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월호

“공부 잘 하는 나라 아이를 왜 공부 못 하는 나라로 보냅니까”

재미 황용길 박사가 한국 학부모에 보내는 쓴소리

  • 황용길 루이지애나 주립대학 교수·특수교육

    입력2006-11-06 15: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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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 출신 유학생 규모는 초중고생을 포함해 이미 5만 명을 넘었고 미국 전체 유학생 중 국가별로는 항상 2,3위를 차지한다. 이들이 소모하는 외화는 얼마나 될까? 1인당 연간 평균 2만5000달러가 소요된다고 가정할 때 매년 13억 달러, 한화로 1조5000억원의 엄청난 액수를 쏟아붓는다는 계산이다. 미국에서만 그럴진대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일본 등에 나가 있는 모든 유학생 수를 감안한다면 정말로 큰 액수다.

    과연 이 많은 돈이 적절하게 사용되며 수많은 유학생과 영어연수생들의 노력이 바람직한 결과를 얻고 있는지 궁금하다. 귀중한 시간과 국력만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그렇다면 유학비용은 국가부담이 아니라고 정부는 그저 눈감고 있어야만 할까.

    올해 초중고생 유학이 전면 개방된다 해서 한국의 학부모들이 술렁이고 있다. 필자 역시 친척과 평소에 알고 지내던 분들로부터 가끔 문의를 받는다. 우리 아이도 조기유학을 보내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입학절차가 어떻고 아이의 장래에 투자가치가 있는 일이냐? 아이가 잘못 되면 어찌하느냐? 우려와 기대가 교차되는 질문을 한다. 이분들에게 필자는 깊이 생각하고 결정하라는 답을 한다. 대학수준 이상의 유학도 자칫 돈과 시간 버리기 십상인데 조기유학의 경우에는 돈과 시간은 고사하고 아예 아이까지 함께 망칠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외국유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대학과정 이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믿음이며 이 과정 역시 일정한 선발과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조기유학은 투자에 비해 얻는 소득이 너무도 적거나 아예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다. 물론 아동 개인의 상황과 능력이 달라 한마디로 가부를 표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과 사회상황, 유학 대상국의 학교 수준, 유학의 이유와 목적, 귀국 후의 적응문제와 장래진로 문제 등 현실적인 제반 여건을 고려할 때 조기유학의 전체적인 효용성에 회의를 갖게 한다. 흔히 보도되는 외국에 나온 한국 아이들의 탈선과 방황 때문이 아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유학생활을 무사히 끝마치고 돌아간다. 이렇게 세상구경 하며 영어까지 배울 수 있다는 조기유학에 왜 고개를 젓게 되는가.

    무엇을 위해 어디로 떠나는가



    첫째, 아이들이 외국으로 떠나는 이유가 사실 학교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한국사회와 경제의 구조적 불평등, 정치의 무능력이 아이들을 외국으로 내몰고 있다. 둘째, 유학대상국의 교육수준이 한국의 그것보다 떨어지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저급교육을 받기 위해 유학을 갈 필요는 없다. 셋째, 국민의 영어사용능력이 국가경쟁력과 직결된다는 주장에는 결코 공감할 수 없으며, 1~2년의 단기유학으로 아동의 전반적 의사소통능력이 획기적인 발전을 할 수도 없다. 넷째, 다수의 아이들은 귀국 후 재적응 과정에 심한 고통과 갈등을 겪는다.

    이런 문제점들을 독자들과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래서 명확한 분석과 판단을 바탕으로 아이들의 외국유학을 결정했으면 한다.

    한국의 부모와 아동들이 선택하는 조기유학 대상국은 일반적으로 미국과 영국, 캐나다 또는 호주를 비롯한 영어 문화권 국가다. 유독 영어문화권 국가로 아이들이 몰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세계화와 국제화의 시대, 선진 외국의 문물과 지식을 배워 나라에 공헌하고 지구촌의 일원으로서 살자는 고상한 이유가 아니다. 실은 현실적인 필요 때문에 유학 대상국이 결정된다. 풍요한 선진국인 이들 영어권 국가에서 영어도 배우고, 과외 걱정 없이 편하게 공부해 좀더 쉽게 대학에 입학하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취직하기가 복권당첨만큼이나 어렵다는 게 한국의 형편이다. 그러니 모두 일류명문대학만을 향해 뛰어야 한다. 모두 다 일류대학에 합격할 수가 없으니 경쟁은 날로 심해지고 입시 걱정으로 온 가족이 몸살을 앓는다. 아이들 사교육비 충당에 기둥뿌리가 흔들리는 판에 온 나라에 영어회화 바람까지 불어닥쳐 원어민 과외교사가 인기를 모은다. 영어회화 능력이 대학입학과 졸업 그리고 취직의 관건이다. 토플, 토익에다 텝스(TEPS)라는 영어능력시험들이 줄줄이 난리를 쳐대고 기업체와 국가기관의 승진과 봉급인상까지 영어에 좌우된다. 교육부는 영어수업을 영어로만 진행한다고 영어돌풍을 부추기고, 일부에서는 이참에 영어를 공영어로 만들자고 목청을 높인다.

