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호

SKY보다 어려운 김일성대, 졸업하면 권력층 ‘일등사윗감’

  • 주성하│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zsh75@donga.com│

    입력2009-09-10 1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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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KY보다 어려운 김일성대,          졸업하면 권력층 ‘일등사윗감’

    김일성종합대 전경. 왼쪽 건물이 22층의 사회과학부 건물이고 가운데 건물이 본관이다.

    “야,어떤 새끼가 오늘 청소당번이야. 나와.”김일성종합대학의 기숙사 복도에서 한 상급생이 핏대를 올리며 소리쳤다. 그 앞에 오전 강의를 마치고 점심 먹으러 기숙사에 내려왔던 신입생들이 머리를 푹 숙이고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접니다” 하고 기죽은 목소리로 그날 당번이 앞으로 나서는 순간 상급생의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임마, 너 때문에 우리 학부 청소점수가 5점이나 깎였어.”

    한참 씩씩대면서 주먹을 휘두르던 그는 갑자기 “전부 복도에 엎드려” 하고 소리를 지른다. 교복을 입은 신입생들이 복도에 엎드리자 그는 “복도 끝까지 기어갔다 와. 청소도 제대로 못하는 것들은 몸으로 청소하는 법을 배워야 해”라고 지시했다.

    모멸감을 속으로 삼키며 길이 약 80m나 되는 기숙사 복도를 기어가던 신입생들 중엔 나도 있었다. 그때가 대학 생활을 막 시작해 며칠 안 됐을 때였다. ‘집으로 돌아갈까. 이런 생활을 과연 견딜 수 있을까.’ 입학 초기 그런 회의감이 매일같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끝내는 7년을 버티고 졸업증을 받았다.

    대학 생활을 회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배고픔이고 두 번째는 하급생 시절에 시달린 폭행이다. 그러나 이런 폭력도 지방출신 기숙사생들에게만 한정된 것이었다.



    SKY보다 어려운 김일성대,          졸업하면 권력층 ‘일등사윗감’

    김대 구내 용남산 위에 있는 김일성 동상.

    최근 김대의 한 해 입학생은 1500~ 2000명. 이 중 평양 출신 학생과 지방 출신 학생의 비율은 대략 반반이다. 지역할당제 때문이다. 고위간부가 많이 거주하는 평양의 인구는 북한 전체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지만 김대 학생의 절반이 평양 출신 학생이다. 그만큼 평양 시민은 우대를 받는다.

    북한에는 평양을 제외하고 도, 특별시가 모두 11개 있다. 그러니 지방의 한 개 도에서는 한 해에 약 70명이 김대에 입학하는 셈이다. 이 70명 중에서 절반 이상은 다시 도 소재지 간부 자녀 몫이기 때문에 실제 일반 지방 군(郡)에서는 1년에 김대 입학생을 1~2명 배출하기도 힘들다.

    경력별로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에 온 ‘직통생’과 제대군인 비율이 반반 정도다. 사회직장을 다니다 대학에 온 일명 ‘현직생’도 소수 있다. 제대군인들은 사회과학부를 선호한다.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데다 고위간부가 되는 데는 사회과학 전공이 유리하다. 실제 사회과학부 재학생의 70% 이상이 제대군인이며 직통생은 자연과학부에 많다. 여학생 비중은 약 20% .

    김대에선 나이 차이가 최대 10년씩 나는 학생들이 같은 학급에서 공부한다. 직통생들은 제대군인을 ‘아무개 동지’라고 부른다. 하지만 뒤에선 제대군인을 통틀어 ‘제쌈이’라는 속어로 부른다.

    북한에서 공식적인 군 복무 기간은 10년이지만 제대군인들은 보통 5~7년 군 복무를 하고 대학에 온다. 고위간부들이 자기 자식을 군에 보내 일찍 노동당에 입당시킨 뒤 연한이 다 차기 전에 대학으로 뽑아오기 때문이다. 제대군인·노동당원·김대 졸업생, 이 세 가지 자격은 북한 최고의 권력계층에 당당하게 포함될 수 있는 징표다.

    6촌까지 따지는 촐신성분조사

    김대에 입학하려면 철저한 출신성분 조사를 거쳐야 한다. 대략 6촌까지 따진다고 들었다.

    북한에서 잘나가는 세 부류의 사람들을 ‘줄기’라는 말에 빗대는데 첫째가 ‘백두산줄기’다. 김일성과 함께 항일투쟁을 했던 사람들의 후손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들은 대개 김대를 졸업한다. 둘째로 잘나가는 줄기는 ‘낙동강줄기’로 6·25참전자 가족이다. 이들 역시 대다수가 간부로 임명된다. 셋째 줄기는 ‘용남산줄기’로 김 위원장의 모교인 김대 졸업생을 의미한다. 용남산은 김대 구내에 있는 나지막한 산이다.

