왕세자는 이홍(李)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24/1/25). 나이 어린 “원자아기”가 드디어 제 이름을 가진 왕세자가 된 것이다. 모두들 나라의 큰 경사라고 기뻐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기뻐할 일인가. 겨우 11세의 나이에 성인이 된다는 것은, 더군다나 세자라는 정치행위자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무거운 짐을 떠맡는 일인가. 내 아들에게만은 그 역경을 조금이나마 늦게 겪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미룰 수도 없는 상황이고, 다만 그의 곁에서 조금이나마 힘이 돼줄 누군가를 잘 선택하는 것밖에 달리 길이 없다. 그 누군가는 세자빈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일 수도 있으리라.

    노론의 신하들은 이 과정에 만족한 듯 “기쁨을 이기지 못하겠다”(24/1/25)고 말했다. 나는 그들이 기뻐하는 틈을 타 이번 국혼은 ‘간택’이 아닌 ‘중매’ 방식을 택하겠다고 기습적으로 선언했다. 후보자 물색과정에서부터 내 의중이 반영될 수 있도록 규칙을 바꾼 것이다. “관례”에 따라 간택으로 세자빈을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하들에게 나는 “규수를 간택하는 것은 본디 좋은 제도가 아니다. 우리나라 선정(先正) 중에서도 그렇게 말한 적이 있지 않은가”라고 해 내 뜻을 관철했다(24/1/2).

    이렇게 되자 도성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임금께서 마음을 정해둔 곳이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나는 정민시, 서매수, 이만수를 불렀다(24/1/3). 시파인 정민시와 이만수 외에 요즘 내게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고 있는 한성판윤 서매수를 부른 것은 까닭이 있었다. 그는 세자빈 선발을 위한 유관기관의 장(長)일 뿐만 아니라(한성판윤), 비판세력에 내 의도를 그때그때 전달하는 통로가 될 수 있었다(서매수는 이후 1월26일에 대사헌으로 전보됨). “바깥 사람들은 내가 정한 사대부가가 있을 것이라고 말을 한다지만, 나는 실상 어느 집에 처자가 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하늘이 정하는 일이지 어찌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겠는가.” ‘왕의 의중’을 함부로 넘보거나 경솔히 떠들고 다니지 말라는 얘기였다.

    눈치 빠른 점쟁이들

    정조가 회고하는 ‘개혁정치’의 허상

    경기도 여주시 영릉에 있는 세종의 어진.

    이어서 나는 또 하나의 새로운 규칙도 알려주었다. “옛 규례에는 4조(祖) 가운데 현관(顯官)이 없는 집은 한성부에서 그 명단을 빼버리도록 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렇게 하지 말라. 모든 집안에서 단자를 봉해 올리면 예조에서 선별하라”는 지시가 그것이다. 한마디로 그 대상 폭을 넓히되, 선발권을 한성판윤 서매수가 아닌 예조판서 이만수에게 맡긴 것이다.

    “모든 집안을 대상으로 하라”는 이 말에는 기실 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언뜻 보기에 한미한 집안의 규수도 빼놓지 말라는 것으로 들리지만, 동시에 명문거족(名門巨族)의 여식도 아울러 대상에 넣으라는 말이었다. “경들의 인척이나 혹은 친지 중에 서로 찾아보도록 하라”(24/1/3)는 나의 말뜻을 영민한 이만수가 모를 리 없었다.

    사실 그동안 노론은 국혼의 대상을 자기 세력 중에서 찾되, 되도록 세력이 미약한 집안에서 왕비가 선발되게 했었다. 강력한 가문이 외척이라는 칼자루까지 쥐게 되면 자칫 노론 전체가 요동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나온 묵계였다. 앞의 서종제나 홍봉한, 그리고 김시묵의 가문이 선발된 예가 바로 그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예판 이만수는 나의 이 뜻을 정확히 간파했다. 그가 최종적으로 올린 명단이 그것을 말해주었다. 행호군(行護軍) 김조순의 딸, 진사 서기수의 딸, 유학 박종만의 딸, 유학 신집의 딸, 통덕랑 윤수만의 딸이 1차와 2차의 간택을 통과했다(24/2/26). 단연 1순위로 올라온 김조순의 여식에게 관심이 쏠렸다. 아! 김조순의 집안이 어떤 가문인가. 김상헌 이래 전통에 빛나는 안동김문(金門)의 규수가 최종 5배수에까지 오른 것은 과거의 규칙대로라면 불가능했다. ‘중매’라는 방식과 책임자의 변경 등 고심 어린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무래도 조정 대신들의 의구심을 흩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그들이 국혼물실의 당론을 위해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에 김조순 가문에 대해 별로 마음을 두지 않았다.” 이만수 옆에 앉은 예조참판 이노춘을 의식하며 던진 말이다.

