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호

일제 말기 ‘일본패망운동’ 벌인 ‘시온산제국’ 스토리

“우리가 이겨냈으므로 ‘제국’은 이미 완성됐다”

  • 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4-05-31 14: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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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말기 ‘일본패망운동’ 벌인 ‘시온산제국’ 스토리
    2월 말의 어느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출근하자마자 컴퓨터를 켜니 국사편찬위원회의 지인이 보낸 메일 한 통이 눈에 띈다. ‘시온산제국’이라는 사건에 대해 들어보았느냐는 내용이었다. 제국이라, 이름만으로는 사이비종교집단 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러나 지인의 말은 조금 달랐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봄, 일제가 곧 패망할 것이라 예상해 제국 건국을 선포했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호되게 탄압을 받은 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문한 기자는 전혀 들어본 바가 없다.

    며칠 지나지 않아 국사편찬위원회 홍보담당 연구관으로부터 자료가 도착했다. 2월초 미국의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문서였다. 1945년 6월11일 미국 전쟁성 산하 통신보안국(SSA)이 조선총독부에서 도쿄의 내무성 경보국장에게 보낸 첩보내용을 도감청해 작성한 문서였다. 페이지마다 상단과 하단에 큼직하게 박혀있는 ‘Top Secret Ultra’라는 글씨가 유난히 돋보였다. 다섯 페이지 남짓 되는 이 문서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태평양전쟁의 전세 반전 이래 조선인들의 정서가 불안해지면서 발생한 특이할 만한 사건 가운데 하나가 경상북도(조선의 남동부 지방)에서 발생한 이른바 ‘시온산제국’ 사건이다. … 이들 일군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일본의 붕괴 및 연합국의 필연적 승리를 전파하며 스스로 독립을 선언하고 헌법을 공포했다. 또한 ‘주일본 한국총독’을 포함한 약 600명의 관리를 임명하여 연합군의 조선 상륙 환영준비를 하였다. … (여기서부터는 조선총독부의 보고서 원문인용) 국명, 국기, 국가, 헌법 및 독립선언을 채택한 이들은 전세가 일본에 불리해질 때마다 승리의 축제를 열었고, 1600개의 ‘시온왕국기’를 제작해두었다. … 설령 이것이 다분히 광신적인 행위이기는 하지만, 최근 조선인들의 정서와 그리스도교도당 저변에 있는 숭미(崇美) 및 숭영(崇英)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3·1절 아침, 신문을 펼쳐들자 몇몇 일간지에서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한 간략한 시온산 관련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지방방송국에서도 단신을 제작한 모양이었다. 한 지방방송국 기자로부터 당시 사건에 가담했다는 노인의 연락처를 얻었다. 시간 날 때 한번 찾아가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일상의 분주함은 그럴 여유를 주지 않았다. 북핵문제와 6자회담, 이라크파병 같은 초대형 이슈 사이에 60년 전의 ‘해프닝’이 비집고 들어올 자리는 없었다.

    마지막 기회



    시간이 한참 지난 4월 하순 어느날, 마감을 끝내놓고 취재수첩을 정리하던 손끝에 구석에 박혀 있던 전화번호 하나가 걸린다. ‘정운훈이라, 이게 누구였더라.’ 달랑 이름 석자만 가지고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역번호 053, 한참을 바라본 후에야 ‘시온산제국 농무대신’ 이었다는 노인의 전화번호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전화를 해보지만 아무도 받지 않는다.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마찬가지였다.

    일요일 아침, 별 기대 없이 버튼을 누르자 그제야 누군가 수화기를 든다. 정노인의 부인이라고 했다. 노인은 벌써 한달 이상 입원중이라는 전갈이었다. “그래도 말하는 데는 불편이 없으세요.” 입원실로 전화를 걸어보지만 귀가 어두워 잘 알아듣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다시 부인과의 몇 차례 통화. 어쩌면 얘기를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입원해 있는 대구행 기차에 올랐다.

    올해 나이 여든셋인 그는 병색이 완연해 혼자서는 거동이 불가능해 보였다. 장시간 앉아 시온산교회에 관한 글을 쓰고 자료를 만드느라 생긴 병이라고 했다. 시온산제국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왔다는 인사에 그가 대뜸 책 한 권을 꺼낸다. 자신이 쓴 ‘시온산예수교장로교회사’(이하 교회사·‘시온산예수교장로회’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교파가 아니라는 것이 정노인의 설명이다. 교파를 초월한 이들이지만 다수가 장로회에 속해 있었기에 훗날 장로교라는 이름을 붙였을뿐이라는 것이다)였다.