    김대는 현재 3개 단과대와 11개 학부로 구성돼 있다. 1999년까지는 사회과학부로는 경제·역사·철학·법학·조선어문·외국어문이 있었고, 자연과학부로는 수학·물리·화학·생물·지리·지질·원자력·자동화 순으로 모두 14개 학부가 있었다. 하지만 1999년 자동화학부가 컴퓨터과학대학으로, 법학부가 법률대학으로 바뀐 데 이어 2001년에는 조선어문학부가 문학대학으로 바뀌었다. 제대군인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인기 전공인 경제학부와 법학대학이다. 제대군인들이 가장 적은 학부는 어려운 외국어를 가르치는 외국어문학부와 복잡한 수학공식과 씨름해야 하는 수학부 등이다.

    SKY보다 어려운 김일성대,          졸업하면 권력층 ‘일등사윗감’

    김대 도서관 내부.

    김대에선 학생들이 군대식으로 생활한다. 대학 전체가 한 개 연대로 편제됐다. 연대장으로는 촉망받는 제대군인 출신 대학생이 선발된다. 남한으로 치면 총학생회장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선발 방식이 다르다. 김대 연대장은 대학 당위원회가 임명한다. 김대 노동당위원회나 청년동맹 간부들 중에 연대장 출신이 많다. 연대 지휘부는 수십 명의 제대군인 대학생으로 구성된다.

    각 학부는 대대 편제로 연대 산하에 모두 14개 대대가 있다. 그리고 학년은 중대, 학급은 소대라고 한다. 이외 별도로 여자 연대가 있다. 이는 남자들이 여학생들의 방과 후 생활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기숙사 생활통제용으로 임시로 만든 편제다.

    평양 출신 학생들은 자기 집에서 다닌다는 의미로 ‘자가생’이라고 한다. 김대에는 자가생과 지방 출신인 기숙사생이 반반이다.

    평양 학생들은 집에서 통학하기 때문에 조직생활에 별로 얽매이지 않는다. 오전 8시까지 등교해 오전에 1시간반짜리 강의 3과목을 수강한 뒤 낮 1시에 도시락을 먹고 오후 일과에 참가한다. 김대의 오후 일과는 노동당 정책학습, 군사훈련, 야외행사 등으로 구성되는데 한 번도 거르는 날이 없다. 자가생은 저녁식사 시간에 맞추어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기숙사생들은 그때부터 다시 군대와 같은 통제를 받게 된다.

    SKY보다 어려운 김일성대,          졸업하면 권력층 ‘일등사윗감’

    김대 정문. 위쪽 ‘김일성종합대학’ 글씨는 김정일국방위원장 작품이다.

    군대보다 고된 김일성대 기숙사생활

    기숙사생의 일과는 대략 이렇다.

    오전 5시30분 기상구령이 떨어지면 밖에 대대별로 모여 아침운동을 한다. 이어 2학년까지 저학년 학생들은 내부와 외부 청소를 한다. 청소 결과는 연대 참모들이 검열해 점수를 매긴다. 화장실 변기는 손으로 닦아야 하며 수도꼭지도 벽돌가루를 연마제로 써서 반짝반짝하게 만들어야 한다.

    아침 먹는 것도 순탄치는 않다.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면서 절도 있게 행진하지 못하면 연대 참모들이 계속 반복 훈련시킨다.

    저녁에는 밥을 먹고 청소를 하고 9시 반부터는 야간 점검을 받는다. 하루 점검 중에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야간 점검이다. 기숙사생들은 복도에 한 줄로 쭉 늘어서서 점호를 받는다. 이어 대대장부터 참모까지 차례로 한마디씩 하고 들어가면 30~40분은 훌쩍 넘긴다. 점호 시간에 졸다가 넘어지는 일도 종종 벌어진다.

    점호가 끝나면 하급생들이 진짜로 긴장하는 시간이 다가온다. 그날 청소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을 때, 또는 대대 참모에게 승인받지 않고 외출한 사실이 있으면 같은 호실을 쓰는 학생 모두 연좌제로 처벌받는다.

    이런 처벌도 있다. 각 호실 문턱으로 물이 넘쳐 흘러들지 않을 정도의 높이, 즉 2~3㎝ 높이로 약 80m 길이의 복도에 양동이로 물을 붓는다. 이 물을 밀대 등을 사용하지 말고 오직 손 걸레질로만 훔쳐내야 한다. 그리고 마른걸레로 물기를 철저히 없애야 한다. 이 청소를 하고 나면 새벽 1시가 넘는다.

