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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서울대 HK문명연구사업단 공동기획 - 문명의 교차로에서 ④

삭발한 개들이 저지른 야수적 살인이 남긴 것

기독교 광신주의와 고대문명의 종말

  • 송유레 서울대 HK교수·서양고대철학 esong@snu.ac.kr

삭발한 개들이 저지른 야수적 살인이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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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릴로스의 야심

교회사가 소크라테스는 히파티아 사건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을 기록하며, 그녀의 죽음이 단순히 개인적 감정에 기인한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사전에 준비된 ‘정치적 암살’임을 암시한다. 암살의 배후로 지목된 키릴로스(376~444)는 현재 기독교 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앙받고 교회 박사로 기억되는 인물이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논란의 대상이었다. 412년 키릴로스는 폭도들을 동원해 교회 내부의 반발 세력을 제압하고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로 선출됐다. 교회 조직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지 못한 신임 총대주교는 과도한 ‘행동주의’로 자신의 불안감을 상쇄하려 했다. 교회 안으로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지닌 이들을 ‘이단’으로 몰아세웠다. 이 과정에서 엄격한 금욕주의를 표방한 노바티아누스주의자들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축출됐다. 교회 밖으로는 자신의 권한을 세속 정치의 영역에까지 확대하려고 했다. 이러한 ‘월권’으로 인해 키릴로스는 이집트의 총독 오레스테스와 심각한 갈등에 빠진다. 이 갈등은 유대인 문제를 계기로 폭발한다.

이단 축출 이후 키릴로스는 교회의 내부 세력을 규합하고자 유대인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었다. 더욱이 그는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의 타락상을 고발하는 ‘시나고게의 타락에 대하여’를 집필해 반(反)유대인 정서를 조장했다. 마침내 415년 어느 날 오레스테스 총독이 자리한 극장에서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이 싸움은 결국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공동체의 파멸로 귀결됐다.

소크라테스는 이 엄청난 사건이 아주 사소한 이유 때문에 발생했다고 지적한다. 유대인들의 ‘극장 열풍’이 그 사소한 화근이었다. 그가 전하는 사건의 자초지종은 다음과 같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종종 율법을 듣는 대신 극장에 갔다. 특히 무용수들이 관중을 끌어 모았다고 한다. 춤 공연에 열광한 유대인들이 장외 질서까지 문란하게 하자, 기독교인들의 항의가 잇달았고, 관(官)에서도 제재 조치에 나섰다. 오레스테스 총독이 규제령을 공포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극장에 소집했을 때, 기독교인들도 들으러 갔다. 그런데 키릴로스의 열렬 추종자 한 사람이 규제령에 환호의 박수를 보내자 주위에 있던 유대인들이 그를 선동가로 몰아세웠다. 그러자 총독은 ‘선동가’를 체포하게 하고, 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고문에 처했다. 이것은 관권을 침해하는 총대주교에 대한 경고장이기도 했다.

증오에 휩싸인 유대인들은 어느 날 밤중에 교회에 불이 났다는 거짓말로 기독교인들을 집 밖으로 유인해낸 다음 무차별로 공격해서 죽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손가락에 나무 반지를 꼈다고 한다. 다음 날 새벽, 기독교인들의 복수전이 시작됐고, 키릴로스가 몸소 전쟁을 진두지휘했다. 7세기 이집트 니키우의 주교 요한은 승자의 입장에서 전쟁의 경과를 기술한다. “기독교인들은 분노에 차서 시나고게로 향했고, 그것을 차지했고, 교회로 만들기 위해 정화했다.”(‘연대기’).



이 사건은 유대인 공동체의 파멸로 끝나지 않았다. 니트리아 사막으로부터 약 500명의 수도승이 도시로 몰려와서 총독을 ‘이교도 우상숭배자’라고 모욕하며 난동을 피웠다. 총독은 자신이 세례를 받은 기독교이라고 항변했지만, 한 수도승이 그를 돌로 쳤다. 이를 본 시민들이 달려와서 그의 목숨을 구했고, 그를 친 수도승을 잡았다. 총독은 수도승을 공개적으로 고문했는데, 고문이 극심해서 수도승이 죽고 말았다. 키릴로스는 수도승의 시체를 어느 한 교회에 안치하고, 거기에서 그를 순교자로 추대하는 성대한 미사를 거행했다. 소크라테스는, 지각 있는 사람들은 -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 - 키릴로스에 동조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키릴로스는 교회를 세속 권력의 중심으로, 자신을 도시의 통치자로 만들고자 했다. 실제로 그의 시대에 기독교는 더 이상 세상의 ‘약자’가 아니라 ‘강자’가 되었고, 박해받는 자가 아니라 박해자가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대박해가 있은 지 약 100년이 지났을 시점이다. 총독과 총대주교 사이의 권력 다툼은 또 다른 사건에 의해 새로이 불붙는다. 총독과 친분관계에 있던 알렉산드리아 최고의 유명인사, 즉 히파티아가 살해당한 것이다.

아프로디테의 육신

철학자 히파티아는 신플라톤주의 학파의 수장(首長)이었다. 신플라톤주의는 3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의 항구에서 짐꾼으로 생계를 잇던 암모니오스 사카스(‘짐꾼’)에서 시작해 로마로 간 그의 제자 플로티누스(205~270)를 통해 고대 후기 로마제국의 지배적 철학사조로 발전한다.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은 특히 우주의 원리를 논하는 형이상학적 사변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들의 형이상학적 원리론은 기독교 신학의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들은 플라톤의 정신에 충실하게 수학 교육을 중시했고, 그들의 형이상학은 피타고라스주의적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었다. 히파티아는 이러한 전통을 계승한 철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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