    힘겨워 보이는 첫인상과는 달리, 이야기를 시작하는 그의 눈에 금세 힘이 들어간다. “우리가 이겼지. 오직 성경의 힘으로 마귀의 제국 일본을 이긴 거야.” 강산이 여섯 번이나 바뀐 동안에도 그의 믿음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다. “고문 당하고 두드려 맞고 죽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지켜냈어. 일본놈들, 점복(占卜)에 경배하는 가짜들, 좌익우익 할 것 없이 모두 이겨냈다고.”

    경북 의성에서 나고 자랐다는 정노인은 대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군청에서 일하기도 했던 인텔리 출신이라고 했다. 1941년 고향에 온 박동기 전도사와 함께 새벽기도운동을 하며 시온산교회를 처음 시작한 그는 1945년 ‘제국 선포’ 때 친형과 함께 내각의 일원으로 참여했다는 것이었다. 형은 내무대신, 그는 농무대신이었다. 역시 장시간의 대화는 무리였을까. 그의 자세가 점점 흐트러져갔다.

    어쩌면 그 이야기는 단순한 종교적 광신일 수도, 태평양전쟁 말기의 스트레스가 일군의 사람들에게 남긴 트라우마의 발현일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일제통치와 해방, 미군진주와 좌우익의 대립, 6·25, 박정희의 집권에 이르는 시간 동안 그와 그의 ‘형제’들이 겪은 이야기는, 가혹했던 시대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하나의 우화였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소용을 알 수 없는 옛이야기를 여기 옮겨두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일제 말기 ‘일본패망운동’ 벌인 ‘시온산제국’ 스토리

    시온산제국의 마지막 생존자 정운훈 노인.

    ‘산기도에서 돌아온 박동기 전도사는 강한 서북풍이 불어옴을 보았다. 이윽고 하늘이 뭉텅 열리고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다. … 십자가의 왼편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와 의성을 향한다. 연이어 십자가 우편에서 바람이 불어나와 대구 쪽으로 향한다. … 다시 십자가 중앙으로부터 강한 바람이 박 전도사에게 불어와 그의 몸 속으로 들어간다. 박전도사는 형언하지 못할 기쁨을 얻는 동시에 휴거하기 시작한다.…’ (‘교회사’ 중 ‘시온교회의 시작’ 일부)

    1940년 11월29일 새벽, 경북 청송군 현서면의 한 교회 사택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이른바 ‘십자가의 영광’ 사건이 시온산제국이 만들어지는 계기였다. 포항 등 경북 일대의 교회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해야 한다”는 설교를 하다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산골 깊숙이 있는 고향마을에 피난해 있던 박동기 전도사는 이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새벽기도운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경북 각지를 돌며 동지들을 모으던 그의 설교에 정노인과 형 정운권 씨가 감동해 동참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이들에게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은 ‘적그리스도의 제국’이었으며, 강압에 못 이겨 신사참배를 인정한 다른 교회들은 모두 ‘죄에 빠진 패배자’들이었다. 오로지 자신들만이 조선에서 유일한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확신이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더욱 가혹해진 일제의 탄압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감옥에서 죽고, 다른 대부분의 교회들이 신사참배를 인정하게 된 것은 시온산 운동이 사람들을 모으고 힘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근거였다. 기성교단의 변절에 분노한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모임은 오래갈 수 없었다. 의성과 경산 등지에서 이루어지던 모임에 대해 일본 경찰의 추적이 계속되고, 몸담고 있던 교회들이 속속 폐쇄되어가자 이들은 박 전도사의 고향이자 ‘십자가 영광’ 사건이 있었던 청송군 현서면 수락마을로 숨어든다. 이곳에서 일본의 탄압과 기성교단의 배신에 관한 기록을 남기던 이들은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시온산제국을 건국하라는 명령이 내렸다”는 박동기 전도사의 말에 따라 대일항전을 위한 정치조직을 만들기로 한다.