    채제공을 탄핵하다 유배를 갔고, 지난해에야 겨우 풀려난 이노춘의 의심 어린 눈빛이 매서웠다. “그런데 지난달 현륭원 참배를 하던 날 밤 꿈이 무척 좋았다. 마치 나더러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만 같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꿈 얘기를 꺼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국복(國卜, 국가지정 점술가) 김해담이 거들었다. “기유년 5월15일 유시(酉時)면, 대길대귀의 격으로, 복록도 끝이 없고 백자천손을 둘 사주(四柱)입니다.” 김조순의 딸 얘기다. 늘 그렇듯 점쟁이들은 눈치가 빨랐다. 내 마음을 훤히 읽고 있지 않은가. “오늘 간택 때 보니 김조순의 여식이 얼굴에 복이 가득하고 행동거지도 뛰어나 자전과 자궁도 한번 보시고 첫눈에 좋아하셨다.” 자전까지 좋아하셨다고 하자, 이병모와 이노춘도 마지못해 말했다. “지금 성상의 하교를 듣고보니 참으로 종묘사직을 위해 끝없는 복이라 하겠습니다.”(24/2/26).

    문제는 나의 건강이었다. 근력이 날이 갈수록 쇠퇴해갔다. 요즘에는 버티고 서 있기조차 힘들어졌다. 먹는 것과 자는 일이 제대로 안 되니 정신까지 왔다갔다해 책 읽는 것도 힘들다. “신도 어제 그렇게 힘들어하시는 것을 보고 대단히 염려스러웠습니다.” 원릉(元陵, 영조의 능)에 가서 예를 올릴 때 휘청거리던 나를 본 이병모의 말이다. “내가 즉위한 지 20여 년이 흘렀는데, 신하들과 만나고 대화 나누는 것을 이렇게 못하기는 처음이다. 이제는 부득이 휴양을 위주로 해야겠다.”(24/2/27).

    정말로 휴양이 필요한 때다. 그동안 그야말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온통 국사에 매달려온 날이 몇 해던가. 올해 들어서만도 “옷을 입은 채로 밤을 지새우길” 벌써 25일째다(24/1/25). 그러다보니 체력이나 정신력이 모두 엉망이었다.

    50발의 화살을 쏘아도 끄떡없던 내가 체력의 한계를 느낀 것은 몇 해 전부터였다. 특히 지난해 7월부터는 시력이 매우 나빠져 안경을 쓰지 않으면 글씨를 읽을 수가 없다. 복잡한 일을 만나면 어김없이 이상이 생겨 등골의 태양경과 좌우 옆구리에 횃불이 타는 듯한 열기가 올라오곤 한다(23/7/10). 지난해 가을의 현륭원 행차 때에는 걸음을 제대로 옮길 수조차 없었다.

    성과 미미한 4대 개혁안

    체력보다 더 안 좋은 것은 정국 상황이다. 지난해 1월, 그러니까 좌우의 팔이라 할 수 있는 채제공과 김종수가 약속이나 한 듯이 열흘 간격으로 저세상으로 간 후(23/1/7; 23/1/18), 믿고 국사를 의논할 신하가 없어졌다. 쓸 만한 인재들 역시 하나 둘 내 곁을 떠나갔다. 군국(軍國)의 기무에 밝았던 윤시동이 몇 해 전에 죽었고(21/2/18), 그동안 나라 재정을 도맡아온 정민시마저 세상을 떠났다(24/3/10). 설상가상으로 중국에서 건너온 전염병으로 12만9000여 명의 백성이 사망했다(23/1/13). 여름엔 극심한 가뭄으로 온 나라의 곡식이 말라 타버렸다(23/5/22). 아전들의 농간은 심해지고(23/2/18), 수령들은 관직을 재산 형성의 첩경으로 보고 온종일 “어떤 읍의 소출은 얼마이고 어떤 직의 소득이 얼마인가”라는 말만 주고받았다.