    영어의 나라 한국, 먹고 사는 일이 영어에 달렸으니 달리 방도가 없다. 영어를 잘 해야 명문대학에 갈 수 있고, 일류직장에 취직도 되며, 좋은 신랑 예쁜 신부 만나 깨 쏟아지게 백년해로할 수 있다니 영어를 안 배우는 사람이 이상할 지경이다.

    세상에 쓸모 없는 문법과 독해만 가르쳐서 대학 영문과를 졸업해도 미국인과 말 한마디 못 나누게 만드는 한심한 한국의 영어교육은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이구동성이다. 영어를 제대로 배우려면 본고장에 직접 가서 영어하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며 배우는 방법이 제일이라며 전국의 대학은 영어연수단을 조직하고 신문방송은 연일 영어, 미국말, 잉글리시 타령이다. 어디 그뿐이랴. 선진국에서는 공부도 재미있게 가르치고, 과외도 필요 없고, 대학 가기도 별로 어렵지 않다니 내친 김에 그 곳에서 아예 대학까지 마칠 장기계획을 세운다. 일석십조의 묘안, 조기유학은 날로 인기를 모아 부유층은 느긋한 기대감으로, 서민층은 애타는 희망으로 아이들을 외국으로 떠나 보낸다.

    그러나 여기서 꼭 짚어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선진 외국학교는 아이들을 과연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며 “미국 영국 캐나다의 학교가 우리나라 학교보다 잘 가르치고, 영어 잘 하는 그곳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보다 정말로 공부를 더 잘 할까?” 하는 의문이다.

    선진국은 교육도 선진?

    영어문화권 국가의 교육재정은 한국보다 월등히 많다. 따라서 물리적인 교육환경은 분명 한국보다는 풍족하다. 돈이 많으니 기자재도 풍부하고 모든 면에서 여유롭다.

    그러나 “어느 나라 아이들이 정말 공부를 더 잘하고 더 우수한가”에 대한 연구조사결과는 일반의 통념을 뒤집는다. 풍요한 영어문화권 아이들은 놀랍게도 밑바닥을 면치 못한다. 교육효율의 대표적 평가척도인 국가별 학업성취 기준에서 볼 때 한국의 교육은 이들 구미의 국가를 완전히 압도한다. 보기 좋고 살기 좋다고 학교까지 좋다는 법은 없다.

    적어도 초중고교육에서 한국 교육이 아직까지는 세계 정상급이다. 최근 미 교육부가 발표한 제3차 국제수학·과학 경시대회 (TIMS Study)의 결과와 유네스코의 조사결과에서 보듯 한국은 세계 최고권의 성적을 올리고 있고 미국·영국의 교육계는 우리의 학교를 경이의 눈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학과과정의 양과 질을 고려할 때 현재 우리의 조기유학 개방정책은 공부 잘 하는 나라의 아이들을 공부 못 하는 나라로 보내는 우스운 꼴이 되고 만다.

    집 떠난 지 얼마 만에 영어로 조잘대는 아이가 신통방통해 보이리라. 그러나 실제로 아이는 저질교육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토대가 있어야 집을 짓듯 모든 배움은 기초가 있어야 가능하다. 바로 그 이유로 해서 초중학교와 고등학교 초반기까지의 교육은 기초학습능력의 체계적인 습득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 장래 사회생활에서 또는 대학에서 요구하는 응용력의 기반을 만들어 주는 일이 초중고 교육의 기능이다. 그러나 영어문화권의 학교는 일반적으로 한국과는 전혀 다른 아동 중심의 진보주의 교육을 신봉하여 기초지식의 습득을 게을리한다. 응용력과 창의력만 강조하기 때문이다.

    줄기차게 세계 최하위를 달리는 미국 아이들의 학업성적은 서구식 교육의 문제점을 확연히 보여준다. 매년 노벨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내는 나라가 미국이라고 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작년에도 미국인 신분으로 노벨상을 받은 이들 대부분이 귀화한 외국 출신 미국시민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미국 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조기유학생들이 선호하는 미국 공립학교의 실상을 한국에 있는 미국인들에게 물어보라. 한국 교육은 이렇게 고치라고 점잖게 충고하는 미국 교수들과 현장의 언어를 가르친다는 원어민 영어교사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은 미국 아이들의 무식함과 버릇없음에 골머리를 흔들리라.

    아이들 교육문제로 고민하지 않는 나라가 없고, 교육개혁을 추진하는 세계 모든 나라는 어떻게 해야 아이들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학습에 쏟도록 할까 궁리하고 있다. 그런데 유독 한국의 교육정책은 될 수 있으면 적게 공부시키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풀고 열고 내돌려 놀리자는 교육정책은 제 풀에 망가지자는 이야기와 다름없다. 조기유학을 핑계로 우리 아이들이 외국의 쉬운 학교로 도피하고 있다. 한국 정부와 부모들은 왜 어린 아이들을 외국의 저질학교로 내몰아 바보로 만들고 있는가.

