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7월호

‘기초 체력’ 바닥난 기초학문

현장보고

  • 송홍근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05-05-23 16: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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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여대 한국사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임혜련씨(28)는 대학원에 진학한 뒤 아직까지 후배를 받지 못했다. 장래가 불투명한 한국사 분야의 대학원 진학을 학부 후배들이 꺼리기 때문. 설상가상으로 학부제가 본격적으로 실시된 뒤로는 학과의 존립을 걱정할 정도로 한국사 전공자 수도 현저히 줄었다.

    임씨는 “시장이 대학을 점령해 버렸다”면서 “인문학을 고사시키는 쪽의 문교정책과 학교의 근시안적인 정책이 지속된다면 학과 자체가 없어질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 대학 한국사학과 전공과목은 수강인원을 채우지 못해 폐강되기 일쑤다. 학부제를 시행하고 있는 타 학교 사학과도 비슷한 실정.

    한국사 학위를 받기 위한 전공 이수 학점도 36학점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학생이 다른 학문 분야를 복수전공하고 있기 때문. ‘부득불(不得不)’ 한국사를 전공하게 된 학생들은 복수전공 과목이나 영어, 컴퓨터 등 취직에 도움되는 공부에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한다.

    “2중 전공제도는 비인기 학과의 정원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정도 학점을 이수하고 학사 학위를 받는다는 것은 난센스죠.”



    임씨는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가슴에 품었던 꿈을 접은 지 오래다. 전공 교수가 정년 퇴임을 해 결원이 생겨도 신임 교수를 채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인문학 분야에서, 교수가 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5월28일 서울 K대 도서관. 열람실 책상을 각종 고시용 수험서가 점령하고 있었다. 소위 문(文), 사(史), 철(哲)을 공부하는 사람은 한 손에 꼽을 정도. 대학 도서관이 ‘거대한 고시원’으로 변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벼랑 끝에 선 기초학문

    고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은 관련 학과 학생에 한정되지 않는다. 취업이 어려운 기초학문 전공자의 상당수가 사법고시, 공인회계사 자격시험 등에 뛰어들고 있다.

    “전공 공부는 졸업을 하기 위해 시험 때나 잠깐 하는 정도죠. 저 같은 문학 전공자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요. 고시에 승부를 걸든가, 아니면 취업을 위해 미치도록 영어공부에 매달리든가. 전공을 살려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사람은 ‘정신나간 놈’으로 취급당하기 십상이에요.”

    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는 김모씨(27)는 “기초학문이 학생들에게 버림을 받은 이유는 ‘밥그릇’을 만들어 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취직이 잘 되는 법대나 경영대에 다녔다면 고시에 청춘을 걸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갓 입학한 대학생 중에는 아예 재수를 선택하는 이도 적지 않다. 올해 서울대 비인기학부에 입학한 김모씨(20)는 중간고사를 마치고 아예 재수를 결심한 경우.

    “‘그런 학문을 공부해서 뭐에 써먹을 거냐’는 주변의 얘기도 있었고 무엇보다 스스로 만족할 수 없었어요. 이번 입시에 실패하면 학교로 되돌아가야 하겠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전공에 미래를 걸 생각은 없어요.”

    그는 지난해 입시에서 복수 지원했다 낙방한 사립대 법대에 진학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처럼 기초학문이 벼랑 끝에 섰다. 대학에 불어닥친 거센 시장논리가 기초학문을 퇴출 대상 1호로 전락시켜 버렸다. 취업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기초학문을 외면하는 학생들과, 모집단위 광역화(학부제)·BK(두뇌한국)21사업으로 대표되는 정부의 기능성·실용성 중심 교육정책이 가뜩이나 ‘기초체력’이 약해진 기초학문 분야의 입지를 더욱 좁히고 있는 것이다.

    준비 안된 학부제가 主犯

    기초학문의 위축현상은 대학 교양과정에서도 심각하게 드러난다. 대학 교양과정이 시장논리에 따라 재편됐고 대학생들의 ‘학문편식’ 현상이 심각해져 모든 학문의 기본이 되는 교양과정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각 대학은 1995년부터 학사운영에 대한 자율성이 증대돼 교양과목 학점배점기준, 졸업소요학점, 학기당 취득학점 등을 대학이 자율적으로 지정할 수 있게 되자 영어회화, 컴퓨터 등의 강의를 강화하고 한국사, 철학개론 등을 교양필수에서 제외했다. 심지어 교양국어를 가르치지 않는 대학도 생겨났다.