    무엇보다 내가 즉위 초 발표했던 ‘4대 개혁안[更張大誥 : 민생경제·인재등용·군제개혁·재정 분야의 개혁안]’(2/6/4)이 군제[戎政] 개혁을 빼고는 성과가 미진하자, 민심이 떠나기 시작했다. “공업과 상업을 발달시켜 민생을 유족하게 만들려는” 경제[民産] 개혁은 신해통공을 제외하면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세수 증대를 위해 취한 공동납(共同納) 제도 역시 국가의 재정[財用] 여건을 만회하는 데는 기여했으나, 탐관오리의 농간과 횡령을 낳았다. 특히 ‘신향(新鄕)’이라 하는 부민층과 ‘잔반(殘班)’이라 일컫는 쇠잔한 빈민층 사이의 양극화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그렇게 보면 저들의 실망과 좌절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내가 즉위했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큰 기대를 가지고 조정을 바라보았는가. 그들은 마침내 이 땅에 새로운 정치가 열리리라 기대했다. 노론과 소론, 그리고 남인으로 나뉘어 ‘내 편은 절대적으로 감싸안고 네 편은 무조건 배척하는[黨同伐異]’ 편당의 정치가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규장각에 서얼 출신의 4검서를 임용했을 때, 문벌과 학력과 지역에 구애하지 않는 세상, 서얼이라도 차별받지 않고, 성균관 출신에 문과 급제자가 아니더라도 능력만 있으면 인정받는 그런 시대가 올 것이라 예상했다. 이제 억울함이 없는 나라, 착한 이가 복을 받고 나쁜 자는 벌을 받는 세상이 될 것을 바랐다.

    나도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사헌부 관리들을 직접 만나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었다. 심리절차를 혁신해 억울한 재판을 없애려 노력하기도 했다. 도성 주위의 왕릉에 행차할 때면 “멀리 삼남(三南, 경상·전라·충청도)과 양서(兩西, 평안·황해도), 북관(北關, 함경도)에서까지” 올라온 사람들이 길가에 늘어서곤 했다(3/8/4). “산에 가득 차고 들에 두루 찬” 이들 중에는 잘못된 행정을 고발하고 호소하기 위해 온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들의 고발을 빠뜨리지 말고 받아들이게 했다(격쟁(擊錚)과 상언(上言) 허용).

    기회가 없진 않았는데…

    그런데 재위 24년째인 지금은 어떠한가. 언제 그런 기대가 있었냐는 듯 온통 냉소와 싸늘한 시선뿐이다. ‘4대 개혁안’ 중에서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은 인재 등용이다. “우리 동방의 성쇠는 오로지 인재의 양성과 적재의 적소 배치 여부에 따라 좌우”됐다. 그런데 고시제도의 문제로 준수한 영재가 선발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인사[銓選]를 맡은 부서는 인재를 감별하는 지혜가 없어 연줄에 의한 요행(僥倖)인사만 거듭해왔다(2/6/4).

    이 때문에 나는 탕평책을 실시해 그동안 정계에서 소외됐던 소론과 남인 중에서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했다. 당파가 다른 인재들을 규장각 안에 끌어들여 회통(會通)의 정치를 하려 했다. 하지만 그 폭이 넓지 않아 전체적으로 볼 때, 노론 중심의 정국운영을 면치 못했다. 조정에 나온 자들이 “제 몸 보전하기에 능하고 처세술에 달통해 모두가 샛길로 통하고 구멍을 뚫는 일에 열중”(19/1/11)했다는 권유의 지적을 내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무엇보다 재야의 명망 있는 여러 지식인[山林]을 초빙해놓고도 정작 그들의 정책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반성한다. 이른바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놓고는 문을 닫는 격”이 아니었는지 후회스럽다. 요즘 송환기와 이성보가 한사코 출사(出仕)를 거부하는데 이는 자업자득인 셈이다. 신뢰를 잃은 군주의 말은 뜨내기의 언약보다 못하다는 것을 요즘처럼 절실히 느낀 적이 없다. “나이 오십이 돼서 마흔아홉 살까지의 잘못을 깨달았다[行年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23/12/25)고 한 사람이 위(衛)나라의 대부 거백옥(퀒伯玉)이던가. 내 나이 오십이 다 돼서야 재위 24년 동안에 “한 가지 일도 제대로 해놓은 게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됐다(23/12/13).

    하지만 돌이켜보면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재위 19년이던 1795년이 그랬다. 그해는 모처럼 노·소론 및 남인의 인재가 의정부와 육조에 고루 배치됐다. 특히 심환지와 이시수와 이가환이 형조·병조·공조의 판서로 나란히 앉아 국사를 돌보는 모습은 내가 그토록 꿈꾸던 탕평정국이 아니던가(“득의(得意)의 탕평”)(19/1/26).

