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호

“정몽준과 불화? 이렇게 거짓말해도 되는 거요?”

도중하차 박세직 전월드컵조직위원장의 항변

  • 육성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09-07 13: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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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28일 오후. 기자는 서울 광화문 미국대사관 뒤편 이마빌딩 8층에 있는 월드컵조직위원장실을 찾았다. 박세직 위원장은 하루 전날인 27일 “대승적 차원에서 사임을 결심했다. 8월 8일까지 대통령의 뜻을 기다린 뒤 답변이 없으면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정리한 직후에 기자를 맞았다. 대형 유리창을 통해 청와대가, 오른쪽엔 문화관광부가 보였다. 사진기자의 요청에 따라 창밖을 내다보는 박위원장의 표정은 줄곧 상기돼 있었다. 그의 목소리도 평소보다 훨씬 거칠었다. 목이 컬컬하다며 냉수를 시킨 박위원장은 “다른 사람들처럼 문화관광부 보도자료를 쓸 일이지 뭐하러 나를 취재하느냐”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어제 저녁 그동안의 입장을 바꾸어서 사퇴 의사를 밝히셨습니다. 심경에 변화라도 있으셨는지요.

    “문광부 장관이 전혀 사실과 다른 얘기를 언론에 발표하고 그것을 기자들이 그대로 쓰는 걸 보고 법적 대응을 하려고 변호사와 명예훼손 문제에 관한 검토까지 했습니다. 끝까지 싸울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런데 파월장병들이 문광부로 쳐들어가서 점거농성을 하겠다는 겁니다. 만약 그러다가 지난번 사태처럼 큰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내가 다 시켰다고 할 거 아닙니까. 나라가 시끄러워지는 것을 막고 싶어서 마지막으로 대통령의 뜻을 기다리기로 한 겁니다. 사퇴 의사를 표명했을 뿐이지, 아직은 사퇴한 게 아닙니다”

    “세상에 이런 억지가 어디 있어”

    박위원장은 ‘허위사실’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것은 7월25일 박지원 장관이 언론사 체육부장단 기자간담회에서 직접 배포한 보도자료를 두고 한 말이다. ‘월드컵조직위원회 위원장 교체와 관련하여’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는 ‘박세직 위원장을 사퇴시킬 수밖에 없다’는 문광부의 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광부와 박세직 위원장의 의견은 여러 지점에서 부딪친다. 먼저 1월18일 열린 조직위 총회의 성격이다. 문화관광부는 당시 박세직 조직위원장을 교체하려 했으나 박위원장이 “총선 때까지 연기해달라”고 강력히 요구해서 그 시기를 늦췄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박세직 위원장은 “말도 되지 않는 억지”라고 반박했다.

    “정말 교활한 거짓말쟁이야. 세상에 어떻게 그런 거짓말로 나를 자리나 구걸하는 졸장부로 만들어. 당시에 나도 문화관광부가 나의 재신임 여부를 검토중이라는 얘기를 들었어. 총회를 며칠 앞두고 박지원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아무 대답이 없어. 아, 뭔가 있구나, 직감이 가더라고. 그래서 총회가 열리던 날 아침에 박장관을 직접 찾아가서 물어봤어. 그랬더니 박장관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불화설이 있기는 하지만 대단한 문제가 아니다. 남자 세계에서 해결 못할 일이 뭐 있느냐. 정몽준 회장하고 셋이 모여 저녁이나 함께 하면 끝나는 거다’라고 했어. 만일 박장관의 말대로 내가 일을 잘못했으면, 그때 나를 선출하지 말았어야지. 그랬으면 나도 털고 나와서 총선에 출마했을 거 아냐. 만장일치로 뽑아놓고 이제 와서 그때 다 결정된 일이니까 물러나라고. 이런 억지가 어딨어.”

    박위원장은 박장관이 배포한 보도자료에 관해 물을 때마다 언성을 높였다.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말투도 반말조로 바뀌었다.