    또 학점을 따기 쉬운 실용과목엔 수백 명이 몰리는 반면, 그나마 개설돼 있는 철학·문학·수학 등 진지한 성찰을 요구하는 교양과목은 수강신청자가 적어 폐강되거나 여러 단과대학 학생들을 모아 대형 강의로 진행하기 일쑤다. 경희대 2학년 김지영씨(22)는 이렇게 말한다

    “원하는 전공학과에 들어가려면 교양학부 학점이 좋아야 하는데 어려운 과목을 수강하면 결과는 뻔하죠. ‘무엇을 배우고 싶으냐’가 아니라 ‘어느 교수가 학점을 잘 주고 얼마나 공부하기 쉬우냐’가 수강과목을 선택하는 기준입니다.”

    그러나 기초학문에 대한 ‘찬밥 대우’는 대학생들의 지적 수준을 하락시킨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수학과 물리학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컴퓨터 지식을 쌓아봐야 기형적인 지식이 될 뿐이에요. 대학생들의 학력 수준이 매년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지적 수준을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아요.”

    고려대 김인환 교수의 이야기다. 기초학문을 전공하는 교수들은 한결같이 “교양과정에서 모든 학문의 뿌리인 ‘기초학’이 소외되는 것은 국가의 미래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라고 주장하며 기초학이 튼튼해야 나라가 산다는 논리를 펼친다.

    교육 전문가들은 기초학문 붕괴의 ‘주범’으로 학부제(모집단위 광역화)를 지목한다. 1995년부터 각 대학이 도입하기 시작한 이 제도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전공 분야를 접하게 하고, 기존의 학문 분야를 아우를 수 있는 통합인재를 육성하겠다는 것이 그 근본 취지.

    그러나 명분과 실제는 다르다. 각 대학들이 교수와 학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준비 안된’ 학부제를 받아들인 것은 정부로부터 BK 21 지원금을 받아내기 위해서라는 게 대학사회의 상식이다. “철저한 준비 없이 학부제가 시행되면 기초학문이 고사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는 “지원금을 포기할 것이냐”는 실리론에 묻혀버린 것.

    “모집단위 광역화는 처음부터 잘못됐습니다. 미국식 제도를 아무런 준비 없이 도입한 교육당국의 책임이 가장 크고 무분별하게 적용한 각 대학도 책임이 있어요. 미국은 학부에서 기초학문에 대한 지식을 쌓은 뒤 전문대학원에 진학해 응용학문을 익힙니다. 학부제를 시행하기 이전에 전문대학원을 만들었어야 해요.”

    서울대 기초학문협의회 의장 유평근 교수의 주장이다. 유교수는 또 “준비 안 된 학부제도를 도입한 이후 부작용이 곳곳에서 속출하고 있다”고 말한다.

    학부제 실시 이후 우선 학문간 서열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서울대 학적과에 따르면 자퇴생 수가 99년 129명에서 지난해 204명, 올해 4월 현재 219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자퇴생 가운데 90% 가량은 서울대나 사립 명문대의 인기학과로 이동했다는 것이 학교 관계자의 귀띔이다.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 등 사립 명문대도 재학생 이탈로 고민하고 있다.

    사립 명문대 97학번 이모 씨(23)의 경우. 그는 ‘전공을 바꿔야겠다’고 결심했다. 지금 전공으로는 성공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학문간 서열은 신라(新羅)의 골품제도와 비슷합니다. 6두품 학문을 전공했다고 취업을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평생 진골, 성골 뒷바라지만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이씨는 계열을 이과로 바꿔 의대에 진학할 계획이다. “군대 문제도 해결된 만큼 합격할 때까지 계속 공부하겠다”고 한다.

    인기학과를 선택하기 위해 스스로 1년 낙제를 하고 원하는 전공에 재도전하는 ‘기현상’도 벌어진다. 서울대 98학번 H씨는 ‘전공재수’를 해 입학동기들보다 1년 늦게 전공과정에 들어갔다. 2학년을 마치고 인기전공에 지원했다 낙방한 뒤 1년 동안 재수한 것.

    학과에서 학부로 모집단위가 광역화되면서부터 ‘전공재수’ ‘전공삼수’란 조어(造語)가 더 이상 낯선 말이 아니다. 올해 서울대 자연대의 경우 지망한 전공에서 탈락한 학생은 38명. 그중 18명은 2차로 다른 전공을 지원해 3학년이 됐지만 나머지 20명은 전공재수를 시작했다.