    군에서 단련된 제대군인조차 “대학이 어떻게 군대보다 더할 때가 있느냐”고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처벌청소보다 더 싫은 일도 있다. 기숙사는 상급생 호실과 하급생 호실이 서로 붙어있는데 방 칸막이가 합판이었다. 혹여 처벌받지 않고 점검이 끝나 호실에 들어오면 옆방에서 “야! 203호”하고 부르는 소리에 정신병에 걸릴 정도였다. 입학 초기에 뭣 모르고 “예”하고 대답하면 “방금 대답한 새끼 여기 오라”는 호령이 날아들었다. 기다리는 것은 “걸레 빨아오라” “물 떠오라”는 식의 심부름이다.

    그래서 우리는 “야! 203호”하고 부르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도 별로 현명한 방법이 아니었다. 대답이 없으면 “방금 소리 났는데. 니들 다 죽었어”하면서 슬리퍼 질질 끌고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점차 적응한 뒤 우리는 부르는 소리가 나면 서로 눈짓으로 순번을 정해 대답하곤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기껏 하는 반항이 식수를 떠오라고 시키는 상급생에게 반항의 표시로 화장실 욕조 물을 퍼서 가져다주는 정도. 그런데 이 방법도 곧 들통이 났다. 그 학생은 이가 몇 대 부러져 병원에 한 달 동안 입원한 뒤 집에 내려가 석 달 동안 치료받고 왔다. 구타를 한 상급생들은 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후 상급생들은 우리가 물을 떠가면 꼭 먼저 마셔보게 했다.

    살벌한 대학 과정을 견디면서 김대 학생들은 고난과 역경에 강한 사람들로 단련돼간다. 간부가 돼서 사람들을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식의 처벌을 내려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배운다고 할 수 있다.

    뇌물로 학점을 사기도

    안타깝게도 김대에서 공부의 중요성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나의 경우 대학 졸업 때까지 모두 30개 과목을 배웠다. 이 중 점수가 나오는 과목은 24개. 나머지 6개는 합격, 불합격으로만 평가한다. 30개 과목 중 대학 전체 공통과목이 17개, 전공과목은 13개 정도 된다. 김일성주의노작, 김일성주의기본, 혁명역사, 주체철학, 제2외국어 등이 공통과목이다. 조국통일 및 남조선문제, 미일제국주의 조선침략사, 환경보호와 같은 이색과목도 공통과목에 포함된다.

    졸업시험은 김일성주의노작, 외국어, 전공과목, 졸업논문이라는 4개 과목에 한해 치른다.

    1980년대까지는 대학에 공부하는 분위기가 그나마 좀 서 있었다. 대학 입학 초기에는 과목 졸업시험에서 두 과목을 낙제했다고 유급시키고 그 뒤에도 낙제를 면치 못하자 퇴학당하는 학생도 보았다. 남한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유명 집안의 자식인데도 그랬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대학에서 공부 분위기는 확연히 사라졌다.

    이전에는 교수에게 뇌물을 주고 좋은 학점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지만 배급이 끊긴 교수들 중에 뇌물을 받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도 그런 교수에게 당해 여러모로 보아 분명 최우수를 받았어야 할 과목에서 중간 성적밖에 못 받았다. 물론 뇌물을 쓴 제대군인은 모두 최우수 성적인 5점을 받았다.

    이것 때문에 당시 적잖게 분노했지만 이것이 돈 있는 사람이 점수도 잘 받는 사회 부조리에 대해 점점 더 의식화되는 계기가 됐다. 그 교수에게 고마운 생각도 약간 있다. 그가 아니었으면 과연 나의 인생이 오늘에 이르렀을까.

    뇌물 받는 교수들이라고 어찌 심적 고뇌가 없으랴. 김대에 있는 2600여 명의 교수는 나름 북한의 최고 지성이라는 자부심을 간직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 없었다. 교수 체면에 장사도 할 수 없고 가족을 살릴 길은 양심을 파는 일뿐인 걸. 그럼에도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는 교수들도 있었다. 뼈만 앙상한 몸을 겨우 끌고 대학에 출근하는 노교수들을 보면서 “선생님, 뇌물을 받더라도 어떻게든 살아야 합니다. 선생님은 굶어 돌아가시기엔 너무 아깝습니다”라고 속으로 외친 적도 있었다.