    1월18일이면 정치권이 온통 총선 분위기에 젖어 있던 무렵이다. 박세직 위원장 역시 자신의 지역구인 경북 구미에 출마할 것인가를 놓고 저울질을 계속하고 있었다. 당시 구미는 갑,을로 나뉘어 있던 2개 선거구가 통합되느냐의 여부로 관심을 끌었다. 통합될 경우 박위원장은 한나라당의 김윤환 의원 또는 제3의 후보와 맞붙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자민련 관계자에 따르면 박위원장은 당시 선거구 협상을 벌이던 사람들에게 “구미 지역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지역구의 여론도 수시로 보고받고 있었다. 결국 박위원장은 지역구 출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박위원장의 바람과는 달리 구미지역 선거구는 통합됐고, 한나라당은 공천과정에서 김윤환 의원을 탈락시켰다. 박위원장으로서는 3파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박위원장은 총선 출마를 포기하게 된다.

    “내가 직접 해보니까 국회의원과 조직위원장을 겸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지역구에 관심을 가졌던 건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월드컵이라는 국가 대사에 힘쓰고 싶었습니다. 그런 내가 정치생명 운운하며 자리를 구걸했다는 겁니까. 그렇게 모략할 수 있는 겁니까”

    “월드컵 때문에 총선 포기했다”

    ―당시 박위원장은 “지금 조직위원장을 바꾸면 총선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말을 했다면서요. 그건 총선과 조직위원장 자리를 연계시킨 듯한 인상을 강하게 풍깁니다.

    “그 비슷한 얘기는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선거를 치르는 마당에 경상도 출신이고 자민련 소속인 내가 물러나면 DJP 공조도 쉽지 않고 그렇게 되면 영남표를 얻는 데도 지장이 많지 않겠습니까. 그런 뜻으로 했던 말이지, 총선때까지 연기해달라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그건 완전히 다른 얘기 아닙니까.”

    ―사실상 총선에서는 승산이 없었던 것 아닙니까. 당시 여론조사 결과로도 한나라당의 김윤환 의원이 훨씬 앞서고 있었는데.

    “우리가 자체적으로 조사한 자료에서는 내가 앞섰어요. 또 우리 지역구는 외지 사람이 많아서 인물 중심으로 투표하기 때문에 이길 자신이 있었어요. 그런데 아주 혼탁하게 선거판이 진행됐어요. 정말 정치판에 대해 회의가 들었어요.”

    문광부 보도자료에서 가장 논란이 됐던 부분이 바로 박위원장과 정회장의 불화설이다. 박장관은 박위원장과 정회장을 화해시키기 위해 저녁 식사 자리를 주선한 적이 4번 있다. 하지만 두사람의 스케줄이 맞지 않아 3인의 만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문광부의 주장처럼 정말 의식적으로 자리를 피했던 것일까.

    “정말 교활해. 정확하게 말을 해야지. 장관이 제의한 술자리는 세 번이고, 한 번은 내가 제의한 거야. 총회를 앞두고 박장관이 처음 제안해서 1월27일로 날짜가 잡혔어. 그때 정회장이 해외출장을 가는 바람에 2월 1일로 미뤄졌어. 그런데 이번엔 박장관이 바쁘다는 거야. 세 번째 약속은 2월16일인데, 그 다음날이 바로 내가 출마 포기를 선언하는 날이잖아. 지역구 유지들도 만나야 하고 정신이 없어서 내가 양해를 구했지. 그 다음엔 내가 박장관과 정회장을 따로 만나서 술자리를 제안했는데 성사되지 않았어. 이렇게 자초지종을 설명해야지, 마치 밥 먹는 자리에 두 사람이 불화가 있어서 같이 안 나타난 것처럼 말하면 어떡해. 이렇게 거짓말을 해도 되는 거야.”

