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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으로 본 문종 독살설

주치의는 왜 종기 걸린 임금에게 독성 강한 꿩고기를 처방했나

  • 글: 이종호 과학국가박사 mystery123@korea.com

조선왕조실록으로 본 문종 독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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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의(內醫) 전순의가 내전(內殿)에서 나오면서 말하기를, “임금의 종기가 난 곳이 매우 아프셨으나, 저녁에 이르러 조금 덜하고 농즙(膿汁)이 흘러 나왔으므로, 두탕(豆湯)을 드렸더니 임금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음식의 맛을 조금 알겠다’ 하셨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기뻐하였다.(문종 2년 5월5일)



유시(酉時)에 임금이 강녕전(康寧殿)에서 훙(薨)하시니, 춘추(春秋)가 39세이셨다. 이때 대궐의 안팎이 통하지 않았는데, 오직 의관(醫官)인 전순의, 변한산, 최읍만이 날마다 나와서 안부(安否)를 보살폈지마는, 모두가 범용(凡庸)한 의원(醫員)이므로 병증(病症)을 진찰(診察)할 줄은 알지 못하여, 해로움이 없을 것이라고 여기면서 임금에게 활 쏘는 것을 구경하고 사신(使臣)에게 연회를 베풀도록 하였다. 종기의 화종(化腫)이 터지므로 전순의 등이 은침(銀針)으로써 종기를 따서 농즙을 두서너 홉쯤 짜내니, 통증(痛症)이 조금 그쳤으므로, 그들은 밖에서 공공연히 말하기를, “3, 4일만 기다리면 곧 병환이 완전히 나을 것입니다”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曹)에서는 날마다 임금의 기거(起居)를 물으니, 다만 대답하기를, “임금의 옥체(玉體)가 오늘은 어제보다 나으니 날마다 건강이 회복되는 처지입니다” 하였다.

이날 아침에 전순의 등이 나아가서 안부를 보살피고는, 비로소 임금의 옥체가 위태로워 고생하는 줄을 알게 되었다.



(중략)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외정(外庭)에서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어째서 청심원(淸心元)을 올리지 않는가?” 하니, 전순의가 비로소 청심원을 올리려고 했으나 시기가 미치지 못하였다. 조금 후에 임금이 훙서(薨逝)하였다(사망하였다는 뜻).(문종 2년 5월14일)



문종이 사망하고 단종이 즉위하자 곧바로 문종의 사망 원인을 놓고 의관들에 대한 문책이 시작된다. 의관들에 대한 문책 등 전말의 중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의금부에서 전순의는 수종(首從)으로 죄를 중하게 하고, 변한산, 최읍은 1등을 감하여 곤장 100대에 유(流) 3천리로 하고, 조경지, 전인귀 등은 장 90대를 때리게 했다. 다시 전순의는 고신(告身, 조정에서 내리던 벼슬아치의 임명장)을 거두고 전의감 청직으로, 변한산, 최읍은 영사로 하였다. 같은 날 사헌장령 이보흠, 사간원 우헌납, 조원희가 전순의, 변한산, 최읍에게 경한 죄를 줄 것이 아니라 중죄를 청했다.(단종 원년 5월18일)

전의감 청직 전순의, 영사 변한산, 최읍을 방면하다.(단종 1년 1월4일)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허리 위에 종기는 비록 보통 사람이라도 마땅히 삼가고 조심하여야 할 바인데, 하물며 임금이겠습니까? 움직이는 것과 꿩고기는 종기에는 금기하는 것인데, 전순의가 문종께서 종기가 난 초기에 사신의 접대(接待)와 관사(觀射) 등 여러 가지 운동을 모두 해로움이 없다고 생각하였고, 이어서 구운 꿩고기를 바치기에 이르면서도 꺼리지 않았습니다. 또 종기가 농(濃)하면 침으로 찌를 수 있으나 농하지 아니하면 침으로 찌를 수가 없는 데도, 전순의는 침으로 찌르자고 아뢰어서 끝내 대고(大故)에 이르게 하였으니, 비록 의원을 업으로 하지 않는 자라 할지라도 방서(方書)를 펴서 보면 일목요연(一目瞭然)한 것인데, 하물며 전순의는 의원(醫員)으로서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여서 모두 계달(啓達)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를 마땅히 극형(極刑)에 처하여야 하는데, 특별히 말감(末減)에 따라서 다만 전의감(典醫監) 청지기로 정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내의원에 출사하도록 하시니, 심히 미편(未便)합니다” 하였다.(단종 1년 4월27일)

의관 전순의의 수상쩍은 행동

대사헌 기건(奇虔) 등이 상소하기를, 질병(疾病)은 마땅히 치료(治療)하는데 삼가야 하고, 약이(藥餌)는 반드시 금기하는 바가 있는데 치료를 잘못하고 금기를 범하면 그 병이 심해져서 마침내 구료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문종대왕(文宗大王)께서 편찮던 초기에 내의 전순의가 자기의 편견(偏見)을 믿고 여러 의서(醫書)를 널리 찾아보지 아니하고, 마침내 ‘해롭지 않다’고 아뢰어 임금에게 사신을 문밖까지 전송하도록 하여, 종기의 증세를 더욱 심하게 하였는데, 또한 이를 살펴보고 놀랐을 터인데도 오히려 ‘해롭지 않다’고 하여 수라상에 식료(食療)를 또한 꺼리지 아니하고 바쳐서 종기가 매우 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전순의와 최읍, 변한산이 들어가 내진을 보고 침으로 종기의 입구를 따고서, 외부에 드러내어 말하기를, ‘상체가 마땅히 며칠 안 되어 좋게 회복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이 모두 기쁘게 생각하였는데, 갑자기 안가(晏駕)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전순의 등을 목을 베어서 통분(痛憤)을 풀려고 하였는데, 단지 관직만을 삭탈하여 천예(賤隸)로 유배시켰다가 곧 또 이를 석방하고 조정의 반열(班列)에 끼이게 하니, 신 등은 통분함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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