    1995년 학부제 시행 이후 서울대 자연대의 천문, 해양, 지질학 등 비인기 전공은 지원자가 급감해 30~40명이던 정원이 현재 절반 정도로 줄었다. 학과 단위로 학생을 선발할 때도 비인기 학과였지만 정원 채우기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고려대 한문학과 관계자들은 2000학번 전공지원 결과가 발표되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지원자 수는 단 3명. 1지망에서 탈락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정원은 어느 정도 채웠지만, 모집단위가 학부에서 단과대학으로 광역화되는 내년이 더 걱정이다. 서양어문학부의 경우도 편중 지원은 마찬가지. 영어영문학과는 193명이 지원해 오히려 정원이 늘어났지만 노어노문학과와 불어불문학과엔 각각 8명, 15명이 지원했을 뿐이다.

    학교 전체 정원까지 고민해야 하는 지방대학은 사정이 더 나쁘다. 충남 호서대학교가 철학과를 폐과하기로 결정한 뒤 지방대 기초학문학과 교수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더욱 커졌다. 지원자가 한 명도 없으면 간판을 내려야 하기 때문. 호서대 철학과는 98년 학부제 실시 후 1지망 전공배정자가 99년 2명, 2000년 2명으로 줄어든 뒤 2001년엔 단 한 명도 지원자를 받지 못했다.

    열악한 연구환경도 원인

    학생들도 “학부제 강행으로 학생의 전공 선택권이 박탈되고 있다”면서 문제를 제기했다.연세대 총학생회는 모집단위 광역화 반대투쟁을 계속해서 전개할 예정이고, 한총련 소속 각 대학 총학생회도 대대적인 반대농성을 계획하고 있다. 연세대 총학생회 이수연씨(21)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또다시 ‘전공 입시’를 겪게 만드는 학부제는 반드시 재고돼야 한다”며 “아무리 좋은 제도도 부작용이 크다면 중단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기초학문 전공자들의 학부제 철회 요구가 거세지자 서울대는 2002학년도 입시부터 ‘전공 예약제’를 도입, 총 417명을 일반 전형과 분리해 따로 선발하기로 했다. 정원의 일부를 학과 단위로 모집하겠다는 것. 지원자가 적은 학과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고육책인 셈이다. 사범대 불어교육과와 독어교육과가 전공 예약제로 10명을 선발하고 인문대 불문과 독문과가 각각 10명씩, 노문과 서문과 언어학과가 8명씩을 전공예약제로 선발할 계획이다.

    기초학문 분야는 응용학문 분야와 달리 정부, 학교의 지원 이외에는 연구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정부 지원은 응용학문 분야에 집중돼 있다. 정부와 대학들은 심심치 않게 기초학문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해왔다. 그러나 연구비 지원 결과를 보면 기초학문에 대한 정부와 대학의 인식이 쉽게 드러난다.

    국무총리실의 감독을 받는 정부산하 연구기관 중 인문학 연구를 담당하는 인문사회연구회에는 9개 연구소가 속해 있다. 이들 단체의 총예산은 798억5400만원, 이 가운데 정부출연금은 405억3500만원이다. 반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올해 총예산이 1145억9600만원에 이른다. 그중 정부출연금은 501억8100만원. 인문사회연구회 소속 9개 연구기관의 총예산을 다 합쳐도 KIST 한 곳보다 적다는 계산이 나온다.

    “공대 대학원생들은 장학금, 연구비 등을 지원받으면서 공부하는지 모르겠지만, 전 박사 5학기가 될 때까지 정부 보조금이나 장학금은 구경도 못 했습니다. 인문학연구소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관심이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학을 전공하는 이승일씨(32)의 이야기다.

    ‘10년째 강의 노트가 바뀌지 않는다’ ‘기초학문 분야는 가시적인 성과가 없다’ 등의 비판에 대해 기초학문 전공자들은 “연구 보조금과 연구시간을 충분하게 제공해준 적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실제로 대학교수만큼 전화통화하기가 어려운 사람들도 없다. 강의, 각종 회의, 논문심사, 회의에 불려다니다 보면 제대로 연구할 시간이 부족한 것이 사실. 진지한 성찰, 끝없는 실험을 해야 하는 기초학문 전공자들에겐 더욱 그렇다.

