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제2의 수지김’ 정은복 사건 추적기

의혹의 안기부 수사 20일, 자살시도, 그리고 실종20년

  • 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제2의 수지김’ 정은복 사건 추적기

2/5
안기부에 끌려간 지 20일이 지난 9월20일경, 정은복씨를 비롯해 구금됐던 가족들은 ‘혐의 없음’으로 훈방조치됐다. 당시 안기부의 사건기록은 ‘정경희와 접촉했으리라는 혐의점이나 정황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고 되어 있다. 연행이 갑작스러웠듯 석방 또한 갑자기 이루어졌다.

심문 녹취록과 자술서 위주로 구성된 안기부 사건기록에는 정씨가 자필로 작성한 ‘간첩인정 자술서’가 포함돼 있지만, 당시 안기부 수사관들은 “스트레스에 시달린 정씨가 다른 가족들의 석방을 위해 거짓진술한 것으로 밝혀져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내용 자체가 횡설수설인 데다 사실확인을 해보니 전혀 신빙성이 없었다는 것.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 이 자술서에는 본인의 서명은 물론 간인 등 공문서에 필요한 확인도장이 하나도 없다.

“내가 살면 가족들이 고통받는다”

문제는 안기부의 이러한 조사가 당시 실정법으로도 명백히 불법이었다는 사실. 1차적으로는 영장 없이 이루어진 불법 구금이었고, 20일이라는 기간 또한 법정기한(48시간)을 훨씬 넘긴 것이었다. 더욱이 구체적인 혐의사실이나 증거도 전혀 없는, 말 그대로 ‘일단 찔러보는 식’의 조사였다.

이에 대해 당시 조사에 참여했던 수사관들은 “지금 기준에선 불법이었음을 인정하지만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4인1조로 구성된 이 사건 담당 수사팀 가운데 팀장과 주무는 이미 사망했고, 보조업무를 맡아 조사에 참여했던 수사관들은 의문사위에서 “영장발급 없는 강제연행이나 법정구금기한 초과 등은 당시 정보기관들의 대공수사에서는 관행화된 일이었다”고 주장했다.



안기부에서 풀려나와 집으로 돌아온 정은복씨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남편과 자녀들에게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왜, 어떤 조사를 받았는지도 설명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날, 정씨는 가족들의 눈을 피해 수면제 40알을 삼켰다. 그의 가슴 위에는 “내가 살아 있으면 남편과 자식들이 고통을 받는다”는 편지와 함께 막내아들의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놀란 가족들이 재빨리 병원으로 옮긴 덕분에 정씨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응급조치와 내과치료 후 정씨는 ‘생명의 전화’ 상담원 활동 당시 알고 지내던 정신과 전문의 이모 박사가 있던 이대 동대문병원으로 옮겨졌다. 사건 이후 이박사를 만난 정씨는 사람을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고 한다.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박사에게 “나를 아는 척하면 당신도 안기부에 끌려가 피해를 입을 것이니 모르는 척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

유감스러운 것은 사건발생 20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진료기록은 보존연한이 넘어 폐기되고 없다는 점이다. 정씨의 담당의사였던 이박사도 현재 건강이 좋지 않아 당시 상황을 명확하게 증언하기 쉽지 않은 상태다. 어렵사리 연결된 전화통화에서 이박사는 “차트가 없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증상이었는지 회상하기 어렵다”고 말했지만, 지난 2001년 의문사위에서는 “무언가에 쫓기는 듯 불안해 보이는 피해망상과 신경쇠약 증세를 보였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한 달 가량 치료를 받고 퇴원해 집에서 요양하던 정씨는 이후 “다소간 차도를 보이는 듯했다”고 가족들은 말한다. 자녀들의 귀가시간이 밤 아홉 시만 넘기면 패닉상태에 빠지는 등의 몇 가지 증세를 제외하고는 희망을 가질 만했다는 것. 성당에서 정씨를 다시 만났던 김보좌주교 또한 “이전에 비해 말수가 상당히 줄었지만 그래도 이겨내는 듯 보여 한편으로는 대견스러웠다”고 회상한다. 그러던 정씨가 안기부에서 풀려나온 지 석 달이 채 못 된 12월의 겨울밤, 딸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고

관심의 초점은 단연 정씨가 20일간 안기부 지하조사실에서 어떻게 조사받았는가에 쏠린다. 그러나 조사를 주도한 수사관의 진술 없이 보조역할을 한 이들의 증언만으로 당시 상황을 복원하기란 쉽지 않은 일. 특히 이들은 “고문 등의 가혹행위는 일절 없었다”고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오로지 계속해서 자술서를 작성하게 하고 이를 기초로 심문하는 작업만 20일 동안 진행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모두 사실이라 해도 정씨가 심리적인 충격을 입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 1기 의문사위 조사팀의 판단이었다. 평범한 가정주부가 악명 높은 ‘남산’에서 20일을 보내며 공포분위기 속에서 조사를 받은 것만으로도 정신적인 타격이 결코 작지 않았으리라는 것. 정씨가 엄청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간첩행위 자술서’를 허위로 작성했던 것이나, 귀가한 다음날 자살을 시도한 것만 봐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설명이다.

2/5
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목록 닫기

‘제2의 수지김’ 정은복 사건 추적기

댓글 창 닫기

2019/11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