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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다큐 | 잃어버린 근대를 찾아서-마지막 회

왕세자와 파혼한 민 규수의 슬픔

1920년대 서울

  • 박윤석│작가 unomonoo@gmail.com

왕세자와 파혼한 민 규수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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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와 파혼한 민 규수의 슬픔

영친왕 이은.

갑신정변 3일째인 12월 6일 오후 4시를 전후해서부터 자정 무렵까지 창덕궁과 창경궁 안에서 일본 청국 조선 3국인들이 고종 임금을 놓고 벌인 난리를 실록은 다음과 같이 줄이고 줄여 요약하고 있다. 청일전쟁 10년 전에 작은 청일전쟁이 조선의 왕궁에서 벌어졌다. 국내에서 외국 두 나라가 맞붙는 전쟁에서 조선인은 두 패로 나뉘어 붙어 조역을 수행했다.

청나라 병사들이 궁문으로 들어오면서 총포를 쏘았고 우리나라 병사들도 따라 들어오니 일본 병사들이 힘을 다해 막았다. 임금께서 후원에 있는 연경당으로 피하여 (…) 옥류천 뒤 북쪽 담장 문에 이르렀다. (…) 청나라 통령(統領) 오조유(吳兆有)가 병력을 거느리고 상감을 담장 밖 북묘로 맞으러 왔다. 홍영식 등이 왕의 옷깃을 끌어당기며 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주상 전하를 사인교에 태우자 홍영식 등은 다시 절규했다. 우리 병사가 홍영식과 박영교를 쳐 죽였다. 사관생도 7명도 함께 죽였다.(…) 원세개가 병사를 보내어 임금을 영접했고 자정 무렵 임금은 선인문 밖에 도착해 오 통령의 청병 지휘소에 머물렀다.

백성의 궁전

전차가 또 도착하고 다시 한 차 가득 승객들을 쏟아내었다. 종로4정목에서 연결되는 창경원 노선의 종점이다. 팻말에는 홍화문정거장이라 쓰여 있다. 어른들은 잰걸음으로, 아이들은 달음박질쳐 앞서거니 뒤서거니 바로 앞 홍화문(弘化門)으로 몰려든다. 창경궁의 정문이다. 범인들은 범접하지도 못하거니와 대궐을 드나드는 양반 나리들이라도 어지간한 지체 아니고는 이 문으로 들락거릴 수 없는 것이 불과 10여 년 전까지의 일이다.

1920년 4월의 마지막 주 월요일. 2층 지붕에 누각을 인 웅대한 홍화문은 활짝 열어젖힌 3칸 대문의 드넓은 관람객 출입구로 모여드는 옛 백성들과 그 후예들을 맞아들인다. 왕궁의 정문이 이처럼 완전 개방되는 것은 왕조의 큰 길흉사가 아니고서는 없는 일이었다. 홍화문의 서늘한 그늘을 통과하자 아이들은 금천을 가로지르는 왕의 다리 옥천교(玉川橋) 돌다리를 내달려 넘어서고 곧바로 펼쳐지는 궁의 정전(正殿)을 향해 활짝 열린 명정문(明政門)으로 뛰어든다. 그런 아이들을 보는 어른들의 얼굴엔 함박꽃이 핀다. 눈을 들어 보면 궁궐은 온통 꽃대궐이다. 명정전(明政殿) 드넓은 정방형 뜰의 박석바닥 위에 서면 사방은 봄눈이 내린 듯 벚꽃 천지다. 그 꽃무리의 기운은 동쪽 담장을 건너 전개되는 경모궁 터와 총독부의원의 동산 일대로 뻗어 장관을 이룬다.



휴일이 아닌데도 이렇다. 엊그제 주말은 사실상 벚꽃 시즌의 끝물이라 할 수 있었는데 미처 못 온 사람들은 이번 주에도 넘쳐날 것이라 한다. 벚꽃은 이미 지고 있다. 지난 주말은 대단했다. 신문은 이렇게 전했다.

춘색은 자못 무르녹아 대도회인 서울은 꽃동산을 이루었다. 28만의 온 도시 인민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자연의 봄빛과 따뜻한 햇살에 싸여 한강으로 남산으로 우이동으로 일요일을 이용하여 나가는 사람의 수효가 헤아릴 수 없다. 18일은 아침부터 창경원을 향하여 물밀어오는 노소남녀의 사람 물결 가운데로 달려드는 자동차와 인력거가 함께 섞여 헤쳐나아가지도 못할 만치 복잡한 광경을 이루었다. 꽃 우산을 펼친 듯한 벚꽃 동산 사이로 가벼운 봄옷을 입고 사뿐사뿐 걸어가고 걸어오는 청춘남녀는 에덴의 낙원을 일시에 세상에 나타내는 듯하였다.

그날 입장객은 2만8000명으로 집계되었다. 창경원이 생긴 10년 이래 최대 성황이라 했다. 경성 인구 10분의 1에 해당하는 인원이 전국에서 몰려든 것이다. 그날 인파에 한림도 한몫을 했다. 창경원의 정문 앞에서 하나코와 만나 꽃구경을 하기로 했는데 만나지 못했다. 한자리에 잠시도 서 있을 수 없이 떠밀리며 두 시간을 서성였는데 하나코는 찾을 수 없었다.

해 뜨는 집

길은 점점 경사가 높아져 오른쪽으로 크게 휘면서 박석고개로 오른다. 궁궐의 담장도 고개마루를 따라 오르는데 그 초입에 문 하나가 나 있다. 월근문(月覲門)이라 쓰여 있다. 달마다 찾아뵙는 문. 길 건너로 이어지는 동산 위 사도세자의 사당 경모궁으로 가는 최단 통로다. 아들 정조가 만든 문이다. 그때 즉위 3년을 맞은 정조의 나이 27세. 아버지가 고인이 되던 나이였다. 경모궁 참배 때만 열리는 이 문을 나서 맞은편 언덕을 오르면 일첨문(日瞻門)이 열려 있다. 날마다 바라본다는 뜻의 문이다. 마치 첨성대에서 별을 바라보는 심정과도 같이 정조는 열 살 때 사별한 아버지를 찾아 그 문으로 들어갔다.

아버지에게서 정을 받지 못한 사도세자. 정 붙일 아버지를 일찌감치 상실한 정조. 정조가 오래 살았던 창경궁의 처소에서는 월근문과 일첨문이 정동향으로 바라다보였다. 달과 해는 아침저녁으로 그곳에서 떠올랐다. 부정(父情)을 상실한 두 사람은 그렇게 두 문을 사이로 오래도록 마주 보고 있었다.

크고 작은 전각 20개 이상이 6개 이상의 권역으로 나뉘어 배치되었다는 경모궁의 규모와 그 참배에 기울인 정성은 아들 정조가 겪은 슬픔과 통한의 깊이를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준다. 아버지가 뒤주에 들어가던 날, 영조임금 앞에 죄인처럼 엎드린 사도세자 곁에 함께 엎드린 열 살 세손은 할아버지 왕에게 간절히 청했다. 신에게 올리는 기도가 그보다 더 절절할 수는 없었다. 왕은 지상의 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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