    무엇을 먼저 배워야 하는가

    체류국 학교의 저질교육만이 문제가 아니다. 아이가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모국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학습하는 내용을 배우지 못한다는 점도 역시 고려해야 한다. 떠나 있는 동안 필연적으로 생기는 학습의 공백으로 인해 아이는 귀국 후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 외국에서 적게 배우는 동안 본국의 아이들은 많이 배우고, 그러는 동안 학업성취의 격차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커져버렸기 때문이다.

    학습에 필요한 기초를 쌓지 못한 아이는 귀국 후 당연히 뒤처지게 되고 당황한 부모는 대책마련에 고심한다. 한국의 외국인 학교는 미국영주권이 없으니 입학자격이 없고, 집에 내버려 둘 수는 더욱 없다. 결국 또래를 따라잡기 위한 집중과외가 다시 시작되고, 이도 여의치 않을 때는 아예 외국에 아이를 주저앉힌다. 돈 쓰고 공들였더니 사교육비는 오히려 더 들고, 심한 경우 아이를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국제방랑자로 만든다. 한국 아이들은 외국 가면 잘 하지만, 외국 살던 아이들은 한국에 오면 견디지 못한다는 간단한 사실을 왜 무시하는가.

    그래도 아이들은 외국으로 떠난다. 노란 머리 파란 눈의 아이들과 어울리며 영어라도 배울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아동들의 외국어 습득속도는 놀랍게 빨라서 성인들에 비해 단기간에 많이 배울 수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남의 말인 영어를 1~2년 내에 마스터할 수는 없다. 그 정도 시간으로는 수박 겉 핥듯 겉모양만 대충 보는 학습에 지나지 않는다. 습득속도가 빠른 만큼 상실속도 역시 빠르다. 귀국한 후 사용하지 않으면 금세 까맣게 잊고 마는 것이 외국어다.

    외국어를 배우는 만큼 모국어의 습득기회가 줄어든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영어 배우려다 우리말 못 배우는 희한한 경우인데 이 아이들이 모국에 돌아와서 어찌될까? 영어도 완벽하게 못 하고 모국어도 제대로 못 하는 국적 불명의 아이가 생겨날 수 있으며 모국의 풍속과 관습을 배우지 못해 사회생활에 불편을 겪을 수도 있다. 세상 사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다시 돌아와 살 곳은 결국 한국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국에서 살 아이들은 한국의 말과 문화를 먼저 알아야 한다. 어디서 어떻게 살며,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지 않는, 뿌리를 잊은 국민에게 미래는 없다.

    흔히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똑똑하다고 한다. 그러나 영어로 말을 잘한다고 해서 곧 실력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두서없는 떠벌림은 소음에 지나지 않으며 얕은 식견은 곧 드러난다. 진실로 실력 있는 사람은 풍부한 전문 지식에 바탕을 둔 출중한 판단력과 사려 깊은 식견을 지닌다. 여기에 덧붙여 말까지 잘할 때 금상첨화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KAIST 출신의 26세 한국인 청년이 프린스턴 대학 수학과 조교수로 임명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영어소통능력은 미국에서 낳고 자란 성인들에 비하면 아무래도 모자랐으리라. 그래도 전공분야에 관해서는 해박한 지식과 정확한 이론을 지녔다고 선발위원들이 판정했기에 이 청년을 임용했을 게다. 그는 한국에서 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수학분야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고 한다. 무슨 뜻인가. 준비된 능력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실력을 쌓기 위해서는 폭넓은 독서와 학습을 통해 마련된 축적된 지식이 있어야 하고, 이를 기반으로 해서 확고한 논지와 이론을 정립해야만 한다. 사고력, 창의력, 번득이는 기지 역시 기초가 있어야만 개발이 가능하다.

    결국 축적된 지식이 있어야 말도 잘할 수 있는 법이다. 사람은 아는 만큼만 조리 있게 말할 수 있다. 자신이 모르는 사항을 남에게 설명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사람이 쓰는 모든 지식의 개념은 어휘(단어)로써 표시되고 소통된다. 따라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아는 단어가 많고 사용하는 단어의 수도 많다. 말을 잘하기 때문에 지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있기에 말을 잘하게 된다는 이치다. 지식의 기반에서 출발하는 어휘력이 표현능력을 결정한다. 영어가 곧 실력이라는 허황된 논리는 이제 그만 접어두자. 한국말을 잘 하는 이가 영어도 잘하며, 영어를 잘해야 한국말도 잘한다.

    미국에는 금발머리 아가씨들의 무식함을 놀리는 노랑머리 농담(blonde joke)이 많다. 얼굴 예쁘고 인기 좋다고 마냥 조잘대는 푼수덩어리 돌머리 아가씨들을 비웃는 농담이다. 예쁘고 말을 잘해도 무식할 수 있다. 말 속에 알맹이가 있어야 인정을 받으며 그 알맹이는 다름아닌 지식이다. 지식이 있어야 실력이 있는 법이다.

