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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규명위 보고서를 비판한다

‘반민족행위 핵심증거’가 총독부 관제언론 기사?

  • 홍진표│사단법인 시대정신 상근이사 jpho@chol.com│

‘반민족행위 핵심증거’가 총독부 관제언론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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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족행위 핵심증거’가 총독부 관제언론 기사?

2009년 11월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개최한 친일인명사전(전3권) 발간 기념행사에서 참석자들이 수록내용을 보고 있다.

친일단체와 전쟁지원단체 주도자를 규명하는 일도 문서만으로는 진실에 접근하기 어렵다. 지금도 많은 사회단체가 명망 있는 인사들을 공동위원장이나 고문으로 추대해놓고 실무자들이 일을 주도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일제하의 관제단체들도 그런 경우가 적지 않았음은 불문가지다. 그러나 언론에는 당연히 외형상 대표성을 지닌 인물이 기사화되고, 그중에서도 더 알려진 인물이 우선시된다.

반민규명위의 보고서에 따르면 일제 후반기 친일인사로 규정한 사회·문화 분야의 유명인은 예외 없이 여러 단체에 동시에 소속돼 있다. 그만큼 일제에 의해 이름이 이리저리 동원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 당사자와 증언자의 부재는 반민규명위가 보도의 공정성을 신뢰하기 어려운 일제의 관제언론에 의존해 결론을 내리게 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어냈다.

반민규명위는 스스로 반민특위를 계승했다고 주장하고 홈페이지 연혁란에 이를 표시하고 있지만, 사실 이는 주관적인 희망에 불과하다. 반민특위는 광복 후 3년 만에 조직되어 사건의 현장에 근접해 있었고, 검찰의 기능만 담당하고 판결은 재판부에 맡겼으며, 당시 기소된 사람들은 생존 상태여서 변론이 가능했다. 반면 반민규명위는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서 역사 연구의 사료를 갖고 판결까지 내렸다. 그 명분의 당당함에 비해 방법은 매우 초라했다.

반민규명위는 관련법에 의거해 조사대상자가 고인일 경우 그 후손들에게 이의신청의 기회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 같은 제도는 당사자 부재의 보완장치가 되기 어렵다. 후손이라고 해서 선대의 사실관계를 정확히 알 도리가 없고, 기록에 의한 반론이 아니면 인정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총 1052명의 조사대상자 가운데 접수된 이의신청이 124건에 불과한 것은 이를 방증한다. 사료에 의존한 반민규명위의 작업으로는 일제의 강제성이나 지식인의 고뇌와 같은 생생하고도 중요한 당대의 현실 요소를 고려할 수 없다는 문제 때문에 발생한 결과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에 이어 1937년 중일전쟁을 본격화했고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치달았다. 이 때문에 식민지 조선은 광복 전 10여 년을 전시체제에 묶여 있었다. 이때 일제는 교육계와 문화예술계의 유명 지식인들을 전쟁홍보에 동원했고, 기왕에 관료가 된 사람들도 이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회색지대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반민규명위가 발표한 친일명단 1005명 가운데 무려 70%에 해당하는 704명이 이 시기에 집중돼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반민규명위의 잣대를 들이대면 초야에 묻히지 않고 체제 내에서 삶을 지속했다는 자체가 죄가 된다. 이들 나약한 지식인들을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투철한 혁명가나 순교자의 수준을 모두에게 요구한다는 것은 가혹하고 비현실적이다.

항일이냐 친일이냐의 이분법은 기업인에게도 적용됐다. 군수품 제조업자와 일정규모 이상의 전쟁지원금을 낸 사람은 자동적으로 친일인사에 포함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연합국의 패전국 전범 처벌과정에서도 기업인들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 가해자인 식민지 본국의 기업인들은 단죄되지 않았는데 피해자인 식민지의 기업인들이 그 후손들에게 범죄자로 규정된 것이다. 기업가가 너무 세속적으로 기업의 이익을 챙겼다는 죄를 물은 셈이다.

한 시대의 역사에는 명과 암이 동시에 존재한다. 한 개인의 삶 또한 굴곡과 공과(功過)가 함께한다. 그만큼 사람에 대한 평가는 쉽지 않으며, 포용력을 갖고 그의 인생 전반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봐야 한다. 반민규명위가 친일로 규정한 인사들 중 일부는 한때 항일운동에 앞장섰거나 광복 후 건국과 산업화에 큰 업적을 남겼다. 장기간의 식민체제에 일시 순응하는 행위가 있었다고 해서 이들을 친일인사로 규정하고 나면, 예컨대 백선엽 장군을 6·25전쟁의 영웅으로 존경하면서도 ‘반민족’을 떠올려야 하는 정서적 분열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는다.

실적주의와 이해관계

국가권력이 직접 나서서, 발견가능한 문서만으로, 오래된 범죄자를 찾아내겠다는 시도의 약점을 더욱 극대화한 것은 반민규명위의 인적 구성이다. 2005년 5월31일 출범한 반민규명위는 위원장을 포함한 위원 11명이 대통령(4명), 국회(4명), 대법원장(3명) 추천을 받았다. 이 때문에 당시 노무현 정부와 가까운 인사가 다수를 차지했고, 위원 임기제 때문에 활동마감까지 그 구도가 바뀌지 않았다. 활동기간 중간에 임기가 만료돼 교체된 위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연임했고, 총 7명이 출범부터 종료 때까지 활동했다.

노무현 정부와의 친화성 여부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들이 독립적인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그룹으로 움직였다는 점이다. 초대위원장 강만길, 2대 위원장 성대경, 위원회 전 기간에 상임위원을 지낸 노경채, 후반기 위원을 지낸 임경석, 김경일 등은 모두 역사문제연구소의 고문 또는 연구위원으로 활동해왔다(역사문제연구소 홈페이지에 따르면 박헌영 전 남로당 당수의 아들인 원경이 이사장을 맡고 있다). 마치 다수의 판사로 구성된 재판부를 주심판사를 포함해 한 분파가 장악한 것과 다름없는 이 같은 구도는, 사건 조사와 기소를 담당하는 검찰의 기능과 판결을 내리는 법원의 기능을 양손에 쥔 반민규명위의 권한이 다수결제도를 통해 다시 특정그룹에 의해 독점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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