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2월호

‘절망속 희망찾기’ 사회복지사 24시

  • 육성철 sixman@donga.com

    입력2005-05-06 15: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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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3일 아침 8시. 서울역 광장에는 찬바람이 가득하다. 올 겨울 들어 가장 춥다는 날씨지만, 염천교로 통하는 지하도에는 몇몇 노숙자들이 아침 잠을 청하고 있다.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아마도 점심때나 돼야 자리에서 일어나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으로 떠날 모양이다.

    지하도를 나와 봉래동 쪽으로 걷다 보면 오른편에 화신빌딩이 있다. 김유경씨(30)는 이 건물 5층 서울시노숙인대책협의회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다. 기자가 김씨를 처음 만난 건 서울역에 수백 명의 노숙자들이 진을 쳤던 98년 여름이다. 김씨는 이때부터 낮에는 서울역 광장 테이블에서, 밤에는 서울 시내를 돌며 노숙자들을 만났다. 그로부터 2년. 김씨는 노숙자가 시간대별로 움직이는 경로까지 자세히 꿰고 있다. 얼마 전에는 ‘노숙인에 대한 지역사회의 태도’를 주제로 석사학위 논문을 제출했다.

    김씨는 아침 일찍부터 밀린 서류를 정리하고 있다. 그는 “연말연시에 모처럼 쉬었더니 몸이 날아갈 것 같다”고 말했다. 평소 서울역을 떠나지 않고 사무실에서 먹고 잤던 터라 모처럼 얻은 휴식이 달콤했던 모양이다. 14년 만에 처음으로 동생과 영화구경을 했다는 말이 이채롭게 느껴진다.

    아침부터 전화벨이 연이어 울린다. 질문을 던지기가 미안할 정도다. 그는 통화를 끝낼 때마다 끊어진 말들을 천천히 이어갔다.

    “한 달 전쯤이었는데, ‘쪽방’에 살던 분이 새벽에 일을 나가다 자동차에 치여 돌아가셨어요. 그분은 ‘희망의 집’에 계시던 노숙자였거든요. 지금까지 행정기관에서는 거리에 있는 사람만 노숙자로 판단했어요. 그래서 그분들을 시설에 수용하는 일에 집중했던 거죠. 하지만 이젠 언제든지 노숙에 이를 수 있는 한계계층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마 경기가 회복돼도 노숙자는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쪽방’은 서울 회현동이나 동자동 등지에 집중적으로 분포돼 있는 0.3~0.7평 크기의 빈민층 거주지를 부르는 말이다. 전국에 8200여 개가 있는데 혼자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한국도시연구소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쪽방 거주자의 58.4%는 이미 노숙 경험이 있다. 이들은 거리를 떠돌다 돈이 조금 생기면 다시 쪽방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희망의 집’은 서울시가 노숙자의 재활을 돕기 위해 복지관 등에 설치한 보호시설을 말한다. IMF 이후 많은 노숙자들이 이곳을 통해 새출발했지만,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그들 중 상당수는 아직까지 거리를 떠돌고 있으며 시설 입소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김씨는 “노숙자 문제도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날씨가 추운데도 시설 입소를 기피하는 노숙자들의 경우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는 설명이다. 김씨는 “정신질환자, 만성 노숙자, 장애인, 여성 등은 시설 입소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며 자신이 목격한 어느 여성 노숙자의 사례를 소개했다.

    “남성 노숙자에게 돈을 받고 성관계를 맺는 여성 노숙자가 있었어요. 우리가 그분에게 접근하려고 하니까 험악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더라구요. 여러 명의 남성 노숙자들이 방어벽을 치는 거예요. 이미 그 여성을 중심으로 돈을 주고 관계를 맺는 그룹이 생긴 겁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여성이 입소한다고 해도 제대로 보호받을 수 있는 시설이 없다는 점이에요.”