    일본 국민이 영어를 잘해서 전자기기와 자동차의 세계시장을 쥐고 흔들지 않는다. 일본은 품질과 신용으로 시장을 제압했다. 일본이 영어를 잘했더라면 미국의 정보와 금융 그리고 서비스 사업까지 제압할 수 있었으리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은 다르다. 미국은 막대한 부존자원과 기술력의 바탕 위에서 세계 최대의 공업생산력을 오래 전부터 이미 확보해 놓고 있었다는 점을 잊지 말자. 미국은 그 바탕 위에서 정보와 금융까지 휘어잡고 있다.

    국민 모두가 영어를 잘 해서 나쁠 것은 없지만 다 잘할 필요는 없다. 좋은 물건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품질이 좋은 물건은 잘 팔릴 수밖에 없다. 좋은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술을 개발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최신정보의 신속한 전달이 필요하다. 첨단정보가 학계와 산업계로 빨리 전달돼야 이용도 되고 활용도 된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석이라 했다. 그런데 첨단기술 정보는 꼭 영어로만 전달되고 습득해야 할까?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최신정보를 정확히 분석해서 신속하게 전해줄 전문번역가들을 양성해 이들을 활용하는 방법이 훨씬 지혜롭다. 모든 국민이 이미 알고 자유롭게 사용하는 우리말을 제쳐두고 왜 영어로 지식을 새로 배우자고 동분서주하는가. 지름길 버리고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는 어리석음이다.

    문제는 얼마나 정확하고 빠르게 최신정보를 번역하고, 어떻게 정리·선별하여 소비자에게 신속히 전달하느냐는 기술적인 문제다. 언어의 차이로 정보전달이 안 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일본 문부성 번역국은 구미의 최신 정보와 전문기술서적을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구하고 번역해서 각계각처에 전한다. 미국에서 출간된 연구논문이 불과 1주일 만에 번역·출판되고 인터넷에 뜨는 형편이며 학계와 산업계는 이를 이용해서 기술을 발전시켰다. 세계를 주름잡는 일본의 전자기기와 자동차는 이렇게 탄생됐다.

    미국에서 학업에 정진하는 수만 명의 한국 유학생들, 매년 수천 명이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가 기회를 기다리는 박사학위 소지자가 이미 3만명을 넘었다. 발에 채는 외국박사들 세계에서 박사학위 소지자가 인구밀도에 비례해 가장 많은 곳이 서울이라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많이 오고 많이 가는데 이들 중 과연 얼마나 직장을 잡는가. 겨우 한 줌의, 그것도 미리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행운이다. 미국의 일류대학을 졸업했다 하더라도 학연, 인연 등의 확실한 연줄이 있거나, 혹은 재력이 뒷받침해주는 이들에게만 기회가 있다. 미리 정해져 있다는 말이다.

    낙점받지 못하는 많은 이들, 특히 이공계 출신 유학생들은 미국에서의 생활을 택한다. 선진기술과 지식으로 훈련된 인재를 수용하지 못하는 한국의 허술한 인력관리정책은 이들을 미국에 주저앉게 만들고 미국의 기초학문은 다시 이들에 의해 유지되고 지탱된다. 땅 팔고 소 팔아 미국 유학 보냈다가 미국만 좋은 일 시키는 꼴이다.

    기술개발이 안 되고 산업발전이 늦다고 모두가 한숨이다. 그러나 한국은 있는 두뇌도 활용하지 못하며 산업개발의 근본인 기초과학은 뒷전으로 밀려나 폐사 직전이다. 미국은 인재를 수입한다. 끌어안고 대우해주니 이민 오고 유학 와서 미국에 귀화해 미국인으로 연구한다. 교육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산업기반이 유지되는 큰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한국은 현재 있는 사람들도 쫓아내고 있다. 외국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은 건방지고 동화하지 못한다고 경원당하는 실정이니 세계적 과학자가 나오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초중고에서 아무리 잘해도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받침을 못 하니 생기는 결과다.

    한국이 필요로 하는 영어교육

    기능성 중심의 생활영어는 보통 설정된 가상의 상황에 맞추어 공식을 외우듯 연습하는데, 실제상황에서는 평소에 연습한 회화예문대로 미국 사람들이 묻지도 않을뿐더러 대답 역시 외우고 준비한 대로 할 수가 없다. 한국 사람들의 영어는 “3분 영어”라는 말이 있다. 짜깁기식 3분 영어 강의를 틀에 맞추어 연습하다 보니 외국인과 만나 3분만 대화를 하고 나면 밑천이 다 떨어져 갑자기 벙어리가 돼버린다는 이야기다.

    결국 응용력이 필요한데 이는 기본 문법과 형식을 깨우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 영어회화도 기본은 문법과 형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생활영어는 미국에 살다 보면 저절로 배울 수 있으며 전문지식 습득에 큰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하다못해 고등학교 수준의 학과과정도 생활영어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영어교육의 최종 목적이 선진기술과 지식의 습득을 통한 국가산업의 발전이라면 독해와 작문의 중요성을 무시해서는 절대 안 된다.