    1944년 4월25일, 수락마을의 교회에 1000여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시온산제국’의 건국을 선포하는 자리였다. 연호는 도광(道光),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의 수도는 경주. 국기와 국가도 별도로 만들어 공포했다. 전권총리와 내무대신, 육·해군사령관, 일본총독 등 총 9명의 내각은 물론, 전국을 12지파로 나누어 도지사와 군수, 면장에 이르기까지 수백 명의 지방관리도 임명했다. 물론 모두 시온산교회 신자들이었다.

    정노인과 부인 곽정자(77)씨가 결혼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정신대에 끌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결혼을 결심했다는 곽씨에게 이후의 삶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당시 시온산제국의 지도부는 수락마을 뒷산에 숨어 연합국의 승리를 준비했다. 열일곱의 꽃다운 나이였던 곽씨는 결혼 직후부터 이들과 함께 산골짜기에 숨어서 밥을 짓고 빨래를 해야 했다.

    이들에게는 일본이 ‘적그리스도의 나라’인 만큼 그들과 싸우는 연합군은 ‘하나님의 군대’였고 태평양전쟁은 선과 악의 최후 결전이라는 ‘아마겟돈’임에 틀림없었다. 사이판, 괌, 오키나와에서 일본군이 패배할 때마다 이들은 수락마을에 모여 기뻐하는 예배를 드리고 노래를 지어 불렀다. 지도부 구성원들은 수락마을 뒷산에 마련된 산막에서 일본의 폭정을 기록하고 성경을 해석하는 내용의 책과 연합군이 상륙할 때 들고 나갈 수천 개의 ‘십자가기(旗)’도 만들었다. 이름하여 ‘성업(聖業)’이었다.

    투옥 그리고 해방

    ‘5월21일 새벽 밥을 지어먹고 성업을 계속했다. 문득 저 아래를 내려다보니 몇 사람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윽고 가까이 온 그들은 알지 못하는 이들이었는데, 대뜸 우리에게 수갑을 채우고 방안에 들어가 성업서류를 챙기기 시작했다. 일본 경찰이었다. … 금호강 아양교를 건너 도청에 있는 고등과 형사실로 끌려갔다. 모두 유치장내 다른 방에 수감되었다. … 육중한 문을 닫더니 열쇠로 잠가버린다. 마귀를 무저갱에 가두어버리는 세상을 고대하던 우리가 그들 손에 의하여 지옥 같은 옥에 도리어 갇히게 된 것이었다.’ (‘교회사’ 중 ‘투옥’ 일부)

    “들림이 있을 것이니 모든 교인들은 흰옷을 입고 금식하라”는 박 전도사의 지시에 따라 모든 교인이 수락마을에 모였던 5월20일, 그러나 기대했던 휴거(携去)는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이튿날 아침 들이닥친 일본경찰에 의해 33명의 지도부가 경북 일대의 각 유치장에 감금되어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일제의 패망과 연합국의 승리를 예언한 수십 권 분량의 기록은 꼼짝없는 증거물이 되었다.

    정노인이 수용되었던 도청 고등과 형사실의 취조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가혹했다. 매질과 물고문이 반복됐지만 이들은 이미 ‘순교’를 각오한 상태였다. 유치장에는 밤마다 이들이 외우는 요한계시록과 다니엘서 구절들이 어지럽게 울려퍼졌다. ‘하늘의 군대가 곧 아마겟돈에서 승리해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다.’ 수감생활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이들은 서로를 다독여주었고, 결국 단 한 사람의 ‘변절자’도 나오지 않았다고 정노인은 자랑스러워한다.

    여타의 독립운동 조직과는 판이한 성격의 이 사건에 대해 고등계 형사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6월초에는 경성에서 총독부 사법국 이사관이 직접 내려와 심문에 나섰다. “금년 8월이면 전쟁이 끝나 조선은 해방될 것이며, 예수가 재림하여 시온산제국이 중심이 되는 천년왕국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이들의 주장을 말없이 받아 적은 이 이사관은, “일본에도 당신들처럼 신들린 사람들이 있다”는 한마디만 남기고 서울로 돌아갔다(SSA가 도청한 총독부 보고서는 이 이사관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듯 괴로운 시간이 어느새 80일을 넘긴 여름날이었다. 정노인이 감방에서 복도를 통해 경찰서 사무실을 보니 직원들 모두 줄을 맞춰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라디오를 통해 기미가요가 울려퍼지고 천황의 목소리가 들렸다. 항복조서였다. 비로소 전쟁이 끝난 것이었다. 입대와 징용을 위해 경찰서 마당에 끌려와 있던 청년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틀이 지난 8월17일 아침, 유치장 문이 열리고 고등계 주임형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고생이 많았소. 이제 나가서 마음껏 독립운동 하시오. 목욕이라도 시켜서 돌아가게 해드릴까 했는데 목욕물 준비를 못했으니 이발이나 하도록 하시오.”