    공부하는 분위기는 제대군인들이 다 흐려놓곤 한다. 입학시험도 제대군인들끼리 따로 친다. 상대평가인 셈이다. 이렇게 입학한 제대군인들은 최고의 수재인 직통생들을 공부로는 절대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니 뇌물을 들고 교수들을 찾아다닐 생각을 하는 것이다.

    SKY보다 어려운 김일성대,          졸업하면 권력층 ‘일등사윗감’

    2008년 김대에서 개최됐던 대화궁 유적 전시회.

    김대에 오는 제대군인치고 일반부대에서 오는 사람은 많지 않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친위대라고 할 수 있는 호위국 출신이 상당히 많았다. 이들은 시험도 형식상으로만 치고 입학한다.

    평소 자기가 어리석어 원자력학부에 왔다고 늘 푸념하던 한 호위국 출신 제대군인의 사례다. 그가 호위국에서 제대하기 전 한 간부가 대학과 학부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나타났다. 그해 제대할 사람 중에 직급이 높은 군인부터 자기가 지망하는 학부에 표시를 한다. 10년 동안 바깥세계와 철저히 격리당한 채 군복무를 해온 이 제대군인은 원자력학부라는 이름에 ‘필’이 꽂혔다. 원자력학부는 신생 학부라 10년 전 그가 군에 입대할 때까지만 해도 없던 학부였다. 새로 생긴 것이니 뭔가 멋있겠다고 생각하고 지망해 대학에 왔는데 막상 와보니 졸업생들은 방사선을 쪼일 확률이 높은 직종에만 배치됐다. 그는 공부에 별다른 흥취도 없었다. 그래도 그는 뇌물을 쓰면서 그럭저럭 괜찮은 점수로 대학을 졸업했고 졸업하기 전 고위 간부의 딸을 만나 전공과는 무관한 분야의 간부로 임명됐다.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곳에 배치받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경력과 뒤를 봐줄 수 있는 권력이다. 점수는 참고사항일 뿐이다.

    평양 출신도 그러하지만, 특히 지방 출신 제대군인들은 졸업할 때가 다가오면 여자 찾기에 온 힘을 다 기울인다. 평양의 권세 있는 집 여자를 얻으면 운명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한편 권력 있는 집안도 제대군인에 당원이면서 김대를 졸업한, 이를테면 경력이 출중한 사위를 선호한다. 승진할 자격을 충분히 갖추면 구설에 휘말리지 않고도 충분히 뒤를 봐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훗날 자기가 물러나도 사위 덕을 볼 수 있다. 김대의 제대군인들은 누가 더 권세 있는 집 딸을 얻는지 경쟁이라도 하듯이 선보러 다닌다. 그리고 대개 졸업하기 전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큰 의미에서 볼 때 권세가의 사위라는 목표에 도달한다.

    김대에 공부하는 분위기가 서지 않았다고 해서 김대 졸업생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어쨌든 그들은 여러 검증을 거쳐 최고로 인정돼 선발됐다. 제대군인들도 공부실력은 떨어져도(그중에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제대군인들도 있다) 군이라는 울타리에서 치열한 경쟁을 거쳐 추천장을 받은 사람들이다. 학업 성적이 한 인간의 능력을 대변하는 유일한 징표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술 담배 하다가 퇴학당하기도

    직통생 선발 시스템도 나름 괜찮다. 북한에는 학원이 없다. 머리는 별로 좋지 않지만 고액 과외 시스템을 통해 성적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없다. 평등한 조건하에서 경쟁하다보니 머리 좋은 사람들이 골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김대의 규율은 매우 엄격하다.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다 적발되면 운이 나쁜 경우 퇴학까지 당한다. 그렇지만 필자가 김대 재학할 때는 술 담배와 무관한 학생은 거의 없었다. 원래 북한 남성의 흡연율은 세계적 수준이다. 90% 이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술과 담배 하는 학생을 적발하기 위해 연대 참모들이 규찰대 완장을 달고 대학 구내는 물론 대학 주변까지 샅샅이 수색하곤 했다. 그래서 하급생 때는 대학에서 20분이나 걸어 나가 가슴에 단 대학 배지를 뗀 뒤 담배를 피웠다. 그 정도 걸어 나가지 않으면 규찰대의 단속구역에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침식사를 한 뒤에는 시간이 없어 그렇게 멀리 나갈 순 없다. 이때는 화장실이 뽀얀 연기로 차는데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학생은 들켜도 누가 감히 뭐라고 하기 힘든 상급생들이었다.