    미국 아이들과 어울려 밥 잘 먹고 술 잘 먹기 위한 유학이 아니라면 책을 읽고 보고서도 써내야 한다. 독해력과 작문능력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인터넷도 생활영어 수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사업에서의 영업행위 역시 문서와 문자의 사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사람끼리의 직접접촉은 통역을 사용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미국 교육이 지난 30년간 겪은 ‘whole language’ 소동은 영어교육에 있어서 다시없는 좋은 교훈이다. 문법과 발성규칙에 중점을 두는 어학교수법(phonics)을 제쳐두고 의사소통의 기능성만을 강조하는 whole language방식을 사용한 후부터 난독증(dyslexia)성향의 학습장애아들이 쏟아져 나왔고 미국의 특수교육은 글을 읽지 못하는 아이들 때문에 일대 곤욕을 치르고 있다. 기초교육을 소홀히 하다 날벼락을 맞은 미국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캘리포니아주는 ‘whole language’ 금지 법안까지 통과시키며 기본으로 회귀하는 형편이다.

    배우고 살기 위해서는 읽고 써야만 한다. 언어의 네 가지 사용방법인 읽기, 듣기, 쓰기, 말하기 중 읽기와 쓰기가 가장 어렵다. 그러나 바람직한 영어교육은 정확한 문법과 형식에 준하는 쓰기와 읽기를 무시하지 않는다. 읽기와 쓰기를 하다보면 생활영어도 저절로 늘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문법에 기초한 독해와 작문을 무시하면 큰일난다.

    누가 아이들을 외국으로 내모는가

    한국의 교육은 세계적으로 극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오죽하면 미국과 영국은 한국교실의 수업광경을 비디오로 제작하여 교사지망생들에게 시청시킬 정도일까.

    그랬던 한국 학교가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 온 나라 학교가 뒤숭숭하고 아이들은 밖으로만 나돈다고 모두가 걱정이다. 창의력은 안 키워주고 온통 주입식 교육만 시키는 학교가 재미없고 답답하다고 아이들은 아우성이고, 교사들은 제멋대로인 아이들에게서 아예 손을 놓고 있다. 행동조절의 방책이 없으니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당황한 부모들은 고심 끝에 아이들을 외국으로 보낸다. 한국의 학교가 너무도 엉망이라 어쩔 수 없다는 한탄이다.

    그러나 이런 한심한 문제들이 학교의 잘못으로 시작됐을까? 선생님들이 잘못하고 재미가 없어서 교실이 붕괴하고 아이들은 보따리를 싸 해외로 도피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한국 교육의 침몰은 사실상 교육현장 밖에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학교를 바꾼다 해도 나아질 삶은 없고 아이들은 계속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다. 구조적인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한국 교육의 문제는 공정한 경쟁이 없는 취업구조와 대학교육의 실패에서 시작된다. 한국의 초중고 교육은 외국에 비해 성공적이다. 그러나 대학에서 망가진다.

    이 통탄할 현상은 한국 사회에 있어 절대적으로 부족한 취업의 기회에 그 원인이 있다. 일자리가 너무도 부족한 것이다. 넘쳐나도록 많은 사람, 기업주들은 같은 값이면 일류대학 출신, 또는 혈연, 지연, 학연으로 연결된 사람들을 찾는다. 이 때문에 초중고생은 영어능력을 키우기 위한 조기유학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일류대학 들어갈 궁리만 한다.

    한편 든든한 연줄이 없는 대학생들은 명문·비명문을 막론하고 취업걱정만 한다. 기초학문은 외면되고 취업이 용이한 학과는 무조건 문전성시다. 빚을 내서라도 어학연수를 다녀와야 하고, 취업경쟁에 처진 대학 졸업생들은 외국으로 나가 학위를 따며 국내로의 재진입을 노린다. 취업기회의 절대적인 부족이 수많은 초중고, 대학생들을 외국으로 내몰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느닷없이 학교만 두들겨 맞고 있다. 문제는 밖에서 시작하건만 모든 잘못을 학교 탓으로 돌리고 교사들은 죄인의 행색으로 머리를 들지 못한다. 정녕 누구의 잘못인가 깊이 생각해 보자. 현재 한국의 학교와 교사는 남의 죄를 뒤집어쓴 채 변명도 못 하고 있다.

    문제의 고리를 풀기 위해서는 취업의 기회가 확대돼야 한다. 나아가 모두에게 공정한 경쟁 기회를 부여하는 취업제도가 확립돼야 한다. 사회가 순조로울 때 학교는 칭송을 받는다. 또한 공평한 취업의 기회가 모두에게 부여될 때 사회는 비로서 살 만한 세상이 된다.