    대구역 앞에 이르자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각지에 숨어 있던 동료들이 하나둘씩 수락마을로 모여들었다. 모두가 눈물을 흘리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결국 승리였다. 이튿날 성대한 축하예배를 드렸다. 더는 숨어 있을 필요가 없었으므로 문을 활짝 열어놓고 마음껏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아마겟돈’은 끝이 났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당시는 실로 아슬아슬한 위기상태였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당초 총독부는 8월17일경 수감되어 있던 경북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모아 한꺼번에 처형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유치장에 있던 시온산제국의 지도부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천황의 항복조서 발표가 며칠만 늦어졌어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상황. 원래는 죽음이 예정되어 있던 그날에 감옥에서 풀려나 수락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새 세상은 오지 않으니

    ‘일본이 망하자 일장기에 있는 태양의 반을 먹으로 칠해 태극기를 그려서 들고 다니거나 게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음양오괘란 무엇인가. 점술에나 사용하는 미신의 도구가 아니던가. 점복의 도구로 만든 깃발은 묵과할 수도 경배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 일장기를 칠해 만든 태극기는 반은 일본, 반은 조선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 환란의 시대가 가자 태극점복의 시대가 왔다.’ (‘교회사’ 중 ‘점복시대’ 일부)

    분명 꿈에 그리던 해방이었다. 이제 곧 하나님의 군대가 이 땅에 임하면 새로운 세상,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이 확실했다. 9월6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준비해둔 십자가기는 일본경찰에 모두 빼앗겼던 터라 찾을 수 없었지만 이들은 온 마음을 다해 환영장에 나갔다.

    그러나 미군은 그들이 그리고 있던 하나님의 군대가 아니었다. 심지어 상당수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소식은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미국 대통령 트루먼과 국방장관 마셜, 주둔군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시온산제국을 소개하고 ‘아마겟돈의 승리’를 치하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군대’가 자신들을 ‘제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예수는 재림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의 세상도 천년왕국은 아니었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해방공간의 정치논란 속에서 이들 시온산제국의 구성원들이 그리던 꿈은 찾을 수가 없었다. 좌익과 우익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이들은 양측 모두에게 미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미신숭배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목숨 걸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들에게, 음양오괘로 만든 태극기를 강요하는 우익은 ‘뱀의 자식들’일 뿐이었다. 지도부는 모든 교인에게 태극기를 소지하거나 게양하지 못하게 했다. 다시 투쟁이 시작됐다.

    좌익 또한 함께할 수 없는 이들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교회를 인정하지 않는 ‘붉은 무리’는 야곱의 형 에서처럼 ‘선택받지 못한 사탄의 무리’였다. 이들이 산에 모여 기도하는 동안 좌익은 이들을 우익광신집단으로, 우익은 태극기와 국가를 거부하는 공비집단으로 몰아붙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점점 악화됐다. 남한 단독정부가 들어선 1948년 겨울에는 국방군 공비토벌사령부에 신도들이 붙잡혀가 한달 가량 조사를 받아야 했다.

    전쟁의 불똥

    “결국 제국은 오지 않은 것 아닙니까. 일본은 망했지만 믿음은 실현되지 않았으니까요.”

    병실 침대에 힘겹게 기대앉은 정노인에게 물었다. 화를 내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뜻밖에도 그는 빙그레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그걸 몰라. 땅 위의 제국이 아니야. 하나님의 나라인 거지. 내가 ‘농무대신’이라고 한 것이 정말 세상권세를 누리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아? 그랬다면 실현되지 못한 거지. 하지만 시온산제국은 우리가 끝내 버티고 믿음을 지켜냈다는 것만으로 이미 승리한 거야.”