    밤이면 기숙사 정문에 규찰대가 지켜 서서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학생이 없는지 단속한다. 같은 호실 동료 중에 생일을 맞은 사람이 있으면 호실 학생들이 대개 밖에 나가 마음 놓고 먹고 마시고 하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으면 기숙사 호실에서 생일을 축하해줄 때도 있다. 이때는 단속이 좀 완화되는 밤 12시가 넘기를 기다렸다가 창문과 출입문을 담요로 가리고 불빛이 절대 새나가지 않도록 한다. 아예 불을 켜지 않고 생일 파티를 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목소리도 최대한 낮추어야 한다. 규찰대가 새벽 2~3시까지 기숙사를 무작위로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규찰대에 단속되는 경우 뇌물로 최대한 빨리 사태를 무마해야 한다. 담배 피우다 걸리면 보통 담배 1보루를 뇌물로 주었다. 규찰대원들이 악착같이 순찰하는 이유도 무슨 사명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런 뇌물에 재미가 들었기 때문이다.

    김대 학생들이 수업엔 빠져도 이것만은 재미있어서 무조건 참가한다는 회의가 있다. 바로 두세 달에 한 번씩 전교생이 체육관에 모여서 진행하는 사상투쟁회의다. 이 회의는 퇴학 위기에 몰린 학생들이 마지막 심판을 받는 자리다. 싸움질, 도둑질, 흡연, 장기 무단결석, 임신 등 사유도 가지각색이다.

    사상투쟁회의의 자아비판 무대에 올라가라는 통지를 받으면 절반 이상의 학생이 도망쳐버린다. 그냥 퇴학당하겠다는 뜻이다. 그래도 비판 무대에 올라오는 학생들은 마지막 희망의 끈을 안고 있는 경우다. 전교생 앞에서 자아비판만 잘하면 퇴학을 면할 수도 있다고 간부들이 설득하는 것이다. 물론 10명 중 한 3명은 퇴학을 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비판을 잘했어도 퇴학당하는 학생도 많다. 북한에서 공개 총살할 때 이용하는 방법과 흡사하다. 사형수에게 군중 앞에서 자아비판만 잘하면 그냥 감옥행이라고 회유한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형수는 군중 앞에서 열심히 자아비판을 한다. 다 끝나면 “저런 놈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하고 군중에게 물은 뒤 사형수가 미처 반항할 사이 없이 눈과 입을 막고 처형한다.

    기억에 남는 사상투쟁회의 장면 중에 이런 일도 있었다. 지방 제대군인이었는데 제대한 뒤 고향에 가자마자 부모가 정해준 여성과 약혼식을 올렸다. 산골에서 10년 군복무를 하다보면 모든 여자가 다 예뻐 보인다. 그런데 이 제대군인이 운 좋게 김대에 입학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평양에서 살다보니 눈이 높아진 것이다. 친구들이 돈 많고 권세 있고 예쁜 여성들에게 장가드는 것을 본 이 제대군인은 자연히 고향에 두고 온 약혼녀가 싫어졌다. 그래서 방학에 내려갔다가 파혼을 선포하고 올라왔다.

    파혼 후 퇴학위기에 몰린 김대 학생

    화가 난 이 여성이 대학 당위원회에 아무개가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을 버리려 한다고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 때문에 이 제대군인은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비판이 다 끝나자 주석단에서 거불거불 졸던 총장이 눈을 뜨더니 잠에 취한 소리로 말했다.

    “동무, 그래서 살겠다는 거요. 안 살겠다는 거요.”

    “살겠습니다.”

    “그런 작은 목소리에 무슨 결심이 깃들어 있다고 그래.”

    그러자 제대군인이 “살겠습니다”하고 크게 소리쳤다.

    체육관 안이 키득키득 웃는 소리로 수라장이 됐다.

    “어이. 청년동맹 비서. 저 동무가 저렇게 굳게 결의했으니깐 한번 지켜보자고.”

    이렇게 돼서 그 제대군인은 퇴학을 피할 수 있었다. 그가 정말 약속을 지켰는지는 알 수 없다. 일단 회의만 벗어나면 이후 약혼녀와 조용히 합의해 갈라져도 문제를 일으키지만 않으면 괜찮다. 북한이란 사회에선 시범 케이스(본보기)에 걸린다는 것이 정말 무서운 일이다.

    대학 생활 중에는 전교생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누구나 참가하기 싫어하지만 반드시 참가해야 하는 경연도 있다. 그게 바로 ‘문답식 학습경연’이라는 것이다. 방학을 해서 집에 갈 때 대학에선 A4 용지로 수십 장이 되는 문제집을 필사하게 한다. 집에 가서 다 외우라는 것이다. 문제집에는 김 부자의 노작 해설, 소위 덕성(德性) 연구 등이 담겨 있다.