    숨가쁘게 달려온 2년

    김씨는 서울대 소비자아동학과 91학번이다. 소비자아동학을 전공한 사람이 뒤늦게 사회복지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졸업을 앞두고 왠지 기업에 들어가서 기계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해서 서울대 학생생활연구소 상담원을 거쳐 서울역으로 나오게 됐다.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다 보니까 그 분야에서 일을 하게 되면 ‘내가 왜 사는지’에 대한 고민이 줄어들 것 같더라구요. 사회복지는 몸을 굴리면서 배우는 학문이잖아요. ‘공부하는 실무자’라고 할까요. 그런 게 내 체질에 딱 맞아요.”

    아무리 일이 좋다지만, 포기하고 싶은 적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데 한눈 팔 시간조차 없었다고 한다. 김씨는 일에 몰두할 때 ‘이러다 죽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한다. 자정이 넘도록 노숙자를 상담하고 회의를 마치면 새벽이다. 이때부터 상담내용을 정리하면 날이 밝는다. 그야말로 숨가쁘게 달려온 2년이었다.

    지난해 추석 연휴였다. 김씨는 그간의 활동을 정리할 생각으로 5일 동안 사무실에서 지냈다. 자물쇠로 문을 잠그고 그 안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밥을 냉동실에 넣어두고 칼로 잘라 해동시켜 고추장에 비벼 먹으며 글을 썼다고 한다. 그렇게 정리한 글들이 파일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그는 오래 전부터 기록하는 데에 집착하고 있다. ‘누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경험은 전수돼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다.

    “아마 제가 오락을 잘 몰라서 이렇게 살 수 있을 거예요. 자원봉사자 교육을 할 때도 저는 하드트레이닝을 강조해요. 백번을 스치는 사람보다 한 번을 제대로 파고드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죠.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에 전력을 다해 매달립니다. 얼마 전엔 13시간을 쉬지 않고 교육한 일도 있어요.”

    김치찌개로 점심을 때우고 남대문 경찰서 뒤편에 있는 지역상담센터로 갔다. 김씨는 이곳의 도움을 받아 쪽방지역 거주자들의 실태조사를 준비중이다. 조사방법과 일정을 자원봉사자들과 협의한 뒤에 사무실로 돌아온 시간은 3시 10분. 이제부터 지난해 사업에 대한 평가회의가 시작된다. 김씨는 회의자료를 챙겨들고 나가면서 한마디 툭 던진다.

    “전 아무래도 필드 체질인가 봐요. 힘들어도 그게 더 적성에 맞는 것 같아요.”

    김씨와 다시 마주앉은 건 밤 9시가 넘어서다. 얘기를 시작할 만하면 어김없이 전화가 걸려온다. 그냥 인사만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는 법이 없다. 안부를 묻고 새로운 업무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어쩌다 노숙자의 전화를 받으면 몸상태를 체크하고 입소방법을 자세히 알려준다.

    ―IMF 직후엔 ‘실직 노숙자’ 차원에서 문제를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경기가 좋아질 때까지 잠깐 보호하려는 차원에서 서비스했잖아요. 하지만 요즘 거리를 보면 ‘실직 노숙자’라는 각도에서 보기 힘들어요. 일반적으로 노숙자를 말할 때는 거리를 중심으로 파악하는 서비스는 시설에 제한돼 있어요. 여기서 논리적 모순이 생기는 겁니다. 거리에는 쉼터에서 아무리 손길을 뻗쳐도 개입할 수 없는 영역이 있어요. 저는 그 문제를 풀어야만 노숙자에 대한 총체적 접근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현 시스템에서는 거리의 노숙자를 그런 방식으로 풀기 어려운 것 아닙니까.

    “7살 먹은 아이가 아버지를 따라 술을 마시고 입에 담기 어려운 욕을 해요. 예순살 된 아버지를 구타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 아이를 그대로 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문제를 풀려면 정신과 의사가 반드시 필요한데 그게 안 돼요. 부처마다 의견이 다르고 서로 일을 떠넘기고 있어요. 정말 불행한 일이지만 노숙자 한 명이 죽어야 서울시장이 겨우 한마디 하는 게 현실이에요. 이제부터라도 노숙자를 중심에 놓고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서비스를 해야 합니다.”

