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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27

윤심덕·김우진 ‘현해탄 정사(情死)’ 미스터리

유서도 시신도 없는 선상(船上) 행방불명,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존설의 진실은?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윤심덕·김우진 ‘현해탄 정사(情死)’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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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심덕은 열한 살에 진남포 삼숭학교에 입학해 박인덕, 김일엽과 단짝 친구로 지냈다. 공교롭게도 훗날 세 여인 모두 남자 때문에 비극적 삶을 살아야 했다. 박인덕은 청년 부호 김운호와 결혼했다가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자 조선 최초로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했고, 김일엽은 네 차례 결혼에 실패한 뒤 수덕사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열네 살 되던 해에 집안이 진남포에서 평양으로 이사하자 윤심덕은 평양 숭의여학교로 전학했다. 평양에 이주한 이후 모친 김씨는 미국인 여의사 홀 부인이 운영하는 광혜여의원에서 일했다. 그러한 인연으로 홀 부인은 윤심덕의 후견인이 되었다. 의사가 되는 게 어떻겠느냐는 홀 부인의 권고에 따라 윤심덕은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다. 숭의여학교는 총독부에서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학교가 아니어서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면 인가받은 학교에서 2년간 더 공부해야 했다. 평양여고보에서 공부하면서 윤심덕은 의사가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음을 깨닫고,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편입했다.

윤심덕은 사범과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니까 훈도라는 명예로운 사령장을 받아가지고 여러 동무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고향으로 부임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강원도 원주로 발령이 났다. 낙심했으나 상사의 명령이라 할 수 없이 부임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한 학기 만에 더 오지인 횡성으로 전근명령이 내려왔다. 심중에는 불만이 쌓였고 가슴 속에 타오르는 명예욕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 해 여름방학 때 윤심덕은 경성여고보 동창회에 참석했다가 내빈으로 초대된 하세카와 교장과 세키야 학무국장을 만났다. 윤심덕은 학무국장에게 다짜고짜 달려들어 멱살을 붙들고 “나를 무슨 죄로 시골구석으로 쫓아 보냈느냐. 나는 있기 싫어 흥!”하며 억지를 썼다. 좌중은 모두 웃었다. 국장도 교장도 웃고 말았다. 이 모험이 효험이 있어 그의 전근지는 횡성에서 춘천으로 변경되었다. (‘윤심덕의 일생’, ‘신민’ 1926년 9월호)


1915년 윤심덕은 총독부 관비유학생에 선발돼 교사생활을 1년 만에 청산하고 도쿄 유학을 떠났다.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을 거쳐 도쿄음악학교 성악과에 입학했다. 도쿄음악학교는 우에노(上野)공원에 위치해 우에노음악학교라고도 불렸다. 윤심덕은 도쿄음악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김우진과의 만남



윤심덕·김우진 ‘현해탄 정사(情死)’ 미스터리

부유한 집안 때문에 불행했던 극작가 김우진. 윤심덕의 애인 가운데 한 사람이긴 했지만, 같이 정사를 결행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던 듯하다.

도쿄에서 윤심덕은 유학생들과 폭넓게 교유했다. 윤심덕은 왈녀라는 별명처럼 성격이 남성적이고 쾌활해서 남학생에게도 내외하는 법 없이 몇 번 만나면 서슴없이 말을 놓았다. 홍난파, 채동선, 김우진 등 숱한 남학생과 염문을 뿌렸지만, 자기가 싫으면 아무리 구애해도 받아주지 않았다.

니혼(日本)대학 문과에 다니던 박정식은 윤심덕에게 반해 약혼하자고 하루에도 몇 번씩 연애편지를 보냈다. 꽃다발과 사랑의 시를 전하면서 전력을 다해 구애했지만, 윤심덕은 냉정하게 뿌리쳤다. 박정식은 실연의 충격으로 정신이상이 생겨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귀국해 몇 년 동안 총독부병원 8호실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박정식의 친구들이 윤심덕에게 찾아와 “사람이 그 지경까지 되었는데 사랑을 받아줄 수 없느냐?”고 부탁하자 윤심덕은 짜증을 내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것이 왜 내 탓이냐. 아무리 내게 반해 실성했기로 내가 싫은데 어떻게 사랑을 받아주느냐?”

윤심덕은 싫은 사람에게는 한없이 쌀쌀맞게 대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서슴없이 애정을 표시했다.

윤심덕이 동경에 있을 때 특히 친하게 지내는 청년이 두세 사람 있었다. 그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윤심덕과 그 청년들이 사랑하는 사이라느니 어쩌느니 하고 아주 본 듯이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윤심덕의 정숙지 못한 행동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웬만한 사람의 입에는 거의 오르내릴 정도로 소문이 자자했다. 남들이 자신에 대한 험담을 하면 할수록 윤심덕은 자기와 가깝게 지내는 청년들에게 더욱더 노골적으로 애정을 표했다. 그러다 보니 윤심덕을 헐뜯는 사람들이 제풀에 지쳐 다시는 그 같은 말을 입에 담지 않은 일도 흔히 있었다. 다시 말하면 윤심덕은 자기 속만 결백하면 세상에서야 아무렇게 떠들거나 머리털 하나 까딱하지 않는 뱃심이 있었다. (‘석일은 악단의 명성 윤심덕 3’, ‘동아일보’ 1925년 8월4일자)


1921년 윤심덕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김우진, 홍난파, 조명희 등 30명의 청년들과 함께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 노동자 단체 동우회의 운영비 모금을 위한 고국 순회공연에 나섰다. 이때 윤심덕은 김우진과 처음 만났다. 그때만 해도 김우진은 목포에 아내와 딸이 있었던 데다 도쿄에서 일본인 간호사와 사랑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선머슴 같은 윤심덕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윤심덕도 동우회 순회공연단에 참여한 다른 청년과 친밀한 관계여서 김우진에게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동우회 순회공연단은 일본을 떠나 부산에 도착해서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날 밤 공교롭게도 여관방이 모자라서 윤심덕은 독방에서 자지 못하고 남자들과 함께 하룻밤을 지내야 했다. 윤심덕과 가장 가깝다는 그 청년도 같은 방에서 잤다. 밤이 조금 이슥해서 같이 자던 청년이 윤심덕의 정조의 단물을 한번 맛보고자 윤심덕에게 수상한 행동을 했다. 그때 윤심덕은 갑자기 일어나며 그 남자의 뺨을 치고 “나는 네가 그 같이 더러운 남자인 줄 모르고 가깝게 사귀었더니 이것이 무슨 금수의 행동이냐?”며 준열히 책망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너무도 무안하고 민망해서 당장 백배사과하며 이후 다시는 그 같은 마음을 먹지 않겠다고 애걸복걸했다. 이런 일이 있은 이후에도 윤심덕은 여전히 그 남자와 가깝게 지낸다 한다. (‘석일은 악단의명성 윤심덕 3’, ‘동아일보’ 1925년 8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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