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은 박정희 정권을 심각하게 격하(格下)하고 박근혜를 홀대했을까. 민정기 씨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새로 들어선 정권이 전 정권을 격하하는 것은 언제나 있는 일이다. 노무현이 자살한 것도 자세히 살펴보면, 노 정권을 격하하기 위해 이명박 정권이 수사한 게 계기가 되지 않았나. 5공이 대통령 단임을 실천하겠다고 거듭 이야기한 것도 장기 집권한 박정희 격하로 보일 수 있었다. 격하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로 봐야 한다. 마오쩌둥(毛澤東)도 사후 격하운동을 당했고, 전두환도 노태우 때 백담사로 유배 가지 않았나.”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덧붙였다.
“민주당 의원들이 서울현충원에 가면 김대중 묘역만 참배하고, 보수파는 이승만·박정희 묘역만 참배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JP는 전두환이 박정희 묘소를 참배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다. 전두환은 호국보훈의 달인 6월과 아웅산 사건이 일어난 10월 9일엔 반드시 서울현충원을 찾아가 현충탑과 이승만·박정희·김대중 묘역, 아웅산 순국자들을 모신 국가유공자묘역을 참배한다. 최근 들어서는 임정(臨政) 묘역도 참배한다. 육군 경리감을 지내고 예편한 그의 장인(이규동)은 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는데, 전두환은 장인 기일에 대전현충원을 찾을 때마다 그곳에 있는 최규하 묘역도 참배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1979년 10·26 직후 수사에 나선 보안사는 청와대 비서실장 금고에서 9억5000만 원의 수표와 현금뭉치를 발견해 3억5000만 원은 압수하고 나머지는 박근혜 측에 돌려준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이 돈 일부를 가져갔기에 박근혜와 불편해졌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기자는 전두환에게 이 얘기를 물어보지 못했다. 민정기 씨는 “그 돈은 박근혜 대통령이 수사비로 쓰라고 준 것”이라고 해명했다.
“보안사를 중심으로 한 합수부가 10·26 공범 혐의자인 김계원 비서실장 방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금고를 발견하고, 이 금고를 관리해온 권숙정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하여금 열게 했다. 권 보좌관은 이 금고에서 나온 9억5000만 원은 정부 공금이 아닌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 돈이라고 진술했다. 그래서 권 보좌관으로 하여금 전액을 샘소나이트 가방에 넣어 박근혜 씨에게 전달하게 했다.
얼마 후 박근혜 씨가 ‘10·26 진상을 철저히 밝혀달라’는 부탁과 함께 수사비에 보태 쓰라며 합수본부장(전두환)에게 3억5000만 원을 보내왔다. 그런데 1989년 5공 비리를 수사한 검찰은 박근혜 씨가 합수부로부터 깨끗하지 못한 돈을 받은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내용을 발표했다. 1996년 수사를 한 검찰은 합수본부장이 그 돈을 임의로 사용했다고 발표해 또 오해를 만들었다.”
‘공공의 적’ 전두환

2월 25일 제18대 대통령 취임식. 전두환과 그를 투옥한 김영삼이 지켜보는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이 입장하고 있다.
“매년 명절이면 (5공은) 그분(박근혜)께 직접 사람을 보내 인사하고 선물을 보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잘 알고 있는데 밝히지는 않겠다. 전두환이 퇴임한 다음에는 내가 명절 선물을 보냈다. 전두환이 백담사에 가 있을 때도 보내다가 5·18 특별법으로 수감돼 재산을 압류당한 다음부터는 보내지 못했다.”
전두환의 회고와 민 씨의 설명을 종합하면 전두환은 박정희에 대해 강한 충성심을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 충성심을 현실화한 것이 12·12였다. 그런데 왜 전두환은 박근혜 당선인의 방문을 받지 못했을까. 민 씨는 “18대 대통령선거가 끝난 후 당선인 측에서 연희동으로 인사를 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런데 집을 수리할 일이 있어 두 분이 지방에 가 있었기에 방문이 이뤄지지 못했다. 대신 당선인과 전화로 인사를 주고받았다”고 전했다. 전두환은 박 당선인의 방문을 받지 못했지만, 2월 25일 열린 18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
눈여겨볼 것은 전두환이 보수세력인데도 보수세력이 집권했을 때 얻어맞았다는 점이다. 노태우 정권 때는 5공 청문회 증인으로 섰고 백담사로 2년간 ‘유배’를 갔다. 김영삼 정권은 ‘5·18 특별법’으로 무기징역과 함께 지금껏 문제가 되고 있는 거액의 추징금을 부과했다. 박근혜 정부는 ‘전두환법’을 확정해 공격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를 제외한 후임 보수정권 모두 그를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좌파’라고 하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왜 그는 같은 보수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것일까.
지금 정치권엔 좌우를 막론하고 386세대가 다수 포진해 있다. 정치적 성향은 달라도 이들은 젊은 날의 기억 때문에 전두환을 싫어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권력을 잡은 보수세력은 종북세력 등 그들을 적대시하는 세력을 억제하기가 쉽지 않자, 자신들도 좋아하지 않는 전두환을 대신 처벌해 ‘군기’를 잡으려는 게 아닐까. 대립하는 세력과의 긴장이 힘들어, 같은 배를 탔지만 ‘같이 가기 싫은’ 전두환을 공격해 긴장을 풀려고 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전두환은 만만한 ‘공공의 적’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