    이후 좌우익의 대립이 깊어질수록 분위기는 점점 나빠졌다고 정노인은 회고했다. 숨어 있다가는 오히려 큰 피해를 입을지도 모르겠다고 판단한 제국의 구성원들은 대구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대구는 해방공간에서 좌우익의 대립이 가장 극심했던 지역이었다. ‘뱀의 자식들’과 ‘사탄의 무리’가 격렬하게 싸울수록 이들에게 튀는 불똥도 더욱 세졌다. 1949년 가을에는 경찰의 토벌을 받은 좌익 빨치산들이 팔공산 기슭에 머물고 있던 시온산제국의 두 신자를 밀고자로 단정하고 도끼로 살해하기도 했다.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좌익과 우익은 모두 수락마을부터 부수고 시온산제국 구성원들을 폭행했다. 일제 때보다도 더 가혹한 혼돈의 시대였다.

    결국 이듬해인 1950년 봄, ‘제국’의 지도부는 다시 한번 경찰서에 줄줄이 끌려들어간다. 이번에는 남대구서. 남로당과의 내통 혐의였다. 별다른 혐의점이 나오지 않자 매질과 전기고문이 이어졌다. 열흘간의 조사 끝에 결국 ‘국기를 모독적 언사로 비판함을 반성하고, 이후 개정운동은 합법적으로 전개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대구, 경산, 의성, 청송, 서울 등지에서 열리던 모임은 금지되었고 예배는 중단당했다.

    그해 여름, 전쟁이 터졌다. 그때까지의 고초는 전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7월말에 이르자 인민군은 대구부근까지 남하해 마산을 넘보게 되었고, 수많은 보도연맹원들과 옛 남로당원들이 트럭에 실려 코발트광산에서 떼죽음을 당했다. 그 와중에서 적지 않은 시온산제국의 구성원들이 화를 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뱀이 사탄을 죽일 때는 의인을 놔두지 않는 법’이었다.

    첫번째 희생자는 시온산제국의 일본총독이었던 황모 목사였다. CIC(Count er Intelligence Corps·미군방첩대·해방후 미 24군단 아래 설치되었던 정보기관) 대구지부의 협력자였던 인근마을 청년 몇몇이 그를 좌경분자로 밀고한 것이었다. 태극기 반대도 보안법 위반이라는 논리였다. 반야월에 살던 박모 장로도 황 목사와 같은 혐의로 CIC에 체포당해 끝내 남로당원들과 함께 코발트광산에서 살해당했다. 그의 주검은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경산에 살고 있던 김모 장로 또한 마을 청년단장의 밀고로 CIC에 끌려갔다. 태극기에게 경례하라는 조사관들의 요구에 끝내 불응한다는 이유로 총살당했다. 시온산교회 구성원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순교자’의 주검을 거두어 골짜기에서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전쟁이 깊어질수록 한때 ‘하나님의 군대’라 믿었던 미군에 대한 분노도 점점 커져갔다. 미군이 도로변 가정집에 침입해 부녀자를 유린하는 사례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강간과 약탈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이들은 결코 하늘의 군대일 수 없었다. 금호강변에서 과수원을 하고있던 한 신도는 자신을 덮친 미군병사를 피해 가까스로 달아날 수 있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끝내 이겨낸 자신들 대신 ‘신사참배의 죄를 범하고도 회개하지 않은 변절자들과 점복의 무리들’을 편드는 UN군은 이제 ‘하나님의 원수’일 뿐이었다.

    모두들 떠나가고

    ‘뱀이 시온교회의 3인을 죽일 작정으로 투옥하고 한국전쟁을 일으키는 계획까지 세웠으나, 시온교회의 3인은 끝내 죽이지 못하고 인민 수백만을 살해하였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쳐넣어 태극점복을 경배케 하려 했으나 그것도 뱀의 소원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도리어 전쟁이 성경의 7년 대환난연표 안에서 선취되었으므로 한국사와 세계사가 시온의 연표교리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제 시온은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교회사’ 중 ‘대구시대’ 일부)

    전쟁이 끝나자 남은 이들이 하나둘 다시 모여들었다. 이미 많은 구성원들이 죽거나 떠났고, 각지에 있던 교회는 사라진 후였다. 남은 이들은 자녀들을 ‘태극기에 대한 경례를 강요하는’ 학교에 보내지 않고 대신 스스로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후의 시간은 ‘끊임없는 이산(離散)의 시기’였다고 ‘교회사’는 기록하고 있다.