    미국박사들의 탁상공론

    둘째, 현장경험 없는 미국 박사들의 탁상공론이 한국 교육의 위기와 실용영어지상론 등의 환상을 몰고 왔다. 아는 것이라고는 미국밖에 없는 (그것도 껍데기만) 사람들로 교육계의 지도층이 빠르게 형성되고 있으며, 우리 교육이 현재 겪고 있는 안으로부터의 붕괴현상은 어쭙잖은 외국의 교육관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바로 이들 소위 교육전문가와 관료들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교육정책은 미국 교육계를 80년대 중반부터 휩쓸고 있는 포스트모던 교육철학의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다. 미국식 진보주의 교육철학에 바탕을 두고, 브라질 출신 파올로 프레이어(Paulo Fr eire)의 해방교육 계통의 교육관과도 유사점이 많은 포스트 모던 교육관은 학교교육이 사회지배계층의 이익추구를 위해 존재한다고 강변하며 일체의 기존지식과 학교체제를 거부한다. 지배계층이 그들의 기득권 유지에 필요한 가치와 지식을 피지배 계층에 학습하도록 강요하는 곳이 학교라는 주장이다.

    미셸 포컬트(Michel Foucault),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로 대표되는 포스트 모던 교육은 절대적 진리를 인정치 않으며 학생을 지적 압박의 대상으로 교사를 지식의 압제자로 규정한다. 또한 학교에서 가르치는 학과지식을 오직 계급유지를 위한 강요된 세뇌의 도구로 매도한다. 탄압자인 교사가 피압박자 아동들을 얽매며 실생활에 아무 소용이 없는 학과지식을 강제로 주입하여 이들의 창의력과 비판력을 마비시키고 결국에는 의식 없는 허수아비로 만든다는 프랑크푸르트 학파(Frankfurt School)류의 급진적 계급투쟁 이론이다.

    미국, 영국의 공교육을 황폐화하고 일본 교육계를 당황하게 만든 예의 진보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열린교육, 대안교육, 참교육 등의 이름으로 이제 한국의 교육을 뒤흔든다. 심지어 이반 일리히(Ivan Illich) 등이 주창하는 탈학교운동, 학교무용론까지 대두하여 아이들은 졸며, 부모는 불평하고, 교사는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상인으로 전락하고 있다.

    학과지식의 전수를 중요시하는 주지학습은 숨막히는 교육으로 외면당하고 실용교육 만능론이 교육을 끌고 간다. 실생활에 직접적 연관이 있는 지식만이 가치가 있기에 국어, 역사, 수학을 막론하고 지식축적 위주의 교육방법은 주입식교육이라 불리며 힐난받고, 영어학습의 기본인 문법과 독해, 그리고 작문이 멸시되고 영어회화가 제일이라는 얄팍한 상업론이 판을 친다. 투쟁의 이념이 교사와 학생을 적으로 만들고 당장 쓸 수 있는 지식만이 추앙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학교가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부족한 투자와 척박한 환경에도 한국의 학교는 나름대로의 구실을 훌륭히 수행해왔다. 그런 우리의 학교를 이념의 유희에 휘말린 소위 교육전문가들이 뿌리를 자르고 있다. 이들은 멈추어야 한다.

    셋째, 닫힌 사회와 폐쇄된 사회인식이 교육을 망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이견과 시각의 차이를 허용치 않으며 반론과 도전은 눈총을 받고 눌려왔다. 윗사람이 그렇다고 하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 의식의 폐쇄성은 개방되고 열려 있어야 할 대학사회에서 더욱 심하고 정책결정권을 가진 힘있는 자들간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사회의 지식인과 지도층이 이런 지경이니 창의적 사고가 발붙일 수가 없다. 내 뜻을 거스르면 모두가 적이라는 폐쇄적인 사회에서 어찌 학생들의 사고력이 발달하고 창의력이 개발될 수 있는가? 위에서 먼저 열려야 국민의 의식이 열린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은 발전의 목줄을 거머쥐고 새로운 생각을 억누른다. 이들이 바뀌지 않는 한 변화는 없다.

    1. 창의력도 기초가 있어야 생긴다

    창의력의 결핍이 학교의 주입식 교육 때문에 생긴 문제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창의성은 하늘에서 떨어지듯 저절로 나타나는 능력이 아니며 무릇 모든 종류의 배움과 마찬가지로 기초가 있어야 생겨나는 노력의 결과다.

    또한 지식의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소위 주입식 교육은 기초지식의 배양을 극대화할 수 있는 좋은 교육방법이다. 진절머리나는 일제의 살인적 교육방법이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탁월한 학습효과를 발휘하는 가장 근본적인 학습방법이라는 말이다. 한국 교육은 주입식 교육의 장점을 잘 이용하여 우리의 아이들이 세계적으로 우수한 수준의 기초학력을 지니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축적된 지식을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교사가 별로 없다는 데 한국교육의 문제가 있다. 미적분 공식을 줄줄이 꿰고 물리와 화학 문제를 떡 먹듯 풀어대면서도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이런 지식들이 쓰이는지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교사 훈련에 커다란 구멍이 있으며 이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다. 배양된 지식과 실제적 응용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능력 있는 교사들이 배출되어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주입식 교육 자체가 나쁘지는 않다. 쌓인 지식을 어떻게, 왜, 그리고 언제 쓰는가를 가르치지 않는 점이 폐단이다.