    ‘힘겨루기’로 보낸 시간

    여러 가지 이유로 중단됐던 수원 화성 공사가 다시 착수됐고, 1월에는 나의 숙원이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尊號)를 올렸다(19/1/17). 사실 생부의 명예회복은 내게 무엇보다도 절박한 문제였다. ‘죄인의 자식’이라는 취약점은 즉위과정에서 논란이 된 국왕의 자격조건을 떠나서라도, 신민들의 지지를 얻어 개혁을 추진해야 하는 나로서 정당성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였다.

    그런 만큼 노론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김종수는 “요순과 같은 성인도 존호를 받은 적이 없었다”(18/12/8)면서 존호 추진을 비판했다. 홍문관의 부수찬 한광식은 존호의 글자가 이미 정해진 시점에 자구(字句)의 의미를 가지고 시비를 걸었다(18/12/25). 이 때문에 나는 할머니(慈殿, 영조비 정순왕후)와 어머니(慈宮, 혜경궁)의 존호를 올리는 것에 끼워 넣는 방식으로(‘合設’) 생부의 명예를 회복할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의 존호를 올린 다음, 마침 같은 해에 회갑을 맞이하신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한 행사를 수원 화성에서 열기로 했다. 개혁의 상징 공간인 화성에서 회복된 정당성을 선언하고, 그동안 괄목할 만큼 성장한 장용영의 무위(武威)를 반대파들 눈앞에서 확인해줄 계획이었다. 아! 그때는 정말로 “천명(天命)의 돌보심이 새롭고, 인심의 지향하는 바가 바야흐로 절실해지던”(19/1/26) 기회였다. 그런데 그 시기에 나는 대체 무엇을 했던가.

    나는 그해를 “아무 일이 없는 해”(19/1/28)로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오늘의 성대한 행사는 천년을 가도 보기 드문 일”이라는 신료들의 찬사에 우쭐해져(19/2#12), 장용영의 놀라운 기동력에 도취해 기회를 흘려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국법에 저촉돼 연금상태에 있던 나의 고모 화완옹주를 석방해, 강화도에 유배 간 이복동생 은언군을 몰래 불러옴으로써(19/6/20) 거대한 신료집단과 힘겨운 줄다리기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어진 선비를 가까이 하고 내외척을 멀리한다[右賢左戚]”(19/3/10)는 나의 정치원칙을 저버리는 일이기도 했다. 그 시간은 바로 64명에 이르는 나주목의 기민(19/5/22)을 구제하는 일에 마음을 쏟고, 휘하의 죄수를 25명이나 제멋대로 장살(杖殺)한(19/8/24) 가혹한 수령을 단속해야 했던 때였다.

    무엇보다 권유와 박장설 등이 천주교 문제를 제기해 남인을 축출하려 했을 때(19/7/4), 서학의 본질과 장단점을 본격적으로 다루었어야 했다. 이미 천주학으로 인한 당쟁의 격화를 우려해 회피하고 무마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주교라는 그릇에 담겨 있는 서구문명의 원리를 깊이 있게 궁구(窮究)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나는 7월에 이가환과 정약용을 지방으로 좌천하고, 이승훈을 예산현에 정배(定配)하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중대사만 맡고 작은 일은 위임한 세종

    흥미롭게도 세종대왕에게도 재위 19년(1437년)은 중요한 해였다. 내가 가장 배우려고 하는 나의 준거 군주인 세종께서는 그해를 ‘정사를 위임’하고 ‘기민을 구휼’하며 ‘새로운 기술을 실험’하는 한편 ‘대외문제를 예방’하는 일로 채우셨다.

    당신은 먼저 왕세자에게 국사의 일부를 위임하셨다. 이조와 병조 등 군국의 중대사는 당신이 맡되 그 나머지 작은 일들을 세자가 처리하도록 하셨다(19/1/3). 이 조치는 그보다 한 해 전에 시작된 의정부서사제(18/4/12)와 마찬가지로 잡무로부터 국왕을 벗어나게 했고, 당신은 이로써 훈민정음 창제 등 중요한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해에 당신은 또한 김종서를 함길도에 보내 육진(六鎭)개척을 주도하게 했고(19/8/6), 황희에게 공법이라는 세제개혁을 논의하게 했다(19/8/27). 관련 사안의 책임자가 재량권을 가지고 일의 성과를 거둘 수 있게 했다. 그전부터 이천과 장영실 등에게 전담케 한 과학기술의 개발이 결실을 보아 보루각(報漏閣)이라는 자동인형을 만들고, 흠경각이 완성된 것도 이 때였다.

