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考試 권하는 사회

  • 곽대중

考試 권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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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들의 ‘고시 투자’가 본격화되면서 재학생들의 고시합격률도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2000년 실시된 42회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한 802명 중 재학생은 199명으로 24.8%를 차지한다. 97년의 16.7%, 98년 21.1%, 99년 22.3%로 꾸준히 높아지는 추세다. 예전에는 3학년 때 진로를 고민하고 4학년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취업과 시험을 준비하던 반면, 이젠 1학년 때부터 고시 스터디 그룹을 준비하는 경우가 쉽게 눈에 띈다.

“대학 4학년을 死학년이라고 하잖아요. 가장 안정적인 취업통로로 당연히 공무원을 선망할 수밖에 없고, 사법시험은 일단 목표를 크게 잡는다는 취지에서 택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양다리 걸치기’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일단 사법시험 준비하다 안 되면 행정고시로 바꿀 수 있고, 그것도 안 되면 7급으로 낮출 수도 있잖아요.”

S대 법학부 2학년인 김모양의 이야기다. 2000년 3월 서울대 법대신문 ‘두루저널’이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1, 2학년 때부터 사법시험을 준비하겠다는 응답자가 전체의 78%에 달했다.

고시의 매력 중 하나는 실력만 있으면 면접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 그래서 운동권 경력이 있는 고시생들도 눈에 띈다. 지방 C대학 총학생회장 출신인 노모씨도 2년째 신림동에 거처를 잡고 사법시험을 준비중이다.

“단순히 입신양명을 바라고 공부를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학생운동을 통해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던 것이나 법조인이 되어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나 본질은 다를 것이 없다고 봅니다. 열정만으로 평가받으려던 과거에서 벗어나 이제는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습니다.”



실제 몇 해 전 사법시험에는 80년대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386세대 고시생들이 다수 합격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럼 이렇게 모여든 사람들이 모두 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일까.

“고시촌이라고 하니까 엄숙하게 공부만 하는 동네일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관악경찰서 관내에서 가장 사건 사고가 많은 곳이 신림 9동입니다. 녹두거리가 있어서 서울대생들이나 고등학생들이 술 먹고 행패 부리는 일도 있지만, 고시생들이 관련된 사고가 대다수입니다.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서로 시비가 붙어 싸움이 나는 경우가 많고, 고시의 중압감을 술에 의지해 풀려는 사람들을 자주 목격합니다. 아까운 인재들이 이렇게 썩어가는구나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오죠.”

신림 9동 파출소 박정길 순경의 말이다. 10여 년간 헌책방을 운영해온 장모씨는 “절반 이상은 마음을 다잡지 못한 채 거대한 고시행렬에 얹혀 흘러가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물론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도 많지만, 밤늦도록 불야성을 이루는 술집들을 보면 부모가 피땀 흘려 보내주었을 돈이 저렇게 날아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장씨는 ‘노는’ 고시생들을 세 부류로 나누어 재미있게 이야기한다. 첫째는 유유자적(悠悠自適)형. 한두 번 낙방의 고배를 마시다 보니 적응이 되어 세월이 가든 말든 한량처럼 대책없이 사는 고시생을 이른다. 둘째는 허장성세(虛張聲勢)형. 몇 년 고시공부하다 보니 법지식은 많이 늘어 걸핏하면 법조문을 들먹이고, ‘헌법 공부는 이렇게 해야 돼’ 하는 식으로 허풍을 떠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좌충우돌(左衝右突)형. 며칠간 공부를 잘 하다가도 초조함과 불안감에 술집, 혹은 PC방, 만화방에서 다시 며칠을 탕진하는 스타일이다.

몇 해를 고시공부에 매달리다 병원을 찾는 경우도 많다. 신림 9동 한복판에 자리잡은 연세복음병원 서성배 원장은 “다른 병원에 비해 요통 환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것은 확실하다”고 이야기한다. 50분 공부하고 10분 쉬는 것이 몸에 좋다는 것은 상식인데 한번 집중하면 좀처럼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하다 보니 고시생 중 요통 환자가 많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많은 것은 스트레스성 질환으로 두통이나 위궤양, 그리고 정신질환이다. 서원장은 ‘물러설 줄 아는 자세’를 강조한다.