    “불화설은 조작된 루머”

    박위원장과 정회장의 불화설이 흘러나온 건 오래 전이다. 박위원장이 취임하던 직후부터 두사람이 월드컵의 주도권을 놓고 신경전을 펼친다는 얘기가 축구계에 나돌았다. 정회장이 FIFA(국제축구연맹)의 정보를 독점한다는 소문에서부터, 박위원장이 정몽준 회장을 무시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실제로 정회장은 박위원장 체제가 출범한 이후 여러 측면에서 달라졌다. 이홍구, 이동찬 위원장 시절엔 조직위원회 회의에 꼬박꼬박 참석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지만, 박세직 위원장이 들어온 뒤엔 회의에 불참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렇다면 두 사람 사이엔 실제로 이상기류가 있었던 걸까.

    “정부로부터 처음 월드컵조직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있었을 때 내가 먼저 정몽준 회장과 상의하고 결정했습니다. 그때 정회장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어려운 시기니 맡아주는 것이 좋겠다’고 합디다. 그래서 이 사람과 함께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조직위와 축구협회가 일하는 과정에 이견을 보인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업무에 관한 부분이지, 그걸 가지고 두사람이 불화를 겪는다고 말하는 건 웃기는 일입니다.”

    ―올 초에 조직위원장의 판공비를 100% 인상하는 문제로 정회장이 이견을 제시한 일도 있지 않았습니까.

    “정회장이 워낙 바쁘다 보니 결재과정에서 자세한 내용을 보고받지 못해서 생긴 오해입니다. 내가 알기로 정회장은 나의 판공비를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 예산의 효율적인 집행을 지적한 겁니다. 정회장이 문제를 삼아서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소위원회를 구성해 재검토하라고 지시했고, 결국 원안대로 통과됐어요.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이견이 있어서 바로잡은 것인데.”

    ―지난해에는 박위원장이 후배를 조직위 직원으로 채용하려다 정회장과 부딪친 일도 있었다는데요.

    “전문위원을 한 사람 두려고 했던 일이 있습니다. 내가 그래도 조직위원장인데 나를 측근에서 보좌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서야 말이 됩니까. 그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것도 못하면 위원장더러 뭘 하라는 겁니까”

    박위원장의 거취 문제는 5월말부터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문광부의 주장에 따르면 거듭 자진사퇴를 요구했지만 박위원장이 거부해 더 이상 안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던 셈이고, 박위원장의 의견으로는 5월25일 갑자기 닥쳐온 일이다. 박위원장에 따르면 5월25일 이홍석 문화관광부 차관보가 찾아와 “정치적으로 왔으니 정치적으로 가달라”는 의견을 전달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정말 5월25일 이전에는 문화관광부로부터 사퇴에 대한 어떠한 메시지도 받지 못했습니까.

    “도대체 무슨 얘기를 들었다는 거요. 박장관이 뿌린 보도자료에는 별 얘기가 다 있지만, 나는 모르는 일입니다. 박장관이 나보고 물러나라고 했으면, 내가 뭐하러 이 자리에 앉아 있겠어요. 5월25일에 이홍석이가 뜬금없이 나보고 자리를 양보하라고 하는데,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야. 아니 생각을 해보라구. 1월에 다 결정된 일이면, 뭐하려고 장관이 저녁 자리를 주선하려고 했겠어.”

    문화관광부의 보도자료에 따르면 박지원 장관은 박세직 위원장을 사퇴시키기에 앞서 자민련 고위층의 비서실장을 만난 것으로 돼 있다. 이 자리에서 박장관은 사퇴의 불가피성을 설명했고 자민련측 관계자도 “박장관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 자민련 관계자는 “사실무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자민련의 이수영 총재비서실장은 “박위원장 문제로 박장관을 만난 일이 없다”고 해명한 뒤 “여러 얘기가 들려오기에 박위원장을 만나서 ‘정회장과 잘 지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한 기억은 있다”고 덧붙였다.

    ―박위원장은 자민련 소속 당직자입니다. 거취문제를 자민련측과 협의했습니까.