    겉으로 나타난 현상만 보면 거리 노숙자는 2년 전에 비해 눈에 띄게 줄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더 심각해졌다고 볼 수도 있다. 서민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잠재적 노숙자’ 수는 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설 입소를 거부하는 만성 노숙자가 증가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노숙기간이 길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복귀 가능성이 낮다는 뜻이다.

    밤 11시. 간단한 회의를 마치고 야간상담 지역으로 갔다. 김씨는 오늘 시청역을 맡았다. 지하도에서 마주친 노숙자들 중에는 김씨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다. 김씨는 언제 어디서 무슨 말을 했는지를 떠올리며 친근하게 다가섰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조선족 여성의 얘기부터 술냄새를 물씬 풍기는 험상궂은 청년까지…. 콘크리트 바닥에 판자를 깔고 누운 그들 곁에서 김씨는 꾸준히 쉼터 입소를 권했다.

    11시 30분. 공익요원들이 지하철 역사 안쪽에 누워 있는 노숙자들을 밖으로 내몰았다. 셔터를 내릴 시간이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힘없이 돌아서는 그들에게 “오늘 밤만이라도 따뜻한 방에서 주무시는 게 어떻습니까”라고 물었지만, 대답이 없다. “여기서 죽지 쉼터엔 안 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자꾸 귀찮게 굴지 말고 컵라면 값이라도 달라는 사람. 김씨는 그에게 “돈을 드릴 테니 내일 다시 만나서 따뜻한 방으로 가자”고 말한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손에 돈을 얹어주고 돌아선다. 김씨의 혼잣말이 들린다. ‘내일 꼭 오셨으면 좋겠는데….’

    2시간에 걸친 상담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 평가회의까지 끝낸 시간은 새벽 2시. 그는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없다.

    ―요즘 사회복지사의 ‘전문성’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회복지학을 공부한 사람의 강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현장에서 일해보면 차이가 뚜렷해요. 가장 큰 게 사회복지 마인드겠죠. 노숙자 상담을 한다고 했을 때 처음부터 철저하게 클라이언트의 처지에서 문제를 풀어간다는 점이 달라요.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자활을 도울 수 있는 전략 부분에서 사회복지사는 기본이 돼 있다는 거죠. 실제로 이쪽 일을 하다가 사회복지학을 다시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복지와 무관한 분야로 진출하는 것은 처우나 근로조건이 결정적인 문제 같습니다.

    “그것도 있지만 사회복지사가 일할 수 있는 영역도 중요해요. 노숙자 쉼터의 경우 사회복지사가 잡무를 처리하기도 바쁜 실정입니다. 그래서 의욕이 있어도 버티기 힘들어요. 저는 사회복지사의 영역만 잘 갖추면 열심히 일할 사람은 많다고 생각합니다.”

    새벽 2시 30분. 김씨는 “오늘도 밤을 새워야 할 모양”이라며 서류 정리를 시작한다. 벌써 여러 곳에서 자료 요청이 들어온 탓이다.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뿌듯하다”고 답했다. 월급 120만원에 1주일 평균 70시간이 넘는 고단한 생활. 요즘 신세대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김씨의 열정적인 삶을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사표를 던지는 공무원들

    지난해 10월 경기도 안양시 안양2동사무소에서 일하던 사회복지사 박정희씨가 세상을 떠났다. 박씨는 아이를 낳고 2개월 뒤에 일을 시작했는데 자신이 위암 환자인 것조차 모르고 과로에 시달렸다고 한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하 국기법)이 제정된 뒤 일선 사회복지공무원들은 한마디로 ‘전쟁’을 치렀다. 수급권자를 결정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자산조사를 벌였는데, 한 사람당 400~500가구를 맡은 경우가 허다했다. 1가구 평균 1시간만 잡아도 2개월간 500시간을 현장조사에 매달린 셈이다.

    행정기관에 소속된 사회복지사들의 격무는 요즘도 여전하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다른 길을 찾는 사람도 크게 늘었다. 지난해에만 무려 300여 명이 사표를 제출했고(현 4500명) 앞으로도 더 있을 전망이다. 2배로 늘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벌써부터 ‘3D직종’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형편이다. 정부는 당초 2001년에 700명을 충원하겠다는 방침을 세웠으나, 최근 일용직 공무원을 사회복지직으로 대치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사회복지계의 반발은 거세다.

