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호

20대 리포트

탈코르셋 현상과 그루답터

“화장 않는 女, 화장 男 점점 늘어”

  • 김동은 고려대 미디어학부 4학년

    trust7@korea.ac.kr

    입력2019-03-07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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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혼자 시험기간이냐?”

    • “남의 시선보다 아침의 여유 더 중요”

    • “화장한 티 나지 않게”

    • “맨박스(남성이 남성다울 것)에서 나와야”

    서울 성북구 안암동에서 자취하는 여대생 김모(24) 씨는 요즘 등교를 준비하는 시간이 반절로 줄었다. 화장을 생략한 덕분이다. 매일 ‘풀 메이크업’을 하던 때와 확연히 달라진 변화다. 덕분에 아침을 여유 있게 챙겨 먹는다. 하지만 불편한 일도 생겼다. 화장을 하지 않는 김씨에게 여자 친구들이 “혼자 시험기간이냐?” “집에 무슨 일 있느냐?”라는 농담을 건넨다. 언젠가는 취업 스터디 선배로부터 “면접 준비한다고 정장을 입으면서 화장을 빼먹느냐?”는 핀잔도 들었다.

    반면, 서울 홍대 부근에 거주하는 남성 박모(26) 씨는 요즘 화장품의 가짓수를 늘리고 있다. 화장을 하면 할수록 한결 더 나아 보이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다만 화장한 사실을 주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고 신경 쓴다. 립스틱은 되도록 옅은 붉은빛으로, 아이섀도(eye shadow·눈꺼풀 등에 음영을 주어 눈언저리를 아름답게 하는 화장품)도 눈에 띄지 않는 색으로 신중하게 고른다.

    박씨는 인디밴드에서 활동하면서 화장을 시작하게 됐다. 일주일에 한 번 공연 무대에 오르기 전 화장으로 정성스레 다듬는다. 그러다 일주일에 한 번만 화장을 하는 게 아쉬워졌다고 한다. 박씨는 이제 매일 화장하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섀도 팔레트만 세 개를 갖고 있다. 비비크림, 섀딩(음영을 넣어 코를 오뚝하게 보이도록 하는 화장)은 기본이고 하이라이트(이마, 코, 뺨 등의 돌출된 부위에 광을 내 얼굴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화장품)까지 추가한다.

    요즘 여대생 김씨와 남성 박씨와 같은 사례는 흔히 볼 수 있다. 젊은이들은 “화장 않는 젊은 여자, 화장하는 젊은 남자가 점점 늘고 있다”고 말한다.


    男 대학원생, 코 섀딩에서 프라이머로

    고려대 교육대학원에 재학 중인 남자 대학원생 이모(27) 씨는 화장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왜 화장을 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코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항상 콤플렉스였다. 그렇다고 성형할 엄두가 나진 않았다. 우연히 화장을 통해 커버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에게 우연히 ‘화장을 통한 커버’를 알려준 사람은 다름 아닌 유튜브에 남성 화장법을 소개하는 한 유튜버였다. 이씨는 “처음엔 섀딩만 따라 했는데, 이후 다른 화장법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프라이머(얼굴에 비비크림이 잘 흡수되게 도와주는 보조크림)에 컨실러(피부의 잡티를 가려주는 화장품), 비비크림까지 바른다고 한다. 이씨 화장의 핵심도 ‘티 나지 않게 하기’다.

    취업을 준비 중인 여학생 정모(25) 씨는 얼마 전까지 매일 피부 화장에만 30분 이상 할애했다. 프라이머, 파운데이션, 비비크림, 컨실러를 얼굴에 바르는 것이 아침의 가장 중요한 일과였다. 지금은 로션 위에 선크림만 바르고 외출한다. 얼굴을 꾸미는 데 들이는 시간은 채 5분도 되지 않는다.


    “탈코르셋 선언에 감명”

    정씨는 “예전엔 남들에게 민낯을 보이는 게 싫었다. 집 앞 슈퍼에 갈 때도 화장을 했다. 아니면 마스크나 모자로 얼굴을 가렸다”고 했다.