    “5월26일이었을 겁니다. 자민련 이수영 실장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박장관을 만났더니 나를 사퇴시킬 수밖에 없다는 말을 했다는 거예요. 박장관이 이실장보고 그랬대요. ‘FIFA 부회장을 사퇴시킬 수는 없고, 박위원장이 물러나는 것이 좋겠다. 이 문제를 공조와 연결시키지 않았으면 한다. JP에게 잘 설명해달라.’ 그래서 이 실장이 JP에게 보고했더니 JP가 ‘무슨 소리냐’며 화를 내더라는 겁니다. 절차적으로 맞지도 않고, 사퇴할 이유도 없는데 내가 왜 물러섭니까. 그래서 나도 ‘이대로 그만둘 수는 없다’는 입장을 정리한 겁니다”

    박장관을 만나지 않았다는 이실장. 이실장과 박장관이 나눈 얘기를 직접 전해들었다는 박위원장. 이실장은 기자와의 전화인터뷰에서 “JP에게 그런 얘기를 보고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여기서 서로의 주장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대목에 또 한가지 미스터리가 있다. 자민련은 박위원장이 사퇴압력을 받는 와중에도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김학원 대변인이 짤막한 입장발표를 했을 뿐 당 차원의 대응은 없었다. 이와 관련, 김대변인은 의미있는 말을 남겼다. “교섭단체 문제로 민주당과 공조가 필요한 시기였다. 한 개인의 문제에 당력을 집중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6월5일. 박위원장에 따르면 이날 박장관으로부터 처음 사퇴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물러나라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처음엔 정몽준 회장과의 불화설을 꺼내더라구. 그래서 하나하나 설명했지. 불화가 아니고 오해라구. 그러자 조직위원회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거야. 경기장 사후관리 방안이 문제라나 뭐 그래. 그것도 지방자치단체가 잘 할 것이라고 설명해주니까 나보고 리더십이 부족하대. 이북에 월드컵 게임을 나눠준다는 발언을 정부와 상의도 없이 정몽준 회장이 했다는 거야. 정몽준이가 조직위원회 수석부위원장이니까 위원장인 나에게 책임이 있다는 식이잖아. 그래서 따졌지. 남북분산개최는 정치적으로 풀어야 할 사안인 만큼 문광부가 직접 챙길 일 아니냐구. 박장관도 말문이 막혔던지 그 다음엔 할 일 많이 했으니까 정부의 방침에 협조해달라는 거야. 그래서 생각했지. ‘야, 이 사람들이 상부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구나’ 하고….”

    6월7일. 박위원장은 자민련의 김종필 명예총재를 만났다. 일종의 SOS였다. 박위원장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김명예총재는 “화가 치민다. 내가 대통령 만나서 얘기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김명예총재의 의견도 문화관광부에 전했습니까.

    “그날 바로 박장관 만나서 JP의 말을 그대로 얘기했어요. 자민련도 받아들일 수 없고, 나도 납득할 수 없다. 이렇게 물러날 수는 없다. 뭐 그런 얘기였습니다”

    6월 말부터는 박위원장의 해외출장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먼저 박위원장이 유로2000을 관전하기 위해 출국하려다 문광부의 제지를 받은 일이 있다.

    “치사해. 유로2000은 모범적으로 치러진 대회야. 그런 곳에 가서 조직위원장이 놀다 오겠어?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르려면 쉴새없이 비즈니스를 해야 해. 가만히 앉아 있으면 일이 될 것 같아? 우리가 일본처럼 돈이 있어, 유럽처럼 축구붐이 조성돼 있어? 아무것도 없잖아. 올림픽조직위원장이라도 해본 나니까 일이 되는 거 아냐.”

    7월3일. 박위원장은 미국에서 열리는 월드컵 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출국길에 올랐다. 박위원장에 따르면 출국 직전 이홍석 차관보가 찾아와 다시 자진사퇴를 촉구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이차관보가 처음으로 ‘월드컵문화시민협의회장’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문화관광부에 따르면 박위원장이 ‘이번 출장만 다녀오면 본인의 거취문제를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문화관광부와 관련된 다른 직책을 문의했다는데.