    1월 3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신길3동사무소를 찾았다. 박미진씨(34)는 9년차 사회복지공무원으로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처음 발령받은 곳은 경기도 남양주시. 3시간이 넘는 출퇴근길을 8년이나 계속한 끝에 지난해 서울로 근무지를 옮겼다. 이 과정에 박씨의 공무원 등급은 7급에서 8급으로 낮아졌다. 연봉 1800만원. 그 자신도 사회복지사가 아니고 단순한 월급쟁이였다면, 벌써 그만두었을 거라고 말한다.

    사회복지공무원들에게 지난 1년은 지옥과도 같았다. 새로 수급권자를 정하고, 지급액을 재조정하는 과정에 수많은 민원이 쏟아졌다. 기껏 고생하면서 욕은 욕대로 먹어야 했다.

    “국기법에 대해 말들이 많지만, 저는 기존 생활보호법보다는 훨씬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요. 솔직히 말해서 IMF 직후엔 보호받을 사람도 아니면서 돈을 받는 경우가 꽤 많았거든요. 그걸 바꾸는 과정에 손해를 보았다는 느낌을 가질 수는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예산이 정해진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는 없잖아요.”

    박씨는 수급권자의 금융거래 내역을 조회할 수 있게 된 것이 ‘국기법의 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금융거래 내역만으로 정확히 판별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내놓고 있다. 이에 대해 박씨는 “억울한 사람도 있겠지만, 앞으로 보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박씨는 현재 173가구를 맡고 있다. 미아리 같은 저소득층 밀집 지역에 비하면 수월한 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장에 자주 나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잡무만 처리해도 하루가 다 간다는 것이다. 신규 수급권 신청자가 계속 늘고 있어 그쪽을 조사하기도 시간이 빠듯한데 아침부터 민원이 밀려들면 하루종일 화장실도 못 가고 자리에 붙어 있어야 한다.

    사회복지사 한 사람이 국기법, 장애인, 아동복지, 노인복지, 청소년 업무에 행정잡무와 관공서 심부름까지 모두 처리하는 상황에서 사회복지사에게 질좋은 서비스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일 것이다.

    무리한 업무량은 후유증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박씨는 3개월 이상 제시간에 퇴근을 못했다. 안양시에서 공무원이 과로사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낮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집에 가서 아이들을 잡는 거예요. ‘명색이 사회복지를 전공했다는 사람이 무식한 어머니가 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후회를 하면서도 일에 치이다 보면 집에서 아이들을 돌볼 여유가 없습니다.”

    사표를 던지고 싶은 생각이 치밀어오를 때마다 그는 사회복지사로서 첫발을 내딛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어머니 없이 자란 초등학생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할머니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저에게 ‘어머니 없는 자리를 채워달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후원자를 연결시켜 주었는데, 지금껏 건강하게 자라고 있어요. 사회복지사만의 보람이라고 할까, 뭐 그런 걸 의지하며 살아가는 거죠.”

    최근 사회복지 공무원들 사이에 최대의 관심사는 신규직원 채용 문제다. 행자부는 공무원 구조조정 차원에서 일용직을 사회복지직으로 전환시키겠다는 구상이고, 사회복지계에서는 사회복지 전공자를 채용해야만 복지서비스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맞서고 있다. 결국 이 문제의 핵심에는 이른바 ‘사회복지사의 전문성’이 있는 셈이다.

    “사회복지사는 사회적 약자를 다루는 직업이에요. 그 사람의 문제를 정확히 규명해서 욕구를 파악하고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죠. 잘 모르는 사람은 단순히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기본적으로 상담기술이 필요하고, 지역사회 자원을 연결시키는 능력, 아동·청소년·장애인·노인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받쳐줘야 합니다.”

    또한 박씨는 지속성을 강조했다. 누구나 처음에는 의욕을 갖고 일을 시작하지만 부실한 복지체계 때문에 금방 지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없으면 이 바닥에서 버티기 힘들다는 얘기다. 박씨는 뒤늦게 사회복지 공무원이 되려는 친구를 간곡히 말렸다고 한다. 맨땅에 헤딩하다가 나가떨어지는 동료를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란다.