    “기초과학 연구자에겐 시간이 가장 중요합니다. 서울대처럼 열악한 연구 환경에선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수 없었습니다. 일부 대학을 제외하고는 거의 서울대와 비슷한 상황일 거예요.”

    1999년 서울대에서 고등과학원(KIAS)으로 자리를 옮긴 황준묵 교수의 말이다.

    ‘박사(博士)실업’

    대학가에서 “광부, 농부에게는 딸을 시집보내도 기초학문 박사과정 학생에겐 절대 안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할 정도로 박사(博士)실업은 심각한 문제다.

    벤처기업에서 웹 기획자로 일하는 김희경씨(35)는 99년 가을학기를 마지막으로 시간강사 생활을 접었다.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딴 문학박사 학위가 오히려 걸림돌이 되더라고요.”

    나이 때문에 지원할 수 있는 곳도 적었지만 서류전형을 통과하기도 힘들었다. ‘너무 많이 배웠다’는 이유로 회사들이 퇴짜를 놓았던 것. 그는 대학부설 사회교육원에서 웹 마스터 교육을 수료하고 나서야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김씨는 “힘들게 한 공부가 쓸모없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순수학문 분야의 박사 실업은 ‘수요’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기초학문의 부가가치에 대한 무지 때문”이라고 말했다.

    “77학번부터 인문학 전공자의 교수 임용은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차라리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취직했더라면 지금 같은 박탈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거예요. 평생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3년째 시간강사 생활을 하고 있는 황모씨(37)의 하소연이다.

    황씨는 “대학원까지 진학하는 사람이 없어져 실업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지만 학문 공백의 후유증은 엄청날 것”이라고 개탄했다.

    현재 박사과정에 재학중이거나 시간 강사로 일하는 사람들이 순수학문의 마지막 전공자가 될 것이라는 ‘단절론’마저 나오고 있다. “오죽하면 학술진흥재단에서 ‘학문보호종’까지 선정해 특정 학문 분야의 명맥을 유지하게 하겠느냐”는 한탄이 나올 정도다. 학술진흥재단은 대학 시간강사들의 지원을 받은 뒤 심사를 거쳐 문학, 어학, 철학 등 기초과학분야 연구자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다.

    지난해 서울대 대학원 입학 전형에서 사상초유의 미달 사태가 벌어진 것도 기초학문에 대한 극단적 위기론을 뒷받침한다. 역대 최저 경쟁률을 보인 2001학년도 서울대 박사과정에서 인문대는 0.65 대 1로 단과대 중 가장 낮은 경쟁률을 보였다. 석사과정도 학생들이 기피하기는 마찬가지다.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 사립대의 인문학 기초과학 석·박사 과정 지원율도 감소 추세이고 지방대학의 경우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다음은 경북대 국문과 이상규 교수의 분석.

    “인문학 계열의 박사 10명 중 8명 가량이 현재 시간강사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1998~2000년 박사학위 취득자의 경우 국문학·철학박사의 실업률은 80%이상이고 역사학의 경우는 75% 가량 됩니다. 자연계열에선 수학과가 최악으로 70% 이상의 실업률을 보이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누가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겠습니까? 정부와 학계는 학문후속세대의 적체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서울대 종교학과 윤원철 교수는 최근 한 세미나에서 대학원 졸업생들의 취업 현황을 조사해 발표했다. 세미나 참석자들은 ‘예상된 결과’에도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96년부터 5년간 서울대 인문대가 배출한 박사학위 수여자가 355명인데 그중 정규 교수직에 채용된 사람은 123명(33.6%)에 불과했던 것. 타 대학과 비교하면 상당히 높은 수치지만, 91년부터 95년까지 배출된 박사학위자 152명 중 132명(87%)이 교수로 채용된 것과 비교해보면 90년대 중반 이후 인문학 전공 박사학위자의 취업난을 쉽게 알 수 있다. 윤교수는 “조사결과가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90년대 중반 이후 인문학 분야가 급속도로 침체된 것을 보여주는 실례”라며 “앞으로 순수학문 전공자가 교수 자리를 얻기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5월18일 오전 서울대 대학본부 4층 총장실에선 교직원 수첩을 놓고 서울대 이기준 총장과 인문대·사회대·자연대학장 사이에 고성이 오갔다. 인문대학, 사회대학, 자연대학을 먼저 적고 나머지 단과대학을 가나다 순으로 배치하던 서울대 교직원 수첩이 지금까지의 관행과 다르게 전 단과대학을 가나다 순으로 만들어진 것이 사건의 발단. 서울대 인문대·사회대·자연대 교수 352명은 이날 ‘기초학문의 위기’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고 기초학문에 대한 지원을 촉구했다.

