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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서울대 HK문명연구사업단 공동기획> 동서양의 접점 | 이스탄불과 아나톨리아

기독교가 기독교 착취 그러나 이슬람은 관대했다

십자군이 초래한 기독교 분열

  • 박용진|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parktoan@gmail.com

기독교가 기독교 착취 그러나 이슬람은 관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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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별하긴 했으나 서유럽인과 비잔티움 제국 주민들은 같은 기독교인이었다. 비잔티움 제국이 이슬람 세력에 맞서 싸우는 한 서유럽인들은 도와줘야 했다.

1070년대 만치케르트 전투에서 패한 비잔티움의 황제 미카엘 7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서유럽 내부에서 벌어진 세속 권력과의 갈등에 정신이 없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4세와 성직자 임명권을 놓고 대결하다 황제에게 ‘카놋사의 굴욕’을 겪게 했다. 사정이 여의치 못해 그레고리우스 7세는 십자군을 제창하지 못했다.

1094년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콤네누스가 다시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황제는 소아시아 반도의 절반 정도를 잃고 있었다. 교황은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를 회복시키기 위해 서유럽 기사를 보내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리하여 비잔티움 황제의 생각과는 달리 ‘기독교의 성지 회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소아시아의 영토 회복은 부차적인 문제가 됐다.

서유럽을 출발한 제1차 십자군은 헝가리와 불가리아를 거쳐 콘스탄티노플로 갔다. 그때 알렉시오스 황제는 자신의 지휘를 받으며 보수를 받고 싸워줄 하급 기사들을 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십자군에는 높은 신분의 기사들이 포함돼 있어 당황했다. 황제는 그가 원하던 대로 일을 진행하기 위해 기사들로부터 충성의 맹세를 받으려고 했다. 맹세를 하면 이들을 콘스탄티노플로 받아들여 식량 등 물품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서로 다른 생각

십자군은 맹세를 하지 않았다. 당시는 보급에 어려움이 있었기에 식량 등의 물품은 현지 조달이 원칙이었다. 현지에서 마련해주는 세력이 없으면 약탈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십자군은 물품 마련을 위해 콘스탄티노플 주변의 농촌을 약탈했다. 상황이 꼬여가자 황제는 요령 있게 십자군 지도자들과 협상해 어느 정도의 편의를 제공해주는 대신 충성의 맹세를 받아냈다. 그리고 재빨리 그들을 소아시아 반도로 내보냈다.

놀랍게도 1097년 6월 십자군이 투르크의 수도였던 니케아를 점령하자, 황제는 군대를 이끌고 가 니케아를 접수했다. 십자군은 팔레스타인을 향한 원정에 나섰다. 알렉시오스 황제는 투르크로부터 스미르나, 에페소스, 사르데스 등 소아시아 반도의 일부를 탈환했다. 1099년 예루살렘을 탈환한 십자군은 주변지역까지 점령해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고 에데사 백작령, 트리폴리 백작령, 티오키아 공작령 등의 봉건국가를 세웠다.

알렉시오스 황제는 십자군의 이러한 행위를 그에게 바친 충성의 맹세에 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십자군 덕택에 소아시아 반도의 상당 부분을 회복할 수 있었다는 데 만족해야 했다.

예루살렘을 탈환했다는 면에서 제1차 십자군전쟁은 성공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슬람 세력이 힘을 합쳐 기독교도들이 세운 국가를 공격해 여러 지역을 함락시켰다. 그리하여 제2차 십자군 원정이 이뤄졌으나 실패했다. 이슬람에서는 살라딘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등장해 이슬람 세력을 통합해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십자군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옛 동로마와 서로마 지역의 관계 증진에는 기여했다. 관계가 개선되기만한 것은 아니다. 십자군은 보급의 현지 조달을 위해 빈번하게 약탈을 자행했기에 비잔티움 주민들의 반감을 샀다.

비잔티움인들은 서유럽인들에 대해 변덕이 죽 끓듯 하고 배신을 밥 먹듯이 한다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소아시아에서 빼앗긴 영토를 서유럽 방면에서 보충하려고 했다. 서유럽 영주들은 이것을 위협으로 보았다. 이때문에 독일 황제인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는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중요한 목표로 삼기도 했다.

양측은 무엇보다도 지중해 상업권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지중해 무역은 베네치아가 주도하고 있었다. 베네치아는 일찍부터 비잔티움 제국 내 상업에서 상당한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해상무역에서도 특권을 갖고 있었다. 베네치아는 아드리아 해를 통과해야 지중해로 나갈 수 있었으므로 비잔티움 해군의 보호 아닌 보호에 의존해야 했다. 그들은 많은 대가를 치르고 비잔티움 제국의 항구를 사용하거나 제국 내 상업을 독점하는 권리를 받았다.

11세기 말 알렉시오스 황제는 특권을 베네치아에 한정하지 않고 피사에도 부여했다. 그의 아들 요안네스 황제는 제노아에도 특권을 줬다. 베네치아의 경쟁자를 만들려는 심산이었다. 1171년과 1182년 베네치아의 독점에 불만을 품은 비잔티움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제4차 십자군 결성의 속사정

베네치아는 비잔티움 제국 내에서의 독점적인 지위에 안심할 수 없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해결책은 비잔티움 제국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기회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뒤, 원정 목표를 콘스탄티노플 정복으로 바꾸는 것으로 봤다.

그리하여 ‘추악한’ 제4차 십자군이 결성됐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 사이의 반감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4차 십자군 결성은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가 제창했다. 예루살렘을 비롯한 주요 도시를 빼앗긴 서유럽은 먼저 이집트를 공략해 팔레스타인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만들려 했다. 이집트로 가려면 배를 이용해야 하므로 베네치아에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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