    방학이 끝나면 전교생은 사흘 동안 문답식 경연을 한다. 이 경연은 학부별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돼 우승학부를 가린다. 두 개 학부 학생 수천명이 한자리에 모여 제비뽑기로 대회에 나올 상대 학부 학생들을 뽑아내 임의의 문제를 제시한다. 10여 명의 학생을 평가해 학부의 성적을 결정한다. 탈락하면 학부 전체에는 비상이 걸린다. 그리고 뽑혀 나갔지만 대답을 잘하지 못한 학생은 공공의 적이 되고 엄청난 시달림을 받는다. 대답을 잘해야 할 뿐 아니라 질문자로 뽑히면 질문도 교묘하게 해야 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문제로 제시된 ‘김정일이 대학시절 비가 옴에도 불구하고 다른 학생들과 건설장에서 함께 일했다’는 내용의 일화를 한 학생이 쭉 이야기한 뒤 상대 학부에서 질문자가 제비뽑기로 선발됐다. 갑자기 수천 명 앞에 나서게 된 그 학생은 당황한 나머지 “그런데 그날 정말 비가 왔습니까”하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하고 말았다. 다행히 퇴학은 당하지 않았지만 대학 졸업 내내 그 일로 시달림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 학부의 한 여학생은 점수를 깎아먹고 대동강에 나가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각 학부는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방학이 끝나는 날보다 사흘 일찍 지방학생들을 올라오게 만든 뒤 문제들을 암기시킨다. 물론 이는 반칙이지만 일찍 학생들을 부르지 않는 학부가 없다. 그런 열성도 보이지 않았다가 탈락하면 학부 간부들이 비판을 받기 때문이다. 한 달밖에 안 되는 방학이 이 때문에 또 단축된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먼 지방의 학생들, 실례로 양강도 혜산이나 함경북도 라진 등에 사는 학생들은 4~5일씩 기차를 타고 가야 했다. 정전으로 기차가 수시로 멈춰 섰기 때문이다. 집에 오가는 길에 열흘 넘게 허비하고 경연 때문에 또 3일 단축되니 방학은 한 달이지만 집에는 보름도 있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학부 간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또 하나의 행사는 교내 체육대회다. 김일성 생일 등에 체육대회가 벌어지는데 이때 하이라이트는 축구경기다. 축구는 자연과학부보다는 제대군인이 대다수인 사회과학부에서 늘 우승을 차지했는데 특히 경제학부가 강하다. 항상 우승 문턱에서 좌절된 철학부가 한번은 대학 내 체육단인 용남산체육단 축구팀을 통째로 입학시킨 일도 있었다. 특채 입학이 일정부분 인정되기 때문에 이런 일도 가능한 것이다. 용남산체육단은 4·25체육단, 평양체육단 등 북한 유명 체육단 중에 서열 6위로 평가된다. 하지만 오랫동안 한 팀을 이루어 발을 맞춰온 프로선수들도 결국 경제학부에 패배했다. 경제학부에는 은퇴한 유명 국가 대표선수가 많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교육과정안을 사회과학부는 4년, 자연과학부는 5년 안에 무조건 끝내라는 지침이 떨어졌다. 예전보다 2년 정도 빨리 졸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002년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반드시 군복무를 해야 한다는 지시도 떨어졌다. 이전에는 김대를 나오면 군에 나가지 않아도 됐고 나가는 경우에도 소위로 임관했지만 이때부터 대학을 졸업하고 ‘하급병사’로 군복무를 시작해야 했다. 군복무는 대학 기간을 감안해 4~5년만 하면 됐다.

    김대 학생들은 재학 기간 각종 행사와 노력동원에 참가하는 일도 많다. 연중 무조건 해야 하는 노력동원은 농촌지원이다. 봄에 한 달, 가을에 20일 정도 황해도나 평안남도 농촌에 가서 모내기와 수확을 도와주어야 한다. 평양 학생들은 일이 힘들다고 농촌동원을 싫어하지만 기숙사생들은 규율생활에서 조금이나마 해방될 수 있기에 오히려 반긴다. 돈 있는 평양 학생들은 후방 지원이라는 명색하에 빠져서 집에서 노는 경우가 많다. 국가의 보장이 미약하기 때문에 학급이 먹을 수 있는 식자재를 자체로 조달해 해결해야 하는데 이런 명목으로 빠지는 것이다. 돈 없는 학생은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다.