    사소한 시비가 이처럼 크게 불거진 것은, ‘교직원 수첩’이 기초학문의 위상을 되살리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교수들을 자극했기 때문. 서울대 자연대의 한 교수는 “‘수첩 사건’에 대해 서울대가 내분을 겪고 있다’ ‘공부도 안 하는 교수들이 밥그릇 싸움만 한다’는 식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며 “현재 기초학문이 처한 위치와 기초학문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라고 말했다.

    지난해까지 사용하는 데 불편이 많았는데도 3개 단과대학을 교직원 수첩의 가장 앞부분에 기록한 것은 기초학문 분야가 대학의 중심이라고 생각해서다. 서울대 도서관을 중심으로 기초학문을 연구하는 단과대학이 자리잡고 나머지 단과대학이 배치된 것도 같은 이유다. 권영민 서울대 인문대학장의 설명. “언어, 문학, 사상, 역사, 철학이 학문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어요. 서울대의 이념도 기초학문을 중심으로 응용, 실용학문을 육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학의 이념이 하루아침에 변할 수는 없지요.”

    서울대 교수들의 성명서 발표 파동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가장 먼저 바통을 넘겨받은 것은 전국대학 인문학연구소 협의회. 협의회는 “실용성이 대학운영의 기본 잣대가 돼 인문학이 고사 위기에 처했다”면서 “대학과 정책 당국의 오류가 오늘날 인문학의 위기를 자초한 매우 큰 이유이며 정부와 대학은 기초학문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협의회가 성명서를 발표한 데에 이어 서울대 인문대, 사회대, 자연대 3개 단과대학은 선(先)기초학문 후(後)실용학문 중심의 학제 개편, 법대·의대·경영대 학부과정 폐지, 전문대학원 제도 도입을 요구했다. 이화여대, 성균관대 등에서도 기초학문 지원을 요구하는 교수들의 모임이 활발해지면서 기초학문을 살려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지고 있다.

    인문학과 디지털의 만남

    그런데 인문학이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은 “시대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전공자의 책임”이라는 지적도 있다. 학생들은 이미 문자보다는 영상, 분화보다는 통합에 익숙해져 있는데 교육 수요자의 변화된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학문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초과학은 응용과학과 접목될 수 있는 기회가 많아 상황이 다소 나은 편이지만 인문학의 경우는 지식산업화의 측면에서 보면 전망이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첨단기술과 인문학의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인문학자들 사이에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다.

    “학생들은 이미 과학과 예술의 결합에 익숙해졌어요. 21세기 새로운 패러다임은 인문학, 디자인, 사회학, 공학이 한데 융합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안주해서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어요.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잖아요. 새롭게 등장한 디지털과 인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것이 인문학자의 당면 과제입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최혜실 교수의 말이다.

    최교수는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하이퍼텍스트 등 새로 등장한 장르의 콘텐츠를 제작하는 디지털스토리텔링이라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하고,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규약을 만드는 것은 인문학적 기반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최교수의 믿음이다. 공학 전공자들은 자연히 첨단기술과 어울리는 양질의 콘텐츠를 만드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

    연세대학교 설성경 교수는 ‘춘향전’을 영어, 일본어, 중국어, 불어, 독일어 등 5개 국어로 즐길 수 있는 CD롬을 제작해 수출까지 하고 있다. 그가 CD롬 작업을 시작한 이유는 인문학의 대중화, 세계화를 위해서다. 그는 사이버 대학 등에서 강의를 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고전 문학의 응용학’이라고 이름붙였다.

    설교수는 “분필만 갖고 학문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며 “진지한 인문학적 성찰을 바탕으로 디지털 기구를 이용해 수요자에게 좀더 가까이 갈 수 있는 학문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최근 ‘구운몽’과 ‘홍길동전’의 디지털화 작업에 여념이 없다.

    같은 대학 서상규 교수는 1980년대 후반부터 컴퓨터를 활용한 국어 정보화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수천만, 수억 어절에 달하는 대량의 언어 자료를 컴퓨터로 처리해 언어의 내적 구조를 밝혀내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것. 생산된 국어학 정보는 언어심리학, 언어병리학, 언어교육 등 실용적인 분야에서 사용할 수 있다.

