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역사 산책

한국 불교 통해 본 중국문화

민중불교 기여한 김교각, 조화사상 설파한 원효

  • 글: 유재신 토론토대 동아시아학부 석좌교수

한국 불교 통해 본 중국문화

2/4
그는 중국 민중불교에 크게 기여한 승이었다. 그는 정원 10년(A.D. 794), 99세때 뭇 승려를 불러놓고 작별 인사를 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에 돌 구르는 소리가 요란했다고 한다. 그가 앉은 채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지났으나 그 시체가 변하지 않았으며 그 형태가 불경에서 묘사한 지장보살과 흡사하여 승려들이 그를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인정했다. 이후 김 지장보살로 높이 숭앙하고 그를 기려 신광(神光)령에 탑을 세웠으니 그것이 지금의 단신보전(丹身寶殿)이다. 그를 분향 재배하러 오는 사람들이 수천리 밖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그 종적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태백이 쓴 ‘지장보살찬(地藏菩薩讚)’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대웅(大雄)이 하늘을 덮습니다. 해와 달도 빛을 잃을 것입니다. 오직 거룩한 부처의 지혜만이 빛을 뿌릴 수 있고 또한 그 자애로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고통의 나라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디서나 영원토록 사악한 흐름을 막을 수 있는 분이 있으니 지장보살을 제외하고 그 누구를 꼽을 수 있겠습니까.

원래 김교각이 젊었을 때는 성격이 급하고 행실이 방종하여 그 재주를 믿고 왕족들과 거리낌없이 호탕하게 놀아났으나 결국 그 유흥이 지나쳐서 고통이 되었으며 그 고통에서 헤어나기 위하여 부처님께 지혜와 검을 빌리고 자기의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고 성스러운 향객(香客)이 되기 위하여 빌었는데 다행히 신력의 도움을 받아 그 고통이 말끔히 가셨습니다. 그래서 소인은 무딘 필치로나마 이 일을 찬미하려 합니다.‘마음이 빈다면 티없이 깨끗해진다네 / 살아서 지나친 것 삼가매 / 죽어서 부처가 되었네 / 채색으로 그린 성상(聖象) / 실로 허황한 소문 아니었고 / 눈을 쓸 듯 만병을 고치니 / 하늘도 맑게 개이었네 / 찬양할사 바다 같은 공덕 / 대를 이어 영원히 알려지리라’(이태백 전집 제28권에서).”

이처럼 김교각은 지장보살로 숭앙받았으며 이태백이 찬시를 쓸 정도로 중국 민중불교에 크게 공헌한 고승이었다.



혜초 신라의 명승 혜초는 어려서 당나라에 유학을 했는데 개원 7년(A.D. 719)에 금강지가 서역으로부터 오니 금강지를 스승으로 모셨다. 후에 해로를 따라 인도에 도착하여 오천축(五天竺)이라 불리는 불교 성지를 방문했다. 그는 서북인도와 중앙아시아를 다녀서 돌아왔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혜초의 노정(路程)을 현재 남아있는 책의 기록에 의거해 더듬어 보면 남해(南海)로부터 중인도(中印度)로 들어가서 석가가 열반한 구시나국(拘尸那國 Kusinagara)을 지나 피라비기국(彼羅?期國 Varanasi), 즉 지금의 인도 북부 베나레스를 거쳐 마갈타국(摩?陀國 Maradha)에 이르러 록야원(鹿野苑), 구시나(拘尸那), 사성(舍城), 마가보제(摩訶菩提) 등 사대영탑(四大靈塔)을 순례하고 또 중천축(中天竺)의 사대탑(四大塔)을 보고 남인도로 들어갔다.

천축(天竺)이란 인도를 칭하는 것이고 오천축(五天竺)은 오인도(五印度)라고도 하는데 동서남북중(東西南北中) 다섯 방향으로 나뉜 인도 전체를 일컫는다. 그는 인도를 여행했을 뿐만 아니라 이란, 아라비아, 시리아 등 중(中)아시아 제국들을 방문하였으며 파미르 고원을 넘어서 727년 11월에 당나라 수도인 장안(長安)으로 돌아왔다.

혜초는 범문(梵文·범자로 된 글)과 한문(漢文)에 정통해 법문불경(法問佛經)을 한문으로 번역하여 불교에 관한 저술을 많이 남겼다. 특히 54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밀교(그 시대에 인도에서 유행하던 불교의 한 파)의 전파에 공헌했다. 그가 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73권은 그가 지나온 인도 및 서아시아 여러 나라의 정치 종교 풍속 등에 관한 기록으로 역사적인 가치가 크다.

이외에도 인도에 다녀온 중국의 고승들이 쓴 인도 기행문, 즉 법현(法顯)의 불국기(佛國記), 현장(玄裝)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등이 있었으나 중국의 고승들은 주로 인도의 상류사회와 접촉했다. 그들이 불타가 탄생한 성지 인도를 추상적으로 미화하려 한 데 반해 혜초는 주로 평민들과 접촉하면서, 철학적인 면에 치중하여 비현실적이며 역사의식이 부족했던 그 시대의 인도 사회를 본 그대로 기록했다. 때문에 ‘왕오천축국전’은 그 시대의 인도와 서역(西域)과 인도의 정세, 역사, 문화를 바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2/4
글: 유재신 토론토대 동아시아학부 석좌교수
목록 닫기

한국 불교 통해 본 중국문화

댓글 창 닫기

2021/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