    대학 2학년 때는 6개월간의 교도생활이 기다리고 있다. 평양고사포병사령부에 나가 군복을 입고 대공포 진지를 지키는 일이다. 반 년 동안 군인이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TV화면에서 자주 보는 각종 퍼레이드를 준비하느라 동원되는 때가 많다. 1990년대에는 대학생들이 군 열병식에만 동원됐는데 2000년부터 집단체조까지 참가하게 됐다. 2000년 방북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부 장관이 참관했던 아리랑집단체조의 전신 ‘백전백승 조선노동당’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열병식과 집단체조는 1년 넘게 준비한다. 오전에 공부하고 오후에 땡볕 속에서 연습하는 일과가 반 년 넘게 이어지고 수업에서 완전히 빠지는 기간도 석 달이 넘는다. 당연히 공부할 분위기가 서지 않는다. 특히 빠진 수업은 보충수업을 하는데 대충 며칠 동안 몇 달치를 다 보충한다. 이외 각종 건설장에도 동원될 때가 많다.

    허기와의 싸움

    앞에서 말했듯이 기숙사생으로서 대학 생활 중에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배고픔이다. 기숙사 학생 식사량은 김일성 사망 전후로 확연하게 갈렸다. 고난의 행군이 들이닥치자 김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밥 양이 너무 적어 기숙사생들은 늘 ‘밥을 먹고 나서야 배고픈 것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밥 먹기 전에는 위가 텅텅 비어 감각조차 없다는 말이다.

    휴일에 동료들이 다 외출하면서 남겨둔 식권으로 식당에서 14인분을 비닐봉지에 담아와 둘이 한 끼에 다 먹을 정도로 밥 양이 적었다.

    기숙사에선 대대 학생 간부와 일반 학생의 밥 양이 차이가 난다. 대대 간부들은 학부가 줄을 서서 밥을 먹는 것을 통제한 뒤 제일 마지막에 밥을 먹는데 식당 아줌마들이 간부들에게는 밥을 일반 학생의 2배 이상 꾹꾹 눌러 담는다. 하지만 일반 학생들은 큰 불평을 하지 않는다. 북한에서 이런 특권 의식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런 환경에서 배우고 사회에 나가 간부가 되는 김대 학생들은 졸업 뒤에도 특권을 당연하게 여긴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김대 학생들도 주변 농장에 벼 뿌리를 캐러 나간 일이 있다. 벼 뿌리를 대용식량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벼 뿌리를 먹은 일은 없다. 가공방법이 미흡해 다 썩혀버린 것이다. 지방 대학에선 칡뿌리를 먹은 학생도 많다. 칡뿌리는 몇 번 먹으면 이가 꺼멓게 변하는데 아무리 칫솔질해도 잘 벗겨지지 않는다.

    대학 때 가장 창피했던 일은 오전 11시만 되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같은 책상에 여학생과 함께 앉기도 하는데 꼬르륵 소리는 신경을 쓰면 쓸수록 더 나는 것 같았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뒤 대학 주변의 개인집들은 먹고살기 위해 음식을 만들어 대학생을 상대로 장사를 했다. 음식이래야 옥수수국수, 두부, 쉼떡(상아떡), 술 등이 고작이다. 대학생들은 외상, 저당 문화에 빠르게 적응해갔다.

    교수들이 배고파 강의를 못할 지경이 되고 학생들 중에도 영양실조 환자들이 속출했다. 김대는 산하에 농장과 수산조합, 탄광 등 부업기지를 갖고 있다. 김대 전체 교직원은 5600명가량인데 이 중 교수가 2600명이고 나머지 3000명 대다수가 농장 및 수산, 탄광 등에서 일한다. 하지만 이런 농장들도 고난의 행군시기에 자체 농장원들을 먹여 살리기 힘든 형편이 돼 대학에 별 도움이 못됐다.

    김대의 어려운 형편이 김 위원장에게 보고됐다. 그러자 그는 김대 소속 외화벌이 회사를 만들라는 특별지시를 하달했다. 그리고 그 회사에 많은 특혜를 주었다. 그 외화벌이 회사가 벌어오는 양곡으로 1990년대 말부터 대학의 식량사정은 많이 안정됐다. 배부를 정도는 아니지만 밥 양도 조금씩 늘어났다.

    2001년경 김 위원장의 지시로 고기겹빵(햄버거) 공장이 평양에 세워졌다. 여기서 생산된 고기겹빵이 김대와 김책공업종합대학, 김일성고급당학교 재학생들에게 우선적으로 공급됐다. 특히 주목할 점은 자가생들에게도 점심을 싸오지 않게 하고 고기겹빵을 공급했던 것. 고기겹빵이 크기는 작아도 장마당에서 비싼 가격에 거래됐기 때문에 기숙사생들은 이 빵을 모아두었다가 장마당에서 팔고 대신 싸고 양이 많은 음식과 바꾸어 먹었다.