    서교수는 “경제적 가치 추구라든가 실용성 추구와 같은 시대적 경향이나, 컴퓨터 사용에 따른 방법론의 변화에 있어서 인문학이 다소 느리게 적응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유독 인문학만이 변화에 뒤떨어져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정보기술을 응용한다기보다는 새로운 정보기술을 만들어내는 영역으로서 인문학이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 사회에서 이와 같은 인문 지식과 디지털 첨단기술을 결합해 지식을 대중화 하는 작업은 이제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90년대 초반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을 때 기반을 닦은 것이고, 디지털과 인문학의 융합에 대한 사회의 인식도 아직까지는 낮은 편이다.

    그렇다면 선진국들은 기초학문을 육성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 미국에서도 기초학문 분야를 지원하는 학생 수가 감소하는 추세다. 시장논리에 따라 학제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수요가 줄어든 기초학문 분야의 학생 수가 줄고 있는 것. 그렇다고 우리나라처럼 기초학문이 경시되는 것은 아니다. 기초학문을 교양과목으로 철저히 교육시키겠다는 대학의 확고한 방침이 서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유수한 대학들이 운영하고 있는 심도 있는 교양과정이 그러한 예다. “폭넓은 교양교육을 밀도 있는 전공교육에 앞서 행한다”고 밝힌 예일대 문리과대학의 교육 취지가 대표적인 경우. 하버드대학은 대학 새내기들에게 ‘중핵교양과정(core curriculum)’을 이수하게 한다.

    서울대 유평근 교수는 “하버드대학의 ‘코어 커리큘럼’은 1960~1970년대의 대학교육을 반성하며 하버드대학이 총력을 기울여 만들어낸 것”이라며 “80년대 초부터 미국 고등교육 개혁은 교양교육의 재확립과 내실화에 모아졌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학의 교양교육 프로그램이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분야를 골고루 폭넓게 공부할 수 있도록 인지능력을 계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호기심을 충분히 충족시킨 뒤 의과대학, 법과대학, 경영대학 등에 진학할 수 있도록 한 하버드대학의 학제는 학생이탈로 초조해하는 국내 기초학문 교수들의 질투를 살 만하다.

    권영민 서울대 인문대학장은 “미국은 학부에서 기초학력을 쌓은 뒤 법, 경영학, 의학 등 전문대학원에 진학해 프로페셔널이 되는 시스템이 구축돼 있다”면서 “우리처럼 기초학문을 홀대하면서 응용학문 분야를 육성해봐야 그 결과는 자명하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철학교육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지역에서도 젊은이들이 응용학문을 선호해 기초학문 지원자 수가 감소하는 추세지만, 전통적으로 철학 등 기초학문이 모든 학문의 토대가 돼왔기 때문에 최근에도 천대받지는 않는다.

    프랑스인들은 스스로 세계에서 가장 지적인 국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자부심의 밑거름이 바로 철학교육이다. 프랑스 조스팽 정부가 98년 집권하자마자 철학 교육이 위축되는 것을 우려해 초급과정에 철학과목을 개설하도록 했을 정도다.

    프랑스 대학입시(바칼로레아)엔 철학이 포함돼 있다. 바칼로레아의 철학 시험문제가 어떻게 출제되었는지는 범국민적 관심사다. 노상카페에서 시험문제를 가지고 난상토론이 벌어질 정도. 인문계의 우수한 학생들이 입학하는 고등사범학교 출신들도 졸업 후 처음엔 일선 고등학교 철학교사로 임명된다.

    또한 프랑스 각급 학교에선 언어교육도 강조한다. 초등학교 국어수업이 주 9시간이나 된다. 국어 한 과목을 문법, 읽기, 쓰기, 철자, 암송, 동사변화 등 여섯 가지 부문으로 나눠 교육한다. 언어교육이 전 교과목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학에서도 제대로 된 국어교육을 받지 못하는 우리의 실정과는 딴판이다.

    독일 정부도 과거 동독 지역의 기초학문 분야가 부실하다고 생각해 정신과학센터를 구동독 지역에 세우는 등 기초학문을 적극 육성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4대학(소르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고려대 현택수 교수는 “프랑스도 순수학문 지원자가 줄어들고 있지만 연구자들은 국가가 지원하는 국립연구소 등에서 경제적인 걱정 없이 연구하고 있다”며 “프랑스 대학 교양과정에 미래를 밝힐 수준 높은 인식론 강의가 넘치는 것은, 연구가 얼마나 활발한가를 반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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