    무엇보다 세종께서 기근을 구제한 방법은 지금 생각해도 놀랍기만 하다. 우선 기근을 생각하는 방식이 독특했다. “천재(天災)와 재이(災異)는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 다만 구휼하는 조치는 사람에 따라 잘할 수도 있고 잘못할 수도 있다”(19/1/12). 가뭄과 홍수 자체는 피할 수 없지만, 그 대응은 사람의 노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었다.

    판중추원사 안순의 제안과, 즉위 초년 황희가 강원도에 행했던 사례를 토대로 해 만든 다음의 구휼 원칙은 그 같은 당신의 생각을 잘 반영하고 있다.

    첫째, 기민(饑民)구휼 장소를 남자와 여자, 환자와 건강한 자를 구분해 설치하라. 기민일수록 더욱 더 체면을 지켜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그들의 마음을 편히 해주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둘째,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를 묻지 말라. 고향을 떠나 돌아다니는 그들의 자취[根脚]를 묻기 시작하면 비록 배가 고파도 올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셋째, 아전이 아니라 마음 착한 중들에게 음식 나눠주는 일을 맡겨라. 아전에게 맡기면 “구휼한다는 이름만 있고, 그 실상이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구휼과 관련해 포상과 상벌을 시행하라. 그래야 수령과 아전이 기근구제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다. 마지막으로, 관찰사에게 그 일을 위임하라. 중앙에서 모든 상황을 알 수도 없을뿐더러 시의적절한 대응을 취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19/1/2).

    세종께서는 식량을 증산하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셨다. 정초가 찬집한 ‘농사직설’을 전국에 반포하게 한 다음 수령들로 하여금 “성의껏 가르치고 일러서 억지로라도” 그 책에 나와 있는 방법대로 농사를 짓게 하라고 지시했다(19/2/15). 경기관찰사 김맹성이 특별히 이삭이 많이 달린 보리를 바쳤을 때, 당신은 “성군(聖君)의 도래를 감축한다”는 아부성 발언에 도취하지 않고, 그 종자를 다시 심어 더 많은 보리이삭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19/5/8). ‘성군의 징표’가 아니라 좋은 종자를 얻을 수 있는 기회로 활용했던 것이다. 경복궁 성 밖에 사는 사람이 한 해에 두 번 익는 올기장[早黍]을 바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신께서는 그에게 상을 내린 다음 그 종자를 기름진 땅에 심어 시험하게 하라고 지시하셨다(19/5/28).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어

    이처럼 백성을 굶주리지 않게 하기 위해 당신은 ‘좋은 농법’과 ‘종자시험’을 장려하셨다. 그 결과 “심각한 가뭄으로 시냇물은 물론이고 우물까지 모두 마른”(19/2/9) 상황에서도 기근으로 죽는 백성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세종께서는 일본국 내부의 권력다툼 소식을 전해 듣고,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로 밀려올 것을 대비해 무비(武備)를 갖추게 했다. 그와 동시에 전라도의 곡식 20만석을 대마도에 보내 “교린의 도를 돈독히” 하는 한편 우리 백성의 피해를 예방하게 했다(19/1/9). 여진족을 피해 우리나라에 도망쳐온 중국사람 지원리와 김새승 등 7인을 후대해 장영실로 하여금 금은을 제련해 신물질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게 한 것도 이 해였다(19/7/5).

    이처럼 세종께서는 권한을 위임하고, 체계적인 기근구제 방법을 마련하고, 예방적인 정사를 베푸셨다. 당신은 나라의 큰 방향만 의논해 정하시고, 신료로 하여금 “내가 곧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충직하게 자기 일을 하도록 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부끄러운가.

    정조가 회고하는 ‘개혁정치’의 허상
    박현모

    1965년 전남 함평 출생

    서울대 박사(정치학)

    現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연구실장

    저서 : ‘정치가 정조’


    나는 재위 19년을 “천년에 있을까말까 한 경사스러운 해”라고 자축하면서, ‘아무 일도 없이’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언로(言路)를 열어 “상하가 막힌 상황”을 개선하고, 인재를 폭넓게 등용했어야 했다. 중인이나 노비 등에게 부여된 신분적 제약을 과감히 혁파했어야 했다. 그해 8월 황해도 오차진에 정박한 이양선(異樣船)과 일전을 벌이기보다는 그들의 앞선 문물을 분석하고 받아들였어야 했다.

    나는 하지 않아도 될 일에 몰두했고, 정작 해야 할 것을 등한시했다. 처음에 알 수 없었던 위기의 실체, 일의 실마리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지만, 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아! 흘려보낸 시간의 보복, 잃어버린 기회의 채찍이 매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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