    “정말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아. 자꾸 그렇게 거짓말을 하면 지금이라도 명예를 걸고 법적 투쟁을 벌일 거야. 월드컵을 홍보하려는 사람을 도와주지는 못할지언정… 나한테 먼저 이영덕 전총리가 회장으로 있다는 월드컵문화시민협의회 자리를 거론하기에 나름대로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갔다와서 얘기하겠다’는 말을 했던 거야. 그걸 그렇게 바꿔놓다니. 정말 치졸한 짓이야.”

    “신앙만 아니면 할복할 생각이었다”

    ―그럼, 미국에 다녀온 뒤에는 정확한 입장을 전달했습니까.

    “7월12일로 기억합니다. 집행위원회가 끝나고 점심시간에 이홍석 차관보를 내 방으로 불러서 얘기했어요. 내가 생각해봤는데 ‘이렇게 물러나는 것은 국가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요. 그리고 다음날인가 이차관보가 우리 보좌관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거야. 총회를 소집해서 불신임을 의결하겠다고. 어찌나 분통이 터지는지, 신앙만 아니었다면 할복이라도 할 생각이었어. 마음 같아서는 조직위원장 집무실에서 단식농성을 벌이든지,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걸 생각까지 있었다구.”

    ―총회에서 부결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몇몇 조직위원들이 전화를 해왔는데, 문광부 직원들이 직접 찾아와 서명하라면서 ‘박세직이는 정몽준과 사이가 나빠서 사퇴시켜야 한다’고 말했다는 거야. 어쩔 수 없이 이름을 적었다는 사람도 있었어. 조직위원들을 보면 체육인, 국영기업체 관계자, 종교인, 자치단체장 등이 많아. 그 사람들이 문광부의 의견을 거스를 수 있을 것 같아. 어림없는 일이야. 그랬다가 나중에 무슨 화를 당하려구. 작정을 하고 몰아붙이는데 내가 무슨 힘으로 그걸 막아내.”

    이 무렵부터 언론에 박세직 위원장의 사임 가능성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역시 정몽준 회장과의 불화설이 단골로 등장했다. 이런 가운데 원로자문위원들이 김대통령에게 건의문을 올렸다. 건의문에 서명한 사람은 모두 7명. 여기에는 민주당 국회의원인 김운용 IOC위원도 포함돼 있었다.

    ―국내 언론이 박위원장의 개인적인 문제를 부각시킨 반면, 외신들은 정치적 압력을 강조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답답하다는 거요. 장관이 뿌린 보도자료는 그대로 받아쓰면서, 왜 내 얘기는 실어주지 않는 거야. 정말 저돌적인 사람들이야. 후임자를 자기들끼리 다 정해놓고 나를 내보내려고 온갖 구실을 갖다붙인 거잖아. 이게 정권에 도움이 되나, 월드컵에 도움이 되나, 민심에 도움이 되나. 모두가 마이너스야”

    ―7월26일까지 박장관이 직접 배포한 보도자료에 강력히 반발하다가 바로 다음날 사퇴의사를 밝혔습니다.

    “싸움이 안될 것 같아서 그랬던 거야. 나한테 정보가 들어오는데 모두가 청와대의 뜻이라는 거야. 그래서 박장관이 무리해서 기자회견을 열었다는 거야. 대통령이 그렇게 마음을 정했다면 싸움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렇다면 대통령의 뜻이라는 판단을 내리고도 8월8일까지 사퇴 시기를 늦춘 이유는 무엇입니까.

    “원로자문위원들이 대통령의 공식적인 답변을 기다려보라고 해서 그런 겁니다. 지도자는 최후의 순간에 생각을 바꿀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박위원장은 인터뷰 말미에 민주당과 청와대의 음모설을 흘렸다. 하지만 기자가 “물증이 있느냐”고 묻자 답변을 피했다. “신문에 나왔으면 세상이 다 아는 얘기 아니냐”는 게 박위원장의 대답이었다.

    8월4일 오후. 기자는 다시 박위원장의 집무실을 찾았다. 불과 1주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후임자에 관해 의견을 주고받는 직원이 있는가 하면, 집무실 한쪽에는 박위원장의 책을 빼곡히 담은 박스가 놓여 있었다. 짐을 꾸리고 있었던 것이다.