    김대열씨(47)는 18년째 홀트아동복지회(이하 홀트)에서 일하고 있다. 홀트는 국내외 입양을 주선하고 관리하는 기관이다. 한국에서 입양문제는 언제나 ‘뜨거운 감자’였다.

    세계적으로 ‘유아를 많이 수출하는 나라’라는 오명을 듣고 있는 한편, 핏줄을 중시하는 전통적 가치 때문에 국내 입양에 대한 인식도 부정적이다.

    김과장이 처음 홀트에 몸담은 80년대 중반 우리나라의 연간 해외 입양자 수는 7000~8000명에 달했다. 그 숫자는 96년 ‘입양촉진 및 절차에 관한 특례법’이 제정된 이후 2000명대로 줄어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내 입양은 해외입양의 절반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초창기 입양의 상당수가 전쟁고아나 결손가정 아동인 데 비해 최근에는 미혼모 입양이 급증한 것이 특징이라 할 것이다.

    “장애아의 경우 국내 입양은 좀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입양이 된다고 해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어려워요. 그런 아이가 외국으로 가면 건강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국내 입양이 최선이지만, 그게 어렵다면 차선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과장은 입양의 성패는 사후관리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사후관리를 못 하면 ‘베이비세일’이라는 비판을 받겠지만, 사후관리를 잘 하면 아동복지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김씨는 자신이 직접 사후관리 프로그램을 운영한 일도 있다. 해외 입양 아동의 친부모 만남, 뿌리찾기, 캠프활동 등이 그것이다.

    “사후관리를 통해 해외 입양을 떠난 아이들이 그 사회에서 정체성을 갖게 해줘야 해요. ‘나를 버린 나라’가 아니라 ‘나를 잘되게 하기 위해 보내준 나라’로 인식하게 만들어야죠.”

    김과장은 해외입양 업무에 종사하다가 89년부터 행정직으로 옮겼다. 당시만 해도 사회복지사가 현장이 아닌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게 이례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동료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 김씨 자신은 물론 동료들도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한다.

    “사회복지사가 행정을 알면 효율을 몇배로 끌어올릴 수 있어요. 사회복지 마인드를 갖고 있는 사람이 기획이나 예산배정 등에 참여하면 현장에서 큰 힘을 받을 수 있습니다.”

    최근 사회복지사의 처우 개선에 관한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는 것과 관련, 김과장은 조금 다른 견해를 보였다. 사회복지사는 자기희생과 노력을 앞세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김과장은 “우리나라의 사회복지는 아직 씨를 뿌리는 단계에 있으므로 성급하게 열매를 따먹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사회복지사가 열심히 일하면 클라이언트가 인정하게 돼 있습니다. 클라이언트가 ‘우리를 돕는 사람들이 이런 대우를 받아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될 때 처우는 자연스럽게 좋아질 겁니다.”

    이것은 김과장이 살아온 뒤안길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농촌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중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김과장은 검정고시와 야간대학을 거쳐 사회복지사의 길로 들어섰다. 대구 동산병원에서 정신치료사로 일하던 시절 전문적인 서비스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서 홀트에 입사한 것이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회복지사는 꼭 맞벌이를 했으면 좋겠다 생각해요. 의욕이 있어도 여건 때문에 도중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사회복지도 제대로 하려면 계속 재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그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에요.”

    보호가 절실한 장애아동

    1월2일 오전 10시. 서울 방배동의 장애아동 가족지원센터에서는 새해 업무준비가 한창이다. 지민희씨(34)는 이곳에서 장애아동 보호와 유료헬퍼(전문도우미) 활동을 총괄하는 팀장이다. 지씨는 한신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뒤 잠시 무역회사를 다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싫증을 느끼고 장애아동에 관심을 갖게 됐다. 더 늦기 전에 배운 것을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지난해 지씨는 사회복지공동모금의 지원을 받아 유료헬퍼 제도를 도입했는데 이것은 기존 자원봉사자와 달리 유료 봉사자를 고용해 장애인 서비스의 질을 높이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제도. 센터에서 장애인에게 쿠폰을 나눠주고, 장애인은 다시 유료 봉사자의 서비스에 대한 대가로 쿠폰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40명이 교육을 받고 현장에 투입됐는데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지만, 문제점도 나타났다.