    그럼에도 현재 한국의 교육계는 주입식 교육을 마치 뱀 대하듯 하며 “오로지 창의력”을 외치고 있다. 못하는 분야만 우러르며 잘하는 분야를 천대하는 이해할 수 없는 자학이다. 주입식 교육과 창의력 교육은 별개의 학습이 아니다. 두 분야는 어울려 공존하며 서로를 돕는다. 기본지식이 풍부할수록 창의력 발달의 소지가 높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2. 경쟁을 북돋워라

    교육이 잘못돼서 경쟁에 처지고 주눅드는 아이들이 생긴다는 비난은 학교를 아예 없애자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우수한 학력을 추구하지 않는 교육제도는 학교가 아니다. 탁아소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어떤 교육제도에서든 경쟁에 처지는 아이들은 생긴다. 모두가 한결같이 일 등을 할 수는 없고, 모두 다 명문일류대에 합격할 수는 없다. 정해진 입학정원이 있기 때문이다. 학교의 가장 큰 책임은 우수한 인재를 될수록 많이 길러내는 일이다. 그래야 나라가 산다. 정녕 못 따라오는 아이들을 돌보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의 몫이다. 각자의 임무와 역할이 다르다는 말이다.

    현재 한국의 경제개혁정책은 경쟁력 없는 기업체의 정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각 대학은 연봉제를 도입하고, 우수 교수를 스카우트하며 경쟁력 향상에 노력하고 있다. 기업끼리 겨누고, 대학끼리는 견주라고 하면서 어째서 아이들은 경쟁하면 안 된다는 것인가? 현재 추진중인 교육개혁의 최종목적조차 국가경쟁력의 신장에 있지 않은가? 정당한 경쟁은 생존의 원동력이다. 경쟁을 없애자함은 인간성을 거부하고 발전을 포기하자는 얘기다.

    3. 한국과 미국은 다르다

    그래도 미국의 공교육은 돌아간다. 선생님은 폭사하고, 아이들은 총살당하며, 성적은 전세계적으로 꼴찌를 다투어도 미국의 공립학교는 아직 건재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우리나라 같으면 벌써 정리대상 제1호로 선정돼 수술을 받았으리라. 그 이유는 막강한 경제력에 바탕을 둔 미국의 사회구조에 있다. 학교가 죽을 쑤더라도 풍부한 취업 기회와 윤택한 사회보장정책이 교육의 실패를 보충한다는 말이다. 물론 좋은 직장은 일류대학 출신이 차지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전체적인 취업의 기회는 거의 모두에게 차례가 돌아갈 정도로 넘쳐난다. 여기서 생기는 경제적 여유가 교육의 실패를 메워 주는 것이다.

    완전히 경쟁에 처진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보장제도의 안전망이 튼튼히 구축되어 있다. 저소득층에 지급되는 사회복지기금(welfare, 영세민 구호기금) 또는 SSI(supplementary social security inc ome, 사회보장추가기금)라 불리는 지원금은 한국의 기준으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액수다. 정치와 경제가 기본적인 생계를 보장하는 미국 사회, 그래서 교육이 제 역할을 못 해도 대중의 불만은 조절된다. 사회가 문제를 감당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학업성적이 극히 우수하거나 타력에 의지하지 않고는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힘들고 저소득층에 대한 보호정책은 아직도 구호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 처지면 죽는 사회, 하지만 구제 방도가 없다. 그래서 학교는 비난받고 아이들은 삼삼오오 외국으로 떠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기본틀이 바뀌지 않고는 아무런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 초중고교가 잘못해서 생긴 사회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학교가 변한다 해서 문제의 본질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고뇌를 풀어주는 역할이 바로 정치의 몫이다.

    4. 정치부터 정신 차려라

    한국 사회의 혼란과 민중의 힘겨운 삶은 초중고 교육의 잘못이 아니다. 부언하거니와, 학교의 목적과 역할은 지식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 있다. 학교가 만들어낸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만드는 것이 정치의 몫이다.

    한국 교육의 문제는 정치가 초래했다. 정치가 지리멸렬, 직장을 창출하지 못하고 학교가 만들어낸 사람들을 제대로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병의 원인은 무능력한 정치와 부패한 사회에 있으며 학교는 병을 앓고 있는 환자와 같다.