    “동장이 퇴임해도 이보다 낫겠다”

    ―그동안 청와대나 문광부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까.

    “직접 들은 것은 없습니다. 원로자문위원께서 그런 말씀을 해주시더군요.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는데 박세직이가 물러나야겠다는 겁니다. 내가 사퇴해야 한다는 건의문이 청와대로 세 번이나 올라갔다는 겁니다. 두 번까지는 그냥 넘어갔는데, 세 번째는 어쩔 수가 없다는 얘기였습니다. 그게 김대통령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1주일 전에 비해 감정이 많이 누그러진 것 같습니다.

    “그때는 정말 분통이 터져서 극한적인 투쟁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싸움이 길어지다 보면 감정싸움만 커질 게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녹음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물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억울하더라도 내가 참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정치를 그만두실 생각도 있습니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정치가 환멸스럽지만, 세상사는 모르는 일 아닙니까.”

    박위원장은 정권이 민심을 잃고 있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특히 영남권의 민심에 대해 많은 말을 했다. 박위원장은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을 잘 고려해서 순리적으로 풀었어야지”라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8월8일 오후 5시. 세종문화회관 컨벤션센터에서 박세직 위원장의 이임식이 열렸다. 박지원 장관과 정몽준 회장은 참석하지 않았지만, 원로자문위원들의 얼굴은 보였다. 박위원장은 “다 지나간 일을 놓고 원망할 마음이 없다”는 말로 이임사를 시작했다.

    “저에 관한 항간의 소문에 대해서는 역사의 순리가 진실을 밝혀줄 것으로 믿습니다. 눈앞의 정치적 이익에 급급하면 큰 것을 잃게 됩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정의는 반드시 성취되는 날이 있고, 정의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습니다.”

    이임식이 끝난 직후 행사장 뒤편에서는 작은 소동이 있었다. 파월전우회 회원들이 불만을 터트린 것이다. “일 잘하는 사람 내쫓고 월드컵이 잘 될 것 같으냐” “동장이 퇴임해도 이보다는 낫겠다” 박수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박위원장이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박세직 월드컵조직워원장의 사회파동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박세직 위원장은 두 차례에 걸쳐 김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첫 번째 편지를 쓴 시점은 6월2일. 박위원장이 문화관광부로부터 사퇴하라는 메시지를 전달받고 심각하게 고민하던 무렵이다. 이때 박위원장은 A4용지 넉장에 붓펜으로 편지를 쓴 뒤 자신이 사퇴할 수 없는 이유를 기술한 문서를 첨부했다. 박위원장은 사퇴하겠다는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힌 직후 두 번째 편지를 띄웠다.

    존경하는 대통령님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목전에 두고 국사에 얼마나 골몰하시겠습니까. 이처럼 매우 바쁜 시절에 불행한 소생의 신상문제로 심려를 끼쳐드리게 된 점 어디까지나 소생의 부덕한 소치로 생각하며 대통령님의 용서를 먼저 구합니다. 연이나 김대통령님 내외분을 오래 전부터 존경하고 제가 받은 현직 분을 통하여 대통령님과 국가에 충성하려는 자세에는 추호의 변함이 없습니다. 이 점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현안의 문제로 제가 불명예스럽게 현직에서 물러나는 불상사가 생기기라도 한다면 이는 한평생 명예 하나만을 지키며 살아온 소생에게는 죽음이나 다름없는 가혹한 시련에 직면하게 됩니다. 대단히 불경스런 말씀이 될지 모르나 저는 육신적 생명의 연장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이며 조직위원장 직무실이 곧 저의 무덤이 될 것입니다.