    태극기와 이를 강요하는 정부를 끝내 인정하지 않던 이들은 혼란이 가라앉은 1962년 무렵 다시 한번 고초를 겪었다. 당초 예정된 수도였던 경주로 근거지를 옮긴 직후였다. 이번에 그들에게 닥쳐온 시련은 5·16 쿠데타였다. 이들은 그해 4월5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앞으로 ‘점복기(旗)를 바꿔야 한다’는 내용의 건의문을 보낸다. 그리고 다섯 달 후, 경찰이 들이닥쳤다. 문제의 발단은 바로 그 건의서의 문구였다. 태극기에 관한 한 국사학자의 저서를 인용해, ‘태극의 양과 음은 각기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고 있다’고 쓴 것이 국기모독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대공 용의점이 있으니 수사하라는 지시가 서울에서 내려왔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이들을 마주한 경주경찰서의 고위간부는 해방 전 대구에서 이들을 심문했던 바로 그 형사였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투였다. 해방 후 십수년이 지났으되 세상은 여전히 ‘저들’의 것이었다. 장로 대부분이 조사를 받았고, 이제 목사가 된 박 전도사는 “국법 아래에서 믿겠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에 따라 믿겠다”고 답했다가 구속됐다. 박정희 의장 앞으로 건의서를 쓴 장로도 함께 구속됐다. 5·16 직후의 한국은 그렇듯 관대하게 ‘표현의 자유’를 인정해줄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이후 지도자였던 박동기 목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떠났고, 한국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교리 때문에 생활에 곤란을 느낀 사람들이 떠났으며, 아이들에게 ‘국기에 대한 맹세’를 거부하라고 가르칠 수는 없었던 부모들이 떠났다. 분열의 와중에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장로회를 조직하는 등 여러가지 노력을 해봤지만 한번 기울어진 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1991년 지도자였던 박 목사도 세상을 떠났다.

    믿는다는 것

    긴 이야기가 끝났다. 그토록 힘겹게 60년을 살아오는 동안 단 한번도 후회하거나 의심해본 적이 없느냐고 물었다. 정노인의 대답은 단호했다. “단 한번도 없어. 그게 우리의 제국이고 승리인 게야.” 대신 정노인은 “이후 교회가 예전의 정신을 잃어버렸다”고 일갈했다. 애초의 정신을 이어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정노인은 더 이상 경주의 시온산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 사이 ‘제국’의 선포에 참여했던 이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고, 당시 일을 기억하는 이는 오로지 그와 아내 곽씨만 남았다.

    정노인 부부는 농사를 지으며 3남2녀의 자식을 키웠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를 따라 시온산교회를 나가던 아이들은 자라면서 모두 ‘세상 교회’로 떠나갔다. 아버지가 물려주고 싶어했던 시온산제국의 꿈은 그들의 미래와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성장한 자녀들은 모두 좋은 대학을 졸업해 번듯한 대기업 중견간부로 성공했다. 누구도 정노인을 꺾을 수 없었듯, 그도 자식들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정노인이 준 책을 받아들고 병실을 나섰다. 문득 ‘제국’이 선포되었다는 청송군 수락마을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구에서 버스로 1시간30분을 달려 도착한 현서면. 이곳에 한 대밖에 없다는 택시를 타고 20분 남짓 더 가자 수락마을이 나타났다. 생각대로 첩첩산중의 외진 마을이었지만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작았다. 과연 수천 명의 신도들이 모여 일제패망 이후를 준비할 수 있었을까 싶을 만큼. 이제 기성 대형교단에 흡수된 옛 교회는 말끔히 단장되어 더 이상 60년 전 모습을 찾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갖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믿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기댈 곳을 잃어버린 사람들,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 제국을 꿈꾸었으되 아직 그 제국을 보지 못한 사람들. 그럼에도 이미 자신들은 승리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이제 모두가 떠난 그 ‘제국’을 정노인만이 쓸쓸하게 남아 지키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가 떠나면 ‘제국’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과연 옳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비가 곧 내릴 듯 날이 어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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