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상근씨가 모은 스크랩과 자료들을 아들 철원씨가 설명하고 있다.
‘1964. 3. 24(화) 흐림 :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들이 데모를 시작해 연·고대 등으로 퍼져 많은 학생이 연행되고 국회의사당에서는 연좌데모가 있었고…상당수의 부상자가 나왔다고 전한다. 철원이가 그 속에 들어 동대문서에서 자정이 지나도록 귀가치 못하였다. 위정자들은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꿈을 아니 주고 일시적인 속임수로 그때그때 모면하여 나가는 식이어서야 신임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극우단체 YTP의 실체
송철원씨는 3·24시위 이후 다시 유학 준비를 위해 집으로 들어갔지만 얼마 안 있어 다시 학교로 나올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졌다. 서울대 문리대의 경기고 후배들이 찾아와 “학교에서 경기고 출신은 모두 프락치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경기고 선배이자 중정 프락치였던 김씨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학교에 나와 학원사찰 조사활동을 재개했다.
서울대 학생운동권의 이런 활동은 곧 전국을 뒤흔드는 사건으로 비화된다. 학원사찰 문제가 대학가의 이슈로 가닥을 잡아갈 즈음 송씨가 엄청난 자료를 입수했다. 후배를 통해 송씨에게 찾아온 사람은 자신을 중앙대 학생이라고만 밝히고 가방 하나 분량의 서류뭉치를 안기고 사라졌다. 이들 문서는 공화당의 재정지원을 받는 극우파 학생단체로 알려진 YTP에 대한 것이었다. 내용은 놀라웠다. 전체 조직도와 입회원서, 서약서뿐 아니라 미행법, 접선법, 교살법, 교살을 자살로 위장하는 법 등이 자세히 제시돼 있었고, 실제로 조직원들은 모처에서 훈련까지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사무실의 위치와 전화번호, 암호 등도 씌어 있었다.
이 단체의 서약서엔 “일체의 비밀은 생명을 걸고 엄수하며 배신할 때는 생명을 바친다. 생명을 걸고 복종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4·19 이후 KKP(구국당)로 출발한 이 단체는 5·16군사정변 세력과 결탁한 이후 극우 청년·대학생 단체로 변모해 1963년 7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어용 비밀폭력단체로 재조직됐다. 이후 중앙정보부가 이를 학원사찰에 이용했다는 게 운동권의 추측이었다.
하지만 송씨에게 발각된 당시에는 이미 생명력이 없어진 상태였다. 정권에도 이 단체가 부담이 됐기 때문이다. YTP가 과연 어떤 일을 했고, 그 배후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선 지금까지 거의 밝혀진 게 없다. 이와 관련, 6·3동지회 사무총장인 오성섭씨는 송씨의 아버지를 찾은 자리에서 기자에게 충격적인 증언을 했다.
“네가 유관순이야?”
“당시 제 애인(현재 부인)의 오빠가 YTP 총책이었는데, 애인을 시켜 관련 문건을 빼낸 뒤 윤보선 의원 측에 전해줬지요. 윤보선과 김영삼이 국회에서 YTP와 관련한 질의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렇게 빼낸 문건 때문입니다. 처남은 아직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지만 언젠가는 말할 때가 올 겁니다. 제가 보기엔 공화당의 거물 김○○이 배후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송철원씨는 문리대 동기인 손정박·최혜성·이영섭 등과 학원사찰 조사위원회를 만들고 경기고 조사활동을 시작했다. 송씨는 문리대 내 관련자들을 불러 조사하고 사실 확인용 각서를 받는 대신 ‘신상명세는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써줬다. 조사 결과 문리대 내에만 중정 끄나풀과 YTP 회원이 20여 명에 가까웠다. 심지어 정치학과 동기 중에도 거기에 속한 이들이 있었다. 송씨는 “중정 사찰요원인 김씨의 조직과 YTP는 완전히 별개인데도 사람들은 흔히 같은 단체로 오해를 한다”며 “조사해보니 두 쪽 모두에 프락치로 거명된 경기고 출신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