    광우병 위험 소고기를 먹다

    고기겹빵에 들어가는 쇠고기는 어디서 조달했을까. 2001년 유럽에서 광우병이 돌았다. 독일에서만 광우병에 걸린 소가 16마리 발견됐다. 독일은 30개월 이상 소 40만마리를 도축했다. 그런데 북한이 이 쇠고기를 가져가겠다는 의향을 밝혀 모두 2만7000t의 냉동쇠고기가 북한에 들어갔다. 이 쇠고기는 모두 고기겹빵에 들어갔다. 결국 김대를 포함해 북한의 수재들과 특권층들이 다 먹어치운 셈이다.

    당시 북한이 독일산 쇠고기를 어디에 소비했는지는 독일 정부나 한국 정부도 아직까지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그 쇠고기를 누가 먹었는지가 이 글을 통해 최초로 공개되는 셈이다.

    우스운 일은 지난해 남한에서 광우병 논란으로 인한 촛불시위가 벌어지자 북한 측이 “남조선 인민들의 생명을 팔아먹는 친미 매국노”라면서 남한 정부 비난에 열을 올리고 시위를 적극 독려한 점이다.

    김대 안에는 비밀 독서회 비슷한 것도 존재했다. 금지된 서적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돌아다니면서 김대생들에게 외부 세계를 알려주었다.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책은 ‘미국개관’이라는 도서. 500쪽 넘는 두꺼운 책으로 미국에 대한 각종 자료가 다 담겨 있었다. 미국 식량생산이 한 해 6억t 가까이 되지만 농사에 종사하는 인구는 전체 인구의 2.5%밖에 안 되며 농업 비중도 전체 GDP의 4%도 안 된다는 대목을 읽고 나는 까무러치게 놀랐다. 2000만 인구의 절반 가까이 농업에 매달리고도 한 해 200만t 좀 넘게 생산하던 당시 형편에선 도무지 믿기 힘든 일이었다. 아니 상상도 잘 안 됐다. 그 책을 기초로 남한의 경제력이 어느 정도일지 열심히 계산하던 기억도 있다.

    김일성대에서 읽은 ‘국부론’

    지금 생각해도 ‘미국개관’에 실린 자료는 상당히 정확했다. 그 책이 누구를 대상으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북한에서 그런 정확한 외부 자료를 읽을 수 있는 계층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학부 학부장 정도는 그런 자료를 접하지 않을까 추정해본다.

    이외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또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서독 중심의 역사를 독일 통일 때까지 서양의 시각에서 분석한 도서 등도 기억에 남는다. 그때 우리는 밤잠을 자지 않고 그런 책의 중요부분을 필사해 돌려보았다.

    김대에도 반정부적 사고방식을 가진 학생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그에 대해서는 동아일보 지면(6월3일자)에 ‘10여 년 전 그날, 부자세습에 분노했던 김일성대 학우들에게’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기사를 적었기에 이 글에서는 생략 한다.

    SKY보다 어려운 김일성대,          졸업하면 권력층 ‘일등사윗감’
    주성하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김일성종합대 졸업

    북한군 예비역군관

    2002년 한국 입국

    2003년 동아일보 입사


    김대 졸업생은 특별 관리를 받는다. 졸업해 3년 동안 매년 2회씩 전 졸업생들의 적응실태를 조사한다. 본인이 직접 직장을 찾는 남한과는 달리 북한에선 대학 졸업생의 직업을 국가가 정해준다. 김대 졸업생들이 평양에만 차 넘치지 않도록 지방에 강제로 내려보낸다. 졸업 뒤 같은 대학 박사원(대학원)으로 진학하는 사람도 나라에서 정해준다. 김대의 박사원 규모는 300명 안팎에 불과하다. 박사원을 졸업하면 거의 예외 없이 대학교수가 되기 때문에 대다수 학생은 박사원에서 벗어나려 애를 쓴다. 북한에선 교수가 별로 인기 없는 직업이다.

    졸업 뒤 내 동창들은 전국 각지에 뿔뿔이 흩어졌다. 개중에는 고위간부가 된 사람도, 외국에 나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나처럼 서울에 온 사람도 있다. 그래도 우리는 순수한 젊음과 열정을 발산하며 한때 어깨를 함께하고 희망을 노래하는 김대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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