    “늘 수동적으로 받기만 했던 장애인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부분도 있었어요. 하지만 도우미의 의욕을 최대한 끌어올리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예산이 많지 않았거든요.”

    유료헬퍼는 외국에서 보편화된 시스템이다. 특히 뇌졸중 등을 앓고 있는 중증 장애인의 경우 유료헬퍼는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중증 장애인들은 방안에서 홀로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장애아동 가족지원센터에서는 주간보호도 실시하고 있다. 서초, 강남 지역 장애아동들이 학교를 마친 뒤 이곳에서 보호를 받는다. 프로그램은 노래부르기, 만들기, 이야기하기 등이다.

    센터에서는 장애아동 가족들을 상대로 캠프도 자주 열었다. 이 프로그램은 가족들에게 많은 힘을 주었다고 한다.

    “첫째는 ‘외롭지 않다’는 느낌일 겁니다. 서로 경험을 나누면서 앞으로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장애아동을 둔 가족끼리 갖는 ‘동류의식’도 큰 효과라고 봐요.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하지만, 캠프에서는 서로 감싸줄 수 있잖아요.”

    장애아동 가족지원센터에는 하루 평균 10여 명의 장애아동이 찾아온다. 나이는 11세에서 21세까지 다양하고 대부분 정신지체장애인이다. 이들이 머무르는 놀이방은 10여 평 남짓. 함께 노래부르는 시간을 빼면 어수선할 때가 많다. 하지만 이런 시설이라도 이용할 수 있는 아이들은 그래도 행복한 편일 것이다. 아직도 수많은 장애아동들이 집 밖에 나서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보람을 먹고 산다

    신용석씨(29)는 지난해 11월부터 강서노인복지관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다. 그는 대학에서 전자계산을 전공했는데 사회복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 다시 대학을 다녔다. 부모님이 장애인 복지시설을 오랫동안 운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학에서 배운 이론을 현실에 접목시켜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아직 얼마 안 됐지만, 참 다른 게 많더라구요. 그걸 생각하면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일단 열심히 뛰기로 했습니다.”

    강서구는 서울시에서도 복지관이 많은 지역에 속한다. 그만큼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이곳에서 김씨는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계층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주는 일을 하고 있다. 순회상담, 쌀·밑반찬 지원, 빨래 서비스 등이 그것이다. 특히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중점적으로 보살피고 있다.

    “언론에서는 엄청난 세금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들어가는 것으로 보도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현장에서 보면 방세와 가스비를 겨우 내는 사람들이 많아요. 추운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지내는 분이나, 도움을 받지 못하고 끝내 돌아가시는 분을 볼 때면 답답할 뿐입니다.”

    신씨는 보통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업무를 시작한다. 퇴근 시간은 밤 9~10시. 보호대상 가구를 돌며 상담하는 일이 대부분이고, 복지관에서 사회교육 서클을 진행할 때도 있다. 다른 곳에 비해 근로조건이나 대우는 좋은 편이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없는 건 아니다. 특히 능력있다고 소문난 선배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이 바닥을 떠날 때는 더욱 가슴이 아프다.

    “사회복지를 너무 좋아해도 떠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합니다. 사회복지사들이 남들보다 좋은 대우를 해달라는 건 아니잖아요. 그저 사회복지사로서 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을 만들어달라는 건대, 그게 안 되고 있어요.”

    사회복지사 생활 3개월. 그가 느끼는 보람도 여느 복지사와 다를 게 없다.

    “추운 날 밤에 저녁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달동네를 다니는데, 할머니 한 분이 손을 잡아끌며 커피 한잔 먹고 가래요. 길모퉁이까지 나와 안 보일 때까지 배웅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분들은 사람의 손길이 그리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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