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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파리 사이 101장면 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

  • 정수복│사회학자·작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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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37 단조로운 자동차 색상

1980년대 초 파리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하면서 내가 받은 인상은 ‘다양성’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거리를 굴러다니는 자동차의 종류와 색깔도 다양했다. 1990년대 중반 타이베이, 마닐라, 방콕 등 동남아시아 나라들의 수도를 여행했을 때도 거리에 다양한 외제 자동차들이 다니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 외국 자동차 수입이 자유화되면서 서울 거리에도 벤츠, 아우디, BMW, 미니, 푸조, 볼보, 피아트, 도요타, 포드 등 고가의 외제 승용차들이 굴러다닌다.

거리의 건물과 더불어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들도 도시의 분위기에 영향을 미친다. 서울과 파리의 거리 분위기가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자동차의 색상이다. 파리 거리에는 빨강, 초록, 파랑 등 밝은 색상의 자동차들이 자주 눈에 띈다. 그러나 서울에는 검은색과 회색 자동차가 주조를 이룬다. 가끔 밝은 색 자동차도 보이지만 전반적으로 자동차의 색상이 무겁다. 무거운 자동차 색깔은 한자리 하는 남자들의 양복 색깔이나 마찬가지로 한국의 획일적 권위주의의 상징일 수도 있다. 검은색 외제 승용차는 “나 이런 사람이니까 잘 모셔라”라고 말하는 듯하다. 일상의 모든 행위는 자기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무슨 색의 옷을 입을 것인지와 마찬가지로 무슨 색의 자동차를 탈 것인지도 자기 연출의 한 방법이다. 의상에서 다양한 개성이 드러나듯 자동차의 색상도 좀 더 밝고 다양해질 수는 없는 것일까?

풍경#38 네일케어, 매니큐어

며칠 전 강남 신세계백화점 10층 식당가에 저녁 식사를 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어디에선가 진한 아세톤 냄새가 풍겼다. 아이스크림 상점 앞에 있는 네일케어센터에서 젊은 여성들이 손을 내밀고 있는 고객들의 손을 마사지하고 손톱을 정리하고 매니큐어를 칠해주고 있었다. 몇 달 전 홍대 앞 언덕길을 올라가면서 유리창을 통해 본 특별한 장면이 떠올랐다. 고객들이 의자에 앉아 있는데 발치에 젊은 여성들이 쭈그리고 앉아 발을 마사지하면서 발톱에 매니큐어를 칠해주고 있었다. 여성들의 손톱, 발톱 정리는 매우 은밀한 사적 공간에서 해야 하는 일이라는 나의 통념을 깨는 장면이었다. 그런 일들이 상품화되어 돈을 주고받는 서비스업으로 번창한 것도 그렇지만 과거 밀실에서 이뤄지던 일들이 누구나 바라볼 수 있는 개방 공간의 일상적 풍경이 된 것도 흥미롭다.



오늘날 세계가 하나 되면서 파리와 밀라노,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서울에 동시간대 패션이 유행하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유럽과 미국, 라틴아메리카와 동아시아 여성 모두에게 적용되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건 섹시하고 도전적으로 보이는 여성상이다. 그런 에로틱 전사형 미인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의 하나가 매니큐어다. 1990년대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책을 쓴 한 대학 교수가 자기에게 가장 에로틱한 여성의 부위는 길게 기르고 빨간색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제 자기 외모에 조금이라도 신경을 쓰는 여성들은 손톱을 손질하고 매니큐어를 바르는 일을 일상화하고 있다.

보통의 파리 사람들 가운데 깨끗하게 유지된 손에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을 가진 여성은 그리 많지 않다. 유한계급 마담을 제외하고는 파리지엔 대부분은 직장과 집안일에 이중으로 시달리느라 손톱 정리에 쓸 시간이 별로 없는 듯하다. 그러나 서울에는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한 아름다운 손이 넘친다.

풍경#39 거리의 입맞춤

1950년 로베르 드와노(Robert Doisnaud)가 찍은 ‘파리 시청 앞에서의 입맞춤’ 이라는 제목의 사진은 파리의 보도에서 젊은 남녀가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 사람 모두 지그시 눈을 감고 있고 남자의 오른손이 여자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여자의 고개는 남자의 어깨를 향해 왼쪽 뒤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멀리 파리 시청이 다소 희미하게 보이고 키스 중인 젊은 연인들 주변 인도에는 보행자들이 걸어가고 있고 차도에는 자동차들이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당시 파리의 분위기는 사실 그 정도로 자유롭지는 않았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 사진은 연출된 장면을 찍은 것이었다. 그러나 1968년 5월운동은 성해방을 가져왔고 1980년대 유학 시절 나는 파리의 거리에서 남녀가 포옹을 하고 입을 맞추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보고 다녔다. 당시 그런 장면들은 나에게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2000년대 10년을 파리에서 보낼 때는 버스 정거장, 길거리 한 구석, 공원 벤치, 지하철 안에서 입을 맞추는 연인들의 모습이 그저 일상의 한 풍경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오늘날 서울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껴안고 입 맞추는 젊은 연인들을 보게 된다. 파리에서는 1968년이라는 요란한 사회운동 후에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성해방의 물결이 일어났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조용하게 성혁명이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외의 그 수많은 모텔과 호텔은 그런 혁명을 위한 최소한의 설비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젊은이들은 그런 은밀한 장소가 아닌 지하철, 버스 등 대중교통 수단과 길거리에서 포옹을 하고 입을 맞춘다. 젊은 세대는 음지가 아닌 양지에서 자유롭게 애정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 어른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이들 뒤를 따라가고 있다. 서울은 이제 파리와 마찬가지로 공공장소에서 자유로운 사적 애정 표현이 가능한 익명의 공간이 되었다.

풍경#40 소공동 벽 광고

1970년대 말 을지로에서 광교 쪽으로 나가는 사거리의 오른쪽 길에 서 있던 건물의 길고 넓은 벽에는 김홍도의 추수하는 풍경 그림이 크게 확대되어 붙어 있었다. 그 그림을 보면서 나는 마음이 뿌듯하고 편해지는 느낌을 갖곤 했다. 그것이 예술의 힘이리라. 평화롭고 해학이 느껴지는 김홍도의 그 그림은 어느 날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현대적이지만 세련되지 못한 디자인 그림이 들어섰다. 옛 그림이 사라지고 그 근방에 새로운 건물이 여럿 들어서 전체적인 거리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나마 길 건너편의 오래된 한국전력 건물이 버티고 있어서 그 장소의 정체성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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