    고교 시절 경험이 화장을 시작한 계기였다. 쉬는 시간에 거울을 보고 있는데 한 친구가 “너는 피부만 어떻게 하면 진짜 예쁘겠다”고 했고 다른 친구들이 맞장구를 쳤다. 정씨는 “친구가 나름대로 칭찬하는 말을 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도 내 콤플렉스를 눈여겨보는구나’ 하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졌다”고 말했다. 이후 정씨가 비비크림을 바르고 등교하자 친구들은 정씨의 외모에 대한 칭찬을 쏟아냈다. 정씨는 “‘예쁘다’는 말에 내 가치가 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화장을 포기할 수 없었다. 슈퍼에 갈 때도 화장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정씨처럼 많은 여대생은 대학에 입학한 뒤 화장하는 것을 의무처럼 느낀다.

    그러나 정씨는 어느 날 한 뷰티 유튜버가 ‘탈(脫)코르셋’을 선언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때 탈코르셋(몸매를 보정하는 속옷인 코르셋에서 벗어난다, 남의 시선을 의식해 꾸미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정씨는 “나를 위해 꾸미는 것인지 되돌아봤다. 이후 더는 화장하지 않는다. 남의 시선보단 아침의 여유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말했다.

    서울 신림동에서 자취하는 여대생 이모(25) 씨도 얼마 전 화장의 가짓수를 대폭 줄였다. “예전엔 속눈썹 한 올에 신경을 쓸 정도였다. 연예인 못지않게 풀 메이크업을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틈틈이 화장을 고치기 위해 온갖 화장품으로 가득 찬 파우치를 매일 들고 다녔다. 뷰러(속눈썹을 올리는 기구), 브러시(가루 종류의 화장품을 얼굴에 바르기 위한 붓)가 든 파우치의 무게가 책 한 권과 비슷했다.”

    이씨는 한 교수와의 면담 후 이런 화장에 손을 놓게 됐다. “화장은 커리어를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라는 교수의 말이 맘에 와닿았다. 이후 ‘단정한 외모를 유지하기 위해 짙은 화장을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파우치 대신 책을 들고 다닌다는 이씨는 저녁에 클렌징(세수할 때 색조 화장을 지우는 과정)을 하지 않는다.


    “관리하는 남자가 보기 좋다”

    ‘그루답터’는 두발과 수염을 다듬는다는 ‘그루밍’과 빨리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얼리어답터(early-adopter)’의 합성어로, 기본 메이크업에다 색조 화장을 하는 남자를 뜻한다. ‘남성 뷰티’ 산업이 급속히 성장하는 만큼 그루답터 또한 확산되는 추세다. 

    그러나 아직 남자들 사이에서 ‘화장하는 남자’에 대한 편견은 남아 있다. “관리하는 남자가 보기 좋다”는 말도 있지만, “남자답지 못하다”는 말도 나온다. 박씨는 “화장하는 남자를 동성애자로 보는 시선도 있다”고 말했다. 

    고려대 재학생 커뮤니티인 ‘고파스’에 한 남학생은 “남성이 꾸미는 것에 대한 사회적 시선 때문에 행동에 많은 제약을 받는다”는 취지의 글을 게시했다. 이 글에 대해 많은 의견이 올라왔다. “남자가 머리 기르고 화장하면 (다른 사람들이) 한심하게 여기지 않나요?”라는 의견엔 13개의 추천이 달렸다. “여성이 탈코르셋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성은 맨박스(man box·남자를 둘러싼 고정관념의 틀·남성이 남성다울 것을 요구하는 것)에서 나오는 게 사회가 앞으로 지향해야 할 점이라 봅니다”라는 의견엔 19개의 추천이 달렸다.

    ※ 이 기사는 고려대 미디어학부 ‘탐사기획보도’ 수업(담당 허만섭 강사·신동아 기자) 수강생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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