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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원형경기장’에서 결투만 하다 끝난 ‘검투사 정치’

노무현 2003-2008, 빛과 그림자 - 정치

  • 박효종 서울대 교수·정치학 parkp@snu.ac.kr

‘이념의 원형경기장’에서 결투만 하다 끝난 ‘검투사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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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원형경기장’에서 결투만 하다 끝난 ‘검투사 정치’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 노사모의 탄생은 ‘노무현식 정치’가 준 청량제였으나 노사모의 세력은 노 대통령 재임 기간 중 크게 위축됐다.

기능과 목적이 중복된 14개의 과거사위원회에서 시도된 과거사 진상규명은 화해와 통합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건국과 호국 및 산업화세력에 대한 ‘주홍글씨 새기기’가 목적인 것으로 비칠 수 있었다. 위헌 시비를 무릅쓰고 강행한 행정수도 이전도 단순한 이전이 아니라 고려의 개경이 조선의 한성으로 바뀐 것에 비견되는 ‘천도(遷都)’의 성격이었다.

사회의 주류세력을 교체하겠다는 대담한 접근은 곳곳에서 야심만만하게 시도됐는데, 법원이 보수성향으로 이뤄졌다며 진보세력으로 교체를 추진해 소기의 성과를 거뒀고 민주평통에서도 세력의 교체를 완성했다.

미국의 역사학자인 아서 슐레진저는 ‘미국 역사의 순환’에서 “미국의 공화제에는 등뼈(backbone)가 있다”고 주장했다. ‘등뼈’는 공화제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의 경우처럼 어떤 나라든지 공화제를 실시하면 그 나라는 타락하게 되어 ‘참주정치’나 ‘전제정치’ ‘제왕적 대통령제’에 이르게 될 위험을 안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미국은 두려움을 갖고 나라를 운영해왔다”는 것이 슐레진저의 진단이다.

정치란 아무리 선정(善政)을 표방해도 고통이 수반되게 마련이다. 막스 베버는 정치를 ‘악마와의 계약’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의사가 오진(誤診)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좋은 의도로 정치를 해도 사고가 터지고 불이익을 당하는 집단이 나오게 마련이다.

정치적 악명은 폭군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아르고스의 왕 아가멤논은 트로이 원정 때 함대를 움직일 바람을 불게하기 위해 자신의 딸 이피게니아를 희생시켜 아내 클리템네스트라를 격분시켰다.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도 ‘명상록’을 쓸 만큼 지혜로웠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대량 학살한 바 있다. 모든 국가 지도자는 ‘폭정’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자신이 그런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국정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노 정권은 ‘두려움’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정권의 국정운영 스타일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대통령이 울분과 격정을 쉴 새 없이 토해내던 모습이다. 그는 자신의 이상과 비전 및 정책이 국민 여론에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설득의 언어’보다 ‘한(恨)의 언어’를 쏟아냈다. 오스카 와일드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이끌고 싶다면, 그들의 뒤를 따르라”고 조언했는데, 노 대통령은 국민의 뒤를 따르기보다 이끌어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노 정권은 기업을 냉대하면 기업들이 공장을 외국으로 옮긴다는 것을 몰랐다. 세금을 올리면 소비가 줄어든다는 것도 몰랐다. 법치의 엄숙성도 알지 못했다. 대통령 스스로 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놈의 헌법”이라 했다. 노 대통령은 차점자를 55만 표차로 따돌려 당선된 뒤 유권자의 3분의 1 내지 절반인 보수층을 포기하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남은 절반 가운데 절반은 그의 언행에 실망해 그의 곁을 떠났다.

‘식량’ 없는 ‘식량정책’

노무현 정권은 국정 운영의 구체적 성과를 내는 데 미숙함을 보였다. 러시아의 문호 파스테르나크는 ‘닥터 지바고’에서 국가사회주의에 대해 “‘식량’도 없고 ‘땔감’도 없는데, ‘식량정책’은 넘치고 ‘땔감정책’도 풍성한 정부”라고 지적했다. 노 정권에서도 ‘국정의 결과’는 미미한데 ‘국정홍보’는 요란했고 복지의 재원은 부족한데 복지정책은 장밋빛이었다. 서민이 거주할 질 좋고 값싼 아파트는 부족한데 아파트 정책이 남발됐다.

실적 없는 ‘위원회’는 무수히 설립되어 ‘위원회공화국’이 될 지경이었다. 현실의 절박한 문제는 못 보고 미래의 로드맵에만 몰두한 정권, ‘오믈렛’은 만들지 못하면서 ‘달걀’만 무수히 깬 정권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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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종 서울대 교수·정치학 parkp@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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