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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십자로에 우뚝 선 ‘차탈 회윅’에 담긴 비밀

동서양의 접점 - 이스탄불과 아나톨리아

  • 고일홍| 서울대 HK연구교수·고고학 mahari95@snu.ac.kr

문명의 십자로에 우뚝 선 ‘차탈 회윅’에 담긴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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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져 있듯이 지구상에서 농경이 최초로 발생한 지역은 소위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고 불리는 곳이다. 마치 엎어놓은 초승달과 같은 이곳의 서쪽 지역은 이스라엘과 레바논, 시리아를 관통하고(이 세 곳을 합쳐 흔히 레반트 지역이라고 한다), 동쪽 지역은 이라크와 이란을 지나며, 그 정점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동남부에 자리하고 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농경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곳에 야생 양과 염소, 소, 돼지가 서식하고, 야생 밀과 보리가 많이 자라났기 때문이다. 즉, 야생 동식물 자원이 풍부한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자연적 환경 속에서 수렵채집민은 동물과 식물의 습성을 가까이에서 지속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그 야생종을 점진적으로 길들여나갔다는 것이 농경의 발생에 관한 대표적인 가설이다.

정착생활의 뚜렷한 증거 - 텔 유적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신석기 시대 주민들은 기원전 9000년경부터 밀과 보리를 재배하고 소와 양, 염소를 사육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곡식 제분용 갈돌과 갈판의 존재를 통해, 또한 고고학 유적에서 높은 비율로 발견되는 어린 가축의 잔해를 통해 알 수 있다. 후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가축 사육의 중요한 특징은 매년 태어나는 동물의 50% 정도만을 선택적으로 (그것도 주로 암컷을) 사육하고 나머지는 잡아먹는다는 것이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는 이러한 선택적 사육이 기원전 9000년경부터 일어났다는 증거가 포착됐다. 기원전 1만2000년경 이전에 해당되는 유적들을 보면 쓰레기더미에서 발견되는, 다시 말해 잡아먹힌 어린 동물의 뼈는 20%에 불과한 반면, 기원전 8650년경의 유적에서는 어린 양의 뼈가 44~58%나 된다는 것이 확인됐다. 따라서 고고학자들은 이러한 증거를 기반으로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는 기원전 9000년경에 농경사회로 전환이 이뤄졌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농경민은 이내 새로운 경작지와 목초지를 찾아 주변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농경과 그것에 동반된 새로운 삶의 방식이 확산된 것이다. 서쪽 지역으로의 확산에 대해 언급하자면, 두 개의 확산 경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경로를 따라 이주한 농경민은 아마도 레반트 지역의 해안가 지역을 출발해 바다를 가로질러 우선 키프로스에 도착한 다음, 그곳에서부터 다시 크레타와 그리스 본토의 남쪽 지역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경로는 레반트 북부 지역에서 시작해 아나톨리아 반도를 관통한 다음 보스포루스 해협을 넘어 발칸 반도로 이어지는 육상 경로인데, 바로 이 경로를 따라 이주하던 농경민 중 일부가 아나톨리아 고원에 정착했던 것이고, 그러한 정착 지점 중 한 곳이 바로 차탈 회윅이다. 다시 말해, 차탈 회윅 유적은 두 대륙이 만나는 아나톨리아 지역에서의 주민 이동이 가져온 매우 오래된 결실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차탈 회윅이 자리한 코냐 평원에 도착한 초기 농경민 집단은 챠르샴바 강의 지류가 지나가는 저습지대의 한가운데에 솟아 있는 마른 땅 위에 마을을 형성했다. 사실 최초의 마을이 정확히 어떤 형태였는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차탈 회윅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가 아직 최하층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마을 잔해를 통해 확인된 바에 의하면 주민은 단순한 관개시설을 이용해 밀과 보리를 재배했을 뿐만 아니라 완두콩도 키웠고, 열매로 술을 담그고 견과류를 짜서 식물성 기름도 얻었다. 또한 소와 양, 염소를 사육했을 뿐만 아니라 야생소의 일종인 오로크와 늑대, 여우 그리고 표범도 사냥했다.