    그런데도 힘없는 학교와 교사들은 끝없는 질타 속에 목적 없는 변화를 강요당하고 있다. 병의 원인을 고치려 하지 않고, 병을 앓고 있는 환자만 다그치니 문제가 해결이 될 리 없다. 학교는 애꿎은 속죄양이며 정작 비난은 무능력한 정치인들에게로 보내야 한다. 그들이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국민의 기본적 생존권을 보장해주지 않는 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모든 아이들을 다 만족스럽게 교육한 나라는 유사 이래 어디에도 없다. 어떠한 제도에서도 처지는 아이들은 필연적으로 생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행한 현실이다. 그러나 경쟁에 뒤처지는 아이들을 추스리지 못하는 책임을 학교에 지워서는 안 된다. 학교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원이라고는 인력밖에 없는 나라, 학교가 엎어지면 우리를 그나마 지탱해주었던 마지막 끈마저 끊어진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으로 유학가 많이 보고 크게 배웠다는 교육지도자들과, 이들에게 둘러싸인 우리의 나랏님과 정치인들이 도리어 학교를 망쳐 나라를 쓰러뜨리고 있다.

    한국 교육의 몰락은 1995년 김영삼 정부의 교육개혁안으로 그 신호가 올랐으며 그 뒤를 이은 김대중 현 정부에 의해 본격적으로 교실이 붕괴가 됐다. 섣부른 교육정책의 이념적 틀은 세계화 정권이 마련했고, 실제적 파괴행동은 국민의 정부가 행한 셈이다. 자유와 민주를 표방한 양김 정권에 의해 학교가 찢어지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래서 더욱 가슴 아프다.

    우리에게는 인력만이 유일한 재산이다. 어떠한 형태의 교육정책도 전체 아동의 학력저하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 조기유학 전면개방을 포함하는 현재의 교육노선이 재고되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정신 차려야 한다.

    5. 교육전문가도 정신 차려라

    교사는 탄압자가 아니다. 대다수의 교사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명감을 지닌 고뇌하는 교육자들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학과내용은 쓸모 없는 지식이 아니다. 해부학의 지식을 기반으로 의학이 존재하듯 의미 없어 보이는 작은 지식들이 모여 인간의 문화와 문명을 형성한다. 학과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생각 없는 바보가 아니다. 밖으로부터의 유혹을 이겨가며 밤을 지새우는 가상한 아이들이다.

    감히 묻는다. 한국의 교육지도자들은 무엇 때문에 미국과 영국, 브라질의 공립학교가 침몰한 이유를 간과하는가? 학과중심 지식교육을 멀리하면 학교가 무너지고 계급간의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는 역사의 교훈을 왜 무시하는가? 계급을 무너뜨리면 또 다른 계급이 창조된다는 사실을 왜 인정하지 않는가? 정녕 기득권의 탄압이 있다면 오히려 학과지식을 더 습득하여 대항할 만한 힘을 아이들이 길러야 함을 왜 인식하지 않는가? 뚜렷한 교육붕괴의 징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육전문가들은 여전히 막무가내다. 자신들의 과오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죄없는 교사들만 더 들볶고 있다. 좋은 교육방법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교사들 때문에 일이 잘못됐다는 주장이다. 사회계층의 집단이기주의와 교육재정의 부족, 시설의 열악함도 정책실패의 이유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미국의 진보주의 교육계가 지난 50년간 줄기차게 사용해온 상투적인 변명과 핑계다. 어쩌면 변명의 방법과 종류까지도 미국을 빼닮았는지 경이롭기까지 하다.

    독선과 아집으로 뭉쳐 실패를 거듭하는 교육전문가 집단을 없애겠다고 미국연방정부는 1980년대 초 교육부의 폐쇄를 고려하기까지 했다. 혹덩어리(Blob)이라 불리는 이들의 전횡이 없어져야 비로소 공교육이 제 길을 간다는, 정권차원에서 고려된 특단의 정책이었다. 왜 한국은 미국의 실패를 반복하는가?

    6. 부모도 정신을 차려라

    학교가 엉망이라고 불평하는 한국의 부모들은 바로 자신들이 학교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인성교육은 가정의 몫이다. 부모가 가정에서 올바른 본을 보임으로써 아이들의 인성이 계발된다. 선생님 말씀 잘듣고, 공부 열심히 하며, 올바른 눈으로 세상을 보도록 부모가 직접 행동으로 가르쳐야 아이들의 행동도 좋아지고, 학교도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부모들은 요구하고, 불평하며, 학교를 몰아세우고 있다. 이는 교육에의 참여가 아니라 참견이요 파괴다.

    뒷전에서 촌지 제공하고 욕해가며 선생님들께 아이들 인성교육 잘 시키라고 떼쓰는 학부형들이다. 선생님들을 나쁜 인간으로 매도하면서 무슨 교육을 바라는가?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는 아이들이 과연 무엇을 학교에서 배울 수 있을까?

    교육은 학생과 교사와 부모가 모두 협조하고 서로의 책임을 다할 때 가장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학생들은 자신을 소비자로 보지 말고 배우는 데 책임의식을 느껴야 하며, 교사는 그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인 지식교육에 전력을 다하고, 부모는 가정교육에 충실함으로써 아이들의 인성을 책임져야 한다. 어린 아이를 조기유학 보낸다고 뛰어다닐 때가 아니다. 가정교육을 먼저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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