“몇 년 공부를 하다가 이건 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과감히 떨쳐버려야 하는데, 여러 이유로 그 전환점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자주 상담하게 됩니다. 그 동안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있더라도 미래를 생각하며 다른 길을 찾아나설 것을 권합니다.”

서울 명문대 출신인 K씨의 경우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나왔다. 그 동안 그는 한번도 일등을 놓치지 않았고, 부모의 권유로 법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당연한 코스로 신림동에 자리잡았다. 하지만 인생에서 한번도 ‘실패’, ‘탈락’이라는 단어를 접해보지 못했던 그에게 연이은 사시 낙방은 다른 이들보다 훨씬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결국 몸도 마음도 황폐해져 상담 치료를 받는 중이다.

어사화 꽂고 금의환향하는 날

정부는 2003년부터 지금의 암기 위주 사법시험을 대학수학능력시험와 비슷한 ‘공직 적격성 테스트(PSAT)’로 전환할 방침이다. 그리고 영어시험을 폐지하는 대신 국가가 공인하는 TEPS, TOEIC, TOFLE 점수로 대체하고 1차 시험 합격 자수를 10배로 늘려 사시 과열을 줄여나갈 계획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이 얼마나 실효를 거둘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시의 전신(前身)은 과거(科擧)라 할 수 있다. ‘과거’라는 이름이 처음 쓰인 것은 고려 광종 때부터. 각 과목마다 사람을 선발한다 하여 과거(科擧)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392년 건국부터 갑오경장으로 폐지된 1894년까지 502년간 848회의 과거 시험을 통해 1만5137명의 대과 합격자를 배출했다. 조선조 500년 동안 그 숱한 양반들 중 고작 1만5000여 명이라면 얼마나 경쟁이 치열했을지 알 만하다.

같은 양반이라도 몇 대째 과거 합격자가 나오지 않으면 양반으로 취급해주지 않았고 몰락하기까지 했으니 온 집안이 자식의 과거 합격에 얼마나 기대를 걸었을지 쉽게 짐작이 된다. 대과에 합격하여 어사화를 머리에 얹고 백마에 올라 풍악대를 앞장세우며 유가(遊街)하는 것은 가문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그 고을의 영광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어도 이러한 사람살이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신림동 고시촌은 이런 장원급제의 꿈을 아직도 이어가는 곳인지 모른다.

올해 사법시험은 2월18일에 1차 시험을 치른다. 코앞에 다가온 시험 때문에 요즘 신림동 분위기는 긴장감이 감돈다. 밤 11시. 학원 강의가 끝나자 골목마다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신림동의 하루는 여기서 다시 시작한다. 딱 맥주 한 잔만 하자며 P씨를 근처 호프집으로 억지로 끌고 들어갔다. 시험이 목전에 있어 손님이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빈 테이블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 떨어지면 벌써 다섯 번째입니다. 1차라도 한번 붙어봤으면 좋겠는데, 이젠 부모님께 돈 달란 말도 못 하겠습니다. 모두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것 같아 매년 명절 때면 집에 내려가기가 두렵습니다. 올해도 설날은 신림동에서 보내게 될 것 같습니다. 차라리 그게 낫습니다.”

혹시 이번에도 떨어지면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에 “이젠 뭔가 결단을 내릴 것”이라고 대답하면서도 왠지 모를 여운을 남긴다. 그도 노장파로 자리를 굳힐 셈인가.

그는 끝내 술을 입에도 대지 않은 채 술집을 나섰다. 거리에는 여전히 사람들로 활기가 넘치고 PC방, 비디오방, 만화방의 네온사인이 현란하다. 요란한 음악과 함께 인형뽑기에 열중한 사람들도 눈에 띈다.

기회의 균등이라는 조건만 충족된다면, ‘시험’이라는 제도는 혈통과 신분을 따지지 않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대단히 합리적이며 근대화된 제도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제도가 사람을 옥죄고 황폐하게 만드는 사슬이 되어버리는 것이 문제다. 다시 독서실로 향하는 P씨의 뒷모습을 보며 “파이팅”이라도 힘차게 외쳐주고 싶었지만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란다”는 상투적인 인사로 대신했다. 오늘밤 꿈에서 그는 어사화 꽂고 백마에 올라탄 채 고향집에 들어서고 있을지 모른다. 그 꿈을 같이 나누는 3만 명을 뒤로 한 채 신림동을 나섰다.

신동아 200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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