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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원형경기장’에서 결투만 하다 끝난 ‘검투사 정치’

노무현 2003-2008, 빛과 그림자 - 정치

  • 박효종 서울대 교수·정치학 parkp@snu.ac.kr

‘이념의 원형경기장’에서 결투만 하다 끝난 ‘검투사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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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정권이 거대담론에 입각한 개혁 의지를 피력해온 것은 실제로는 ‘절벽’ 위를 걸으면서 ‘구름’을 잡는 사회주의 정권 특유의 모습과 같았다. 주택의 분배정의를 실현한다며 양도세를 대폭 올리고 종합부동산세를 신설했지만, 오히려 집값은 껑충 뛰었고 서민의 전세금 부담은 늘어났다. 노 대통령은 한때 “퇴임 후 임대아파트에 들어가 살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교육에 있어서도 평준화의 논리로 공교육 황폐화를 방치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또한 노 정권은 도롱뇽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한 여승의 로맨티시즘에 굴복해 천성산 공사를 지연시켜 2조5000억원의 국고손실을 초래했다.

노 정권의 개혁이 실패한 이유는 개혁 피로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치가 민생이나 실생활과는 관련 없는 거대담론에 함몰되어 국민으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낼 수 없었던 점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각종 개혁법안은 모두 플라톤적 ‘이데아(idea)’, 즉 ‘이상’에는 강하고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시아(ousia)’, 즉 ‘현실’에는 약한 성격을 보여줬다.

개혁은 필요하지만, 개혁에도 ‘단서조항’이 있음을 모른 것이 화근이었다. 바람직한 실사구시적 목표가 있고 구체적인 계획을 추진하는 가운데 낡은 질서를 혁파하는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였다면, 사람들이 그토록 질색했을 리 없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노 정권의 개혁은 ‘파괴적 파괴(destructive destruction)’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노 정권의 이 같은 무능은 인사정책에서 비롯됐다. ‘이념’과 ‘코드’가 맞고 또 대선에서 대통령을 지지한 수많은 사람이 장관 등 공직사회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다보니 청와대가 첫 직장인 참모도 있었다. 정부는 준비된 ‘프로 정신’으로 국민에게 봉사하는 기관이라기보다는 ‘인턴사원’을 훈련시키는 곳처럼 됐고 직업 공무원들은 ‘영혼 없는 공무원’으로 전락했다.



노 정권에서는 공무원 수 늘리는 데 절제가 없었다. 그러나 국정의 실패는 단순히 ‘비만정부’를 지향했다는 점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노 정권은 삼류는 이류로, 이류는 일류로, 일류는 초일류로 만드는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삼류 평준화에 중점을 뒀다. 국가나 사회는 연어처럼 강물을 역류해 상류를 지향해야 한다. 그럼에도 노 정권은 시작부터 하류 지향적이었다. 코드 인사로 민주화투쟁 이외에는 특별한 경력이 없는 386그룹이 정부 요직에 발탁된 것이 대표적 사례다.

노 정권은 약자 중심으로 눈높이를 맞추고자 했다. ‘균형’ ‘정의’ ‘평등’ 등의 수식어를 동원했으나 결국 이것은 하향평준화 정책이었다. 사회는 강자와 약자 혹은 부자와 빈자만으로 이루어진 ‘단순계(simple system)’가 아니라 능력, 가능성, 자질 등 다양한 범주로 이뤄진 ‘복잡계(complex system)’인데 노무현식 정책은 이 점을 간과했다.

‘하산(下山)의 미학’

노무현 대통령은 IMF 외환위기를 맞은 김영삼 전 대통령, 세 아들의 권력형 비리 사건으로 점철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비하면 조용하게 임기 후반기를 맞는 편이다. 대신 노 정권은 황혼기에도 권력에 집착하는 태도를 보였다. 권력자에게는 ‘하산(下山)의 미학’도 중요하다. 마무리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자신의 집권 기간 전반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다.

노 정권은 임기 1년을 남기고 개헌하겠다고 하는가 하면, 기자실 통폐합을 밀어붙였다. 차기 대통령직인수위 구성 후에도 ‘코드 인사’ 논란을 부르는 고위 공무원 임명을 강행했다.

‘이념의 원형경기장’에서 결투만 하다 끝난 ‘검투사 정치’
박효종

1947년 서울 출생

서울대 대학원 국민윤리교육학 석사, 미국 인디애나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서울대 국민윤리학과 교수(정치철학, 정치경제학)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심의위원

저서 : ‘네오마르크스주의에 있어 국가의 재조명’ 외 다수.


노 대통령은 1월4일 경제계 신년 인사회에서 “(인수위가) 구정물 뒤집어씌우거나 소금을 확 뿌리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며 “(인수위가) 계속 소금을 뿌리면 나도 깨지고 상처를 입겠지만 계속 해보자”라고 말했다. 1월9일 청와대 경제점검회의에서는 “우리가 올해 경제운용 방안을 얘기해봤자 말짱 헛방 아니냐”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이런 발언이 알려지자 노 정권에 대한 여론은 더욱 싸늘해졌다. “지난해 10월 국립국어원은 신조어 모음집을 발간하면서 ‘기대를 저버리고 실망을 주는 데가 있다’는 뜻의 ‘놈현(노무현)스럽다’를 기재했었다. 여전히 그런 모습을 봐야 한다니 남은 임기 50일이 길게 느껴진다.”(‘한국일보’ 1월 6일 ‘마지막까지 노무현스럽다’ 기사)

노 정권은 권력의 유한함에 몸부림치는 것으로 비쳤다. 자신의 철학과 이념이 사라질까봐 안절부절못하는 듯했다. ‘정치의 품위’는 노 정권하에서는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신동아 200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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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종 서울대 교수·정치학 parkp@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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