이렇듯 풍부한 식량 자원을 바탕으로 차탈 회윅의 주민들은 한곳에 계속 머물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한 지점에서 근 1000년 동안 존속된 마을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현재까지의 조사 내용에 따르면 차탈 회윅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여느 농촌 마을 혹은 도시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우선 이곳에는 거주용 주택만이 들어섰던 것으로 보이며, 뚜렷이 ‘공공건물’이라 여길만한 건물의 흔적은 아직 확인된 바 없다. 물론 그 ‘주택’ 중 일부는, 내부의 양상으로 미루어 볼 때, 사당과 같은 성격을 가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최소한 외관상으로는 건축물의 차별화가 포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고고학자들은 차탈 회윅 사회를 완전한 평등사회로 보고 있다. 차탈 회윅 마을의 또 다른 특이점은 주택의 성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흙 벽돌로 지어진 이 주택들은 마을의 초기 단계부터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아마도 인구밀도가 높아지자 주택들은 점점 더 밀집됐고, 나중에는 아예 외벽이 연결되었다. 참고로 이렇게 된 데에는 마을의 입지가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 마을이 애초에 저습지대 한가운데에 있는 마른 땅 위에 조성됐기 때문에 옆으로 확장하기는 힘들었을 것이고, 한정된 공간 내에 점점 더 많은 집을 짓다 보니, 결국에는 벌집 형태의 마을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차탈 회윅 주민들은 주택의 천장에 구멍을 뚫어 이것을 출입구이자 채광창이자 환풍구로 사용하기에 이르렀고, 또한 주택들이 연결된 옥상은 마을의 도로 및 광장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문명의 십자로에 우뚝 선 ‘차탈 회윅’에 담긴 비밀

1 예리코 유적에서 나온 회반죽을 입힌 두개골 2 인류 최초의 지도인 ‘차탈 회윅 지도’ 3 차탈 회윅 마을의 복원도

흑요석 교역망의 중심

이 개별 주택의 내부 공간에 대한 조사내용을 보면 무엇보다도 벽에 회칠을 했다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차탈 회윅의 주민들은 주택의 모든 내벽은 물론 바닥 위에 조성된 단상에도 하얗게 회를 발랐다. 따라서 주택의 내부는, 비록 지붕에 나 있는 구멍 하나만을 통해 햇빛이 들어왔어도, 생각보다 훨씬 더 밝고 쾌적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고고학자들이 현미경을 이용해서 잔존 주택 벽체의 단면을 관찰한 결과, 이러한 회칠은 여러 차례에 걸쳐, 그리고 주기적으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차탈 회윅 유적의 입지 자체가 이러한 회칠과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즉, 농경지와는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저습지대에 마을을 계속 유지했던 것은 경작지와 목초지로 매일 오고 가는 번거로움이 있기는 하지만 바로 이곳의 저습지대에서 회벽의 원료가 되는 백악(白堊) 성분이 가미된 진흙 상태의 이회토(泥灰土)를 구할 수 있다는 편리함을 중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차탈 회윅의 주민들은 이렇게 정성스럽게 관리하던 주택을 주기적으로 폐기하고 그 위에 새로운 주택을 지었다. 현재까지의 조사 성과에 따르면 이러한 폐기와 재건축의 과정은 총 18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이 18개 층을 이루는 주택 잔해가 차곡차곡 쌓이면서 차탈 회윅 유적이 만들어졌는데 고고학자들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형성된 인공 언덕을 ‘텔(tell)’이라고 한다. 참고로 ‘텔’은 이 지역의 언어로 ‘언덕’을 의미한다. 사실 농경민 집단이 한곳에 정착했다고 텔 유적이 무조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텔 유적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수백 년에 걸쳐 한 지점에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주택의 주기적인 폐기와 재건축이라는 결코 보편적이지 않은 현상이 일어나야 한다. 결국 텔 유적은 독특한 거주 방식이 낳은 산물로 볼 수 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거주한 농경민들은 그러한 삶의 방식을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유럽 지역에서도 위에서 언급된 농경 확산의 두 번째 루트를 따라 이러한 텔 유적이 확인된다. 즉, 북부 그리스와 발칸 반도 그리고 북쪽으로는 헝가리 평원으로 연결되는 지역에 걸쳐 신석기 시대부터 조성된 텔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텔 유적의 분포를 통해 주택의 반복적인 재건축을 동반했던 독특한 삶의 방식이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처음 등장해 차탈 회윅 주민들에 의해서도 영위됐을 뿐만 아니라, 아나톨리아 지역을 거쳐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에 있는 유럽 남동부 지역으로까지 확산됐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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