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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재구성 ② | 아내의 침묵 살인 사건

“물증 없이 처형 못한다”

최초의 살인 범죄 재판 기록

  • 이창무│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형사사법학

“물증 없이 처형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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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범죄도 마찬가지다. 청소년의 일탈은 4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존재하는 문제다. 온라인 게임, 오토바이 폭주족은 없었지만, 청소년기는 예나 지금이나 과도기적 성장 단계다. 신체와 심리가 극심한 변화를 겪는다. 또한 부모의 한계를 깨닫는 시기다. 청소년은 불안하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반항하고 말썽을 부리는 게 당연하다. 4000년 전에도 청소년은 부모의 속을 썩였다. 길모퉁이나 공공장소에서 빈둥거렸으며 패거리를 지어 말썽을 일으켰다.

수메르의 한 점토판이 이런 내용을 전한다.

“어디 갔었니?”

“아무 데도 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집에서 빈둥거리지. 학교에 가서 과제물을 암송하고, 점토판에 필기하고, 과제가 끝나면 선생님한테 보고한 뒤 바로 집으로 와라. 거리에서 방황하지 말고.”



아버지는 훈계를 계속한다.

“제발 철 좀 들어라. 공공장소에서 서성거리거나 길에서 배회하지 마라. 길을 걸을 때는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말고. 선생님 앞에서 겸손하고, 어려워하는 태도를 보여. 선생님을 어려워하면 선생님이 너를 좋아하게 되거든.”

아버지의 훈계는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다른 애들은 나무하기 바쁘지만, 나는 너한테 나무하라고 숲으로 보낸 적이 없잖아. 짐수레를 끌게 하지도 않았고, 밭에서 쟁기를 끌도록 시키지도 않았어. ‘일을 해서 나를 먹여 살려라’고 말한 적도 없지.”

굉장히 친숙한 광경 아닌가? 마치 TV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오늘날 부모들이 야단치는 모습과 어쩌면 그리도 비슷한지 모르겠다. 확실히 인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신동아’8월호 이 연재를 통해 신화시대의 범죄를 들여다봤다. 인간의 시대로 넘어온 지 수천 년이 흘렀건만 지금도 신화의 힘이 느껴지는 데는 이처럼 우리의 행동에 강력한 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럴진대 수천 년 전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수메르가 나름대로 세속적이고 어느 정도의 합리성을 바탕으로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신(神)은 여전히 만물의 주재자로 군림했다. 도시의 중심에는 신전이 있었고, 그 신전을 감싸듯 각종 건물이 세워졌다.

마침내 法을 만들다

“물증 없이 처형 못한다”

기원전 236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점토판에 전형적인 수메르 설형문자가 기록돼 있다.

신을 위한 봉사와 헌신을 강조하는 사회의 경제는 가족 공동체의 그것과 비슷했다. 가족이 서로를 위하듯 공동체에서 남의 것을 필요 이상으로 탐내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러나 기원전 2400년경부터 가족적인 경제체제를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경제규모가 커지고 사회는 복잡해졌다. 게다가 사제들은 신의 이름을 빌려 갖가지 수탈 행각을 벌였다. 장례를 치를 때 말도 안 되는 비용을 요구했고 신을 모시기 위한 토지와 가축, 도구, 하인을 마치 자기 개인 재산이나 노예처럼 부렸다. “사제가 평범한 사람 집 정원에 있는 나무를 함부로 가져갔다. 또 힘 있는 사람이 일반 백성의 집을 강제로 빼앗기도 했다”는 당시 기록은 사제와 권력자의 횡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사람은 여전히 신을 두려워했지만, 신의 이름으로 잇속을 챙기는 사제나 권력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사제를 신의 거룩한 대리인으로 생각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권력 남용과 수탈은 힘없는 사람을 괴롭히는 가증스러운 ‘범죄’로 취급받았다.

수메르의 도시국가 라가시의 우루카기나(Urukagina)는 사제, 권력자의 수탈을 막고자 법령을 만들었다. 위대한 신화의 ‘힘’은 예전 같지 않았다. 신화를 대신할 뭔가가 필요했다. ‘태초부터 존재해왔던’ 옛 사회의 모습을 복구하고자 공포한 법령에는 이러한 시대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법의 탄생에 반드시 필요한 게 하나 있다. 문자가 그것이다. 법령을 말로 전할 수는 없는 노릇. 인류 최초의 법전이 수메르에서 작성된 것은 필연이다. 최초의 문자가 이곳에서 발명되지 않았던가. 수메르인은 지출 내역, 업무 수행 기록 등을 글로 남겼다. 최초의 문자는 상형문자 형태였다. ‘상형’이 ‘문자’구실을 하려면 공동체의 합의가 필요했다. 상형문자는 효율적이지 못하다. 수많은 세상 일을 모두 그림으로 표현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림이 점차 기호로 바뀌기 시작했다. 점토판에 갈대 펜으로 새긴 설형문자(cuneiform)가 등장했다. 이후 오랜 변화 과정을 거쳐 수메르 문자는 표음문자 체계를 갖췄다. 기원전 2500~2000년 사이 수메르 문자는 낭만적인 문학 표현도 할 수 있을 만큼 발전을 이뤄냈다.

법이 효용을 가지려면 교육이 필수적이다. 법전을 읽으려면 글을 알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글을 배울 수는 없었다. 평민 대부분은 생업에 바빠 글을 배울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특히 설형문자는 배우기도, 쓰기도 매우 번거롭고 복잡했다. 자연스레 글은 귀족과 사제 등 특권층의 전유물이 됐다. 일반 백성은 법전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설명하면 ‘그런가’ 할 뿐이었다. 그래서 특권층은 문자에 대한 독점권을 유지하려 했다. 특권은 글로 만들어졌다. 기원전 2000년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점토판에는 500명에 달하는 필경사의 이름은 물론이고 그들 아버지의 이름과 직업이 적혀 있다. 아버지들의 직업은 신전 관리인, 군대 지휘관, 선장, 세무 공무원, 감독관, 건설현장 책임자, 공문서 관리인이었다. 필경사는 모두가 부유한 집안 자제였다.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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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무│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형사사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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