    비장한 각오로 쓰는 소생의 충정을 헤아려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고 진언하는 바입니다. 만약 항간의 말대로 정몽준 회장간의 불화설에 기인한다면 그 불화가 무엇인지 지적해주시고 저에게 잘못이 있으면 저를 질책해주시기 바랍니다. 대통령께서 계시는데 저희 두사람간의 불화 때문에 위원장을 세 번째로 바꾼다면 국가의 체면과 신뢰도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개인의 인격과 명예와 인권을 누구보다도 존중해주시며 민주주의를 실천해오신 김대통령이시기에 결코 죄없는 저를 희생양으로 삼는 일은 없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대통령 내외의 만수무강하심과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을 기원합니다.

    2000년 6월2일

    불초 박세직 배상

    정몽준회장측 반응

    “박위원장 업무수행 문제 없었다”

    정몽준 회장은 이번 사태와 관련, 공식적인 대응을 피했다. “왜 불화설에 나를 끌어들이느냐”며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 측근들의 의견이다. 박정호 보좌관은 “정회장 성격이 직선적이고, 박위원장도 혼자서 결정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겉보기에 두 사람이 부딪치는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화가 있어서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정회장은 ‘박위원장의 업무수행에 문제가 없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말했다.

    박보좌관은 이번 사태의 본질은 ‘낙하산 인사’에 있다고 꼬집었다.

    “누군가를 조직위원장에 배치하려다 박위원장이 반발하니까 두 사람 관계를 증폭시킨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박보좌관은 정회장의 민주당 입당설이 나도는 가운데 이번 일이 추진됐다는 세간의 의혹과 관련, “정회장은 앞으로도 입당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축구협회 역시 불화설을 납득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처음에는 업무 스타일이 달라서 오해가 생긴 일도 있었지만, 최근엔 문제가 없었다는 것.

    축구협회의 한 관계자는 “누가 더 옳고 그르고의 문제보다는 누가 더 힘이 세냐의 싸움 같다”고 말했다.


    문화관광부 반응

    “계속 버텼으면 더 심한 것도 공개됐을 것”

    문화관광부가 가장 고심했던 부분은 조세형 전의원을 조직위원장으로 내정하고 박위원장에게 사퇴압력을 넣었다는 소문이다. 이와 관련, 문광부는 “만들어낸 얘기다. 후임자에 관해 어떤 결정도 내린 일이 없다”는 반응. 문광부는 오히려 박위원장이 사퇴압력을 피하기 위해 정치적 음모설을 제기했다는 주장이다.

    문광부는 기본적으로 박위원장이 조직위원회를 제대로 이끌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정회장과의 불화설, 조직관리 능력, 리더십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했을 때 적임자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는 것. 문광부 공보실의 한 관계자는 “장관이 주최하는 만찬에 한두 번도 아니고 네 번이나 펑크를 냈다면, 문제가 심각한 것 아니냐”며 불화설을 거듭 강조했다.

    박장관이 체육부장단 기자간담회에서 배포한 보도자료와 관련, 문광부는 “장관의 이름을 박고 뿌린 자료에 어떻게 거짓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문광부의 한 관계자는 “박장관과 힘겨루기를 하려다가 자민련이 도와주지 않으니까 발을 뺀 것 아니냐”며 박위원장의 사퇴 배경을 분석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계속 버텼으면 더 심한 것이 공개됐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민주당의 반응

    민주당의 여유 VS 조세형의 침묵


    민주당 관계자들은 이번 사태와 관련, 어떤 공식적인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문광부가 알아서 결정한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동교동계의 몇몇 인사들은 “임기가 끝났으면 물러나는 게 정상 아니냐”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98년에 민주당의 한광옥 전의원에게 조직위원장을 맡길 예정이었는데 본인이 고사하는 바람에 자민련 몫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는 민주당이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인 셈이다.

    정치권에서는 박위원장의 사퇴설이 흘러나온 직후부터 권노갑 고문이 조세형 전의원을 후임으로 적극 추천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조전의원측은 “신문에 난 것을 보고 알았다”며 내정설을 부인했다. 조전의원측의 한 관계자는 “앞으로 조직위원장을 맡을 수도 있는 거냐”는 질문에 “현재로서는 뭐라 말하기 어렵다”며 답변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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