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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균 해양경찰청장의 ‘해적 이야기’

북유럽의 약탈자 잉글랜드 왕조를 바꾸다

바이킹 해적

  • 김석균 해양경찰청장 | sukkyoon2004@hanmail.net

북유럽의 약탈자 잉글랜드 왕조를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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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 선의 갑판은 사방이 트여 있어서 거친 파도나 악천후 시 파도와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됐다. 바이킹은 모피와 기름 바른 가죽옷을 입고 있었지만 늘 차갑고 축축한 상태로 있을 때가 많았다. 육지 가까이 정박할 때는 상륙해 텐트 속에서 자기도 했다. 그러나 먼바다를 항해할 때는 이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갑판에 펼쳐놓은 2인용 동물가죽 침낭에서 잤다. 이런 경우 끼니는 말려서 소금에 절인 물고기나 육포로 해결했다.

바이킹은 뛰어난 항해사였지만 거친 바다의 위력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나약한 존재였다. 많은 바이킹이 항해 도중 험난한 파도에 배가 난파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추위와 습기로 죽었다.

그러나 험난한 바다의 조건이 바이킹의 모험과 대양으로 진출하려는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생존을 위해 좋은 전리품을 약탈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갔으며 피를 흘리는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다에서 살았다’는 바이킹의 생활에 대한 기록처럼 그들에게는 바다에서의 생존본능과 약탈의 유전자가 흐르고 있었다.

가볍고 빠른 바이킹 선

먼바다로 해적질을 하러 가기 위해서는 장거리 항해에 적합한 배를 만들고 운항하는 기술의 습득이 필요했다. 바이킹은 이미 오래전부터 돛이 없는 배를 만들어 계곡 사이의 피오르드를 타고 다녔으며 날씨가 좋은 때에는 먼바다로 항해하기도 했다.



바이킹은 2000년 동안 가볍고 빠른 배를 만들어온 전통이 있었다. 여기서 한발 나아가 바이킹은 속도를 내기 위한 돛, 단단한 돛대, 바다에서 안정감을 주는 용골을 추가했다. ‘롱십 (Longship)’이라 불리는 바이킹 선은 날렵하고도 빨라서 먼바다 항해에 적합했다. 그뿐 아니라 해안에 용이하게 접급했으며 노를 저으면 내륙의 얕은 강물에서도 자유롭게 운항할 수 있었다.

바이킹 선 중 가장 덩치가 큰 것을 ‘드레카르(Drekar)’, 또는 선수의 용머리 장식을 따서 ‘용수선(龍首船)’이라 했는데 주로 침략과 전투에 나가는 바이킹을 실어 나르는 데 쓰였다. 바이킹 선은 바이킹에게 미지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수단이었으며 먼바다와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 약탈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

선박을 건조할 때는 책임자가 각 분야의 전문 조선공을 거느리고 작업을 했다. 용골과 널빤지로 쓰이는 목재로는 곧고 기다란 참나무를 사용했고 휘어진 곳에 들어가는 목재로는 다른 나무들을 썼다. 배가 다 만들어지면 측면에는 둥근 방패를 붙이고 뱃머리에는 용머리 모양의 장식을 더했다.

바이킹 선의 돛은 커다란 정사각형의 양털 천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엄청난 추진력을 제공했다. 그렇지만 거센 바람을 맞거나 풍랑에 젖으면 조종하기가 쉽지 않았다. 선원들은 그들의 돛대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고 돛에다 빗금이나 다이아몬드 장식을 그려 넣기도 했다.

잉글랜드 약탈

800~1100년은 바이킹이 미지의 세상을 향해 탐험을 본격화한 시기다. 다른 의미로는, 바로 이 시기에 바이킹의 해외 진출을 통한 해적질이 가장 활발했다.

바이킹이 처음으로 기독교 성소를 공격한 것은 793년 1월 8일. 잉글랜드 동쪽 해안에서 약간 떨어진 린디스판 섬의 수도원이었다. 바이킹은 교회에 침입해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고 보물을 약탈했다. 수도자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노예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납치해 갔다. 저항하는 수도자들은 바다에 빠뜨려 죽였다.

이후 바이킹의 브리튼 제도와 유럽 대륙 해안지역에 대한 침략과 무자비한 약탈, 살육은 계속됐다. 교회와 수도원을 파괴하고 수도사를 학살하는 바이킹은 기독교도들에겐 곧 악마의 화신이었다. 바이킹의 목적은 오로지 약탈이었다. 이교도인 바이킹은 기독교의 성소가 어떻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바이킹에게 교회나 수도원은 무력 저항이 없고 황금으로 된 십자가 등 약탈할 보물과 끌고 갈 사람이 많은 약탈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877년 덴마크 바이킹은 잉글랜드 본토를 침공해 국토의 절반에 해당하는 서부와 동부 지역을 지배하게 됐다. 이 지역을 ‘데인로(Danelaw)’라 불렀는데 이는 ‘바이킹의 법과 관습의 지배를 받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이후 잉글랜드는 데인로를 되찾았지만 이미 바이킹과 현지의 앵글로색슨 사이의 문화가 융합돼 정체성과 차별성이 많이 흐려진 다음이었다. 수 세대가 지나면서 양쪽 세력 모두 ‘잉글랜드인’으로 여기게 됐다.

바이킹의 주된 약탈 대상은 풍요롭고 비옥한 잉글랜드였다. 하지만 당시 기독교 예술과 학문의 중심지였던 아일랜드 또한 매력적인 약탈 대상이었다. 아일랜드의 교회와 사원들은 약탈할 물건이 풍부한 저장고였고 풍요로운 초원을 가진, 정착하기에 알맞은 장소였다. 9세기 중반 바이킹은 아일랜드의 리머릭·워트퍼드·웩스퍼드·코크·아크로의 해안에 정착지를 구축했다. 처음에 바이킹은 이런 근거지를 섀넌 강과 같은 아일랜드의 강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가 재빨리 약탈하고 달아나기 위한 겨울나기 거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해안 정착지들은 영구 정착을 위한 출발점이자 내륙 더 깊숙이 들어가 약탈하기 위한 거점이 됐다. 950년을 전후로 바이킹이 해적질 대신 정착을 택하면서 사실상 바이킹의 공격은 끊어졌다. 마지막으로 1014년 4월 23일 벌어진 ‘클론타프 전투’에서 바이킹이 아일랜드군에 패배함으로써 아일랜드에서 바이킹의 지배가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바이킹의 영향력은 오늘날에도 그들이 세운 도시·무역·남긴 지명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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