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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31

평양 명기(名妓) 강명화 정사(情死) 사건

“살아서는 내외가 되고 죽어서는 연리지 되어…”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평양 명기(名妓) 강명화 정사(情死)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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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명기(名妓) 강명화 정사(情死) 사건

강명화가 죽고 난 뒤 그의 연애사를 기록한 소설들이 종로 야시장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왼쪽은 1934년 회동서관에서 펴낸 ‘강명화 실기’, 오른쪽은 1925년 박문서관에서 펴낸 ‘강명화전’.

“나리, 그만 주무시고 일어나세요.”

장병천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아직 깊은 밤이었다. 머리맡을 더듬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이제 겨우 밤 11시였다. 강명화는 화장을 하고, 머리를 빗고, 새로 지은 옥양목 치마저고리까지 차려입고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여보게, 왜 안 자고 이때까지 앉아 있어? 오밤중에 화장은 왜 하고 새 옷은 왜 갈아입었나?”

“저는 이제 이 세상을 하직하고 먼 나라로 가오니 마지막으로 나리 품에 안겨봅시다.”

“그게 무슨 말인가, 먼 나라로 가다니.”



“이왕에 부탁한 말씀대로, 나리는 저를 생각하지 마시고 부모께 효도하고 공익사업을 많이 하시어 사회의 신용을 회복하시면 제가 비록 죽은 혼이라도 지하에서 춤을 추겠나이다.”

“글쎄, 죽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해도?”

“저는 벌써 독약을 먹었어요. 약을 타서 마신 그릇이 저기 있어요.”

강명화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핼쑥했고,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장병천은 강명화를 부둥켜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몹쓸 사람아. 독약은 어디서 났고, 또 무슨 이유로 먹었단 말인가.”

“제가 죽을 결심을 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기회가 없어서 여태껏 살아 있었던 거예요. 용산역으로 나오는 길에 약국에서 쥐약을 사서 감추어두었지요.”

장병천은 급히 의사를 부르고, 서울에 있는 장모에게 전보를 쳤다. 응급조치로 구토제를 먹이려 했으나 강명화는 이를 악물고 먹지 않았다. 새벽잠을 설치고 달려온 의사는 혀를 쯧쯧 차더니 “진작 조치를 취했다면 구할 도리가 있었지만 벌써 약이 온몸에 퍼져 돌이키기 어렵다”는 말만 남긴 채 아무런 치료도 하지 않고 돌아갔다. 이튿날 오후 6시, 강명화는 20시간 남짓 고통에 몸을 뒤척이다 장병천의 무릎을 베고 정신을 놓았다.

“여보게 명화, 내가 누구인지 알겠나.”

장병천이 강명화의 몸을 흔들며 오열하자, 강명화는 가까스로 눈을 뜨고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세상사람 중에 가장 사랑하는 파건….”

강명화는 파건을 부르며 스물셋 짧은 생을 마감했다. 파건은 장병천의 별호였다.

일곱 살배기 어린 기생

강명화는 1901년 평양에서 20여 리 떨어진 남형제산 골짜기에서 강기덕의 맏딸로 태어났다. ‘명화’는 기명(妓名)이고 어려서 이름은 ‘확실’이었다. 두 살 어린 도선이까지 네 식구는 가난한 산골 마을에서도 가장 군색하게 살았다. 강기덕은 천성이 오활하고 방탕해 집안 살림은 조금도 돌보지 않았고, 돈푼이나 생기면 술집과 노름판을 기웃거렸다. 집안 살림은 어머니 윤씨가 혼자 꾸려갔다.

윤씨는 평양 부호의 딸로 태어났지만, 어려서 콜레라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다. 가까운 일가는 콜레라로 모두 죽고 살아남은 사람은 의붓외조부와 윤씨뿐이었다. 의붓외조부는 윤씨를 양육한다며 재산을 가로채 탕진하고는, 결국엔 윤씨마저 푼돈을 받고 강기덕에게 팔아넘기듯 시집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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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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